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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1/28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2)
    무화과
  2. 2005/11/26
    무화과
  3. 2005/11/25
    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1)
    무화과
  4. 2005/11/23
    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2)
    무화과
  5. 2005/11/13
    업보
    무화과
  6. 2005/11/13
    집회에 가기 싫은 이유(4)
    무화과
  7. 2005/11/08
    11월
    무화과
  8. 2005/11/05
    사이
    무화과
  9. 2005/11/02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무화과
  10. 2005/10/31
    현실도피(1)
    무화과

내 마음을 울려요

'네멋대로해라'에서 전경은 고복수가 자신의 마음을 1분 1초도 쉬지 않고 울린다고 한다.

슬램덩크에서 파김치가 된 정대만은 '처얼썩' 림을 가르는 깨끗한 포물선의 소리에 몇번이라도 다시 살아난다.

 

요즘 무리한 일정들로 몸이 말이 아니다.

월수금을 하루종일 학원에서 부대끼고, 남은 날들은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또 계속되는 강추위지만 두 농민의 죽음이 우리를 거리에 서있게 만들었다.

게다가 연말과 병역거부선언이 겹치면서 왜이리도 만나서 놀아야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타고난 건강체질이던 내 몸도 힘들다며 나에게 호소한다.

 

몸이 고되면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모든일이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빠진다.

한마디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목빼고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힘든 상황들 속에서도 나를 몇 번이고 살아나게 하는 것들이 있다.

내 마음을 울리는 사람들의 진실된 모습.

진실된 모습은 강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의 세상살이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자기반성,

그 진실됨은 내마음을 울리고 몇 번이라도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오태양의 마음이 그러했고, 강철민의 마음이 그러했다.

지율스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졌던 것이다.

 

학원에서 남는 시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글을 보았다.

나약한 인간의 진실된 자기 반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며 세상을 바꾼다 .

 

'주교님들의 침묵과 발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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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단이여,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라

 

오늘아침 기동단과 특수기동대 정문앞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다.

인권활동가들을 앞에두고 문 저쪽의 기동단은 "맞을만 하니까 맞았지"

등등의 상식이하의 태도를 보였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다가 갑자기 찬바람이 머리를 스쳐가며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적어도 그들 중의 하나는...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거라는

당연하지만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전제에서 생각은 시작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자극하고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거부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도 오태양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국가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우리는 그 누구도 강철민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군인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또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담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죽인 그 기동단놈들 중에도

그래도 인간의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또한

부당한 명령에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이에 생각이 미치자 기동단 안에서도 부당한 명령에 거부하는, 이를테면

시위해산을 넘어서서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한 폭행의 명령에 항명하는

병역거부자를 상상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기동대 안에서, 사람죽여놓고 "맞을만 하니까 맞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 기대한다. 혹시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박래군선배의 말대로 그들은 진정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 가르쳐주자. 집회때마다, 그들을 만날때마다, 그들을 접촉할때마다

당신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가 무엇인지를, 당신들이 가질 수 있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에 대해서, 오태양과 강철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물론 말하기도 전에 나는 그들에게 두들겨 맞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너무 무섭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더 큰 구조속에서 국가권력이 가지는 폭력성과

대한민국경찰이 가지는 야만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어떤 잘못된 구조도 구조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바꿔말하면 때로는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불의를 키워간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저 상부에서 시켰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에서 용납될 수는 없다.

나치의 명령에 따라 유태인을 학살했던 병사들에 대해서 유죄를 선고했던

그 유명한 뉘렌베르크원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항명의 '죄'가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인간에 대한 '죄'인 것이다.


그리해서 저들에게 알려주자.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범죄는,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시위 진압은,

항명죄보다 더 막중한 인간에 대한 대죄라는 것을.


또한 알려주자

당신들은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명령에 대한 복종 이전에

인간에 대한 존중을 마음속 뿌리깊게 담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다시 인간의 마음을 회복한 자로 하여금

이제 불의에 순응함으로써 불의를 키워가는 것을 거부하도록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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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는 놈

연말이라서 여러가지 모임들이 많이 있다.

쉬고싶은 마음 산타클로스가 기겁할 만큼 길다란 굴뚝이지만

그래도 술자리 거절 못하는 인생이라 이곳 저곳 참여하다보니

피곤하다.

그런데 사실 몸보다 더 피곤한건 따로있다.

예전에 학교다닐때 내가 몸을 담았던 여러부류의 사람들...

오랫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하지만, 오랫만에 만나서 난감하기도 하다.

요사이 이런 저런 송년모임에서 유독

 

"싸가지 없는 놈"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싸가지 없다... 생각해보니 이런 이야기 여러번 들었다.

진짜로 내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싸가지가 없나?

음... 나의 인간관계를 둘러보건데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싸가지[명사]싹수 방언.

 

그래서 또 싹수를 찾아봤다.
 

싹―수 [―쑤] [명사] 앞으로 잘 트일 만한 낌새나 징조. ¶ 싹수가 없다

 

음... 사회적인 의미는 국어사전과는 약간 다르구나...

 

어쨋든 내가 선배들에게 싸가지 없다고 이야기듣는 것은

바로 예의가 없다 는 것이다.

 

예의라... 아마도 그 선배들이 지키고자 하는 예의는

내가 생각하는 예의랑은 사뭇 다르다.

난 선후배간의 예의를 지키기 이전에

인간으로써 서로간의 예의를 비켜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 선배들의 예의는

A라는 남자선배와 B라는 여자후배가 결혼하면 나는 B를 형수라고 불러야하는 것이고

저럴테면 나의 예의는

B는 B로서 나에게 의미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난 앞으로도 선배들에게 선배라는 이유로 예의 바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또한 그 선배들이 나의 후배라고 인식해버리는 친구들에게 선배에 대한

예의를 요구할 생각도 전혀없다.

 

여전히 싸가지 없게 살아갈 것이다.

 

대신에 난 그 누군가와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다.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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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죽음

전용철이 죽었다. 홍덕표가 죽었다.

난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난 그들이 삶이 어떤지 잘 모른다.

내가 경험한 농촌의 삶이란 김남주의 시와

대학시절의 농활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여의도에서 경찰에 맞아죽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한 평생을 땅에서 살아온 그들이 죽어 돌아갈 곳은

그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부모를 여의고 그들의 자식을 낳았던

바로 그 땅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안다.

그들이 거듭되는 흉년에 굶어죽을 수는 있어도,

돌림병이나 자연재해에 죽을 수는 있어도,

시꺼먼 아스팔트 위에서

아스팔트보다 더 시꺼먼 피멍이 들어가며

생전 처음보는 젊은이들의 방패와 군홧발에

죽어야하는 그런 삶은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것은 죽는 법.

그 죽음은 사라짐이나 소멸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특히나 땅에서 살아오고 땅에서 목숨을 부쳐온 농민들은

특히나 파괴에 익숙치 않고 국가폭력에는 더더욱 익숙치 않은 농민들은

특히나 지구와 더불어 인간종의 생명을 지켜온 농민들은

 

죽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그곳,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이,

노무현 정부의 허준영 경찰청장이

노무현 정부의 허준영 청장의 이종두 지휘관이

그리고 검은 모자 검은 장갑 검은구두의 전투 경찰이

인권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땅으로 돌아가야할 그들의 삶을 시꺼먼 아스팔트 위에서

 

소.멸.해. 버렸다.

 

농민들을 아스팔트 위에서 국가공권력이 죽이는 일만큼

죄스러운 일은 없다. 그것은 실정법의 위반일 뿐더러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며,

인간 삶에 대한 예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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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선배는 주를 번갈아 맞교대로 8시부터 8시까지

12시간을 일하고서 100만원을 채 못받는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5주동안 15번 논술학원에 가서

5000원짜리 밥을 시켜면으면서도 250만원이 넘는

돈을 받는다.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일하는 것 이상의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슬로브핫의 딸들.

YMCA의 여성회원들은 회원의 60%에 달하고

자원활동의 90%를 차지하면서도 투표권이 없어서

남성이사들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남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한 번도 나의 성별 때문에

피해를 입어본 적이 없는 나는 여성들에 비해 이미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환태형의 원폭60년, 그리고... 를 봤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원폭피해자의 문제.

지난해 여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난 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온 것일까. 역사적 사실이 그저 머리속에 머물른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직까지 진행되는 고통의

역사를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최고의 악이라는

핵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도 좋은 몸과 환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돌아오라 자이툰, 미안해요 이라크

별음자리와 돕헤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노래라기 보다는 하나의 절규이고 읍소였다.

광화문네거리는 겨울을 넘어서 이미 연말의 분위기에

나무마다 전등을 달고 한껏 취해있었고,

추위마저도 온통의 네온사인과 크리스마스 장식에

발딛을 틈이 없었다. 과연 이라크의 연말도 이러할까.

미안해요 이라크.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도, 아직도 더 가지기위해 아둥바둥하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미안해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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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2-자전거

 

어느덧 집을 나선 발걸음은 

10분을 접어들고 있다.

혼자걷는 발걸음.

길은 빙판길 계속되는 한파로

좀처럼 녹지 않는다

 

언제까지인가 혼자 걷기싫던 시절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었던 길들을

이젠 너무익숙해진 혼자걷는 길 사이로

 

얼굴을 스치고 마음을 흔들고  불어오는 바람

내 마음을 아파해준 소녀의 눈물

 

사이로

 

가끔씩의 외로움

 

 

 

길2-자전거

 

정말이지 오랫만에 한겨울 칼바람에 맞서

자전거를 끌고 용감하게 나섰다.

 

짜증스럽고, 우울하고, 찌뿌둥했던

요새의 기분을 던져버리려

타고나선 겨울길의 서울도심에서

 

내몸속의 찌거기들은 칼바람에 에이는

상처사이로 모두 빠져나갔지만,

내가 찾고자했던 애초의 것들은

 

찾을수 없어서 헤매이었던 겨울길

내 친구 자전거와 함께 잃어버린 길

미열과 함께 불쑥 다가온 피로가

나에게 속삭인다.

'추억을 기억하지말고 그대로 놔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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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종교가 되는 순간

무위님의 [난 대한민국이 점점 더 무섭다.] 에 관련된 글.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무섭다.

 

이라크 파병이 결정났을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파병은 되었고, 우리들은 어찌보면 패배했지만,

그래도 파병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월드컵때도 이정도로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붉은악마의 광풍이 거세었지만,

'태극전사'가 영웅이 되고 히딩크가 구세주가 되었지만,

붉은 악마의 응원을 단지 국가주의적인 감성만으로 볼 수

없었기에, 분명 거리에세 축제를 벌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황우석의 연구를 둘러싼 한국의 상황은

나를 너무 무섭게 한다. 어쩌면 그 공포는

노무현 정권이 쏘아대는 물대포와 전경들의 방패날보다도 무섭다.

그것은 거대한 권력을 지닌 국가가 가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PD수첩을 폐지시키는 네티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그것이 거짓 과장된 속임수라도, 이런 속임수가 통하는 것이 무섭다.

PD수첩이 취재윤리를 위반해서 욕먹는 것보다,

황우석에게 덤볐기에 페지당하는 것이,

그것도 박정희 같은 독재자가 국가권력으로 폐지 하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더더욱 공포는 소름과 온몸의 털을 하늘로 향하게 한다.

 

국가에 의해서 언론이 통제당하면 국가에 맞서 싸우면되지만

인민에 의해서 언론이 통제당하면 무엇을 해야하나...

 

진정 무서운 것은 황우석도, 배아줄기세포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다. 그냥 사람들...

 

과학이 국익이라는 교리를 만나서 종교가 되는 순간에 나는 살고 있다.

 

국익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으니 이번에는

과학과 종교이야기나 해보련다.

기본적으로 난 과학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고,

어찌보면 종교적인 영성이나 이런 것에는 오히려 우호적인 사람이다.

난 윤회를 믿고 있고, 과학적인 방식보다는 비과학적인 방식을 좋아한다.

한국의 고등학교 식으로 나누자면 철저하게 난 문과형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황우석의 연구에 대한 논란은 아무리 봐도

내용에 대해서는 뭐가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아무리 모르고 싫어하더라도 과학의 영역이 있고

종교의 영역이 있으며, 각각은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황우석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건, 사모하건, 존경하건 그건 내 알바 아니다.

난 황우석보다 이나영이 더 좋고, 이상은을 더 사모하며, 홍세화을 더 존경한다.

남들이 이나영을 싫어해도 상관없으며, 홍세화를 비판해도 그다지 큰 상과이 없고,

이상은을 좋아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분위기는 황우석을 존경하라고 강요하는 분위기이며,

사랑을 넘어서 집착을 요구한다.

 

이건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다. 물론 어쩌다

개인에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누군가에게

쏟아붓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일 뿐 절대 사회적 관계는 아니다.

황우석신드롬은 사실상 종교적인 믿음에 위치하고 있다.

황우석은 그가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이미 절대자의 위치에 놓여있고,

많은 신도들이 국익이라는 교리를 설파하며, '믿지 않는 자 구원받지 못하리라'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사회에서 매장하려 하고 있다.

 

세상에, 그 어떤 제대로 된 종교도 믿지않는 자를 구원하려고 하지

매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절대자인 신들은 대게가 마음이 넓어서

자신을 해꼬지 하는 어리석은 인간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황우석 신드롬은 종교가 아니기에 그런 넓은 마음까지는 가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종교가 아니라면, 종교처럼 절대적으로 믿으면 안된다.

믿음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아니 남에게 강요는 커녕

자기 자신도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된다.

오히려 끈임없이 의심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더더욱 과학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믿음으로서 진리를 탐구하지만,

과학은 의심으로서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가 되는 순간, 의심해야 할 것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순간,

맹목적인 믿음이 그 대상을 인간의 영역으로 향하는 순간,

인류역사에서 반복되어온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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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에 대한 기억

돕헤드님의 [나는 나의 노래가] 에 관련된 글.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었다.

원래 집 좀 산다고 잘난 척 하는 아이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잘났는데, 부모잘만나서(자기가 노력하지 않은)

내 위에 서려는 아이들이 싫었다.

다행히도 불만은 우리 부모님에게 향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이 열심히 사신다는 것을, 나에게 충분히 좋은 부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만은 세상으로 향했다.

가난은 세상이 만들고 대를 물려가는 것을 알았기때문이다.

 

그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듣고 안치환의

앨범을 샀다. 그 앨범에는 김남주 시인의 시로 만든 노래가 여러곡 있었다.

희망이 있다(나와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아이고, I go(날마다 날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야...

그것이 김남주 시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당장 옥중시전집을 샀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가면 학생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는 나의 무기로 시를 가지고 싶었다.

시의 기교를 배우기 보다는 시를 쓰는 세계관을 배우고 싶어서

사학과에 갔다(사학과에서도 안배우더라만)

 

김남주와의 만남은, 하이네를 알게했고, 네루다를 만나게 했으며

브레히트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래서 한 때  나는 세계의 혁명시인

들과 함께 혁명의 감성을 키워가곤 했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그 후 병역거부운동을 하면서

나의 생각은 계속해서 변해갔지만,

그 때마다 김남주의 시는 새로운 의미로 나에게 읽히며

항상 힘이 되곤 한다.

지금도 무언가 막막하고 답답할 때는

이미 누래진 김남주의 옥중시전집 두권을 꺼내 읽곤 한다.

 

돌멩이 하나, 나의 칼 나의 피, 옛 마을을 지나며, 자유 등등 좋아하는

김남주의 시를 헤아릴 수 없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이 시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창살에 햇살이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 받고는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별을 우러러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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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편지, 잊혀져갈 기억

그동안의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편지 하나가 없어진걸.

지난달엔가 그 편지를 읽었었는데

그리고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

있을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청소하는 도중에 종이 쓰레기 틈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모른다.. 모른다.

 

아...

이렇게 예전의 기억들은 닳고 애달픈 모습으로 잊혀져 가는구나

편지가 사라지듯이

편지를 통해 기억되었던 사람들과 사람들과 추억들도

아마 편지가 사라졌듯이

어느순간엔가 잊혀져 있을 것이고

난 잊혀진 기억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고 그 새로운것들도 언젠가는 잊혀져 갈것이다.

 

슬픈 기억들...

 

편지를 찾게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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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평화가 나에게 왔습니다. 아주 조용조용하게. 아주 사뿐사뿐하게. 그것은 겨울날 얼굴을 에는 찬바람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한 여름 푹푹찌는 더위 속에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오지도 않았습니다. 평화는 한 겨울 이겨낸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평화는 빨갛게 봉숭아물 든 손톱이 자라나 붉은 반달을 이루듯, 아주 익숙한 속도로 나와 만났습니다. 내가 평화는 만나는 과정이 바로 ‘평화’ 였습니다.


 평화를 알게 되고 병역거부를 결심한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를 결심하면서부터 평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는 저에게 있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저마다 삶에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 가치를 지켜가는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의 대답은 항상 정리된 논리라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는 그것이 추구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현재의 나의 삶을 가꾸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의 신념은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기 위해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위한 것입니다. 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 가꾸어가고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저의 병역거부입니다.


 물론 저에게 있어서 이런 의미를 가지는 병역거부지만, 저의 병역거부가 사회와 만났을 때, 더 많은 의미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의미를 부여했을 때, 이 세상에 다가서는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과 사람들이 저의 양심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저의 병역거부를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신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논리정연한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몸과 삶의 태도 속에 습관으로 각인되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병역거부를 통해서 사람들이 가졌으면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강함을 항상 과시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배려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이를 약한 자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폭력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국가와 국가, 그리고 인간이 만드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형성한 가장 거대한 조직인 국가가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강한 군대를 과시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만큼,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의 권한을 군대에 부여함으로써 인류의 많은 비극들은 발생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오만함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강하지 않은 수많은 인류는 희생당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병역거부는 우리 인간이 약하고 미흡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구성원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파괴의 신이 아니라 생명과 창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일 뿐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미흡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약함을 서로 보완해주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강함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애써 남을 위협하거나 과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런 곳에 들어갈 힘을 돌려 서로의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하기에, 저는 저의 삶이 다른 생명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삶은 물론 제 스스로 일궈온 것이지만, 제가 만나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저의 보잘것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의 삶이 저의 삶과 완벽하게 분리되어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지구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피와 살로부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전제로 살아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또한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고, 제 삶을 위한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을 요구하고 제가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최대한의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며, 앞으로 갚아야 할 것들에 비해 인생은 짧게만 느껴집니다. 낭비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제 것을 내놓기는커녕 내가 살기위해 남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군대라는 것은 제가 살기위해서 남을 죽이는 곳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그 곳에 할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나고, 갚을 시간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무서운 것은, 내 마음 속에 겸손한 보은의 감정대신에 뻔뻔한 자기 합리화의 배은망덕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병역거부는 저의 삶을 지켜가는 최소한의 방어이자, 사회와 소통하며 평화를 퍼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입니다. 저는 입영영장을 받고 비로소 병역거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제 부족함을 깨닫고 사람들과 부족함을 나누어 평화를 만들면서 이미 병역거부자가 되었고, 또 출소한 이후에도 계속 병역거부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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