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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03
    '졸작의 행진'을 위하여(이어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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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2/26
    한가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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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2/21
    '멋진 그녀들' - 이주여성 다큐 기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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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2/20
    봄은 온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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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12/14
    내 친구 - 라디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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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2/08
    난 행복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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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2/01
    기획서 쓰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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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1/30
    출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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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11/23
    펑펑 울다. - 이젠 씩씩해진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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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9/05
    이주제작노트-이해하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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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의 행진'을 위하여(이어서)

알엠님의 [좋은 사람] 에 관련된 글.

내가 고 3때 처음으로 골방이긴 하지만 내 방이 생겼다.

직사각형으로 길다란 방이였다. 

한 쪽면에 책상이 들어가면 그쪽면이 꽉찼고 나머지 공간에 겨우 누울 수 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래도 너무 기뻤다.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왠지 어른이 됐다는 의미로 여겨져서 뿌듯했다.

나만의 공간을 꾸미는 것에 재미도 들렸던 거 가다.

그 동안 그렸던 그림이며 이런 저런 포스터를 벽에 여기 저기 붙여 놓았다. ^^

거기엔 맥가이버 사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내 방에도 가전제품이 들어 왔으니 그게 TV였다.

14인치 정도 되는 TV였는데, 어릴 적 부터 토요명화를 열심히 봤던 나로서는 내 방에 나의 TV가 생긴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물론 TV는 그때 마침 시작한 TV과외를 보라고 놓아준 것이긴 했지만 ....

난 TV과외를 조금 보다가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 시간대에 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이런 저런 역사에 대한 것, 자연에 대한 것,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것 등 참 다양했는데 닥치는 대로 봤던 거 같다. 그러다 아....이렇게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런 거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왠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다큐멘터리를 공부할 수 있는 강좌를 듣기도 하고 거기서 TV에서 보는 다큐가 아닌 다른 종류의 다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큐를 통해 그 동안 알고 있었던 것들은 반쪽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신나게 공부를 했다. 거기서 이전에 포스트로 썼던 '첫사랑' 다큐도 만났다. 그렇게 다큐에 대해 알아갔지만 정작 만드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꿈은 쉽게 이룰 수 없었다.

 

겉으론 활발하지만 난 속으로 참 많이도 곪아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을 긍정하는 방법을 몰라 끙끙댔고 자신감이 없어서 항상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저런 일들을 계속 했다. 하지만 그속에서 행복하지는 않았다. 인간관계도 참 척박했다.

 

그러다 정보통신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5년만 있으면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볼 수 있어, 그건 말이지 너만의 채널을 가질 수 있단 뜻이야'란 친구의 꾐에 빠져서 말이다. 지금이야 넘 당연한 것이지만...당시가 95년이니 그 친구의 멘트는 좀 오버였다. 그렇게 정보통신운동을 시작했지만 참 어려웠다. 여전히 온라인의 세계에 익숙하지 못한 나인데 그 당시는 어떻겠는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참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사무실을 자주 오는 비슷한 또래의 영상활동가가 오는 날은 난 더 초라해졌다. 

그녀는 항상 바쁘게 사무실에 왔다 일을 보고는 휭하니 가곤 했다. 그녀는 너무 당당했고 지금 제작하는 영상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는 했지만 그저 멋지게만 보였다. 그녀가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항상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저거 하고 싶은데.....난 내 꿈에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 

참 많이 부럽고 슬펐다. 

 

그러다 아는 친구가 중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그걸 다큐로 만들고 싶다고 내게 기획을 맞아달라며 부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그런 부탁을 한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몸 담고 있는 단체에서는 나의 나이를 생각하라며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때 나의 나이 28정도였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내꿈을 향해 가는 ...

 

이래 저래 그 작업은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난 그 일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욕망이 더 이상 덥어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 나는 참 맑았다. 한가지 욕망 밖에 없었다. 다큐를 하자. 사람들고 만나고 사람들과 호흡하고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당장 마음 속에서는 하나의 생각만 났다. 

'카메라를 사자!' 푸훗...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는 참 절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생전 처음 회사를 들어가 돈을 벌었다. 딱 카메라 살 돈만 벌자. 그런 맘으로 일을했다. 그리고 딱 그 돈

을 벌어 나왔다. 그돈으로 카메라를 사고는 닦고 닦고 또 닦았다. 그 카메라가 PD100 이었는데 이름도 지었다. "카멜" 이걸 이름으로 부르면 '카멜아'가 된다. 소리로는 '카메라' ㅋㅋ...그러면서 어찌나 좋아했던지.

 

회사를 나오기 전에 강좌를 하나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배울 것이 없는 그런 강좌였다. 그래도 그때는 강좌를 들으러 가는 길이 너무 좋았다. 그 길은 걸어가기에는 어둡고 추운 길이었는데 그길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꿈을 다 이룬 것 마냥 벅찼다. 

 

무대뽀도 그런 무대뽀가 있을까?

참 운도 좋았던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아는 선배가 동영상 컨텐츠 만드는 것을 부탁했다.

먹고 사는 것이 그때 만큼 쉽게 풀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

프리미어를 조금 배워서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걸로 막 산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하루 종일 주물럭 거리면서 편집해서 겨우 납품을 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먹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데 정말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영상 동아리 출신도 아니었고 푸른영상이며 노뉴단, 서영집이 있었지만

새내기로 시작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 날 선뜩 받아 줄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받아달라고 말할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생겼다.

인터넷 한 카페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알게된 사람들이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아는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사람들을 막 만나고 다녔다.

그래도 기뻤다. 그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참 좋아보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던 중에 촬영을 하러 가지 않겠냐고 전화가 왔다. 그것도 뉴스 꼭지를 위해서...떨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촬영하러 나간 날,

같이 나간 기자에게 내가 초보자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카메라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난 자괴감에 빠졌다.

도대체 뭘 찍었는지 생각이 안났다. 너무 막막했다. 너무 쪽팔려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겨우 방송국에 돌아와서 내게 전화를 해 일을 시킨 선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일을 시켰으니 책임지라고 땡깡을 부렸다. 그때 그 선배가 했던 말은 지금도 명언이다. "촬영할 때는 딱 두가지만 생각해. 앵글과 사이즈. 그것의 조합이야. 그 다음이 컨텐츠고..."

그리고 자꾸 하면 는다고도 했다. 카메라를 들고 자신감이 없을 때 그만한 조언도 없다. 지금도 가끔 강좌를 할 때 그말을 써먹는다. 그때 그말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나의 마음을 쫙 펴준 말이었다. ㅋㅋ

 

방송국은 거대한 공장이다. 각기 맡은 일을 하면 되고 그 일을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다음날 연락이 안온다. 그 첫날 내가 그 선배에게 했던 행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다. 어디 뭘 모른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나. 방송국에서...그곳은 정글이고 살아남아야 하는 공간이었다. 

 

 

임산부 체조하러 가야 한다...다음 이야기는 갔다 와서..........

^__________________^

 

 

으흐....이 뒷 부분이 다 날라갔다.

다시 힘내서 마무리를!

 

방송국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운이 좋았던 게지.

얼마나 개차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다행히 카메라를 든 여자는 별로 없었고 아이들과 여성에 관한 아이템이 오면

언제나 내 차지였다. 조금씩 카메라를 드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또 나름대로의 내 장점도 발견하면서 일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열심히 A를 찍어 가면 편집 후에는 B가 되어 방송 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곳에서 참 얄굿은 것을 많이도 배웠다. 돈도 벌었고.

 

그러다 여성노조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리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거기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독립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험이 많은 친구는 얄굿은 경험만 있는 내게 별 불편한 표도 내지 않고 같이 일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그저 작업을 한다는 것에 정신이 없어서 별말 못했지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듯. 친구~~고마워~~

 

왜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할까?

시작할 때의 나의 무대뽀를 자랑하고 싶어서?

아니 어쩌면 졸작이 될 것이 뻔한 이번 다큐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지금은 작업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내 마음을 다지는 것이다.

 

그때는 한가지만 있었다.

하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럴 능력이 되지도 못했다.

난 참 이해력이 느리고 머리로 보다는 마음으로 느끼고 겪어야 겨우 이해한다.

 

그래서 다행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리로 '아,,,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해서 다큐를 만들 수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같이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걸 나눠 주고 싶다. 그렇게 소통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그게 즐거운 경험이든 힘든 경험이든 다 나에게로 오면 아프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짠하다.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참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픈 마음은 다 마찬가지 일테지. 아닌척 이런 저런 것들을 갔다 붙여도 말이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보면 처음에는 안보이던 이런 저런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그러면서 나도 성장할 수 있다.

어쩜 난 소통을 잘 못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너무 자기 안에 갇혀 있어서 남의 안에 뭐가 있는지 느끼기에 모자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행이다.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남을 느끼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난 확장되고 사람들과 만나 소통한다.

 

'소재로 다큐를 한다.' 그건 아마 진짜 다큐가 아닐 것 같다.

겪고 경험하고 이애하고 소통하기 위해 고민하고 고민하고 방바닥을 구르면서 또 고민하고 그렇게 해서 겨우 만들어 내는 것이 다큐인데.....그걸 어찌 소재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작업?

졸작이 되겠지. 정말 졸작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졸작이면 어떠랴. 계속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이 아닐까?

 

요즘 심한 딜레마에 빠졌다.

아기를 만나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정말 아기가 힘이 될 것 같다.

아기를 만나면 고맙다고 몇번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일 욕심 많은 엄마를 만나 고생했는데 고맙다는 말을 꼭 해야 겠다.

그런데 아기를 만나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

작업을 졸작이 되더라도 마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턱 없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여기서 하나만 팔까? 아니면 넓혀야 하나?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고민에 고민은 꼬리를 문다.

시간을 막 붙들고 늘어지고 싶다.

그래서 괴롭다. 어잉.....

 

그래도 해보자.

'졸작의 행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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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

부끄럽긴한데...

한가하다는 것이...

 

오늘은 좀 한가한 마음이 든다.

오늘 일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한가한 것은 아닌데

마음이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1.

마음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아주 바빴다가 어느 순간 아주 한가하다.

이전에 생리를 할 때는 그 기복이 주기적이어서 어느정도 예측도 할 수 있고

원인을 알 수 있어서 대략 적응하며 지냈는데 생리를 안하니 그 주기도 예측하기 힘든듯도 하다. 임신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며칠전 친구들이 집에 와서 놀았는데 세쌍이 모였다. 나를 포함해 두쌍이 임신.

그 친구가 하는 말, 컴퓨터 하나에 파티션 없이 두개의 체제를 깐 것이 임신인 것 같다고 그러니 정말 정신 없을 수 밖에 없다고...ㅋㅋ...재미난 표현이다. 그럴만도 하다.

내 몸에서 내 심장 말고 다른 심장이 뛴다니...놀라운 일이다.

 

2.

임신한 필리핀 출신 언니를 만나고 왔다.

입덧 때문에 한달동안 필리핀에 갔다 와서인지 필리핀 가기 전에 봤을 때 보다 얼굴도 좋아보이고 입덧도 가신 듯 해서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다.

올 초에 한번 유산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언니는 항상 모든 것에 조심스럽다.

그때 먹었던 음식들, 했던 행동들은 다 안하고 싶어한다.

처음엔 유별나다고 생각했다가 그 마음이 아련해서 뭐라고 안하기로 했다.

나도 처음 임신 7주 정도 됐는데 허리가 너무 아파 놀라서 병원에 갔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아기 크기가 0.7cm 였는데 그 작은 아기가 어떻게 됐을까봐 겁이 나서 헐레벌덕 병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것이 사람을 이렇게 혼이 나가게 하는데 아이라는 것은 정말 부모에게 놀라운 존재인 것인가보다. 하며 놀랬던 기억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언니의 유별난 행동도 마음도 이해할만 하다.

필리핀 언니는 벌써 아기 용품을 잔뜩 사다 놨다.

아기 옷, 젓병 셋트, 아기 파우더....등.. 이쁘다. 그렇게 아기에게 집중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버하진 말아야지...

평생 일하는 엄마에게 조금씩 적응하게 그저 살아온 대로 살아야지.

언니의 아기나 나의 아기나 그저 튼튼하게 잘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3.

작업실이 생겨서 참 좋다. 집하고는 사뭇 다르다.

처음에는 작업실에 가야하는 것이 뭔가 일 같고 불편했는데

이젠 익숙해졌나 보다. 그리고 아무래도 일에 능률도 오른다.

집에서는 일이 있을때만 책상에 앉게 되는데 작업실에 있다 보니 이런 저런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 테이프 정리도 하게 되고 어디 지원 받을 곳은 없나 한번 더 찾아보게도 되고 작업과 관련된 최근 뉴스도 찾게 되고....이제 좀더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오도록 해야겠다.

 

4.

이런 컴의 시계가 잘못되어 있다.

6시다....송년회 하나가 7시에 있다.

애연가들이 많으니 가도 별 반가워하진 않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지 보고 싶다. 잠깐이라도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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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그녀들' - 이주여성 다큐 기획

이주여성 다큐멘터리 제목을 '멋진 그녀들'로 할까해요.

항상 사는 게 해피한 것도 아니고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죠.

이주여성분들도 마찬가지죠. 저번 포스트에서 잠시 언급한 것 처럼 이제는 좀 더 그녀들의 상황을 그녀들의 시각을 중심으로 해서 담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자 합니다. 

평범한 우리들이 이 퍽퍽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전반적으로는 힘들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래 어쩌면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은 멋진 일인게야" 그런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 느낌으로요. 그녀들도 그러하니까요. 

그래서 "멋진 그녀들".

 

같이 과정을 나누기 위해서 많이 부족하지만 기획의도를 올려 봐요.

대략 나온 가구성안은 있는데 사적인 정보들이 있는 것이라 안올리겠습니다.

조금씩 모양을 만들어가겠지만 그럴때 마다 조금씩 나눠볼까 합니다.

항상 숨가쁘게 작업을 하다 보니 제대로 주변 사람들과 나누질 못했어요.

요번에는 왠지 숨을 고르면서 갈 수 있을 듯 해요.

 

 



▣ 작품개요


늘어나는 국제결혼, 이주여성

대한민국에서는 한해 30만 쌍이 결혼을 하고 그 중 3만 쌍 가까이가 국제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 중 대부분은 이주 ‘여성’이다. 처음엔 당혹스럽던 “*** 처녀와 결혼하세요” 라는 플래카드도 이제 더 이상은 낯설지 않은데, 이는 이주여성들의 놀라운 증가 추세 때문이기도 하다. 통계청 인구동태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의 경우 2002년에 47명이었던 것이 이듬해인 2003년에는 1,403명으로 늘어났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여성은 이렇게 해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


열등한 존재, 이주여성의 이미지

주류언론은 그들의 고통을 종종 다뤄왔다.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이주여성은 단순히 폭력의 피해자일 뿐이다. TV는 그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들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이다. 

우린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처음 그 이야기를 접했을 때의 충격은 잊게 되고 어느 새 아무 느낌이 없어진 경험. 가끔은 그 무감각이 도를 넘어 애초의 그 부조리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경험.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진실은 없어지고 단지 이미지와 느낌만 남아버린 경험.

주류언론을 통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주여성에 대한 경험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이 불쌍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영상의 반복 속에 어느 순간 우린 그들이 처한 불합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주 여성이 우리에 비해 열등한 존재라는 이미지였다. 그녀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맞고 사는 것이고 이혼을 당하는 것이고 아이를 빼앗기는 것이며 본국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이주여성, 이미지의 재발견

하지만 그녀들은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국제결혼을 선택했다. 국제결혼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결혼 전 그들은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만들어갈 행복한 꿈들을 설계했었다. 우리 머릿속 세상에서만 그들은 열등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이주여성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며 우리와 똑같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이주여성의 이미지를 재발견하려 한다.


이주여성, 우리의 거울(-혹은 우리의 재발견, 이주 여성을 통해 우리의 이미지를 재발견한다는 의미)

한국에 온 이주여성의 많은 수는 가부장적인 가족과 사회로부터 다양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이 그런 문제를 겪는 것은 그들이 ‘이주’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고, 그 근저에는 그들이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열등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다.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은 ‘이주’한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주 ‘여성’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억압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

따라서, 이주여성은 우리의 거울이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성을 비추는 거울이자 한국 여성들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녀들이 처해 있는 조건은 그녀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은 곧 여성연대에 대한 꿈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성연대

이주 여성은 한국에 온 이후 가부장적인 사회의 다양한 병폐를 접하면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삶을 당당히 일궈간다. 열등하지 않은 존재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그들의 노력은 우리의 노력과 동일하다. 그녀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고, 우리는 그녀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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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온다.

ㅋ...넘 심파적인가?

작업실 오는 길에 목련나무가 있다.

근데 이 추운날인데도 (오늘은 추위가 약간 풀렸지만 요 며칠 얼마나 추웠나? 우휴~)

목련봉우리가 이쁘게 있었다. 마치 봄이 코 앞에 와 있는 것 처럼 어찌나 이쁘게 있던지

좀만 기둘리면 하얀 목련이 필 것 같았다.

아...너도 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구나....뭐 그런 심파적인 생각을 하면서 걸어왔다.

 

열심히 썼던 기획서가 안됐다.

면접까지 가서 떨어지니 좀 속이 쓰리다.

이주여성 다큐멘터리 기획서는 버젼업을 3차례했다.

첫번째는 너무 부실하게 급조해서 안됐어도 수긍할만했다.

두번째는 좀 더 시간을 들이고 이런 저런 고민을 했는데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이 세번째였는데, 사실 그 동안 자료조사한 것도 있고 언니들과 만나면서 들었던 이러저런한 것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기획서를 쓴 것 같아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안됐다고 어제 메일을 받았다. 면접을 하면서도 느낀 것인데 이주여성에 대한 피해, 어려움이 더 들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난 더 이상 이주여성을 객체화시켜서 그녀들의 어려움을 발가벗기는 것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 지 모르겠다. 이미 대중매체가 충분히 한 그일을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이주여성에 대한 인식은 이주여성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일을 구태여 내가 해야 하나?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난 그녀들의 삶을 그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듣고 싶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삶을 공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들의 어려움을 함께 바꿔나가기 위해서 난 그녀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그저 징검다리가 되고 싶을 뿐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그녀들이 아니라 그녀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

 

기획서가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내 관점에 나름대로 확신이 있다.

그리고 왠지 더 잘해야 한단 생각도 든다.  

 

같이 작업을 하는 후배에게는 미안하다.

작업비가 넉넉하면 사무실 유지나 이런 저런 장비 구입 등 할 것이 많은 데

아무래도 뼈 빠지게 알바하면서 작업해야 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

하지만 있잖어. 친구. 봄은 와.

글고 우리 관점이 난 좋다고 봐. 글고 매력적이 잖어.

잘해보자구. 우리.

 

이제 열심히 작업해 보자구.

골목길의 목련처럼 열심히 봄을 준비하자구~~~

 

블로그에도 열심히 생각을 올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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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 라디카

라디카씨가 어제 출국했다.

14년 만에 네팔에 돌아가는 것이다.

기분이 어떨까?

2살때 놓고온 아들을 16살이 되서야 보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비행기에 올라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참 궁금하다.

 

나는 좀 철이 덜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여전히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친구, 혹은 인간관계는 그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남녀관계던, 어떤 사회적으로 차이가 나는 관계이던간에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통을 한다. 그게 없으면 난 그만 그 관계가 지속되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힘들어 하다 어느순간 잊어서 날 보호하는 쪽으로 향하곤 했다.

 

이주작업을 하면서도 난 감독과 이주노동자의 관계보다는 친구, 동지의 관계이길 바랬다. 어느측면 그런 면도 있지만 가끔 현실적이지 못한 나에게 이주노동자들의 자신의 상황에 맞게 현실적인 결정을 내릴때는 찔끔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던지 조금씩 이주노동자의 사회적 조건과 그것에 기반한 결정들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주노동자의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면 할 수록 시혜적인 행동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참 싫었다. 그런 행동이 그동안 이주노동 운동안에서 주류를 차지했고 그러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주체적이지 못한 운동에 대해 비판하며 일어났는데 난 조금씩 그런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더욱 강박적으로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관성은 무섭다. 가끔 이주노동자들은 나에게 시혜적인 자세를 취해주길 바랬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역시나 찔끔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어느 순간 친구가 아니라 동지가 아니라 그저 퍼주는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참 뭐랄까. 고갈된다는 느낌. 관계 안에서 고갈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 만큼 외로운 일이 있을까?

 

그럴때 라디카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내가 여성적 이슈 때문에 이주노동자들과 이견이 있어서 힘들어 할때 같이 의견을 나눴다. 여성이어서 그랬을까? 억압적인 사회를 경험해서 그랬을까? 언니와는 참 쉽게 의견을 나눌 수 있었고 같이 욕(?)도 하면서 답답함을 풀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어쩌면 가끔은 버거웠던 분위기를 견뎌냈는지도 모른다.

 

참 아쉬운 것은 언니의 삶을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는 것이다. 몇몇 단편적으로 담은 것은 있지만 그녀의 그 에너지를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언니의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이주의 경험을 종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 특유의 에너지로 하나 하나 겪어낸 것을 보면 참 감동적일 때가 있다.  

 

지금 바램이 있다면

그녀가 본국에 돌아가 아들을 만나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정을 맘껏 나누고

그리고 그동안 그녀를 이래저래 힘들게 했던 엄마와도 단판을 짓고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그리고 긍정하길....

 

그리고 한 이년쯤 이후에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녀, 샤말, 비두, 나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친구였는지,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 지 등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마 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계속된다2>가 되지 않을까?

 

언니, 그때까지 행복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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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행복하다.

어제부로 난 행복하다.

 

의사샘한테 운동을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동안 보약처럼 아껴두었던 알엠님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두편의 전작을 임신한 상태에서 만든 알엠님은 내겐 보약이다.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몰라서 스트레스 만빵인 나에게

명쾌하게 이런 저런 조심해야 할 점,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글고 지금 상황이 참 특별한 때이고 이런 때에 작업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정말 기쁨일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고맙다.

 

임신 5, 6, 7, 8 개월 중에는 태아도 엄마도 행복하단다.

그때 열심히 작업하면 된다고...스트레스만 받지 말고 말이다.

 

^^ 넘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해줬지만 사생활이니 이 정도...

 

어젠 정말 임신 이후로 많이 많이 행복한 하루였다.

 

근데 인생은 참말로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구성안에 베트남 촬영이 있는데 그걸 은근히 부탁해야지 했던

이주여성 관련 센터 활동가가 벌써 베트남에 갔다 왔단다.

1월에 간다고 하고선....으그....환장하겠다.

하지만 정말 무슨 수가 있겠지.

 

이젠 알엠님 말처럼 앞으로 열심히 촬영을 해야겠다.

입덧이 없어서 초반부터 배가 뽈록히 나온 내가 카메라를 들고

이리 저리 움직이면 좀 우수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야 나도 계속 행복하고 아기도 계속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ㅎㅎ

 

얼렁 촬영 일정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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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 쓰기

이*리오라는 선배는 기획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기획서 하나 가지고 4군데에선가 사전제작비를 받아 몇천만원으로 작업을 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 기록을  깰 수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받았는데도 선배는 남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아마도 남는 것은 없었지만(사실 바라지도 않지만 ^^;;) 아르바이트에서 조금은 해방이 돼서 오직!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됐지. 아니...그럴수만 있다면...흑흑...정말 부러운 일이다.  

 

또 기획서를 쓰고 있다.

그 동안 이주여성 관련해서 자료도 더 모았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는데 그걸 나누고 싶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상황이 변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더 반영한 다큐를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자유영혼'의 한계.

그래서 기획서를 쓴다. 뭔가 잡아줄 것이 필요해서.

그리고 작업비도 필요하고. ^^

 

근데 시간도 없고 아이디어도 막 떠오를 듯 하면서 안 떠오른다.

그래서 결국 컴 앞에 많이 앉아 있게 되고

그래서 결국 포스트를 또 쓴다.

 

기획의도는 대략 잡혔는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스타일을 잡고 가고 싶은데

안해본 것이어서 그런지 어색하고 닭살스럽다. ^^

 

휴우~~~

잘하고 싶다.

간지러울 만큼 즐겁고 재미난 다큐를 그녀들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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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참 다양한 공간에서 작업을 했다.

 

처음 영상 작업을 시작할 때는 장비가 없어서 대학로 어딘가에 있었던

영상 편집실에서 한시간에 얼마씩 내면서 20G 하는 컴을 빌려서 20분짜리 영상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편집 장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무슨 용기가 있었던지 일을 맡아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하루에 하나씩 프리미어 기능을 배워가며 영상을 만들어 납품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모르는 사람은 당해낼 수가 없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무섭다.

 

그리고 나서는 옥탑방에서 생활을 하면서 한쪽에 컴을 장만해 놓고 모니터도 없이 데크도 없이 조그만 카메라로 프리뷰하면서 편집을 했었다. 옆에 사람이라도 있을라치면 미안해서 이어폰을 끼고 프리뷰를 했었다. 귀가 아파도 옆에서 괜찮다고 해도 생활과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하는 그 공간에 대한 예의 같았다. 그것이....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난 누가 프리뷰를 하면서 미안해 하면서 이어폰을 찾으면 그냥 하라고 한다. 그게 작업실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서. ㅋㅋ ...그렇게 생활과 작업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햇볕이 잘 든다며 좋아했다.

 

그러다 어렵게 방이 두개 있는 공간을 얻었을 때는 신이 났다. 나도 작업실이 생긴 것 같아 우쭐했다. 그래서 잠자는 공간에서 작업하는 방으로 갈 때는 옷도 갈아 입고 가고 정말 오만 '지랄'을 했다. 그래도 역시나 생활하는 공간과 일하는 공간은 분리될 수 없었다. 일을 하다 말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했으니까.

 

지금? 난 출근을 한다.

얼마전 역시 옥탑이긴 하지만 이젠 명색히 "작업만 하는" 작업실을 마련하였다.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내가 이 공간을 잘 꾸려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정리가 안돼서 정신이 없는 공간이지만 아침에 출근해 올때면 기분이 좋다. 출근을 해서 보일러를 올리고 컴을 키고 라디오를 키고 창문 열어 환기도 시키고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거 아닌 공간일지 몰라도 내겐 참 여러 공간을 거쳐 온 작업실이다. 이제 이곳에서 작업만을 위한 짓꺼리를 하겠지. 벌써 한쪽면에는 전지를 두개 붙여 놨다. 이주여성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을거다. 이 작업실이 어떤 모습이 될 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 다큐에 대한 사랑(닭살스럽다 @@;;)과 고민이 풀풀 넘쳐 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으아...

 

이제 이주여성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어여 기획서 써야 하는데...기획서를 쓰시오~~~슈아!!!

 

 

<공지>

곧 연말 파티를 열까 합니다.

날짜는 작업실을 같이 쓰고 있는 분과 상의를 해야 합니다.

곧 공지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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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울다. - 이젠 씩씩해진다.

오늘로 임신 14주가 되었다.

어제 오늘 몸이 안좋더니 조금씩 갈색혈이 나온다.

 

임신 6주 정도쯤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의사는 그저 조심하라고 될 수 있으면 누워 있으라고 했다.

위험한 시기이니 긴장되고 걱정되고 우선 하던 일들을 대폭 줄이고

한달 정도는 집에 들어 앉았다.

무섭고 어렵더라...그래도 그래야 한다니 그렇게 했다.

맨날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고

그 시간에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경험이 있었던 일이 아니니

어렵더라. 그래도 그럭 저럭 한달을 보내고 나니

어느정도 적응이 된 듯 싶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다.

그런데 그만 갈색혈이 또 나왔다.

겁도 나고 해서 병원에 갔다.

 

 



병원은 갈 때 마다 놀랍다.

처음에는 임신을 알게 돼서 놀랬고

그 다음에는 아기 심장 소리를 들어서 놀랬고

그 다음에는 아기가 2주 새 3배가 커서 놀랬고

(그 전 주에는 0.7cm,  이주 후에는 2.2cm) 

그 다음에는 아기가 사람 모양을 해서 놀랬다.

(그 전까지는 아메바 모양이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아기가 막 움직인다. 이리 저리...

그래서 놀랬다.

 

그런데 갈색혈이 좀 보인다는 말에 의사는

"조심하셔야겠네요. 될 수 있으면 누워계시는 시간을 늘리세요." 한다.

 

아기가 막 움직인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점심을 먹고

다음 일정을 위해 가는 데 자꾸 의사의 말이 생각 나면서 막 서러워지는 거다.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하나?' 한 숨이 나온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임신 12주만 지나면 안정기에 들어가니 그때까지만 조심하자 맘을 먹었는데

그리고 나면 일을 조금씩 할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직도 조심하란 소릴 듣는다.

속상하다.

 

다음 일정은 촬영이었다.

임신 때문에 지체되고 있는

이주여성 다큐의 인트로로 쓸까해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이래 저래 걱정이 되고

도대체 얼만큼 움직여야 괜찮은지 몰라

후배에게 촬영을 맞겼다.

후배도 급히 맞겨진 촬영에 불편한가 보다.

열심히 이렇게 저렇게 촬영하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하는 게 영 불편해 보인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역시나 속상하다.

 

집에 돌아와서는 한동안 멍 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해야 하고 뭘 할 수 있을까

머리속으로 수백번을 대차 대조표를 만들고 지우고 한다.

 

그러다 눈물이 터졌다.

일이 많아서 몸이 너무 힘들어도 차라리 힘든 걸 택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몸이 힘들면 힘든 만큼 쾌감도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는다는 생각에 기뻤던 기억도 있다.

잘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열심히 하는 것 만큼은 그런 대로 잘해서

내가 조금씩 확장된다는 생각에 기뻐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못한다니...

막 목이 메인다.

 

눈물이 난다.

소리 없이 나오던 눈물이 어느새 엉엉 소리를 낸다.

에라모르겠다. 울자.

앞에서 해줄 것이 없어 같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같이 사시는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울자.  

 

골이 아플 때까지 울고 나니

이젠 뱃속에 있는 애기에게도 미안해진다.

그래...

이젠 씩씩해지고 싶어졌다.

그래 씩씩해지자.

 

도대체 그 많은 여자들이 어떻게 아기를 낳고 기르고

자기 일을 하는지...난 도대체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

 

이제는 좀 알아봐야겠다.

 

그래 씩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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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제작노트-이해하기 1

이주여성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이유는 두가지 인데 하나는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물리적으로 시간이 안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

초반에 이주여성을 인터뷰 했었는데

인터뷰 내내 마음이 막막해서 힘들었다.

한국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통역도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 보다 그녀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녀의 경험에 대해 난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없다. 뻔히 아는데 어찌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을 통해 다시 한번 그녀가 아플텐데....

 

그런 생각에 겨우 인터뷰를 마치고 온 이후로는 카메라 들기가 겁난다.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느끼고 같이 화내고

지금 그러고만 있다.

 

하지만 또 다시 느끼는 어려움은.....이해하기 힘들다는 거다.

그렇게 힘든데 어찌 감당하며 살까?

머리로야 얼마든지 이해간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어찌 그럴까?

여전히 남는다.

이 질문은 나 뿐이 아닌 것 같다.

이 답을 잘 구해야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답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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