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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7/27
    꿈에... (2)
    곰탱이
  2. 2008/07/25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1,2
    곰탱이
  3. 2008/07/24
    왜 난 갈매기인가! (5)
    곰탱이
  4. 2008/07/23
    부산 갈매기... (3)
    곰탱이
  5. 2008/07/22
    [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곰탱이
  6. 2008/07/20
    뭐라고 주절주절대고 싶은데... (3)
    곰탱이
  7. 2008/07/09
    에일리언의 시고니 위버... (2)
    곰탱이
  8. 2008/07/08
    잠시...
    곰탱이
  9. 2008/06/17
    삶이여 감사합니다...(펌)
    곰탱이
  10. 2008/06/13
    아~놔~~~! [야구](2)
    곰탱이

꿈에...

어젯밤 꿈에 보았던~~~...

나는 너를 못잊어~~~~....

ㅋㅋㅋ...

 

뭔 연애 얘기는 아니구여^^.

어젯밤 꿈에 지독하게 담배 피는 꿈을 꾸었더랬습니다.

그것두 너무 맛있게 피는...

 

그러다 꿈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 야, 이거 이래두 되는 거냐!

- 담배 이렇게 막 펴두 되는 거냐구!

 

그러다 또 다른 생각이 나타났습니다.

- 야, 거 좀 피면 좀 어떠냐! 좀 핀다구 세상 무너지냐!

- 담배로부터 자유로와야지...ㅉㅉ...

 

그러다 깼다.

아, C~~~, 이게 뭥미 시츄에이숑!

속을 들켜 버린 거 같아 상당히 뻘쭘했더랬다.

 

담배 생각이 없었는데,

이거 불질 하면서 생각나는 건 또 뭥미?

집에 담배 꼬불쳐 놓은 게 있는데, 가져올 걸 그랬나? ㅎ

그래서 한 대 맛있게 펴 줄 걸 그랬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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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1,2

 

** 예전부터 진보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해 보려고 했는데, 지금사 약간의 것을 정리해 보았다.

아래에 있는 목차대로 주저리 주저리해 보면 뭐가 보일까 아니면 나올까?^^

=============================================================================

#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2. 노동자로서 나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6. 진보와 혁명의 관계-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7. 진지전과 기동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예전에 진보라는 말은 ‘빨갱이’, ‘좌익’과 동의어였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라는 말은 진부하다고 할 만치 여기저기서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진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진보, 그것은 ‘유령’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주사파도 진보라고 하며, 심지어 노무현 정권도 진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인다.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은 대통합민주쉰당이 딴나라당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진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보라는 말이 ‘중산층’, ‘서민’(우리는 이들을 보통 민중이라 부른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중산층, 서민이라는 말은 ‘피지배 계급’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제 ‘진보’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중산층, 서민을 위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정의가 사실 참된 것인지 자꾸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어떤 정권도 피지배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는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물음과 관련하여, 도대체 중산층, 서민은 과학적으로 어떤 계층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위의 정의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면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동자로서 나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계급처럼 질적인 차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양적인 소득 차이와 재산 소유 정도 차이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양적 차이는 실제로 그 경계가 아주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어떤 기준으로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을 가를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대단히 자의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이면 서민층이고 2,010만 원이면 중산층인 것인가? 이러한 자의성과 임의성은 명확한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즉 계급 지배에 따른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산층, 서민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계를 은폐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지닌 개념이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곧바로 서민,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엄연히 현실적으로는 계급지배가 일어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일반 대중들은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지게 됨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것이 또한 일반 대중들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도록 만들며, 자신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기를 구분시키고자 한다. 노동자 대부분은 도시빈민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민, 중산층을 위하네 어쩌네 하면서 서민, 중산층을 들먹거리는 것을 진보라 칭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무늬만 진보인 ‘사이비 진보’이다. 진보는 질적인 차이를 지닌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을 통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적인 차이를 지닌 계급지배를 나타내는 개념들은 노동-자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본 개념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느냐 또는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르는, 즉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즉 노동자를 위한다고 해서 모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서민, 중산층은 계급의 측면에서 볼 때 피지배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대부분은 노동자이다. 서민, 중산층으로서 이 노동자들은 어떤 물적 토대를 가지며 살고 있는 존재인가? 그들 삶의 물적 토대는 무엇인가? 맑스는 생산하는 ‘인간’ 자신이 생산력이라고 했으며, 이 인간은 생산관계의 총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삶의 물적 토대는 노동자 자신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 그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이다. 이때 노동자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다는 측면이다. 두 번째는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는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는 대상과 주체의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본가-노동자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노동자 대중은 이러한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다. 그들의 생존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신의 생존을 모두 자신 혼자 떠맡게 된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무한한 적대 경쟁에서 물리쳐야 할 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힘’이 있는 쪽,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자의 첫 번째 측면,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장자 에셔가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처럼 이렇게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본에 맡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사상, 신념, 개념, 언어 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게 될 때 자신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폭로하며, 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인 ‘노동자’를 사용하는 대신에 자본의 비밀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말인 ‘근로자’, ‘국민’, ‘서민’, ‘중산층’이라는 말을 쓰며, 그 말에 아주 익숙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고서 돈 버는 것 자체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게끔 만든다.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자본의 영역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생산관계 속에서 영위해 나가려는 기획을 가지고 실천활동을 해 나가는 순간에서부터 노동자 대중은 진보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두 번째 측면이 첫 번째 측면을 지양해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창출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맑스가 말한 대로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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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 갈매기인가!

난 사실 롯데라는 이름을 안 좋아한다.

그래서 롯데 자이언츠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다.

대신 부산 갈매기 또는 부산 자이언츠 또는 갈매기 자이언츠라고 부른다

(거의 부산 갈매기라는 말을 쓰지만 말이다). 

 

난 롯데 자본을 아주 싫어한다.

물론 어떤 자본이라도 싫어하지만 말이다.

이넘의 롯데 시키들은 자이언츠에 절대 투자 잘 안 한다.

그래서 888-8577로 전화를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사실 원년 몇 해 빼고는 자이언츠라는 이름은 나의 안중에는 없었다.

작년까지 그랬다. 

내가 원년 자이언츠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순전히 최동원 엉아 때문이었다.

동원이 엉아의 공은 정말 뭐라 할까...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도 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동원이 엉아 공만큼이나 인간성도 미치게 만드는 므엇인가가 있었다.

그에 비하여 썬은 내 안중에 없었다.

어따대고 썬을 동원이 엉아 하고 비교하냐고!

 

그 동원이 엉아가 자이언츠를 떠나던 날(아마도 선수협 관계 일인 걸로 기억한다),

나도 자이언츠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서는 자이언츠 욕 많이 했다. 저주도 많이 했다.

'그것들 꼴지하는 거 당연한 거 아냐!'

어쩌다 이길 때가 있을 때,

'개발에 땀 났구만! 쳇!'

뭐 이런 식이었다.

대신 해태 고양이들을 가끔씩 응원하고는 했다.

그리고는 프로야구와 인연을 끊었다.

그리고 프로야구 응원하는 사람들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이해가 잘 안 갔다.

'어렵게 사는 이 판국에 프로야구가 다 뭐람!'

 

그러던 내가 탕아처럼 다시 프로야구에, 부산 갈매기 자이언츠로 돌아왔다.

이건 순전히 진보 블로거 들(염둥이, 은하철도, 산오리 등등)  때문이다.

ㅋㅋㅋ...

이 블로거들 때문에 야구를 보는 눈이 생겼고,

야구 보는 재미가 쏠쏠해졌으며,

야구로 인해 행복한 순간을 맛볼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ㅎㅎㅎ...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나중 시간 되면 생맥주 한잔 쏠 수도 있다^^.

ㅋㅋㅋ...

(50,000만 방문 즈음 해서 벙개나 해 볼까나...

근데 올 사람이 없을 거 같다...ㅠㅠ)

 

부산 갤매기들아!

이 엉아가 돌아왔다!

이 엉아가 누구냐!

뚱산 곰팅이를 꽈악~~~! 잡고 있는 곰탱이 형님이시다.

담주 수요일 엉아가 뚱산 곰팅이 꽈악~~~! 잡아서

먹기 좋게 요리해 너희에게 보양식으로 줄꾸마!

여름 힘들제?

곰팅이 쫌 묵구 방망이로 쌔리뿌라!

 

아~~~, 쪼콤 시원해지는 거 같네!!!

 

 

 * 부산 갈매기 *

           노래: 문 성 재

지금은 그어디서 내생각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파도 치는 부둣가에
지나간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지금은 그어디서 내모습 잊었는가
꽃처럼 어여쁜 그이름도
고왔던 순이 순이야
그리움이 물결치며
오늘도 못잊어 네이름 부르는데

*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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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우리를 잊었느냐!

 

요즘 부산 갈매기들이 맥을 못추고 있다.

이제 기아 고양이한테 4위를 넘겨 주어야 할 위험한 지경(기아와 1게임 차)에까지 와 있다.

가을 야구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몰려 있다.

우야다가 이런 일이 생긴능공!

 

혹자는 갈매기들이 체력이 떨어져서 타격감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하고,

또 다른 혹자는 정수근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부산 갈매기 팀이 부진한 데는 고질적인 지병인 중간, 마무리의 부재이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이다.

겨울 전지 훈련량의 강도는 거의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선수들 각각이 체력과 정신력을 좀더 오래 유지시키고 버티게 하는 팀이

가을에 야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혹독한 더위와 싸우고 있는 선수들에게 좀더 안정감 있게 경기를 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안정감을 기름으로 하여

좀더 신바람나게 달릴 수 있는 잼있는 야구를 하게 만드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수들이 나름 사력을 다해 뽑아논 점수가 뒷문으로 새 나가지 않게 뒷문을 굳게

잠글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점수를 잘 뽑아 놓으면 무엇하나, 마무리 못해 날려 먹으면

이거 선수들 완전히 죽이는 겁니다, 예~~~!

 

불펜과 마무리의 안정, 이것은 선수들의 수비와 공격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상수이다.

부산 갈매기 팀은 선발이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고, 또 좀더 안정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서 어쩌다가 점수를 빼 놓고서 6,7회가 되면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

조금해 지기 시작한다.

이는 추가 점수를 빼 내야 하는데도 빼 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것은 갈매기들이 볼 카운트가 확실히 유리한 1-3에서도 투수의 유인구에 속아서 출루율이

2할도 안 된다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부산 갈매기 타자들은 젖 먹은 힘까지 다해 공격력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 불을 크게 살리는 것은 불펜과 마무리의 확실한 안정이다.

그 중에서도 불펜(중간)의 확실한 안정이 더 시급하다.

그래야 마무리가 현재 불안하다고 하더라도 그 마무리를 앞으로 잘 키울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야구는 머니머니 해도 투수 중심의 게임이다.

투수의 부진이나 약화는 공격력에 물을 끼얹는 강력한 내부의 적이다.

제일호 감독이 시즌 초반부터 향남옹(또는 향운장)을 불펜(중간)의 중심으로 삼았더라면

좀더 여유 있는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임작가는 임작가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진필중을 올림픽, 올스타전이 치루어지는 한 달 동안 중간 요원으로

훈련시켜 써먹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부산 갈매기여!

누가 뭐라 하든 그대들의 길을 당당히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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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이 책은 미이클 레보위츠가 쓴 책(메이데이, 2008)이다.

이 저자의 책은 이미 한 권 소개 된 바 있다, <자본을 넘어 : 맑스의 노동자계급 정치경제학>으로.

이 책의 번역은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3,4장의 내용은 위에서 이미 소개된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소개된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은 크게 2개의 운동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과정이며, 둘째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맑스의 <자본론>이 미완의 저작으로 첫째 운동과정인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 과정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 두 번째 운 동 과정의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 서술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이 둘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 둘째 과정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이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자기 생산이야말로 새로운 여성과 새로운 남성, 즉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는 체 게바라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의 생산의 현실화와 관련하여서 저자는 유고의 [노동자의 자주관리]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 자주관리는 7가지의 어려운 문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그 7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기업 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의 분열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2. 판매가 하락할 때 노동자관리 기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상이한 기업의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노동자관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4. 자주관리기업의 노동자들은 실업자들과 배제된 계층에 대해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5. 노동자 자주관리체제에서 누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책임지는가?

6. 노동자관리기업들의 파산을 허용해야 하는가?

7. 어떻게 노동자관리기업들과 사회 전체 사이의 연대가 직접적으로 기업에 통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이 기업의 이윤을 그 기업에 속한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고자 한다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이며, 이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가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을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게 될 경우, 첫째, 각각의 기업들 사이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되며, 둘째,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빈부 격차가 발생하게 되어 노동자들의 분열이 가속화됨으로써, 셋째, 이 분열을 중재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국가권력과 개별 노동자 사이의 적대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곧바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익과 개별 노동자의 이익 사이의 적대로 표면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며, 이는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되어, 결국 이 자주 기업은 옛날 스탈린주의 식의 국유화로 넘어가게 되거나 아니면 자본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차베스가 주도하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의 혁명적 볼리바르 정책  49개 자체 내에도 깔려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볼리바르 정책이 완전한 반자본주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네수엘라 자국의 산업과 농업을 지반을 다지기 위하여, 즉 베네수엘라 일국적 자본가 계급을 창출하기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면서도(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다)을 볼리바르 정책의 목적과 방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정책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은 기존의 국가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어떤 시인들의 아름다운 관념과는 반대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 국가는 이제 새로운 생산관계의 기초를 창출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국영기업의 형태로, 두 번째의 것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국영기업은 스탈린 식의 국영기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국영기업도 아니다.

또한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는 스탈린 식의 협동조합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 아무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개별적인 소집단도 아니다.

이 두 형태는 사회적 생산기업EPS의 모습을 가지는데, 이 생산기업은 각각의 공동체들이 자신의 필요를 집단적으로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만큼, 전체 공동체의 필요와 목적에 진정으로 기초한 생산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인간 능력의 완전한 발현이라는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사회주의는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현재 베네수엘라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이것이 저자의 말하고 있는 마지막 요지이다. 

 

*** 

일단 저자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좀더 밀어부쳐서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새로운 인간주체의 형성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7가지 문제점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에서도 새로운 인간주체가 형성되지 못해 7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 노동자의 자기 생산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저자에게는 곧바로 새로운 인간주체 생산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새로운 생산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찰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기 위한 변혁적 실천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 노조를 통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대 자본 투쟁으로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이다. 오히려 자본의 내성을 강화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렇게도 열심히 투쟁하는데도 맨날 패배이며, 위축되어 가는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곧 노동자의 노동력의 재생산, 새로운 생산과 맞물려 있다. 이 생산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자본-노동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관계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 생산은 여성의 가사노동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착취 관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자기 생산 방식, 즉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자기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생산관계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스스로 성별 분업 체계를 해체하고 ‘여성 되기’를 통한 여성 해방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이 기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여 그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기초이자 전제(책 203쪽)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칫 오해를 살 만한 부분이 있다. 두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겠다.

(1)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경향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자신의 삶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인 돈이 그 자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의 경제주의 현상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의 여덟 아홉은 좋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 획득이 하나의 수단이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이 궁극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권력 획득이 궁극 목적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권력 획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 형태로 환원될 위험이 아주 많아지게 된다.

(2) 도대체 어떻게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간 주체 형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새로운 생산관계를 통해 새로운 인간 주체를 어디서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이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의 전제는 새로운 생산관계 창출 과정이며, 이 과정을 배제한 모든 논의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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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주절주절대고 싶은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욕만 모구멍을 타고 오른다...

한 인간에 대한 분노(이것에 집착하지 말고 툴툴 털고 훨훨 날아야 하는데...) 때문에...

안 보고 안 마주치고 산다면 느무느무 좋을 텐데,

가끔씩 볼 수밖에 없고,

지금은 당분간 자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빌어먹을...

 

언제 이 질기고 질긴,  쓰레기 같은 인연이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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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의 시고니 위버...

제목을 이렇게 달았는데, 시고니 위버라는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이라는 영화 속에서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여름 학기(보통 계절학기라고 말한다. 계절학기 강좌는 거의 강사들한테 안 주는데... 운 좋게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경제적으로  안 하느니 못한 것이 되었다^^) 기말고사 시험 문제를 내려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마루잡이로 끄적여 보려고 한다.

 

보통 에일리언의 영화를 해석하는 관점이 80년대 다이하드와 함께 남성성의 영웅화(이를 미국의 영웅화로 연결시킨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내가 주워 들은 바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 초점이 아주 다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문제는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즉 시고니 위버가 맡은 역할이 여성의 남성성쯤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인데...

지금 내가 생각하기로는 시고니 위버가 그 남성성의(가부장제 또는 성별 분업화 속에서의 성차로 해석된다) 사회를 해체하는  여성 전사 같다는 것이다.

에일리언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 또는 거대한 남성성의 상징처럼 보이며, 그 에남성성을 여성을 숙주로 하여(이는 여성이 가족 내외에서 행해지는 모든 노동, 이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가 평가절하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생산하는 구조 속에서 그 재생산의 끈을 잘라버리려는 위대한 투쟁의 과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에일리언을 죽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며, 그 해체에는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 숙주라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죽임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성별 분업화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을 해체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 개인으로서 노동자(이는 대체로 남성으로 상징된다)는 그 자신 속에 착취라는 자본의 특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본(에일리언)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식들은 여성의 노동(시고니 위버의 몸)의 착취를 통해 자라나는 구조 속에 있다. 이 구조와 완전히 단절하려는 투쟁이

에일리언에 대한 시고니 위버의 싸움 속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좀더 시간이 된다면 에일리언 1에서부터 4까지 잘 들여다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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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틈 내서 끄적입니다(제목 보고 낚여도 할 수 없사와요^^ 잔머리의 대가...ㅋㅋ).

쓰고 싶은 글도 많고(근데 막상 쓰려면 아마도 잘 못 쓸 거다... 이게 문제라니까...),

대전도 함 내려가 보고 싶고...

그리고 사는 여러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근데 사는 물적 토대가 이 하고 싶은 상부구조를 안 받쳐 준다(경제 결정론자?ㅋㅋ).

 

블로그 먼지 많이 쌓였구나...

이제 또 나가봐야 한다.

 

아~~~!

내 방학 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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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여 감사합니다...(펌)

촛불을 밝히는 우리들을 위해!!

 

 

 

첨부파일 삶이여감사합니다.mp3

 

 

젊은 벗들이여! 감사합니다

새롭고 당당한 그대들의 행진

서로 연대하고 즐기고 의지하며

희망하는 법을 알게 해줬네

그대의 노래는 나의 노래

그대가 추는 춤은 우리들의 춤

그대들을 우리 곁에 두신 삶이여,

오! 삶이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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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야구]

요즘 왜 그러냐... 갈매기... 

가을에 야구 안 할 건지...

곰팅이한테는 이겨줘야지...

아~, 놔~~~!

 

미치겠다...

 

촛불 축제나 열심히 참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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