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밭다' 2011/01/19
  2. 외상장부 (2) 2009/06/23

'종요롭다'

from 글을 쓰다 2011/05/19 21:22
비슷비슷한 어투와 목소리 때문일까요. 집회장에는 난생 처음 왔다는 사람들도 세 번 정도 식순이 지나고 나면 벌써부터 식상하단 소리가 나오곤 합니다. 물론 연단 위에선 이들에게는 절실함과 굳은 의지가 그리 나타나는 것이겠지만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이 틀림없을 터인데도 어찌 그리도 한결같은지. 하지만 그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결의대회에서도, 끓어오르는 분노가 가득한 규탄대회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 분은 구수한 사투리로 외치는 구호 하나만으로도 참가자들을 절로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지요. 결코 허황된 몸짓이나 말투가 아닌, 권력에 대한 해학과 풍자, 조롱, 민중에 대한 올곧은 사랑과 진실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구호 하나, 하나. 그것은 우리의 웃음‘이자, ‘무기’였습니다.
 
“다운 다운 더블유티오(down down WTO)”
“아우워 워드 이스 아우워 웨폰(our word is our weapon)”
 
종요롭다 : 없어서는 아니 될 만큼 긴요하다. 사물에 있어서 가장 중추(中樞)의 부분이 될만하다.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농민운동을, 민중운동을. 아니 스스로를 ‘전선운동가’라 부르며,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권력을, 부를 움켜쥔 자들에게는 한 알의 ‘쭉정이’겠지만. ‘여의도에 아스팔트 해방농사’를 맨 앞에서 이끌어왔던 종요로운 사람, 정광훈. 그가 이제 광주 망월동 민중항쟁 열사들 곁에, 고향 후배 고(故) 김남주 시인의 옆에 고이 잠들었습니다.
 
1년 내내 씨 뿌리고 뼈 빠지게 거두어서
보리농사 망하고 고추농사 조지고 남은 것은 빚 덩이뿐
이 세상에 지어먹을 농사가 하나 있어
여의도에 아스팔트 해방농사 지어보세
너 살리고 나 살리는 아스팔트 농사 이 농사가 최고로세
농민해방 앞당기는 단결투쟁 농사 이 농사가 최고로세
 
사람답게 살겠다고 죽자 살자 일을 해도
사람구실 못하고 이내 신세 조지고 남은 것은 쭉정이뿐
이 세상에 지어먹을 농사가 하나 있어
여의도에 아스팔트 해방농사 지어보세
너 살리고 나 살리는 아스팔트 농사 이 농사가 최고로세
농민해방 앞당기는 단결투쟁 농사 이 농사가 최고로세 이 농사가 최고로세
(고(故) 정광훈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쓴 ‘아스팔트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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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9 21:22 2011/05/19 21:22

'치임개질'

from 글을 쓰다 2011/04/07 23:27

 

가을에 털어놓기만 하고 고르지 않았던 서리태며, 메주콩이 한 자루. 또 꼬투리만 따고 까지 않은 팥 한 자루가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변명하자면 셋 다 같은 때 거둬들이느라 그랬다 하지만. 이, 삼천 평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맘만 먹음 하루면 콩 고르고, 또 하루면 꼬투리 다 깔 수 있을 터이니. 바쁜 건 핑계고 실은 놀고 싶어 그랬을 겁니다. 그래 오랜만에 걷기여행도 했고. 느닷없이 시작한 시험공부에 도서관도 다니고 또 그러면서 책도 읽고 하니. 이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새 농사 준비해야 할 시기. 이러다 주경야독(晝耕夜讀), 아니 아침엔 밭농사, 낮엔 시험공부, 밤엔 콩이며 팥 고르기를 해야 할 판이 될 것 같습니다. 해서 지난 주말, 이틀 내리 안방에 신문지 펴놓고 서리태를 골라냈더랬습니다. 그랬더니. 언제 다 치우나, 싶었던 갑갑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괜한 걱정을 했다 싶게 되더군요. 아, 농부님네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참 넉살좋은 소리 하는 군, 하겠지만요. 뭐, 어떻습니까. 방사능 땜시 창을 활짝 열어놓진 못하더라도 따뜻한 봄 햇볕 받으며 남은 메주콩, 팥을 정리하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요.  

 

치임개질: 벌여놓았던 물건들을 거두어 치우는 일

     

어느 나라 기상청이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환경부는 노천 정수시설에 덮개를 씌우라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고. 방사능 비가 우려돼 우산과 비옷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는 데 총리라는 사람은 맞아도 된다고만 하고 있으니. 하긴 의협이란 데서도 괜찮다고 하는 요상한 나라니 뭐, 어디 가겠습니까. 또 핵발전소 사고인데도 죄다 핵관련 공학자들만 모셔놓고는 영향은 어떨 것 같으니, 대책은 뭐니 하고 있는 언론을 보고 있으려니 이건 뭐, 당연한 거겠지요. 이러나저러나. 봄 햇볕이 좋을 때라 겨우내 닫아뒀던 창문도 활짝 열고 싶지만 그거야 마음뿐. 당분간은 엄두도 못 낼 것이고. 또 벚꽃이며 목련, 개나리가 노랗고, 하얗게 폈으니 어디 꽃구경이라고 가야겠지만. 그것도 당분간은 어림없는 일이겠지요. 그래두요. 따뜻한 볕이 어느새 방 안쪽까지 들어오니. 시험 공부하는 틈틈이 베란다에 나가 자리 펴고 치임개질이라도 하며 이 우울한 봄을 만끽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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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7 23:27 2011/04/07 23:27

'애잡짤하다'

from 글을 쓰다 2011/02/14 20:10
초속 50m가 넘는 태풍도 견뎌냈던 한 노동자가 목을 맸습니다. 높이 35m, 85호 크레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 김주익은 정리해고와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를 요구하며 129일을 그렇게 머물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8년. 연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날 새벽, 또 한 노동자가 다시 크레인에 오릅니다. 박창수에 이어 김주익, 곽재규까지 세 명의 동지를 열사라는 이름으로 떠나보낸 뒤, 몇 년 째 보일러를 켜지 않고 살던 김진숙 지도위원(민주노총 부산본부)이 말입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뼛속까지 찬바람이 파고드는데. 그렇게도 아끼던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곳에 올라. 기어이 그 외로운 영혼을 안고 살아서 내려오겠다고 다짐했답니다. 조합원들은 그런 그를 지키기 위해, 다시 떠나보낼 수 없는 동지들을 위해, 오늘도 밤을 꼬박 새우고 있구요.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란 유서를 남긴 김주익 열사.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려웠는데 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씨는.. 재규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이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이란 글을 남긴 김진숙 조합원. 한 발, 한 발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를 떠올리며, 또 한 발, 한 발 일터에서 쫓겨나야 하는 동지들과 살아남았음을 미안해해야하는 조합원들을 떠올리며 크레인에 올랐을 그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듯 안타깝고, 또 안타까워서 애가 탑니다. 
 
애잡짤하다: 가슴이 미어지듯 안타깝다. 또는, 안타까워서 애가 타는 듯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랐다는 얘길 듣는 순간 김주익 지회장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주익씨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습니다”라고 약속한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자니 애잡짤해 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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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20:10 2011/02/14 20:10

'발밭다'

from 글을 쓰다 2011/01/19 19:13
안상수 대표 아들 건으로 아주 물 만난 고기입니다. 옳거니 때는 이때다 싶은지 ‘아니면 말고’ 식 의혹제기에 단호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도 하고, 이번 기회에 ‘막말정치’를 뿌리 뽑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물론 근거나 확인도 없이, ‘찔러보기’식으로 의혹을 제기하거나 일방적으로 폭로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또 틈만 나면 낯간지러운 말로 서로를 공격하고, 심지어는 쌍스런 욕설까지 퍼붓는 일 따위도 하루빨리 없어져야겠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카더라’ 정치공세는 한나라당이 지존(至尊)이요, 전매특허(專賣特許)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입에 담기도 쉽지 않은, ‘공업용 미싱으로 드르륵’을 내뱉었던 사람은 또 어느 당(黨) 사람이었습니까. 아무리 이번 일이 비난받아 마땅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폭로정치’, ‘막말정치’를 쓸어내야겠지만 말이지요. 한나라당, 기회를 재빠르게 붙잡아 잘 이용하는 소질이 있는게 참으로 남다르구나, 그런 생각만 드니 이거 어쩝니까. 
 
발밭다: 기회를 재빠르게 붙잡아 잘 이용하는 소질이 있다.
 
한나라당이 안상수 아들 부정입학 의혹제기 건으로 폭로정치를 뿌리 뽑자며 발밭게 덤비고 있지만 그 본색을 얼마나 숨길 수 있을까요. 정치얘기라면 이제 신물 나지만 그래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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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9 19:13 2011/01/19 19:13

외상장부

from 글을 쓰다 2009/06/23 14:38
“엄마, 왜 안 깨웠어? 지금이 몇 신데.”
 
봉철이가 눈을 뜬 시간은 8시 20분. 서두르지 않으면 등교 시간에 늦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교까지 데려다 줘야 할 엄마가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엄마, 어디 있는 거야? 나 늦었단 말이야, 빨리 빨리.”
 
봉철이는 안방이며 부엌으로 엄마를 찾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와 벌써 집을 나갔는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식탁 위에 식빵만이 놓여 있습니다.
 
“뭐야, 오늘은 아침부터 나간거야? 에이 나가려면 깨우고 가지.”
 
봉철이는 부랴부랴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섭니다. 다행히 마을버스가 일찍 와서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을버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고 돌면서 봉철이 마음이 급해집니다.
 
“아이 참, 왜 이렇게 도는 거야.”
 
버스는 봉철이가 사는 집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가 매일 아침 문을 여셨던 쌀가게를 지나 동네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닙니다. 하지만 버스에 타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엄마 얘기로는 이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도 가게를 그만둔다고 하셨습니다.
 
“엄마, 아빤 너무해. 저번에 이제 가게 안 하니까 롯데월드도 가고 외할머니 댁에도 가자고 해놓고선. 맨날 맨말 저녁마다 나가더니 오늘은 뭐야, 아침부터.”
 
봉철이는 학교 앞에서 같은 반 친구 영일이를 만났습니다.
 
“나발나발 강봉철, 요새 니 여친, 왜 학교에 안 오냐?”
 
아침밥도 먹지 못한 봉철은 기운도 없는데다 또 짝꿍 얘기를 하는 영일이가 얄미워 대꾸도 안합니다.
 
“헐 나발나발 강봉철이 이제 말까네. 야, 니 여친이 보고 싶어 그러냐? 크흐흐.”
 
“야, 내 앞에서 근정이 얘기 꺼내지도 마, 누가 내 여친이라고. 그리고 나도 좋거든. 걔 안 나오니까. 알았지?”
 
봉철이는 학교 친구들이 ‘나발나발’이라고 부를 만큼 말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학원에서도 “제발 조용히 좀 해”라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봉철이에게 그런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근정이입니다. 김근정은 친구들이 뭘 물어봐도 대답은 안하고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은 봉철이가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도 그렇습니다. 그냥 말없이 들어주고 웃기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봉철이는 근정이가 옆자리에 있는 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야, 강봉철. 니 아무래도 수상하다. 근정이가 학교 안 나오면서부터 니도 맹 풀이 죽어 있는 게. 니 그렇게 걱정돼나?”
 
잠깐 근정이 생각을 하느라 학교 앞에서 만난 영일이가 어느새 옆자리로 온지도 몰랐던 봉철이는 깜짝 놀라 말합니다.
 
“너, 한 번만 더 근정이 얘기 해봐라. 니하고 내하고 끝이다. 끝. 알간?”
 
“헤헤. 니 말 안 해도 내 다 안다. 누굴 속일라고.”
 
봉철이는 빨리 학교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영일이가 놀려대는 것도 싫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아빠를 붙잡고 물어볼 게 많이 있습니다. 대체 밤마다 어딜 쏘다니는지, 왜 오늘은 깨우지도 않고 나갔는지, 롯데월드는 언제 갈 건지를요. 하지만 봉철이 다시 집으로 온 시간은 7시가 넘었습니다. 수업은 4시에 다 끝났지만 6학년 올라오면서 다니기 시작한 보충학원 때문입니다.
 
“에이, 아직도 안 왔네. 배고파 죽겠는데.”
 
봉철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아침은 늦게 일어나 먹을 새도 없었고 점심은 봉철이가 싫어하는 찜닭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밥은 있겠지?”
 
평소에는 혼자 밥 먹는 일이 절대 없는데 오늘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봉철이 밥통이며 냉장고를 엽니다.
 
“뭐야. 텅텅 비었네.”
 
아무래도 자장면이라도 시켜야겠습니다. 어찌된 일이지 밥통에 밥은커녕 냉장고에도 먹을 만한 게 없습니다.
 
“아, 배고파.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나 참. 돈이라도 주고 가야지. 뭘 사먹던가 하지. 밥도 안 해놓고. 정말 너무하네. 안 되겠다. 자장면이라도 시켜야지”
 
봉철이는 냉장고 옆에 붙여있는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자장면을 시키고는 안방 화장대며, 장롱을 뒤집니다. 엄마, 아빠가 가게를 그만 두기 전까지 이곳에 돈을 넣어두는 걸 많이 봤고, 또 몰래 꺼내 쓰기도 했었거든요.
 
“어. 돈이 하나도 없네.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 어디 있지? 어. 이건 또 뭐야? 외상장부?”
 
봉철이는 화장대 서랍에서 검정색 노트 한 권을 꺼내들었습니다. 겉표지에는 ‘외상장부’라고 써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글씨로 누구네 집 얼마, 381-52호 75,000원, 꽤나 두껍습니다.
 
“뭐야, 이거. 외상장부가 뭔 말이데. 어? 이거. 혹시 근정이 아냐?”
 
봉철이가 꺼내 든 ‘외상장부’에는 아침에 영일이가 그렇게 놀렸던 짝꿍 근정이의 이름이 여기저기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름 옆에는 날짜와 함께 30,000원, 27,000원 따위의 숫자들이 적혀 있습니다. 또 어떤 날은 숫자와 이름에 두 줄이 죽 그어져 있기도 합니다.
 
“뭐야. 근정이가 우리 집에서 돈 빌려갔나? 뭔 소리지 이게. 앗~ 찾았다.”
 
여기저기서 근정이 이름이 써 있는 걸 의아해 하던 봉철이 ‘외상장부’를 처음부터 보려고 펼쳐드는데 만 원짜리가 한 장 ‘툭’ 떨어진 겁니다. 아마 엄마, 아빠가 돈을 넣어두었는데 이 한 장만 빼놓고 딴 데로 옮겨둔 거 같습니다.
 
“야. 이거 웬 횡재냐. 크흐흐”
 
봉철은 금세 근정이고 ‘외상장부’고 다 잊어버립니다. 아침부터 쫄쫄 굶어서인지 지금은 자장면 먹는 데 정신이 팔린 겁니다. 허겁지겁 자장면을 다 먹은 봉철이는 남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를 잔뜩 사다놓고는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아마 엄마, 아빠가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일텐데요. 그래서인지 화가 좀 풀리나 봅니다. 슬슬 졸기도 하구요.
 
“봉철아, 여기서 자면 어떻게 해. 방에 들어가서 자”
 
“봉철아, 너 근정이 알지? 근정이 당분간 우리 집에 있을 거다. 그리 알고. 너 인사도 안 하냐? 내일부터는 너 근정이랑 같이 학교 가거라.”
 
언제 잠이 들었었는지 봉철이,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뜹니다. 아마 신나게 카트라이트를 하다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졌나 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며칠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던, 아침에 그렇게 영일이가 놀려대던 근정이가 엄마와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닙니까. 잠에서 덜 깬 봉철이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엄마, 뭐야. 왜 인제 들어와. 그리고 재는 뭐야. 쟤는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아빠, 어떻게 된 거야? 쟤가 왜 우리 집에 와 있어? 뭐야. 말 좀 해봐. 쟤. 인제 우리 집에서 사는 거야?, 방은? 혹시 나랑 같이 쓰라고 하는 건 아니지? 뭐야, 나 쟤랑 같이 살기 싫어. 쟤도 엄마, 아빠 있을 거 아냐? 왜 우리 집에 왔어? 뭐야,, 빨리 말해 봐”
 
봉철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 학교에서 놀림당하는 것도 싫은데 이제 근정이랑 같이 산다니. 죽을 맛입니다.
 
“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얘기하고, 너는 니 방에 가서 자라. 아빤 엄마랑 밥부터 먹어야 겠다”
 
“뭐야. 나 쟤랑 같이 살기 싫어. 알았지. 나 죽어도 쟤랑 같이 안 산다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봉철이는 근정이를 본체만체 하고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갑니다.
 
“뭐야. 밤마다 나가더니 근정이는 왜 데리고 들어온 거야. 그나저나 내일 학교에 어떻게 가지? 가다가 영일이 자식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나. 참.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아니지, 내가 왜 쟤랑 같이 학교를 가. 미쳤어.”
 
봉철이는 당장 내일 아침이 걱정입니다. 영일이 그 놈이 또 얼마나 자기를 놀려댈지 안 봐도 뻔하거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봉철은 침대 위로 몸을 던집니다.
 
“여보, 이제 우리 외상값 받으러 그만 다닙시다.”
 
“......”
 
“당신도 며칠 동안 다니면서 봤잖아요. 이 동네 사람들 이제 다 떠나고 얼마 안 남았어요. 그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찾으려면.... 서울에 없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리고 찾는다고 해도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기겠어요.”
 
“.....”
 
“쟤. 근정이만 봐도 그래요. 엄마는 거 외국인 불법 체류인가 뭔가, 거 왜, 단속에 걸려 언제 베트남으로 쫓겨 갈지 모르는데 돈을 어떻게 받겠어요.”
 
“그럽시다. 내도 요 며칠 많이 생각했소. 아무래도 외상값 받는 건 그만둡시다. 당신 말대로 그 사람들한테 돈 달라고 하는 것도 못할 짓이요. 그나저나 쟤는 어쩌려고 그려요. 당신 말대로 쟤 엄마 쫓겨나도 아빠가 있지 않소. 엄마, 아빠 둘 다 없다면 뭐 어찌해보겠지만 아빠가 있는데 우리가 맡는다는 건 좀 그렇지 않겠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빠한테 맡겨야죠. 근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쟤 아빠가 지금 제 정신이겠어요. 쟤 엄마 어떻게 해서라도 여기에 남게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데요. 엄마가 쫓겨 나가던 다시 집으로 오던 그때까지만 데리고 있자구요. 어차피 우리도 이제 곧 이사도 해야 하고 하니까 오래 데리고 있을 수도 없어요.”
 
잠결이었던가요. 봉철이 귀에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봉철이는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맙니다. 아무래도 내일 학교에 갈 일이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근정이 덕분에 엄마, 아빠가 집에 있다고 하니 기분이 좀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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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4:38 2009/06/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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