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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산업의 (보이지 않는) 굴뚝

 

이런 이야기는 들을 적 있다.

 

2004년에 부안 방폐장 건설 반대투쟁을 할 때가. 당시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공사 였던가?)의 홍보물에는 핵발전소가 석탄이나 석유보다 더욱 환경친화적이라며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당시 평범한 부안주민들마저 알고 있었던, 사용가능한 '핵'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었다. 뭐 씨알도 안먹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최 핵발전소라는 것도 시동을 걸려면, 석유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리저리 해도 석유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는 좀처럼 낮아질 수 없다는 문제의식. 곧! 에너지 소비를 낮추는 것외엔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오늘 또 이런 이야길 보았다.

 

<경향신문>에 난 기산데, 우리가 굴뚝없는 산업으로 알고 있는 iT산업 역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글 검색 1건에 전구 45분을 켤 수 있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믿기나? 난 이 기사를 여러번 곱씹어 보았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편리함이라고 여기는 모든 물건들은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사용해서 만들거나,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든다.

 

결국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이라는 것.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추세다. 내가 진보넷에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하기 위해 드는 석유에너지는 과연 그 효율을 제대로 내고 있는 걸까? 헉.. 하고 나니 무서운 질문이다.

 

오일피크에 대해 이런 저런 경고들이 나오고 있다. 위기는 내 자식들을 겨냥하고 있다. 나만 빠져나가면 되는 세상이 아니기에 더둑 경각심이 든다.

 

(사족) 세상의 모든 허위와 편견을 까발리겠다는 책이 있었다. 그 책에선 지구온난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장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지구가 생겨나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결코 위험한 수준이 아니다. 지구는 온도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왔다. 그러니 지금 올라가고 있는 지구의 온도도 곧 내려갈 것이다."

 

읽어 보고, 그래프도 보고...'끄덕, 끄덕'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그 온도가 내려간다는 지점의 조건이 혹시, 인류가 없어진다는 조건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젠장! 인류가 살아남지 못하고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면 무슨 소용이냐구!

 

하긴, 그런것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경제학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경제학도들이 일반 사람에 비해 이기적인 이유를 알 수밖에 없군. 음하하, 타도하자 경제학과!!



IT산업 ‘굴뚝만 없을 뿐’ 항공업보다 환경 더 파괴
ㆍ구글 1건 검색 소비전력이면 전구 45분 켜


‘비행기보다 위험한 컴퓨터?’

대표적 친(親)환경 산업으로 여겨져온 정보기술(IT) 산업이 실제로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항공 운수 산업보다 더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최신호에서 IT 산업의 에너지 소비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지구 전체 발생량의 2%로 항공기가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같은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항공산업이 바이오 연료 사용 등 온실가스 절감에 노력하는 반면, 급성장 중인 IT 산업은 직접적인 오염물질 배출이 없다는 이유로 환경 문제에 둔감하다는 데 있다.

IT 산업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막대한 전력 소비량 때문이다. IT 산업은 대용량 서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전력을 쓰고 있다. 인터넷 접속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서버는 24시간 쉼 없이 작동해야 하고 중요한 정보 손실을 우려해 항상 ‘열 받지 않도록’ 냉각팬을 돌려야 한다.

독일 뮌헨 지역 대학의 전산망 연결을 위해 지어진 라이프니츠 컴퓨터 센터는 2011년 도입을 목표로 슈퍼 컴퓨터를 주문했다. 이 슈퍼 컴퓨터를 유지하려면 ‘짐을 가득 실은 채 멈춰있던 400t짜리 고속열차가 시속 300㎞를 낼 때’와 같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지금도 한 달 12만유로(약 1억8700만원)에 이르는 이 센터의 전기요금은 슈퍼 컴퓨터가 도입되면 더욱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촌에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전산망 운영 업체들은 수만대의 서버를 운영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IDC에 따르면 2000~2005년 사이 네트워크 서버의 전력 소비량은 2배로 늘어났다. 비평가들은 이를 ‘열풍기’에 비유하며 에너지 절약형 컴퓨터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검색엔진 구글에서 1건을 검색할 때 소비되는 전력이면 에너지 절약형 전구를 45분 동안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IT 기업들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주된 목적은 ‘환경 보전’보다 ‘비용 절감’이다. 구글은 최근 인터넷데이터센터를 미국 오리건주 댈즈 댐 인근에 새로 지었다. 캘리포니아주에 지불하는 돈의 5분의 1 가격에 수력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IBM은 160여개의 전산센터를 7곳으로 통·폐합했다.

슈피겔은 ‘굴뚝 없는’ IT 산업이 오히려 지구 온난화를 부추긴다는 점은 산업화 초기의 철강 산업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철강 산업과 IT 산업 모두 초창기 폭발적인 성장과 그 과실만 주목받았을 뿐, 이들 산업이 유발하는 오염과 자원 소비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 정환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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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쿤/포퍼 논쟁

1. 왜 읽었나

 

- 스티브 풀러, 생각의 나무, 2007.

- 가격은 12000원

- 얇은 편인데 굳이 양장본으로 만들어 어색하다

- 솔직히 표지 디자인도 후지다

이런 책은 문고판으로 나와도 좋을 듯한데.

- 하기사 풀러의 '지식인'도 양장본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 역시 이런 책은 조금 팔아도 이문이 남아야겠지?

이 책은 쿤과 포퍼를 통해 지식인의 문제를 거론한다. 다시 말해,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자신의 저작물과 어떤 연관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는가라는 매우 도덕적인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쿤을 인식론상의 혁명자라는 상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것이 내게 과학은 지나치게 거만했으며, 모든 것을 아는 척 했지만 나에게는 문턱이 높아서 도저히 내가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의 이야기는 과학자의 세계를 종교집단과 유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정상과학에서 쌓이는 오류들이 결국은 혁명적 변환을 통해 교체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 왔음을 고백해야 겠다.

 

그에 반면, 포퍼의 경우에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으로 기억된다. 개인으로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공부를위해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책을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유일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포퍼의 맑스 비판은 과도했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N개의 맑스가 있는데 굳이 소비에트 맑시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리고나서 이런 생각들은 고정관념이 되어서 오랬동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이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놀라운 책을 만날때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것 말고는 없겠다. 개인적으로 쿤이나 포퍼, 그리고 마흐 등의 과학철학자에 대한 이름이 낯설다면, 뒷부분을 읽어도 괜잖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관념에 책임지는 법'이라는 장에서부터는 과학철학 논쟁과는 별개로 읽을 수 있을 정도다.

 

90년대 후반을 달구었던, '안티조선' 운동과 지식인 문제가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렸다. 요즘 총선철을 맞이하여 폴리페서 등과 같은 신조어가 난립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지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와 이런 문제를 스티브 풀러라는 매개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다.



2. 건더기들

 

 

"오늘날 비판의 시선이 하이데거와 같이 세계사적인 패배자들과 관련된 지식인에게 단호히 쏠려 있다는 것은 어쨌든 놀라운 일이다. 아롱과 같은 비판자들은 세상에는 어떤 완전한 선도, 결백한 행위자도 없으며 가장 윤리적인 행동 방침조차 나름의 대가와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현실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이후에 '더러운 손의 이론'이라 불린다."(166)

 

"우리는 공리주의 도덕 철학자들이 소극적 책임, 즉 우리가 하지 ㅇ낳은 것에 대한 책임의 근거로 여긴 후자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특정한 방식의 행동이 다수를 이롭게 하고 소수에게만 피해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것은 나쁜 행동을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비린다. 이런 정신에서 사르트르는, 고의로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안전한 위치에 있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1871년 파리코뮌의 진압을 막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167)

 

"발생론적 오류는 어떤 관념의 타당성을 평가하는데, 그 기원을 고려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미묘한 기능을 하는데, 즉 입증 책임을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의 유대인 혈통이 자동적으로 상대성이론의 평가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178)

 

"로티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와 시간'이 너무나 심오하여 그 저자가, 특히 일단 나치가 하이데거를 합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을 때, 최소한 그들을 막으려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초래한 결과의 비열함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필생의 계획의 고귀함이, 그의 소극적 책임에 대한 대실태의 변명이 된다는 로티의 생각은 옳은가?"(181)

 

"나는 (1968 학생운동 동안) 프린스턴 대학 학부생들의 세미나에 초청된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나는 계속 이 말만을 되풀이했습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제자 중의 한 사람이 ... 모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견지에서, 이 책이 매우 보수적임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학문 분야 중 가장 엄격하고, 어떤 환경에서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 어떻게 가장 새롭고 창조적일 수 있는지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입니다."'구조 이후의 길'에 재수록된 쿤의 마지막 공식인터뷰(1995)

 

 

"더구나 쿤은 순수한 연구의 규범들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동시대 과학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연구를 그러한 목적으롯 ㅏ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적절한 실례는 쿤의 과학이론에서 비판적인 이론을 전개하는데 가장 체계적으로 시도한 라베츠를 틀 수 있는데, 그는 옥스퍼드 대학출판부에서 1971년 발행된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라베츠는 1970년대 영국 사회의 최전선에서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 싸운 미국 출신의 학자로,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에서 출발해 30년 동안 쿤과 서신 왕래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쿤은 라베츠의 정치적 관심과 활동에 불편해하기 시작했고,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쿤에게 조언과 추천의 편지들을 요청해왔다. ... 그러나 걱정을 표시한 지 5년 후 쿤은 라베츠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그가 정치학에서 장학금을 포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과학사 및 과학사회학 교수로 임명하려는 펜실베니아 대학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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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투표한다

재미있는 기사입니다. 영화잡지 <프리미어>에 실렸던 것이라네요..^^

글씨가 깨지는데, 밑의 그림을 한 번 클릭하면 제대로된 그림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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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난데즈씨 어디 계세요?

이 글은 1달전에 썼던 글과 연관이 있다.(클릭)

 

짧막한 글의 주고받음이었지만, 결국 확실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요즘은 '한반도 대운하' 반대를 주장하니 지지한다는 말들이 들린다. 에휴~~

 

좀 신랄하게 들리겠지만, 창조한국당을 지지하는 멘탈리티와 노무현을 지지했던 멘탈리티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대운하반대하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으었으나, 너무 빨간 색이어서 가까이하기 어려웠는데 그나마 창조한국당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니깐 부담없다. 이런 것 아닐까?

 

이는 연예계에서 흔히 존재하는 '팬'적 광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특정인을 좋아할땐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다가, 아니면 단점은 작게보이고 장점이 크게보이다가, 애정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광신적 태도 말이다.

 

내가 이렇게 까칠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헤르난데즈씨의 영입에 침을 튀어가며 칭찬했던 이들이 결국 7번에 머물고 만 비례순번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대운하 반대로 몰려가고 있다. 허허 참.

 

마치, 조중동 적당히 때려주면서 한미FTA 추진하던 노무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감성적인 만족감은 얻되, 실속은 없는 정치적 게임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묻는다.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것으로 치면, 한나라당을 제외하고 다 포함된다. 진정성으로 보자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도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앞선다고 본다. (참고로 작년 대선때 경부운하 반대에 대해 최대로 언급한 곳은 민주노동당이었다. 모두 경제살리기로 뛰어 다닐때 였다)

 

그런데도 창조한국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의 합리적 이성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들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노무현과 문국현이 그렇게 다른가? 난 차이점보다는 핵심적인 공통점을 더욱 많이 본다.

 

마지막으로 묻자. 헤르난데즈씨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그 때 신문을 장식했던 사진의 잉크도 아직 증발되지 않았다. 박근혜 사당에 불과한 '친박연대'와 무엇이 다른가? 지지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일성이 더 크지 않나?

 

참 어려운 사실이다.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학교 다닐때 운동좀 했다고 하는 인간들이 창조한국당에 버글댄다는 사실이다. 그럼 운동경력이라도 말하지 말던가, 아니면 선배라는 이유로 학교나 들쑤시고 다니지 말던가. 거 참. 운동은 몸으로만 하면 이런 부작용이 생긴다니깐.(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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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그저 색깔일뿐인가

* 민중언론 참세상[“‘작가주의 초록’과 단절..연대?통합 적극 고려”] 에 관련된 글.

 

 

환경주의나 환경운동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환경운동도 환경주의 운동도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내가 지지하는 진보신당은 녹색후보를 내놓지 못했다고 핀잔을 듣고, <참세상>에서는 초록정치연대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다.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상종가를 치고 있는 희귀한 상징재라고나 할까.

위의 기사를 보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초록'이나 '녹색' 영역에 대해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다음은 초록의 가치가 과연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를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앞의 것은 운동권내에서 초록이나 녹색이 지니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문제제기고 뒤의 것은 초록의 정치화와 관계된다.

 

아주 짧은 생각이지만, 위의 두가지 질문을 가지고 인터뷰를 차분차분 뜯어보려 한다. (605)



우선, 시작부터 보자. 댓글로 말이 많은 기자답게 질문도 상당히 정치적이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한국사회당과의 초록정치위와 진보신당과의 초록네트워크는 위상에 어떤 차이가 있나. 초록정치연대는 진보신당보다 한국사회당에 더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질문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기자는 사람아닌가? 그런데 이건 유도질문 아닌가? 어쨋든 이에 대해 답을 하면서,

한국사회당은 쉽게 말해 소수자고 약자다. 진보정치 진영 내에서 민주노동당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들은 비주류로서 설움을 많이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보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모색하고 성찰할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본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아니 언제부터 소수자나 약자의 개념이 상대적이고 미시적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나? 우리집안에선 나혼자 남자니까 난 소수자고, 사무실 남자들 중에선 힘이 가장 약하니깐 난 약자인가? 

아니 정치적으로 볼 때에도, 그럼 친박연대는 소수자이고 약자인가? 이것 너무 우스운 코미디 논법아닌가? 그냥 정책면에서 건강하고 함께 할 만하다고 말하면 되지, 약자여서 소수자여서 생각이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도인' 흉내로 보인다.

어쨌든 지나가자. 아직 본론이 아니다. 초록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는 부분은 다음부분이다.

초록은 노자대립이 우리 사회 핵심적인 모순이라 보지 않는다. 노자대립도 우리가 안고 있는 주요 모순 중 하나지만 환경 위협도 우리가 안고 있는 전선 중 하나다.

노자대립을 제일 모순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전혀 함께 할 수 없는 세력과 연대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진보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국민의 메시지는 노자 문제로 용해시킬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런가? 나도 노자갈등이 모든 문제를 덮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답변자는 너무 나이브하다는 인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자갈등 혹은 계급갈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내재적이다. 이는 모든 문제가 노자갈등을 해결할 때 해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제자체가 그렇게 직조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는 초록의 문제라 해도 다르지 않다. 개발이데올로기는 바로 자본주의적 모순에 기대고 있지 않나? 이도 아니라면, 우린 채렵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이런 초록의 정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금, 한국지형에서의 초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초록이 지나치게 현실정치에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위원장 직위를 떠나 초록정치연대의 한 활동가로서 전 찬성하지 않는다. 진보의 재구성을 요구받는 것은 진보가 우리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현실적인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초록 정치에 대한 재모색이 필요하다. 반성 중 한 가지는 기존 초록이 ‘작가주의 초록’이었다는 데 있다. 초록에게 이론적 정합성은 있지만 국민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모색을 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 귀 닫고 우리 내부만 바라보고 정치를 할 수 없다. 진보 내 다양한 정치 세력과 부딪치고 토론하며 적어도 2년 내, 2010년 안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기회로서 ‘진보의 재구성’이 떠오른 것인데 우리 정치만 한다는 것은 한가한 발상이다. 주요섭 전 집행위원은 초록이 기존 진보와 차별화된 ‘등대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반대한다.

 

 흥미로운 것은 인터뷰 내내, 환경운동연합이든 녹색연합이든 시민사회영역을 넘어 사회적인 녹색의제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력에 대한 평가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초록의 가치가 중요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해결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최면식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그럼, 묻자.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인촌 장관은 10년도 넘게 환경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초록의 가치와 당신들의 가치는 다른가?

 

이미 대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환경재단의 문제에 대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회에서 초록의 의제만 퍼뜨릴 수 있으면 도구와 과정은 어찌해도 상관이 없는가?

 

참 답답하다. 구의원까지 해봤다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보고싶은 것만 보는 정치비젼을 가질 수 있는가?

 

난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모든 정책에 녹색이 녹아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빨간색과 녹색은 따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공동체는 중요하지만, 그것을 옭죄고 있는 국가의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정치적 무능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초록정치연대는 제갈길을 갔으면 한다. 참, '영성'에 기대는 '그노시시즘'은 좀 버리면 안되나? 그러다 초록교단이 만들어질까 두렵다.

 

참, 구태여 구분하지 않았는데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

 

1, 초록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없다. - 맞다.

2. 초록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넓을 수 있나 - 그렇다

 

난 위의 답안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록정치연대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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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세상을 지키겠다

어제 종영된 쾌도 홍길동의 대사다.

 

사실 이 별볼일 없는 드라마를 꽤나 열심히 보았다.

 

각종의 패러디도 볼 만 했지만, 홍길동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바꿔나가는 능동적인 모습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때 동지였던 왕과 대결을 맞이한 홍길동은, 왕에게 말했다.

"넌 너가 왕인 세상을 지키기위해 싸우고 나는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세상은 어짜피 꿈이 아니냐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내가 원하는 세상이다. 너에겐 꿈일지도 나에겐 현실이다"

결국 죽게될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기억될 것"

 

결국, 홍자매의 각본이 훌룡한 것이겠지만, 드라마의 캐릭터들도 마음에 든다.

 

다들 뉴하트 볼 때 '난 길동이 팬이야'했다가 집단 왕따를 경험하고, 히히덕거리며 드라마를 볼 때 옆에 있던 아내가 "재밌냐"고 핀잔도 줬다. 그래도 난 한 두번을 제외하곤 본방을 사수했다. ^^

 

뭐랄까? 요즘 세상을 꿈꿀 건더기도 없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당장 당장의 하루살이가 버거운 마당에 꿈꿀 새가 어디있겠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잠이라도 자야 꿈을 꾸지!!"

 

그럼에도 내가 홍길동에게 열광한 것은,

 

절망하고 있는 나에게도 홍길동과 같은 만화적 상상력과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싸우는 사람은, 이길거라는 생각이 없으면 다치기만 한다.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일 매일 즐거운 생각, 두 주먹 불끈 쥐고,

 

"난 나와 우리의 세상을 위해 싸운다" 빠샤 빠샤  아오오오~~~(3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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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맞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늙으면 이래저래 괄시만 받을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늙었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의 이번 영화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상찬이 쏟아 졌다. 뭐, 굳이 이 영화에 대한 어떤 소개도 보지 않고 덜컥 봐버렸다면, 오로지 코엔 형제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런 저런 영화평들을 찾아보았다. 영화에 대한 주변지식은 영화를 보기전보다는 본 후에 더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화는 선입견 없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노쇠한 보안관이 지나치게 무력하게 나와 심란했고, 너무나 노련하고 완벽한 범죄자의 모습에 또 놀랐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모스'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사막에서 사냥을 하다가 돈 가방을 줒는다. 하지만, 그 가방엔 얽히고 설킨 주인'들'이 존재했던 것. 그 중 맹렬하게 모스를 쫒는 것은 안톤 시거. 바로 포스터 윗 부분의 눈깔 주인공 되겠다.

 

 그 와중에 연속된 살인을 추적하는 보안관이 있다. 토미 리 존스가 열연한 벨 아저씨.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모스는 죽어라 도망가지만 시거가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고, 그를 뒤쫒는 벨은 모스도 시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모스는 죽고, 벨은 코앞에서 시거를 놓치고 만다. 이게 끝이다.

 

 



많은 영화평에서도 지적했던 것이 보안관 벨의 무능력에 대한 부분이다. 그도 그럴것이 시거가 공기 압축통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르는데, 벨은 이렇게 묻는다, "총구는 있는데 총알이 없을 수도 있나?"

 

아 참, CSI 였으면 담방 알아봤을 텐데. 시대 배경으로 보건데 1980년대 초반 정도가 아닐까 한다. 분명 영화 중간에 년도에 대한 단서가 나왔고, 내가 순간적으로 계산한 결과로는 1980년대 초반이 맞는데 .... 근거를 대라면 모르겠다. 영화를 다시 보지 않고선.

 

많은 평론가들이 벨 보안관의 쓸쓸함에 눈이 갔다면, 난 모스에게 눈이 더 많이 갔다. 왜냐하면, 무능력한 퇴역 해병이 좀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에 짠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돈은 마약 판매에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에 누가 가져도 될 돈이었다. 그리고 초반엔 모스 아저씨가 너무나 잘 헤쳐나오신단 말이다.

 

그래서 속았다. 모스가 살아남을 줄 알았던 거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죽어버렸다. 풀장에 누워있는 여자와 노닥거리다, 화면이 바뀌고, 다시 돌아오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모스 아저씨. 에구구.

 

원작이 소설이고 <국경> 3부작의 하나라는데, 아무래도 멕시코 국경 지대가 배경인 듯하다.

 

그리고 3대에 걸쳐 보안관을 하는 벨 보안관이 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범죄자 시거도 있다. 벨과 시거는 한 한차례도 만나지 못한다. 물리적인 접촉뿐만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 만큼 시거에겐 벨이 안중에 없고, 벨에겐 시거가 '인식불가능한 대상'이다.

 

오로지 시거와 모스가 있을 뿐인데, 결국 절대 악인 시거가 승리한다. 왠지 인생살이 같다. 나쁜 운이 이기는 것과 닮았다는...

 

음...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말들이 있었는데, 쓰자니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하면 덧붙여야 겠다.(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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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실일까?

 

<프레시안>을 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래기사 참조)

먼저 든 생각은, '에이 사실일까?'다.  나도 참 순진한 사람이다. 이제 뭘 기대할게 있다고 이런다.

그래도 이런 문제는 이념하고도, 정권하고도, 정치하고도 상관없는 인간의 문제가 아닌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사실일까?

버럭 홍교수님이, 이명박이 너무 싫다보니까, 고도의 메타포로 가득한 우화를 쓰신 것이 아닐까?

음...

아침부터 정신이 없군.



 

여고생 강간범, 청소년위원회 공무원으로 복직

[홍성태의 '세상 읽기'] 엽기적인 대한민국
등록일자 : 2008년 03 월 26 일 (수) 10 : 12   
 

  어째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한가? 보수 언론이 이상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데 혈안이 되었기 때문인가? 보수 '찌질이'가 웃기지도 않는 댓글을 달아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인가? 보수 언론도, 보수 찌질이도 다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 자체도 큰 문제일 것이다. 새우깡을 먹으려고 봉지에 손을 넣었더니 놀랍게도 '생쥐 머리'가 잡히는 세상이 아닌가?
  
  아니, 더 큰 문제는 '생쥐 머리'가 아닐 것이다. 이 정부는 이미 1%부자가 지배하는 '고소영 S라인'(고대-소망교회-영남-서울시 라인) 정부, '강부자'(강남-땅부자) 정부라는 지적을 받았고, 여기서 나아가 심지어 전근대적 '형님 정권'이라는 비판마저 받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정부는 스스로 '실용 정부'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경운기보다 느린 운하를 강행함으로써 스스로 사상 최악의 '비실용 정부'로 전락하려 하고 있다. 경운기보다 느린 운하를 강행하면서 '실용' 운운하는 것은 그저 '사기'일 뿐이다. 경운기보다 느린 운하를 강행하면서 이 정부는 스스로 '사기정부'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운하에 반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400명이 넘는 교수들이 운하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재오 의원이 원한다고 해서 운하를 강행해서는 안 된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북한강 수계로 수원지를 옮기면 된다고 얘기하는 데 그건 경운기보다 느린 남한강 운하를 위해 북한강 수계를 대대적으로 수몰시키겠다는 것과 같다. 더욱이 북한강 수계에는 수몰시킬 곳조차 없다. 서울을 포함해서 수도권 2400만 명의 물 생활을 박살내지 않고자 한다면 운하는 절대 건설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왜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지사는 국민의 여론과 교수들의 전문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서두가 길어졌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미 잘잘못이 명확하게 드러난 운하문제가 아니다. 운하는 '생쥐깡'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운하에는 생쥐는 물론이고 수많은 생명체의 주검이 떠다닐 것이다. 운하는 강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운하를 건설하겠다며 엄청난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리석고 비실용적인 낭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정말 힘을 다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토건국가의 덫'에 갇혀서 재정의 탕진과 국토의 파괴라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인가?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웃지 못 할 일이 최근 전라북도에서 일어났다. 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실용적인 운하사업 따위는 즉각 중단하고 이런 일을 해결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용'을 내건 가장 비실용적인 정부로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형님 정권'이라는 비판도 사실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말 섬기기를 원한다면, 눈앞의 참상부터 해결하라! 다른 일이 아니다. 여고생을 상습 강간한 혐의로 해임되었던 전북교육청의 한 공무원이 소청심사라는 절차를 거쳐서 '정직 3개월'로 감형되고 복직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지난 월요일 아침에 알았다. 오랜만에 아침을 먹으며 TV를 봤다. 창 밖으로 노란 산수유가 활짝 핀 모습을 보며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즐겁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침을 먹는다'는 우리말의 이 표현 자체가 얼마나 대담하고 아름다운지.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TV에서 엄청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터지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홍성태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은 운하 사업 같은 쓸데 없는 일이 힘을 허비하지 말고 진짜 해야 할 일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는다. ⓒ연합뉴스

  한 공무원이 작년 8월에 인터넷 채팅을 통해 한 여고생을 알게 되었다. 공무원은 여고생을 만나자고 꼬였다. 그리고 이 여고생에게 '원조교제'(정확히는 '미성년 매춘')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공무원은 여고생에게 자기와 만난 사실을 부모와 학교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해서 상습 강간(경찰의 조서 내용)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사실이 드러나서 해임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미성년자 상습 강간법인 그는 소청심사라는 절차를 거쳐 복직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놀랍게도 '청소년 수련원'에서 다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성년자 상습 강간범'을 복직시킨 것도 모자라 '청소년 수련원'이라니. '특기'를 살리라는 것인가?
  
  이에 관한 전북교육청 공무원의 해명은 더욱 황당했다. 그 자는 이런저런 말로 가해자를 적극 옹호했다. 그 자의 말은 피해자가 사실은 가해자이며, 가해자가 사실은 피해자라는 식으로 들리기도 했다. 즐겁게 먹던 밥이 가슴에 콱 막혔다. 국을 훌훌 마셔 급히 삼켰지만, 하마터면 앞으로 내쏟을 뻔했다. 저런 것들이 교육청의 공무원이라니. 너무나 황당하고, 또 황당했다. 노란 산수유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강간이 중범죄이지만 미성년자 강간은 그 중에서도 중범죄이다. 법이 미비해서 이런 자를 엄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즉각 법을 고쳐야 할 것이다. 6월의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것은 망국적 운하의 건설을 강행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강간범들을 즐겁게 하고 있는 허술한 강간 관련 법이다.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욕을 먹고 벌을 받게 마련이다. 여고생 상습 강간으로 해임된 교육청 공무원이 3개월 만에 복직되어 '청소년 수련원'에서 근무하다니, 도대체 이게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운하건설과 같은 완전히 잘못된 사업에 쏟을 정성을, '형님 정권'과 같은 완전히 잘못된 정치에 쏟을 정성을, 제발 이렇게 끔찍한 문제를 바로잡는 데 기울여라. 미성년자 상습 강간범이라면 공무원에서 파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 그 일거수일투족을 영구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이 정부는 엉뚱한 데 힘을 허비하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날이 갈수록 국민의 불안은 커지고, 오로지 돈과 줄을 찾는 경쟁이 강화되고 있다. 아무리 '2MB정부'라고는 하지만, 제발 할 일을 제대로 해라.
  
  이 끔찍한 사건을 TV에서 보고는 뉴스에서 크게 다뤄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어느 뉴스에서도 전혀 다루질 않았다. TV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뉴스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이 사회는 엽기적 사회가 되었는가? 물론 운하문제나 '형님 정권' 문제가 이 뉴스보다 더 큰 뉴스일 것이다. 그러나 여고생을 상습 강간한 교육청 공무원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운하 문제나 '형님 정권'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들 이 사회가 살만한 사회이겠는가?

홍성태/상지대 교수ㆍ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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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왜 이렇게 쌀쌀한거야!

유난히 날이 쌀쌀하네.

지난 주에 봄이 왔다고 겨울옷을 처박아넣었는데, 아침 출근 전에 그 곳에 눈이 계속 가더라구.

"저걸 꺼내 입어? 그래도 너무 두꺼운데 민망하잖아?" 갈등하다 결국 '그냥 가자'면서 나왔는데, 그 생각은 집앞을 나서면서 꺼내문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후회가 되더라구.

지금도 그 때 다시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올걸하곤 해. 참 사람이란 부질없는 생각에 끝간데 없어.

요즘 <진보넷>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면, 솔직히 무섭더라.  아직도 계속되는 싸움들, 그리고 각각의 치열함들. 그에 반면 나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말년 병장 나부랭이처럼 '에헤라'하는 삶이 계속되고 있거든.

물론, 아이가 둘에 당장 먹고 살길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족안에서는 아빠이지만 여전히 난 나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는 걸 뭐.

엇그제, 일요일 날 아내에게 '아빠와 남편 말고, 그 전에 나는 어디로 갔을까?'라고 물어봤더니, '덜 바쁘냐'고 갈구더군. 하하하^^ 괜한 말을 해서 마님의 속을 긁어 버린 꼴이 되었지 뭐야.

어떤 시인이 그러더라. 오해가 가장 완벽한 이해하고. 남이 내게 하는 말을 '어, 그건 오해에요'라고 반응하게 될 때 사실은 '그건 내가 숨기고 싶은 부분이에요'라고 말하는 거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결국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오해를 받기 위해가 아닐까.

남들보다 낫다는 말,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말들을 기대하는 내가 사실은  남들보다 좀더 낫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고, 변하고 싶은데도 계속 멈춰서 있는 나에 대한  덧칠이 아닐까 하는 거지.

해야 할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음에도 여전히 제자리를 맴맴 돌고 있네.
이제 30대 중반인데, 돌아서려면 지금이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는데, 그냥 길 한가운데 서서 발치의 돌맹이만 건들고 있는 꼬락서니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뭘 해야 할까.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걸까. 내 등을 떠미는 생활이란 것에 이렇게 휩쓸려가도 괜잖은 걸까. 정말 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걸까.

날씨가 잔뜩 흐린 날,

멀리 낙동강 근처에서 경부운하반대 순례를 하고 있는 이가 봄비 소식이 담긴 메일을 보내오고,

이젠 지역활동가라는 명함이 어울리는  형이, '잘 지내냐'고 전화오고,

군대에서 친해진 8살 밑 늙다리 대학생 '선임병'이 인턴으로 취직했다고 알려오고...

이렇게 일상은 계속되는데. 난, 여기서 뭐하지?

술 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술자리'를 찾기도 어려워진 요즘.. '뭐 다들 바쁘니' 하더라도, 난 도대체 왜 이 모양이냔 말이다.

아! 가판의 오뎅이 너무나 먹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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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정태영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정태영 선생이 돌아가셨다.

 

나는 그 분을 민주노동당 당사에서 뵌 적이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이 막 나왔을 때라고 기억한다.

 

그 분은 그 책들을 손에 들고 정책연구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써가며 책을 주고 계셨다.

 

난 정책연구원도 아닌 주제라서, 옆에서 어색하게 '저 아저씬 누구지?'라며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조봉암과 진보당>을 꺼내들게 되었다.

 

그리곤 기억에 묻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선생의 부고기사가 눈에 띠었다.

 

아~ 그 때 그분이 돌아가셨구나.

 

난 그 책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소위 개량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방식에 대해,

 

그리고 그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 대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아주 쉽게 '개량'이라고 붙인 이름이 부끄럽다. 개량이 있으려면, 진본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생각했던 진본은 무엇이었을까? 실체가 있는 것이었을까?

 

결국,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내안의 진본에 기대어 '개량'이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니.

 

허망하고 허망했다.

 

정태영 선생은 작년 민주노동당의 당내 갈등에 대해 많은 상처를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마음이 아프다. 살아있는자에겐 지속되는 삶에 의해 '새로움'이 보일 테지만, 삶이 멈춰진 선생의 기억속엔 지금 모습만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당장 빈소는 찾아뵙지 못하지만, 나중에 아무도 찾는 이 없을 때 소수한병을 사들고 인사를 가야겠다.

 

날씨만큼, 기분도 쓸쓸하다.

 

 

'진보당 사건'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박사 별세
[弔辭] 진보 정당 실천 위해 일생 바친 큰 스승
등록일자 : 2008년 03 월 23 일 (일) 14 : 07   
 

  1956년 진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인 정태영(78) 박사가 지난 2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빈소 : 강남성모병원, 발인 3월 24일).
  
  정 박사는 진보당 사건 때 "북한에서 교육 받은 이론가"로 몰려 조봉암과 나란히 재판을 받았으나 3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는 4·19 혁명 직후 혁신계에 참여하는 등 그 후에도 진보 정당을 향한 정치적 실천을 계속했다.
  
  말년에는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를 연구·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그 노력은 <조봉암과 진보당 :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후마니타스 펴냄)과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후마니타스 펴냄)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갈무리됐다. <프레시안>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조사를 싣는다. <편집자>

  
  진보당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정태영 박사. ⓒ경향신문

  정태영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청년기를 살았다.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지만,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당시의 현실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어 스물여섯 되는 해 조봉암을 만나 진보당에 가입했다. <동양통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진보당 안에서는 '동화'라는 가명으로 청년 조직을 확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봉암 사건 때 "북한에서 교육받은 당 이론가"로 몰려 조봉암과 나란히 재판을 받았다. 3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아 감옥을 나오면서 옥중의 조봉암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때 조봉암은 자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은 진보당을 재건하는 것이라 당부했다. 그 말을 깊이 간직하면서 선생은 평생 진보정당에 대한 신조를 굽히지 않고 살았다. 4.19 직후 혁신계에 참여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3선개헌 반대특위에 참여했으며 신민당 노농국장을 지냈다.
  
  이처럼 청ㆍ장년기를 '정치적 실천'의 단심으로 보낸 뒤, 60세가 다 되어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에 입학해 때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석사를 마친 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저술활동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매진해온 선생은, 요즘 진보파들이 과거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주 토로하곤 했다.
  
  지병인 간경화와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2007년 겨울 쓰러지기 전까지 활발한 사회 참여와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자문위원 혹은 고문의 이름으로 여러 모임을 정신적으로,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 사회운동 단체들의 모임 뿐 아니라 학술행사에도 늘 참여했고, 민주노동당이 행사를 할 때마다 그는 청중석 한 자리에 꼭 앉아 있곤 했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민주노동당 행사에 가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포함한 제1세대 진보파가 50년 전에 겪었던 오류와 실패를 민주노동당이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2006년 7월 27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선생은 50년대 진보당과 4·19 혁명 직후 혁신 세력이 좌절한 원인은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조직 내 건전한 작풍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 때문에 분열하고,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면서 민주노동당이 성공하려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2006년 8월 2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죽산 조봉암 47주기 제사에 참석한 선생은 옆에 있던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민주노동당은 진보당의 실패에서 배우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내부 파벌 다툼에 치중하고 투쟁중심 노선만 고집해서는 국민들에게 외면 받다가 수십년 내에 그 소중한 진보정당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문제를 제기했지만 민주노동당 안에서 자신의 문제제기가 수용되지 않는 것에 선생은 계속해서 실망했다. 2007년 9월 선생의 마지막 저작<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을 내면서 "이제는 젊은 사람들을 닦달하는 일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도 말했다. 과거 1세대 진보정당 운동과 민주노동당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명분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반목을 만들어낸 작풍의 문제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모든 문제를 분단 때문으로 보는 분단환원주의와 통일지상주의의 폐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늘 정치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운동을 앞세워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치의 영역에서 보수 세력의 영향력은 공고화되었고, 진보 세력과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정당의 사회적 기반 역시 소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다가 진보 세력은 시민사회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뿐 정치체제의 운영은 보수 양당에 의해 주도되는 한국 정치 고유의 패턴이 고착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크다." (13~14쪽)
  
  정태영 선생은 자서전을 쓰고 싶어 했다. 스스로의 나이를 생각할 때 현실 개입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국 현대사를 다시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겨울에 들어서면서 몸은 빠르게 쇠약해졌다. 2008년 봄이 되어 날씨가 좋아지면 몸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국 겨울을 다 이기지 못하셨다. 지금 한국 사회 진보정치 운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선생의 마지막 삶이 실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선생 특유의 파안대소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지금, 명복을 기원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박상훈/후마니타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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