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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책에 관한 생각들

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2/01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기... 흥미만점!!(1)
    평발
  2. 2008/06/11
    [책] 우화라기엔 슬픈 희극
    평발
  3. 2008/05/21
    [책]그들의 시나리오를 보다
    평발
  4. 2008/04/28
    [책]조선일보의 난독증(2)
    평발
  5. 2008/04/08
    [책]변하니까 사람이다
    평발
  6. 2008/04/01
    [책]아나키즘, 그게 뭐!!(2)
    평발
  7. 2008/04/01
    [책]쿤/포퍼 논쟁
    평발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기... 흥미만점!!

뽀사마님의 [랑시에르 한국 강연 일정과 공식 사이트] 에 관련된 글.

깜짝 놀랐다. 랑시에르가 우리나라에 오다니...
개인적으론 아감벤이 먼저 올 줄 알았다. 아무래도 그 쪽이 포스트-들뢰즈(네그리)에 가깝다고 봤기 때문인데..

어쨌든 이번 방한이 출판사들의 공동 노력에 의해 성사되었다니, 이 역시 의미가 새삼스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역' 확신작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번역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사랑에선 제안조차 못받았던 것일까?

암튼... 랑시에르라.....

그나 저나, 개인적으론 알랭 바디우의 '메타폴리틱'이 번역되길 바라는데... 이종영 선생이 많이 바쁘신가?

이번 주 목요일 일정은 비워야 겠다. ^^ 흠흠

[16시 추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국역과 관련된 논란은 점입가경이다.

개인적으론 이 과정에 상당히 흥미롭기때문에 이를 포스팅한다.

- 번역자(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어떤> 글.
- 알리딘 로쟈님의 길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
-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서문 번역글
- 양창렬 씨(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옮긴이)의 '자크 랑시에르와 감성의 정치'

대략적인 결론은 이렇다.

번역은 책의 글자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책의 문맥을 옮기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방디유 사건에 대한 평가로 해석되지 않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상당히 '비'민주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바로 이점이 번역자의 오해가 생긴 부분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아직도 오역 운운의 풍토가 너무 아쉽다. 그보다 문제는 결국, 판권의 문제로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을 하고자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

실제로 번역을 시작도 못해놓고 판권을 사놓기만 하는 양심불량 출판사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런 출판사들은 '무관심'보다 더 큰 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생각이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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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화라기엔 슬픈 희극

* 장르문화 잡지 <판타스틱> 6월호에 실린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의 첫 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에 대한 메모. 

 

 

렘의 단편은, 이미 저자 자신이 소개한 바대로, 반전소설이다. 그런데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반전은 이야기의 말미에 보이는 희귀한 형태의 결말로 나타난 '얘기치 못한 전환'이라는 의미의 반전과 공명한다. 그런데 하나도 유쾌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에겐 콘센트를 달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명의 창조주는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이들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사회에서 창조주의 능력은 뛰어난 알고리즘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예측력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기계는 알고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렘은 각각의 개체가 공동의 의식으로 고양될 수록 '공존'으로 이끌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식의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움에 대한 것'과 같이 뭐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문제에 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확장에 비추어 보면 조그마한 영토를 둘러싼 싸움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동서 냉정의 한가운데서 활동을 했던 렘의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간에 또렸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결말에 대해 '웃을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렘이 '로봇'들의 세계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인간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도피로 보인다. 우화라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이 같은 생명체를 대상으로 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단편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렘의 독백이자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이, 콘센트로 연결되듯이 조금만 서로를 더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모두 함께 같은 꿈을 잠깐이나마 꿀 수 있다면 전쟁따위는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는 렘 스스로의 희망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도자만 빼곤 다 현명한 로봇세상이 인간세상과 비슷하여 웃음이 나지만, 렘의 희망은 슬플 뿐이다. 인간인 우리는 과연 공존의 길로 가고 있는가?

 

이번에 출간될 단편집의 내용들이 이와 비슷하다면 꽤나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끝)

작가소개- 스타니스와프 렘: 1921년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르보프에서 태어나, 1946년 크라코우의 야기에보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에는 이론생물학을 필두로 사이버네틱스, 수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으며, 시와 소설, 희곡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1946년에 <화성에서 온 사나이>로 데뷔했다. 1955년에 발표한 <마젤란 성운>은 미래의 우주탐사를 사회주의적인 시점에서 묘사한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으로, 폴란드 문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957년에는 우주 방랑자 욘 티키의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린 <우주여행기>를 발표, 문명 비판가이자 신랄한 풍자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후 <에덴>(1959), <솔라리스>(1961), <무적호>(1964) 등 '우주 3부작'을 발표해, 동구권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SF작가로서 부동의 명성을 쌓았다.

 

 

사이버리아드 - 6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오멜라스(웅진)

 

솔라리스 - 10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안종설 옮김/집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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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들의 시나리오를 보다

1. 이 책은 뒤늦게 찾아왔다.

 

 

비판의 전제는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라는 명칭은, 내내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공공부문의 민영화, 국제투기금융의 착취, 국가를 뛰어넘는 다국적 기업의 전횡, 그리고 문화와 예술의 산업 종속...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고 말하기엔 헐거워 보였다.

 

 

솔직히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공병호 등등을 '멍청한 ..'라고 욕해도 그들은 그들 자체의 합리성을 꾸준히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수주의자들은 감정의 열정보다는 이성의 냉정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이 각종의 경제서들이다. 교양으로 '멘큐'를 왔다 갔다가, 경제사를 들여다 보고...

 

 

그러다 눈에 띄인 게 바로 이 책이다. 수전 조지는 TNI라는 연구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던 이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칭찬은 벌써 듣고는 있었으나, 저자의 내력을 짐작해버린 나는 '신자유주의 비판서'겠구나며 치워 두었다.

 

 

2. 이 책은 '그들의 시나리오'이다

 

 

맞다. 신자유주의 비판서다. 하지만 방법은 차이가 난다. 이 책의 묘미는 책의 전략에 있다.

 

 

세계의 경제를 좌지 우지 하는 세력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계로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지만, 이 체제가 과연 지속될 것인가라는 점에서 의심스럽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특별연구팀을 구성하여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를 점검하고 오랫동안 이 체제를 유지시킬 방안들을 마련하도록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루가노 리포트'다.

 

 

물론 이런 전제는 가상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시나리오대로 세계 경제가 움직이고, 움직일 것이라는 전망엔 부정하기 힘들다.

 

루가노 리포트 - 10점
수전 조지 지음, 이대훈 옮김/당대

 

 

 

 

* 클릭하면, <알리딘>으로 옮겨감

 

3. 이 책은 '현실주의'를 말하고 있다.

 

그들의 시나리오는 한번 정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전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전략들이 어떻게 수미일관한 합리성으로 나타나는지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정부의 보고서 대부분은 보고서로서의 합리적 구조를 가지고 짜여진다. 문제는 전제와 결론이 이미 마련된 상태에서 보고서가 작성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용역 지시서'가 그렇다. 보고서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결론에 대한 근거를 찾는 과정이다.

 

루가노 리포트의 전제는 단순명료하다. 시장이 가장 효율적이다. 자본주의가 가장 많은 부를 가져다 준다. 이 두 가지다. 그리고 결론은 이렇다. 자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국적인 경제권력-세계은행, IMF, MAI-을 만들어야 하며, 국가의 기능은 자국 노동력의 통제로 국한되어야 한다.

 

사실 정치적으로 좌파에 가까운 저자가 이 책을 쓰게된 동기는 꽤나 명확하다.

 

"지금의 좌파로는 이런 주류의 흐름과 제대로된 이데올로기 투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도 빈곤을 문제시한다. 그들도 세계의 난치병과 전염병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자본주의 체제를 흔드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경로를 통해 빈곤과 질병이 좀 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파들을 상대로,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로 대응하는 것은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그리고 그 만큼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발언이 어디 있을까.

 

4. 이 책의 말들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아동노동과 하루 12시간이라는 장시간 노동, 비참할 정도로 낮은 임금, 위험한 작업환경, 노동조합 금지가 일반화되어 있다면, 이를 받아들이겠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 나라의 시민들이 이 모든 관행이 '합법화'되어 있는 나라의 불행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경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는 '자유무역 반대론자', '보호주의자'라는 저주의 꼬리표가 붙게 될 것이다." (248)

 

"만약 보다 공평한 소득분배, 기아근절 등등이 실질적인 목표라면, 누구나 무엇이 수행'되어야 하고'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과제들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네들의 정책이 잘못되었으니 고치라고 설득할 것이 아니라, 힘을 기르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것이 실행'되어야 하고' 실행'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어리석게 되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 간단한 물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현재 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257)

 

"미국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연합세력이 대통령의 '무수정 일괄승인' 권한(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하여 의회의 수정을 거치지 않고 법률로서 발효시키는 권한)을 무효화시켰다. 언젠가 한 친구는 프랑스의 농민연합단체 두 개가 비교적 사소한 문제를 놓고 티격대격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우파농민인들, 좌파농민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우파든 좌파든 농민은 살아남지 못할 텐데!" 그렇다, 이 두단체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힘을 모으는 게 훨씬 바람직했겠지만, 이들 단체나 혹은 역사를 자랑하는 케케묵은 노선들에 따라 사분오열되곤 하는 집단들이 자연스럽게 힘을 규합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256)

 

"사회를 지배하게 될 기본 원칙들을 선택하기에 앞서, 그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나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과 기회를 전혀 인식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보도록 하자. 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고 그리하여 가장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받게 되는" 세계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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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조선일보의 난독증

 

1. 기사 하나

 

"부시 실패 재연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경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부시 행정부 6년의 완벽한 재방송이다. 북한에 대한 가정과 레토릭(수사법)이 같다. 그러나 부시 초기 대북정책의 결과는 무엇인가? 북한의 핵 능력 강화다. 이명박 정부는 그 실패를 답습하고 있다."
  
  <실패한 외교>를 공동 번역한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25일 이 책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부시 행정부 초기를 조명한 이 책을 통해 당시 미국의 대북정책이 왜 실패했는지를 깨닫고 최대한 빨리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잘못된 가정과 레토릭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르면 북한은 머리를 숙이고 나올 것이라는 가정, 그리고 '악행(惡行)에는 보상 없다', '시간은 우리편이다',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 등과 같은 레토릭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2. 기사 둘

 

프리처드 소장의 《실패한 외교》는 부시 미 행정부 8년간의 대북 정책에 관한 기록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중심으로 클린턴 행정부의 북핵 협상을 다룬 책은 많이 있지만, 부시 행정부의 8년을 다룬 것은 이 책이 거의 효시에 해당한다.

국내에선
김대중, 노무현 2대에 걸친 진보 좌파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이 북핵을 해결하지 못했고, 한미 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했다는 진단이 내려져 있다. '실패한 외교'는 태평양 건너편 국내 시각에서 부시 행정부 8년의 북핵외교 역시 북한이 핵무기를 최대 10개까지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했고, 핵 실험을 했고, 미사일 프로그램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전통적인 우방인 한국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참담한 실패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지난 두 정권의 대북 정책은 북한 김정일 정권에 무조건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유연 경직성'때문에 실패했다. 프리처드는 부시 미 정부는 정반대로 김정일 정권에 무조건 강경 대응해야 한다는 '강경 경직성'에 빠져 예고된 실패의 코스를 밟았다고 설명한다.

 

3. 누가 잘 못 읽고 있는가?

 

같은 책에 대한 서평치고는 평가가 상이하다. 하지만 참고로 해야 할 것은, 위의 글은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 중 역자 인터뷰의 내용이라는 점이다. <프레시안> 서평보기

 

뒤의 것은 <조선일보>의 토요일자 북섹션에 나왔던 서평의 일부분이다. 이 기사의 제목은 "이 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책의 내용을 보자면, 부시 행정부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대북정책이 동맹국인 한국의 신뢰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막고자 했던 북한의 핵개발 프로세스도 저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결국 부시행정부의 '실패한 외교'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뒤의 <조선일보>가 국내 좌파정권 운운한 것은 '창조적 서평'을 위한 왜곡에 가깝다. (아직까지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라는 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는 나로서는, 버려져있던 <조선일보>에서 '북섹션'만 꺼내든 실책이 더 후회가 된다.)

실패한 외교 - 6점
찰스 프리처드 지음, 김연철.서보혁 옮김/사계절출판사

 

실제로 해당 책에서는 남한의 대북정책에 대한 논평은 찾아보기 어렵다. 책을 쓴 목적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도 <조선일보>가 끌고가고자 하는 방향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니 엉뚱한 제목에 엉뚱한 도입부로 논점을 흐려버리는 것이다.

 

4. <조선일보> 독자들은 어찌하나?

 

문제는 <조선일보>의 얼치기 기자나 데스크가 아니라, 꼴에 신문이라고 '신주단지' 모시듯이 <조선일보>를 섬기는 독자들이 문제다. 이 독자들이 <실패한 외교>라는 책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누구 책임인가?

 

거참. 이럴때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메타비평'이 필요하다. 예전에 '미디어 오늘'이 이런 기사를 자주썼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거의 업종지로 전환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도, 남한 좌파세력 척결을 기사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는 <조선일보> 기자들! 바보흉내내다간 정말로 바보된다.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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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변하니까 사람이다

테러리스트의 파라솔 - 10점
후지와라 이오리/동방미디어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중에, '일본 전공투 세대의 드라마'식이 있는데 그건 헛소리에 가깝다.

 

물론 등장인물에게 60년대의 점거투쟁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이 책은 얽혀있는 세명의 인생이야기에 가깝다.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일본 추리물 중 하나다.

 

이 책의 도입은 간단하다.

 

일본 신주쿠에 위치한 중앙공원에서 갑자기 폭탄이 터진다. 그 과정에서 과거 전공투 운동의 일원이었던 주인공이 연루된다. 당연히 경찰은 전공투의 운동경력과 폭탄사고를 직렬로 이해한다. (이런 이해방식은 어느 경찰이나 똑같나 보군... 이라고 잠시 투정)

 

문제는 이 사건이 지난 세월에 묻혀져 있던 3친구간의 관계를 매개로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여자 1명에 남자 2이라는 전형적인 삼각관계 구도는 그렇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의 정신상태다. 불의의 자동차 폭발사고 이후에 유랑자로 살아가는데 오지랖도 넓고 지나치게 이해심도 많다. 그의 입버릇대로 '좀 처럼 변하지 않는 성격탓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에게 구시대사람으로 불린다. 사람의 액면만을 따지는 사람이니 그렇게 보일 수 밖에. 거기에 71년의 사건이 90년대에 일어난 사건과 연계되고, 게다가 사람들도 꼬이기 시작하고 갖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역시 추리물의 미덕은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추리물의 속성상 이 이상 이야길 한다면, 스포일러에 가깝다. 그래도 나중에 내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구절은 적어놔야 겠다.



  
"맞았어. 바텐더이긴 하지만 해외 정세에 그렇게 어둡지는 않군."
"아무래도 너 역시 나와 마찬가지의 것을 잃어버린 모양이로군."
"무엇을 말이지?"
"모르겠어, 옛날의 너였다면 지금처럼 직업을 차별하는 말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을 거야."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에 그늘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32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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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나키즘, 그게 뭐!!

1. 왜 읽었나?

예전에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할 때 알던 타 학교 선배의 아이디엔 '아나키즘'이 들어가 있었다.

꽤나 냉소적이었던 이선배에게 아나키즘은 '나 신경쓰고 싶지

 

- 이호룡 지음, 서해문집

- 가격은 9500원

- 디자인은 깔끔하고 이런 저런 사진자료들이 많이 보기 좋음.

않은데엔 신경쓰지 않겠다"는 독고다이의 정신과 배째라의 마인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지라, 개인적으론 아나키즘하면 그 선배가 떠올라 '게으른 인간들을 위한 정치적 알리바이'로 냉소해왔다.

물론 아나키스트 하기락 선생은 매우 좋아한다. 내가 하기락 선생을 알게된 것은 나름 '아나키즘'에 대한 책을 끄적일때다. 이른바 재야쪽 철학서에 간간히 등장했던 하기락 선생이 궁금했다. 이름도 특이하고 그 선생의 책도 도서관에선 찾기 어려웠다.

기억이 맞다면, 하기락 선생은 '하르트만의 자유'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그리고 하르트만의 존재론과 관련된 책을 번역했다.

그리고, 유명한 베른슈타인의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을 번역했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아나키즘 관련 서적도 번역했다.

재미있는 것은 모두 '대구'에 위치한 출판사에서 책들이 나왔다는 것인데,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책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1999년이었나? '티셔츠혁명당'이라는 일단의 집단이 나온적도 있고, 레인보우페스티발때 흑기가 펄럭일때도 있었지만, 아나키즘은, 앞서 이야기한 선배의 영향으로 관심사 밖으로 밀려났다.

 

최근에 도서관을 가서 눈에 띄지 않았다면, 적극적으로 찾아서 볼 일이 없었을 책이다. 뭐, 책의 입장에서건 나의 입장에서건 운이 좋았다고 할까?

 

이 책은 우리나라의 아나키즘 수용사다. 어떻게 아나키즘이라는 정치이념이 수입되었고, 일제시대를 거치고 분단체제를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그래서, 아니키즘에 대해 보는 시각이 교정되었냐구? 미안하지만 NO.

 

일단 이 책에서 거슬리는 것.

 

- 저자는 아나키즘의 우월성을 견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감없이 보인다. 곳곳에서 '이는 아나키즘의 사상이 타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혹은 '아나키즘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는 식의 표현이 보이는데,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

- 그러다 보니,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구분이 모호하다. 내가 볼때 일제시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아나키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로 흘러간 것 같은데 저자는 공상적 사회주의 대신 아나키즘을 외삽시킨다.

- 나아가, 아나키즘이든 공산주의든 모두 사회주의의 다양한 종류하고 해석하면서도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를 너무 칼로 물베듯 하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의 어떤 주장에 대해 '아나키즘의 사상을 원용'했다는 식의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 그러다 보니, 한국 아나키즘 역사에서 너무 주류적 입장만을 서술하지 않았나 싶다. 이를 테면, 근대에 들어서 해방정국에서 1970년까지 한국 아나키즘은 곧 유림과 동일시된다. 뭐, 자료의 부족도 있겠지만 허허.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가, 왜 아나키즘이 일제시대에선 공산주의자에 대한 테러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었고 해방후엔 구친일파 세력과 결탁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사상적 한계'라는 견지에서 해석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맥락속에선 언제나 아나키즘이 옹호되는 입장인지라, 일제시대때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게 테러나 일삼던 아나키스트에게 오히려 반발감만 생겨버렸다. 이게 저자의 진짜 의도는 아닐텐데 말이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서울대 나와서 계명대로 대학원을 갔다가 서울대로 다시왔다. 계명대는 앞서 언급한 하기락선생이 제직했던 학교다. 제대로 아나키즘을 배웠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과잉 감정이입일까? 정치적 판단들에 대한 설명보다는 감정적 동의만을 강요하는 듯한 문체는 끝끝내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의 공산주의 박멸사를 보고 싶다면 함 들쳐봐도 좋겠다. (689)

 

 



 

2. 건더기들

-좌우대립의 흑백논리가 판치는 한, 좌우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은 나올 수 없으며, 평화적 민족통일도 이룰 수 없다.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상 체계를 수립하고 그 속에서 민족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찿아야 할 것이다.(10-11)

일견 타당하다. 그럼에도 아나키즘이 그런 통합적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버라고 본다.

 

 

- 아나키즘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80년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한성순보>를 통해서였다. 당시 신문은 아나키즘을 포함하여 사회주의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암살 활동에 관한 것이었다.(16)

 

- 1910년대까지 한국인들이 수용한 사회주의에는 공산주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주류는 아나키즘이었으며, 1920년대 초까지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대중운동의 성장으로 공산주의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사회주의계는 아나키스트계와 공산주의계로 분화했다. (30-31)

 

-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분화는 결국 조선노동공제회의 분열과 최초의 공산주의 노동단체인 노동연맹회의 창립(1922년 10월)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점차 조선노동공제회를 주도하게 되자 아나키스트들은 이에 반발했다.  집행위원이던 아나키스트 고순흠은 공산주의자 신일용 일파와 연합하여 공산주의자 신백우 일파를 축출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자신 축출될 위기에 몰렸다.  이에 고순흠은 조선노동공제회를 탈퇴했고, 1922년 7월 신백우 일파의 윤덕병과 이수영을 칼로 찌른 뒤 조선노동공제회 간판과 서류를 불태웠다. (37)

 

지하철에서 책을 보다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냐, 이 사람은!!

 

 

-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반공산주의적 입장 또한 민족주의자와의 연합을 매개했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 세력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의 반공산주의적 입장은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나아갔다. 그 적대감은 공산주의자와의 투쟁을 최우선시하고 당시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게 만들었다.(51)

 

-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은 문예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김화산은 1927년 3월 <조선문단> 제5권 제3호에 <계급예술론의 새로운 전개>를 발표하여 공산주의 문예론을 비판하고 아나키즘에 입각한 문예론을 제시했다. ...김화산은 1927년 다시 <뇌동성 문예론의 극복>을 발표하여 "문제의 핵심은 사회혁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에 있다"며 문학을 선전수단으로 삼는 공산주의자들의 문예론을 비판했다.(54) 

사회적 리얼리즘을 문예활동의 프로파간다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회적 실상을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선전도구'라고 한다면 예술만을 따지는 사람들은 관념론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뭐, 요즘에도 예술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술이나 문화활동의 자율성을 주장하기 바쁜데, 솔직히 그런 자율성이 자신의 정치적 무지와 무능력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 삼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실제 태도는 각각 달랐다. 이론적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비판했지만,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운동은 거의 전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아니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반대하면서 반공산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121) 

그런데, 이유가 뭐냔 말이다. 아무래도 아니키즘의 낭만적 수용과 수용대상의 계급적 차이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당시 아나키즘은 있는 집 자체의 취미거리 였나? 에잉... 어쨋든 저자는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사상이 문제라고 하는데 글쎄다. 너무 헐렁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 국민문화연구소 관계자들도 아나키즘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516쿠테타 이후 모범적인 자유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계획 아래 전국농촌운동자협의회를 설치하고, 이를 연락소로 삼아 수산운동을 전개했다.  ... 수산운동의 목적은 유휴 노동력을 활용하여 잘사는 농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농촌계몽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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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쿤/포퍼 논쟁

1. 왜 읽었나

 

- 스티브 풀러, 생각의 나무, 2007.

- 가격은 12000원

- 얇은 편인데 굳이 양장본으로 만들어 어색하다

- 솔직히 표지 디자인도 후지다

이런 책은 문고판으로 나와도 좋을 듯한데.

- 하기사 풀러의 '지식인'도 양장본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 역시 이런 책은 조금 팔아도 이문이 남아야겠지?

이 책은 쿤과 포퍼를 통해 지식인의 문제를 거론한다. 다시 말해,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자신의 저작물과 어떤 연관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는가라는 매우 도덕적인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쿤을 인식론상의 혁명자라는 상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것이 내게 과학은 지나치게 거만했으며, 모든 것을 아는 척 했지만 나에게는 문턱이 높아서 도저히 내가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의 이야기는 과학자의 세계를 종교집단과 유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정상과학에서 쌓이는 오류들이 결국은 혁명적 변환을 통해 교체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어 왔음을 고백해야 겠다.

 

그에 반면, 포퍼의 경우에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으로 기억된다. 개인으로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공부를위해 '역사주의의 빈곤'이라는 책을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유일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포퍼의 맑스 비판은 과도했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N개의 맑스가 있는데 굳이 소비에트 맑시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리고나서 이런 생각들은 고정관념이 되어서 오랬동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이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놀라운 책을 만날때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것 말고는 없겠다. 개인적으로 쿤이나 포퍼, 그리고 마흐 등의 과학철학자에 대한 이름이 낯설다면, 뒷부분을 읽어도 괜잖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관념에 책임지는 법'이라는 장에서부터는 과학철학 논쟁과는 별개로 읽을 수 있을 정도다.

 

90년대 후반을 달구었던, '안티조선' 운동과 지식인 문제가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렸다. 요즘 총선철을 맞이하여 폴리페서 등과 같은 신조어가 난립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지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와 이런 문제를 스티브 풀러라는 매개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다.



2. 건더기들

 

 

"오늘날 비판의 시선이 하이데거와 같이 세계사적인 패배자들과 관련된 지식인에게 단호히 쏠려 있다는 것은 어쨌든 놀라운 일이다. 아롱과 같은 비판자들은 세상에는 어떤 완전한 선도, 결백한 행위자도 없으며 가장 윤리적인 행동 방침조차 나름의 대가와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현실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이후에 '더러운 손의 이론'이라 불린다."(166)

 

"우리는 공리주의 도덕 철학자들이 소극적 책임, 즉 우리가 하지 ㅇ낳은 것에 대한 책임의 근거로 여긴 후자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특정한 방식의 행동이 다수를 이롭게 하고 소수에게만 피해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것은 나쁜 행동을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비린다. 이런 정신에서 사르트르는, 고의로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안전한 위치에 있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1871년 파리코뮌의 진압을 막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167)

 

"발생론적 오류는 어떤 관념의 타당성을 평가하는데, 그 기원을 고려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미묘한 기능을 하는데, 즉 입증 책임을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의 유대인 혈통이 자동적으로 상대성이론의 평가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178)

 

"로티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와 시간'이 너무나 심오하여 그 저자가, 특히 일단 나치가 하이데거를 합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을 때, 최소한 그들을 막으려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초래한 결과의 비열함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필생의 계획의 고귀함이, 그의 소극적 책임에 대한 대실태의 변명이 된다는 로티의 생각은 옳은가?"(181)

 

"나는 (1968 학생운동 동안) 프린스턴 대학 학부생들의 세미나에 초청된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나는 계속 이 말만을 되풀이했습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제자 중의 한 사람이 ... 모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견지에서, 이 책이 매우 보수적임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학문 분야 중 가장 엄격하고, 어떤 환경에서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 어떻게 가장 새롭고 창조적일 수 있는지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입니다."'구조 이후의 길'에 재수록된 쿤의 마지막 공식인터뷰(1995)

 

 

"더구나 쿤은 순수한 연구의 규범들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동시대 과학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연구를 그러한 목적으롯 ㅏ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적절한 실례는 쿤의 과학이론에서 비판적인 이론을 전개하는데 가장 체계적으로 시도한 라베츠를 틀 수 있는데, 그는 옥스퍼드 대학출판부에서 1971년 발행된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라베츠는 1970년대 영국 사회의 최전선에서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위해 싸운 미국 출신의 학자로,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에서 출발해 30년 동안 쿤과 서신 왕래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쿤은 라베츠의 정치적 관심과 활동에 불편해하기 시작했고,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쿤에게 조언과 추천의 편지들을 요청해왔다. ... 그러나 걱정을 표시한 지 5년 후 쿤은 라베츠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그가 정치학에서 장학금을 포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과학사 및 과학사회학 교수로 임명하려는 펜실베니아 대학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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