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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 캉딩(8) - 길위에서 길을

053 - 캉딩(8) -  길위에서 길을

 

파오마산을 내려 오며 저 멀리 금강사와 남무사가 보였습니다.

아침부터 걸어온 궤적이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네요,,,,

 

그래도 고생했다,,,내 두발,,,이렇게 칭찬해주었습니다.

 

 

오른쪽이 남무사, 왼쪽이 금강사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자세히 산허리를 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오랬동안 가꾸었던 밭들이 보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그저 경의를 표할따름입니다.

 

 

남무사

 

오른길과 내려온 길이 다랐지만 결국에 출발한 그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문성공주 다리와 나란히 마주해있는 다리에서요,  그 주변에는 올 여름(2007년)에 무너지 옹벽을

다시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 세찬 물줄기가 캉딩 시내로 가로 질렀습니다.

 

다리 건너편에 보이는 욕실(목욕탕?)은 먼지쌓인지 오래 더군요,,,

 

 

캉딩 시내 안각사 근처

 

정지 표지판 (물론 보행자는 해당 안되지만,,,)을 보고 머추었는데 보기 드문 건물이 있었네요..

지붕을 경사가 심하게 만드는 것은 비가 많이 내리는 동남아에서 볼수 있는 풍광인데요..

캉딩 시내 한가운데에서 보네요, 하지만 그 내력은 역시나 알수 없었습니다.

 

 

 

수정자(水井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우물입니다.

캉딩 시내에도 있더군요, 그 사연을 물어 보고 싶었지만 점심으로 고작 쏘세지 하나 먹었더니

빨리 밥먹어야 한다고 온 몸이 아우성이었습니다.

 

그저 빨래 하는 아낙을 흘긋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습니다.

 

 

수정자에서 빨래 하는 아낙

 

캉딩에는 기독교 교회당과 천주교당, 그리고 이슬람교 사원(청진사 : 중국식 표현)가 있다지만

역시 배고픔에 장사 없다고 찿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산위에 새겨진 암각화

 

 

다리위에 마련된 간이 채소 시장

 

 

역시 이곳에도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민이 있었습니다.

 

 

캉딩에서 거의 매끼를 해결한 식당에서 그날 저녁은 좀 푸짐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식당 주인장이 정성스럽게 담았다는 과일주도 한잔...

 

역시 백주 만큼 독했습니다.

 

 

식당의 마스코트, 이름은 메이메이(여동생,,,)

 

이렇게 빤이 올려다보다가 이름을 불러주면,,,,

 

 

의자위로 단번에 폴짝 오른답니다.

 

몇번 보았다고 요리사와 종업원이 아는 체를 합니다.

티벳탄이었던 종업원은 고향이 중국의 제일 가는 전통마을의 하나로 손꼽히는

단빠(丹巴)에서 왔답니다.

단빠에는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 왈,,,,이제는 미인들 없어요,,,모두 북경이나 상해로 가버렸답니다.

춘절(설날)이나야 볼 수 있답니다...허걱,,,

 

주인장과 실없는 농담을 하며 캉딩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습니다.

캉딩 주위에는 무거쵸라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지만 이미 눈도 많이 내리고 해서

직접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여유로운 나는 그날 저녁을 그렇게 실없이 보냈습니다.

 

 

식당 주인장,,, 며칠 더 캉딩에서 묵으라 권했지만...

 

다음날 아침 눈덮인 캉딩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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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 캉딩(7 - 파오마산 - 下) - 길위에서 길을

052 - 캉딩(7 - 파오마산 - 下) - 길위에서 길을

 

2007년 11월 1일

 

선녀대에서 바라본 선녀상의 등에 난 허망한 바람구멍을 보고 난후의  허한 마음이

역시 선녀대에서 바라본 바이타(백탑 白塔)이 충만하게 해주어 다행이었다.

 

 

백탑 너머로 보이는 산 정상에는 간밤에 내른 눈이 소복이 쌓였다.

 

내일은 저 산 너머로 길을 재촉해야 하지만 오늘은 캉딩에서 머물 것이기 때문에

눈덮인 고개를 넘어야 할 험난함을 걱정하기 보다는

흰눈에 더 쌓였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램만이 솟구쳤다.

 

파오마산 정상에는 아직도 공사중인 라마불교 사원이 있었다.

입장권에 안내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염치가 있어 보였다.

 

무료였다가 여기저기 공사투성이면서도 입장권을 받은 것이 괘씸했지만 한가닥 남은 염치가

그려려니 하게 만든다.

 

공사중인 라마불교 사원은 가려 간게 아니라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파오마산의 정상은 어디쯤일까

하면서 오르고 오르다 보니 눈에 띄인 것이었다.

 

 

공사중인 라마 사원의 측면

 

 

라마 사원의 정면 -- 당시 그리 높지 않은 파오마산임에도 아래녘은 비가 위녘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일갈하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형상화한 석고 조각 

  - 쓰레기 하며 정리가 않되어 있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자 음악은 흘러 나오는데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일하던 사람들이 눈온다고 일을 멈추고 아래 공사 현장으로

간식이라도 먹으러 갔나보다고 짐작해보았다. 

 

공사중인 사원에 음악(티벳음악 - 혹은 캉딩정가였는지도 모르겠지만)만 흘러 넘치고 인적은

없었다.

 

 

사원 입구에는 비비다 만 시멘트와 말똥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원 밖으로 나오자 들어 올때는 못보았던 20여분을 발길을 붙잡았던 모습이 있었다.

 

강소성의 우시의 영산대불, 홍콩의 청동좌불, 수 많은 사원의 부처를 보았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비록 부처상은 아니었지만 마치 고해의 삶을 표현하듯 우는듯(눈물을 흘리는 듯) 

혹은 웃는듯 한 모습이 오래도록 사라지지않았다.

 

 

 

눈 내리는 가운데 외로이 앉아있는 동자상

입장권에 표시도 되지 않은 작은 오솔길로 발걸음도 가볍게 걸었다.

하루종일 비와 눈이 오락가락하더니 오후 3시경에 멈추었다.

하지만 파오마산 여기저기 운무(雲霧)가 자욱했다.

 

 

 

숲길을 걷다가 만난 노랗게 물들은 침엽수

 

 

한참을 걷다가 만난 막다른 길,,,담배 한데 피우고 되돌아 왔다.

 

 

달리고 싶은 것은 철마(鐵馬)만이 아닌 것 같다. 

 

 

여전히 공사중이었던 정인지(情人池)

 

 

정인지 옆에 있었던  선산정석(仙山情石)

 

 

어디서 많이 본듯한 정인지(情人池)

 

 

백탑

 

 

 

 

 

 

 

 

보호받고 있던 임려림(林侶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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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 캉딩(6 - 파오마산 - 中) - 길위에서 길을

051 - 캉딩(6 - 파오마산 - 中) - 길위에서 길을

 

 

해라석에서 5분정도 걷자 정가평(情哥坪)이 나타났다.

캉딩은 정가로 유명하다. 난 캉딩에 머물면서 정작 캉딩정가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 들었다손 치더라도 알지를 못했을 것이다.

 

 

 

크기도 한 정(情)...계단 위로 올라가면 정가평이 나온다.

 

정가평은 작은 운동장만한 것인데 원형으로 만들어서 공연등을 하기에 적당하게 만들었다.

 

정가평 위에는 파마평이 있었다.

파마평은 원형으로 말을 타고 돌게 만들었다.

말이 눈비를 맞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비도 오고 그랬지만 드넓은 초원도, 험난한 고개길도 아닌

좁은 운동장에서 말을 타는게 무슨 흥이 있겠는가?

 

이미 내몽고의 초원에서 엉덩이 피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일주일 내내

말을 타본적이 있기 때문에 별 흥미가 가질 않아 거절하였다.

 

여기저기 아직 정비가 다 끝나질 않았다.

입장료 받고 그러려면 최소한 정비라도 다 끝나고 하던지...

참 이럴땐 돈이 웬수란 생각이 절로 난다.

 

정가평 옆에는 참 이름도 거시기 한 칭궁(정궁 情宮)이 있었다.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라서 별 맛이 나지 않지만....이름 하나는 끝내준다.

 

정이란 무엇이뇨,,,수많은 인간들이 붙들고 웃고 울던 주제이고

앞으로도 끝임없이 불려질 인간사 최대, 최고, 가장 중요한 것이 정 아닌가?

그런데 정가(情歌)에 더해 정궁(情宮)이라니...

그 안에 들어가면 새로운 애인이라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보니 식당과 기념품 판매점,,방금 페인트 칠한 듯

심하게 말하면 정나미 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다.

 

 

정궁(情宮)

 

 

 

정궁 내부, 화려하지만 어딘가 좀,,,,

 

한참 위로 올라가니 선녀대(仙女臺)가 나타났다.

 

 

선녀대 전경

 

가운데 선녀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다른 조각상들이 있었다(역시 선녀일 듯)

선녀상 밑의 돌에는 캉딩정가와 파오마산에 얽힌 사연들을 적어 놓았다.

 

 

캉딩을 유명하게 한 캉딩정가 (영어로도 가사가 번역되어 있었다.)

 

 

파오마산의 전설 이야기...

 

 

 

 

선녀상

 

 

 

연(緣),  인연이라,,,,아마 정(情)도 여기서부터 비롯되리라.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선녀상 뒤로 가자 내 마음도 휑하니 구멍이 난 듯 하였다.

 

 

풍만한 몸이나 등에 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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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 - 캉딩(5 - 파오마산 - 上) - 길위에서 길을

050 - 캉딩(5 - 파오마산 - 上) - 길위에서 길을

 

금강사를 나와 문성공주교를 지나면 파오마산에 올를수 있는 등산로에 다다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마부와 말들이 오지 않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라 권하지만 난 걷는게 좋다.

물론 케이블도 있지만 피치못할 상황이 아닌 경우엔 이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두발로 뚜벅 뚜벅,,,,,,

 

넓은 길이 있었지만 나는 왼편의 숲속으로 난 작은 길을 택했다.

아마 말들도 이길로는 다니지 않았듯이 군데군데 풀이 무성했다.

하지만 길임에는 분명했다.

 

 

20여분 오르자  탑인지 사당인지 모를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아무런 설명도 물어볼 사람도 없어

끝내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송전탑이 눈에 거슬렸다. 좀 피해서 설치 하면 안되었을까?

 

곧 이어 중국의 왠만한 산엔 꼭 있는 악몽같은 돌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끝에는 성(誠)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유교의 흔적인지 도교의 흔적인지 역시 알도리가 없었다.

 

30분여분을 오르자 갑자기 소란스러워 졌다.

케이블카가 있고 관광객들이 있었다.

다들 케이블카를 타고 온 모양이다.

한손엔 카메라 하나씩, 다른 손에 먹을 것, 카우보이 모자 쓰고 요란스럽다.

 

예전엔 무료였다는데 이젠 입장료를 받는다.

일반 50위안, 학생 20위안,  다 돌아보고 느낀 것지만 좀 입장료가 과한 것 같았다.

 

 

 국가급풍경구 - 파오마산

 

 

 吉양禪院

 

 

 

주룽지 전 총리의 글 -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유명하다는 곳(자연풍광이 아름답거나 역사적 유산이 있는곳)에는

중국정치인들의 방문기념 사진이나 글이 꼭 있다.

 

가장 많은 것이 장쩌민 전 주석이다.

5A 급 관광지에는 어김없이 장쩌민의 사진이나 글이 있다.

참 어지간히도 돌아다닌 것 같다.

 

그러나 현 후진타오 주석의 사진은 거의 없다.

관광지 보다는 개발 현장 그런데는 가끔 있다. 일하는 주석의 모습을 보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장쩌민이 다 돌아다니며 글도 써 놔서 더이상 건드릴 곳이 없는가 모를일이다.

 

 (중국은 관광지 등급을 A로 매기는데 A가 다섯인 5A가 최고다. 마치 호텔의 별 다섯개와 비슷)

 

 

米라日巴 대사의 상이라는데 ....아래사진임

 

 

바위의 형상을 보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그 옆에는 하이로스(해라석 海螺石)이 있다.

모양이 소라같이 생긴 돌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물이 솟았다. 신기했다.

 

 

 

해라석 안내판 - 한자를 잘아시는 분은 어떤 연유인지 아실 듯 해서,,,

 

 

신기하게 바위 가운데에서 물이 솟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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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 캉딩(4 - 금강사) - 길위에서 길을

049 - 캉딩(4 - 금강사 金剛寺) - 길위에서 길을

 

난우쓰에서 5분정도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금강사가 있다.

 

 

돌담길 사이로 금강사가 보인다.

 

 

금강사에 도착하기 직전에 보이는 군부대 숙소에 나 붙은 구호

 

정치합격, 군사?경 작풍우량 기율?명 보장유력(몇자는 뜻은 알겠는데 잘 모르겠음), 

현재 중국의 어느 군부대에나 반드시 붙어 있는 구호이다.

예전 한국의 전두환 시절 '정의사회구현' , '선진조국 창조'  뭐 그런 것이다.

 

하지만 뜻을 좀 음미해보면 현재 중국의 정치사회를 반영 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정치 합격,

후진타오 시대가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에 대한 여전한 충성 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군사?경,

군사력(인민해방군)의 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이미 굳건해졌다라고 읽을 수도 있다.

최근 인민해방군의 개혁(군인수의 위주에서 현대화된 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정예부대 재편)을

추진하면서도 인민해방군의 중국사회에 대한 지배력(중국공산당의 지배를 뒷받침하는)이

흔들림 없음을 과시하는 구호일 것이다.

 

작풍우량, 

일하는 방식이 우량하다는데 그건 좀 글쎄, 여전히 비효율적이고 관력적이고 권위적인데...

수긍하긴 어렵지만 과거 인민해방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는

많이 누그러진게 사실이다.  

 

 기율?명,

군기가 확실히 잡혀있다  라는데 인민해방군을 보면 우리가 가끔 비아냥조로 하는

'당나라 군대'라는 모습이 이방인의 눈에는 여전한 것 같다.

 

보장유력,

마지막 구호는 좀 더 심각하다. 힘이 있다. 그러니 까불지 말라는 엄포와 협박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물론 '인민해방군에게 (중국인민을 지킬 수 있는)힘이 있으니 자부심을 가져라, 안심해라 -

서양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받은 바 있는 중국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 '라고

읽히기를 바라겠지만 나의 눈에는 대외적인 것보다는 중국인민들에 대한 엄포로 읽힌다.

 

하지만 모두 다 내 생각일 뿐이다.

누구에게 물어보기에는 적절한 대상(편견없이 솔직하게 제대로 대답해줄수 있는)을 찾기도 어려웠고,

결정적으로 내 말 능력이 부족했다. 이럴때 언어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이 후회된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 뿐인게 더 큰 문제다.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하는  내 성정, 아마 이건 고치기 힘들듯 싶다.

 

 

 

 

 장막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장식이 눈을 끌었다.

 

 

 

진강쓰(金剛寺)에는 버마에서 온 옥불상이 유명하다.

* 버마는 현재의 미얀마의 옛 이름이다.

미얀마의 현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많은 사람들이 버마라고 부른다.

 

 

옥으로 만든 와불 --아마도 저 자세가 가장 편한 자세일 듯,,,

 

 

 

역시 옥으로 만들어졌다.

 

 

금강사 경내에 있는 백탑

 

 

담장에 핀 이름 모를 들 꽃(민들레 같기도 하고,,,)이 금강사의 생명력을 말해주는 듯 하다.

 

 

캉딩의 금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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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캉딩(3 - 남무사) - 길위에서 길을

048 - 캉딩(3- 난우쓰 南無寺) - 길위에서 길을

 

난우쓰는 화려한 절이었다.

난우(南無)는 나무아미타불 할 때의 나무라 짐작된다.

 

어릴적 나무아미타불이 샨스크리티어의 음차인줄은 모르고 그 한자의 뜻을 해석하려다가

머리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남무(南無) 남쪽이 없다고,,, 엥 이게 무슨 뜻이야,,,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질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헛 웃음이 나오지만,,,

 

난우쓰는 그 내부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안내판은 녹슬고 초라했다.

 

 

난우쓰 안내 표지판

 

난우쓰 입구 왼편에는 캉딩 열사능원이 있었다.

아마도 짐작컨데 (아무런 설명도 없어서,,,) 홍군의 대장정에 참여 하였거나 일본 침략시기에

희생하였던 이들을 기리기 위한 묘지인것 같다.

 

홍군 대장정 중 하일라이트의 하나인 노정교 전투가 캉딩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점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녹슨 철문만큼 대장정의 대의(大義)도 중국인들 마음속에서 사라진지 오랜것 같다.

 

 

캉딩열사능원

 

안각사가 한적한 반면 난우쓰는 방문객과 라마승들이 비교적 많았다.

 

난우쓰 입구에는 한자 현판이 있었다.

이곳이 캄파지역으로 티벳의 영역이었고 라마불교의 사찰인점을 감안할 때 한자 현판은

특이 했다. 한자 현판이 있는 연원을 짐작하게 하는 벽화가 있었다.

 

 

난우쓰 현판

 

 

 

 그림의 내용을 보면 청(淸)나라 초기의 건륭황제가 난우쓰에게 난우쓰라는 이름과 금, 비단 등의

재물을 주었다는 것을 볼수 있다. 뒤에는 호랑이 가죽도 있다.

그 후로 난우쓰가 된 것 같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고 그림을 보고 난 후 나의 짐작일 뿐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에 중국식 정자가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안에는 커다란 마니차가 있었다.

신자들이 마니차를 돌리며 불경을 암송하고 있었다.

나도 따라 한바퀴 돌아보았다.

 

 

법당안으로 들어가니 하다로 둘러쳐진 불상(아마도,,)이 있었다. 약간 섬짓한 느낌이 들었다.

모양새가 실제 사람인양 싶었다.

 

원래 법당안에서는 사진을 안찍지만 나 이외는 아무도 없어 무례를 무릅쓰고 몇장 찍었다.

 

 

 

 

 

 

 

 

 

난우쓰는 티벳식 절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라싸에서 본 사원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지붕의 처마가 중국의 다른 절 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하늘로 치솟아서 그런 것 같다.

이는 캉딩이 한족과 티벳탄의 경계영역에 있는 절이라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라싸의 조캉 사원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수 있다.

 

 

라싸의 조캉사원 - 처마가 거의 수평이다.

 

 

 

등불을 피우는 곳, 화려하다.

 

 

불교에서 신성시 하는 코끼리 상

 

 

사자 상과 코기리 상이 나란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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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캉딩(2 - 안각사) - 길위에서 길을

047 - 캉딩(2- 안각사安覺寺) - 길위에서 길을

 

캉딩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5분정도 걸어 가면 안각사가 있다.

안각사에 도착하기 직전 도로변에는 도시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옛건물들이 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캉딩시는 차분했다.

 

 

 

 

 

낡고 허름한 상가이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건 어떤 연유일까?

 

 

안각사 앞에는 낡은 상가건물이 뒤에는 캉딩호텔이 있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 안각사이다.

 

안각사 옆에는 여행책자에도 소개된 유명한 black tent가 있다.

티벳식 배낭여행자 호텔이다.

오후에 숙소를 옮겨 볼까 생각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야딩 다녀온 후로 좀 지쳤고 귀챦아져서

그냥 머물기로 했다.

 

 

 

안각사다.

 

 

절 내부는 간간이 보이는 몇몇 신자들뿐 주인 잃은 빈집 처럼 조용했다.

 

 

 

 

 

 

 

 

귀엽기까지도 한 사자상

 

 

안각사를 지나 10여분을 걸으면 난우쓰(南無寺)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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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 캉딩(1) - 길위에서 길을

046 -캉딩(康定) - 길위에서 길을

 

캉딩은 쓰촨 서부에 위치한 깐즈티베트 자치주(甘孜藏族自治州)의 주도이다.

시내가 Y자형으로 강물이 흐르고 계곡 양편으로 길게 형성된 작은 도시이다.

 

11월 1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겨울비라서 날씨는 좀 쌀쌀했다.

방안에는 어제 저녁 널어 놓은 빨래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었다.

 

 

아침 식사, 죽(시판)과 만두 2개, 그리고 삶은 계란 2개 추가....

 

 

 

캉딩 시내에 있는 동관소학교

 

캉딩 시내에 잇는 소학교의 정문에 새겨진 교훈을 보니 경쟁(競爭), 합작(合作 - 협동의 의미),

구실(求實 -실사구시라는 의미), 창신(創新 - 창조의 의미)이다.

그 중 경쟁과 합작은 정 반대의 의미인데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지 궁금하다.

 

 

 

중국의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듯이 캉딩에서도 여기저기 새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도심을 가르는 강물의 물살이 거세다.

 

 

선전용 현수막만 없다면 나름 깔금한 시내 중심가

 

 

경제발전과 조화로운 사회 건설, 민족단결의 모범 자치주라고 선전 한다.

 

문화센타가 있는 광장 주변에는 역사와 전통을 소개하는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와 이 곳 역사에 어설프게 아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불교 설화와 관련된 듯

 

 

 티벳 영웅 게사르 대왕 이야긴가? 모르겠음...

 

 

 

이것도,,,,불교,,,,이야긴가?

 

 

장수,,,오래 살자는 이야기인데,,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케 사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 까?.....

 

 

티벳 토번국의 송첸캄포왕과 당의 문성공주의 결혼 이야기

 

캉딩의 남쪽 끝에 가면 문성공주교가 있다.

문성공주가 이곳을 지나갔단 말인가? 잘 모르겠다. 다리의 기원에 대한 안내는 찾을 수 없었다.

룽다가 걸려 있는 걸 보면 현지인들이 신성시 한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문성공주 다리 안내판

 

 

 문성공주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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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 따오청에서 캉딩 - 길위에서 길을

045 - 따오청(稻城) - 길위에서 길을

 

오후 늦게 따오청에 도착하였다.  2007년 10월 30일

우선 내일 출발하는 버스표부터 예매하였다.

 

나는 캉딩까지(124위안), 중국인 친구는 신따오치아오(新道橋)까지,

데이비드는 쫑티엔까지 각자 갈길이 달랐다.

출발은 아침 6시란다.

 

첫날 따오청에 도착해서 먹었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운전사 아저씨 단골집인가 보다.

 

운전사 아저씨는 귀여운 딸을 저녁식사에 데리고 왔다.

중국요리라는게 1인분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한사람 추가된다고 나쁠 것 없다.

 

귀여운 아이는 가끔 외식도 할 겸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때론 외국인까지)와

만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테이니 말이다.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따오청 시내 분위기

 

 

 

 

선전용 구호가 어김없이 따오청 시내에도 내걸려 있었다.

 

배도 부른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온천에 가자고 했다.

운전수 양반 싫지 않은 눈치다. 이번에도 역시 부인을 대동한다.

원님덕에 나팔분다고 부인에게도 점수 딸 기회인 것이다.

 

 

배도 부르고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도 담그고, 비눗물로 제대로 씻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다른 친구들이 나오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욕탕 청소하는 티벳여인이 훌쩍 거린다.

감기에 걸렸다고 한다. 보니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매번 한사람 사용하고 나면 청소를 해야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약은 먹었지만 잘 낫질 않는다고 한다. 안타깝다.

 

 

숙소에 돌아오니 마당에 야생여우가 있었다. 헐,,,어디서 잡아온걸까?

 

우리는 그도안 경비를 정산하고 수유차도 마시며, 과일도 먹으며 앞으로 서로 갈길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보다 하루먼저 떠난 중국여인이 메모를 남겨두었다. 데이비드에게 그녀가 묵는 숙소의

주소를 가르쳐주고 그녀에게 전화해주었다. 낼 오후에 데이비드가 찾아갈거라고,,,,

우리가 걱정되었다고 한다.

 

 

인상적인 야크머리 장식

 

 

 

 

 

숙소 안의 주방겸 응접실 모습

 

다음날 우린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터미널로 갔다.

이른 아침이지만 운전수 아저씨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버스에 탔다.

중국인 친구와는 신도교까지 함께 갔다.

 

 

신도교의 마을 풍경

 

 

 

 

 

늦은 점심을 먹기위해 정차한 소형버스

 

버스는 대형버스와 소형 버스 이렇게 두대가 함께 출발 하였다.

나는 대형버스에 탔다. 내 생각엔 소형보다는 대형이 좀 편한 것 같다.

그래도 좌석이 좀 넓어 덜 불편했다.

 

 

호기심 많은 꼬마..모자에는 텔레토비가,,,,,

 

신도교를 지나자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높고 푸른 하늘은 간데 없고 눈이라도 내릴듯 잔뜩 찌쁘려 있었다.

 

드디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몇개의 고개를 넘다보니 눈이 쌓이면 길이 막히는게 다반사일 것 같았다.

 

고개를 내려가는데 이백여대는 됨직한 군용화물트럭이 오고 있었다.

트럭마다 앞면에 프랭카드를 달았는데 시짱(西藏)을 지원한다는 걸 보니

티벳으로 향하는 군수품인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물건들이 티벳인들은 억압하는데 사용된다니

마음이 아프다.

 

오후 5시 30분 캉딩에 도착했다.

우선 터미널 근처(1일 30위안)에 숙소잡고 왕빠(피시방)에 가서 멜 확인 하고

저녁은 볶음밥에다 칭차이 해서 10위안에 먹었다.

 

비가 내렸다. 근 한달만에 보는 비다.

캉딩은 이미 반은 한족의 도시 분위기였다.

 

그날밤 10시쯤 천둥번개가 치더니 정전이었다. 방마다 난리였다.

10여분간 지속되다가 다행이 전기가 들어왔다.

 

 

 캉딩 숙소 창문을 통해 본 부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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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 야딩(15 - 꽁링쓰) - 길위에서 길을

044 - 야딩(15 - 꽁링스 貢岺寺) - 길위에서 길을

 

샹그릴라 향에 이르기 전에 검문소가 있었다.

이제는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야딩 입장권을 보여주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만약 야딩 입장권이 없었다면 아마도 입장권(150위안)에 준하는 벌금을 물었을 것이다.

아마 그 벌금도 흥정이 가능 할지도 모르겠다.

 

 

샹그릴라 표지판 - 한글이 선명하다.

 

샹그릴라는 윈난의 쫑티엔이 있고 따오청의 옛 르와춘(日瓦村)이 이제는

샹그릴라향으로 바뀌었다.  명칭가지고 윈난과 사천 당국간에 논란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어디 샹그릴라가 한 두구데 일까? 전혀 없을 수도 있구,

 

중국 여행을 하면서 유명하다는 관광지에는 많은 곳에 한국어 안내표지가 있다.

어지간히도 한국인이 많이 왔다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일본어나 한국어는 두 나라밖에 사용안하는데도 두 나라의 관광객이

외국인 관광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대부분 나라는 영어를 사용 할 줄 아니,,,,

 

르와춘의 마을 풍경 - 어딘가 좀 어수선 하다.

 

 

 

 

르와춘은 여기저기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것도 대규모로,

기사 왈  선전인지 상해인지(지금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의 사장 세명이 합작으로

대규모 호텔을 짓는다고 한다.

 

아마도 야딩도 곧 쓰촨의 주자거우(구채구)처럼 국민관광단지가 되려나 보다.

제발 개발하는 것도 좋은데

1. 자연경관을 해치지 말 것

2. 지역 주민의 삶에 보탬이 될 것

3. 지역 문화가 지켤 질 것

그래도 덜 훼손되기 전에 다녀온 여행자의 바램이다.

 

20여분을 달려 꽁링쓰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이 곳이 자기 고향이란다.  현재 어머니가 살고 있다고 한다.

집에도 들릴겸 이전부터 약간문제가 있어보이는 차도 손볼겸 들렸다 가잔다.

불감청 고소원이다.

 

각자 산책하는 기분으로 마을 주변을 돌아보며 꽁링스에 갔다.

 

 

꽁링쓰는 황교사찰(게룩파)로 1170년에 지어졌다.

입구에 입장권 파는 곳이 있지만 먼지만 가득 쌓인지 오래였다.

 

 

 

 

절안은 한산 했다.

 

난 밖으로 나와 절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으례 라마불교사원에는 코라를 돌 수 있겠끔 길이 있다.

그런데 데이비드와 중국인 친구는 그냥 돌아갔나보다.

 

 

절 뒤편에 있는 백탑과 마니석 무더기

 

젊은이 한무리가 놀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갈것인지 뭐하며 노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노는 것은 분명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든다.

 

 

멀리 오래된 나무다리와 몇채의 집이 보였는데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갈했다.

 

 

강가에는 야크떼가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리더로 보이는 야크 한마리가 강을 건너고 그것을 다른 야크들이 지켜보고 있다.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세월에 무너진 담장이 손보지 않고 방치되있기도 했다.

 

 

당나귀인지 말인지 모르겠다.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다.

코라를 돌던 한 티벳 청년이 사진을 보자고 한다.

사진을 보더니 멋있다고 한다. 말이,,ㅎㅎㅎ

 

코라를 다 돌았을 무렵 전화가 왔다.

이제 떠난다고 한다.

 

가다가 한 사람을 태웠다.

오랜 노동으로 지친 농부였다. 야크를 키운다고 한다.

 

한참을 달려 자기집에 다 왔다고 내린다.

이곳은 6월이 되면 두견화(진달래꽃)가 장관이란다. 그때 꼭 와보란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

 

우리도 용변을 보기 위해 내렸다.

농부가 도착한지를 알았는지 저 멀리 집에서 가족들이 반기러 나왔다.

 

어릴쩍 할아버지는 5일장이 설때마다 장에 가시곤 했다.

꼭 물건을 사고자 함이 아니라 정해진 일과 비슷한 거였다.

그 때마다 술이 거나해서 돌아오시곤 했다.

때론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으면 몇군데 길을 나누어서

아버지와 고모들이 마중을 나가곤 하였다.

 

주전부리 할 꺼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나는 할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사가지고 오던 밥풀과자를 기다리다 잠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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