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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27
    조지 부시가 다시 술에 손을 댔단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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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9/24
    시사저널, 선택과 집중이 발휘한 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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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8/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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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부시가 다시 술에 손을 댔단다

미국 대중지 네셔널 인콰이어러가 재밌는 기사를 하나 썼다. 오늘 한국 신문 몇 곳이 받아 썼고 티비 뉴스에도 나오더라. 간략하게 말하자면 요즘 골썩을 일이 많은(카트리나, 이라크등등) 부시가 다시 술에 손을 댔다는게다.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기사에 의하면 텍사스만한 잔(그니까 큰 잔이란 말이겠지 맥주잔 같은)에 짐 빔을 따라 마시다가 로라 부시한테 딱 걸렸댄다. 로라는 "스탑 조지"라고 외쳤다나...네셔널 인콰이어러는 부시가 몇  주 전부터 로라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단다.

 

유엔에서 콘돌리자 라이스한테 '나 오줌 마려, 지금 화장실 가도될까'라는 메모를 보내 허락 받는게 로이터에 찍혀 쪽팔았던 부시 또 이상한 건으로 쪽팔았다.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주로 독점고백 '마이클 잭슨은 나를 이렇게 성희롱했다" 류의 연예인 가쉽 기사를 주로 쓰는 곳이라 믿음성은 좀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개뻥을 치는 곳은 아니고 나름 탐사보도^^를 하는 곳이라 맹탕 근거 없이 부시 음주 기사를 썼을 가능성도 낮다.

 

알다시피 부시는 젊은 날 술을 느무느무 사랑했다가 40살 생일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딱 끊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라 부시가 '조지 나냐 짐빔이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 고 강한 압박을 가해 부시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단다. 근데 조지가 그 때 짐빔을 선택했으면 로라나 조지는 불행했겠지만 인류는 지금보다는 아주 쬐금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짐빔은 버번 위스키다. 그니까 스코틀랜드 위스키가 아니라 옥수수로 만든 미국술이란거지. 할인마트 가면 700미리리터 짜리 큰병을 한 사만몇천원 주면 살 수 있는 술이니 그리 비싼 것은 아니고 다른 버번위스키가 그러하듯 머랄까 좀 폭음성향이 있는 육체노동자들이 즐기는 거친 느낌의 술이다. 미국 대통령이면 비싼거도 먹을 수 있는데 오랜 금주 끝에 다시 손댄게 짐빔이라니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다. 

 

술소개는 각설하고, 한겨레 한승동 기자가 부시의 정신상태인가 하는 책을 번역해 출간했던데 거기 보면 금주자는 다시 술을 먹는 성향이 있다, 알콜중독은 절대 낫지 않는다 등등 내용이 있단다. 하튼술을 어느날 갑자기 딱 끊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결단력을 높이 살 수 있는 점도 있겠지만 '담배 끊는 놈하고는 사돈도 맺지마라'는 옛속담이 증명하듯(우리 엄마 아버지는 원래 담배 안 폈으니까 혹시 하는 걱정은 마시라) 뭔가 비정상적인 구석이 있다는걸 의미할게다. 애초 술에 의존했던 점에 대한 문제는 말해 무엇하랴만은.

 

하여튼, 저 뉴스를 처음 보고 잠깐 부시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무뇌스러운 인물이지만 지는 또 요즘 얼마나 힘들었으면 술 끊은 걸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삼던, 로라와 철석같이 약속을 했던 부시가 또 술에 손을 댔을까 하는 생각이 든게지. 생각은 꼬리를 물어, 부시가 만일 또 폭주를 하게되면 안그래도 이상한 짓 많이 하는데 더 이상하게 되는건 아닐까? 이북에 쳐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카지? 심신상실이 되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백악관이 실제 주인이라 평가받는 딕 체니가 대통령이 되 2008년까지 해먹을 건데 그 넘은 더 무서운 넘이자나 하는 생각까지..ㅋㅋ 또한 짐빔 입장으로서는 부시의 음주 소식이 강력한 광고효과를 발휘하겠다는 생각도...

 

내세녈인콰이어러의 표지다. 메인커버 기사는 안젤리나 졸리의 입양이 불법적 요소를 내포했다는 것이고 우측 상단에 부시 사진과 음주 이야기가 있다. 카트리나가 부시를 booze(술을 마시다)하게 몰고 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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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선택과 집중이 발휘한 힘

꼭 블로그에 써야지 한 건 아니지만 단상을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 싶은게 있었는데 까먹었다가 생각났다. 이 생각이 나서 잠이 번쩍 깼다 ㅋㅋ 그려 에보 말마따나 블로그란게 이런거 쓰라고 있는거 아니겠나

 

지난 주 초 발행된 시사저널이 몇몇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난 취재와 추석 귀향을 엎쳐서 화요일날 일찌감치 내려갔는데 서울역에서 시사저널 추석합본호를 샀다. 기대를 안고. 곧 언급하겠지만 기대는 충족됐다.

 

보통 부산 가는 기차를 탈 땐 밤차의 경우, 술먹고 그냥 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요신문을 사서 아주 샅샅이 읽고 써먹을 것을 머리속에 쟁여둔다 남는 시간은 씨네21 같은거 본다.. 그것도 아니면, 읽던 것 들고 간다.인데 이번엔 시사저널을 샀다.

 

시시껄렁한 특별기획, 커버스토리와 달리 시사저널 추석합본호는 '삼성완전정복' 이었다. 책 말미 영화, 공연 소개한 대여섯장 빼고는 백여페이지가 전부다 '삼성'...

 

사회부, 정치부, 체육연예부, 모든 기자들이 자기 취재 영역에서 삼성을 뒤볐다. 물론 시사저널 편집장이 스스로 털어놓은 것 처럼 대특종이 있다던가 그런것은 아니었다. 그간 알려진 사실들은 꼼꼼히 정리해놓은 것, 그리고 각 부서에서 삼성을 다각적으로 치다보니 독자 입장에서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점 등이 크게 다가왔다.(정보를 모으는 것을 넘어 통합의 경지에 이르러 입체적 시야를 주는 것은 내 글쓰기의 강력한 목표중의 하나다. 실제로 성취되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선택과 집중이 훌륭하게 이뤄줬을때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는지 이번 시사저널은 참 잘 보여줬다. 

 

그 책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로 알게된것은 하나, 구조본 산하의 지대위가 노조파괴공작의 실제 근원이다 라는 것-그러나 이러한 것 하나를 발굴하기가 얼마나 어렵던가? 좌파민중언론을 자임하면서 엄두나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일을 종합지들은 이렇게 해낸다. 딴 동네 일이거니 하고 멍하니 있을 바에야 차라리...- 정도 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 1960년대 주간한국 창간 그 이후 1980년대 선데이 서울의 전성기를 뛰어넘어 시사주간지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시사저널의 저력이 여실히 느껴지더라. 김훈도 가고 서명숙도 갔지만 (그러고 보니 이문재도 시사저널 출신이구만)아직 시사저널은 명실이 상부하다. 이숙이 기자나 주진우 기자의 경우  아는 사람은 아는 네임벨류를 유지하고 있잖나.

 

게다가 종이책, 활자의 파워라는게 확 느껴졌다.

 

정확히 계량할 순 없겠지만 아마 내가 요즘 보는 텍스트들의 상당부분은 디지털화 된 것, 아니면 출력물이고 내가 생산하는 텍스트들도 디지털 텍스트다. 기실 원래 난 책의 미래를 믿는 사람인데다 인터넷 매체에서 일하긴 하지만 종이에 대한 애정이 보수적일 정도로 강력한데 이번 시사저널을 보고 그 아련한 짝사랑이 다시 ㅋㅋ

 

또한  시사저널의 삼성 조지기에 비하랴만은 아젠다를 잡아서 전방위적으로 쪼아내는 것을 참으로 하고 싶었고 몇번 시도(?)를 했는데 주객관적 조건이 뒷받침이 안돼ㅠㅠ 번번이 접었었고 X파일 직후 나 역시 '삼성'(!)에 대해 다각적으로 다뤄보자는 의견을 제시(강력하게? 아니면 지나가는 말로?) 했건만 역시...라서 상당히 배가 아팠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을 것이, 듣기에 시사저널 삼성 특집호는 팔리기도 엄청 팔렸단다. 이 책 구하러 몇군데나 다녔지만 못 구했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을 정도니...또한 나 처럼 귀향길에 이 책을 산 사람들은 아마 고향에 가서 시사저널 이야기에 침이 말랐겠지. 개나소나 시사평론가인 한국 같은 정치공화국에서 이번 추석에서 돈 안되는 노가리 주제중의 하나가 삼성 일 것은 분명하고 시사저널은 톡톡한 효과를 거뒀을 것이다. 단기적이나마 열독율도 높아졌을 것이고.

 

다시 종이에 대한 애정으로 돌아가자면^^  전술했듯이 그런 애정이 넘쳐 자주는 아니지만 각종 활자매체(거의가 기관지지만)에서 글을 부탁하면 신나하는 편이다.(솔직히 말하면 빵꾸 낸적도 꽤 있다ㅠㅠ) 왜 그런거 있잖아 어릴적에 자기 이름이랑 글이 박혀 나온 책을 보면 그게 학급문집이라도 가슴 뿌듯한 거. 그런 촌스러움을 탈피 못했다는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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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트레스를 강력하게 많이 받고 있다. 화딱지 나는 일들이 많고, 열받기 시작하니까 사사건건 눈에 밟힌다. 이게 몸으로 바로 드러나는게 환절기랍시고 감기도 직빵으로 걸렸고 심각하진 않지만 몇가지 육체적 징후로도 드러났었다.(왼쪽 다리가 길어진다던가...앗 이건 스트레스랑 관련 없나?)

 

일로 부딪히는 건 정말 쿨하게 지적하고 돌아서고 또 웃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건 뭐...열받지 말고 그냥 내꺼나 잘하자 주의로 살아야지 싶어 한동안 그랬는데 그것도 어느 임계치를 넘어선 느낌이다. 차곡 차곡 쌓아두고 있다. 

 

예전 경험으로 보면 이런게 엉뚱하게 폭발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노라' 는 명제를 실현해 자폭하곤 했는데 뭐 이젠 그럴것 같진 않고.

 

오늘 한 후배랑도 잠깐 이야기 하다 나온 이야긴데 평소엔 허허 거리다가도 확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때가 있단다. 내가.

 

생각해보니 맞다 싶기도 하다.

 

안 그럴려면 조금씩 조금씩 배출을 해야하는데...

 

사실 내가 속으로 가지고 있는 주위에 대한 기대치는 상당히 높긴 하다. 근데 맘으로 바라는 것과 별개로 실제로 그 만큼 바라지도 않고(내 바램대로 됐음 벌써 세상이 다 변했게) 강요같은걸 하는 편도 아니라는게 내 생각이다(그래 만고 내 생각이라니까...)

 

어딘들 무엔들  맘에 쏙 드는 게 있으랴만은 내 머리와 경험과 상식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다. 아주 오랜만에 '벅차다'는 감정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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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흥

환절기마다 통과의례 처럼 다가 오는 감기 몸살이 또 왔다. 아마 연휴 끝나고 서울 집에 올라온 날 몸에서 열이나 활딱 벗고 선풍기 까지 틀고 자다 새벽 선선한 기운에 탈인 난게 아닌가 싶다.

 

어제는 일찍 나가서 기사 두개만 딱 쓰고 몇가지 일 처리하고 일찌감치 들어왔고 오늘은 골골이다. 어제 밤부터 오늘 낮까지는 거의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픈 짐승들이 그런다길래 나도 아프면 아무것도 안 먹고 물만 디립다 마시며 끙끙거리곤 한다. 그러다가 몸이 좀 나아진다 싶으면 먹기 싫은 것(에컨데 달콤한 빵아니 초컬릿 같은 열량 높은것) 억지로 꾸역꾸역 먹기도 하고...

 

머 혼자 사는데 몸도 아프니 서럽다 는 단계는 이미 지나간지 오랜지라 그런건 별로 없고 그냥 몸으로 느껴지는 밸런스의 무너짐 그 자체가 싫긴 하다. 또 자야 겠다. 경험칙상 많은 물, 많은 수면이 가장 훌륭한 약이 더라.

 

내일 아침에는 다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음. 아프다 나은 직후의 약간의 나른함을 즐길 수 있었으면 싶네.

 

첨언: 지금 히스토리 채널에 나오는데 50년대 미국에선 무안 양파 아가씨, 청양 고추 아가씨 뽑듯이 라스베가스 원자탄 아가씨도 뽑으며 원자탄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높이려 노력했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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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출장 취재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지만 역시 또 오랜만이 포스트군ㅋㅋ 그리고 역시 궁금해 하는 사람 별로 없겠지만 난 부산에 와 있음 ㅋㅋ

 

다들 알다시피 김동윤 열사 건이 터졌고 추석도 얼마 안 남은지라 겸사겸사 부산에 내려왔다. 화요일 밤에 부산역에 도착해서 빈소가 차려진 부산의료원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자정깨. 이런저런 이름 날리느 사람들은 낮에 왔다가서 그런지 몰라도 빈소는 생각보다 한산하더라.

 

빈소 앞이 비좁을 정도로 빼곡히 서있는 화환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죽어야 저렇게 대접받는구나 싶다가 속사정이야 어떻든 열사 이름도 못 붙이는 사람도 있지만 유가족이 전적으로 대책위와 뜻을 모은 김동윤 열사는 그래도 낫다는 희한한 생각도 들고...

 

졸지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빈소르 지키고 있던 모녀는 같이 소복을 입고 얼굴이 핼쓱해진지라 얼핏봐서는 구별도 힘들지경이었다. 대책위 사람들 만나 몇마디 나누고 여기저기 카메라 들이대다가 불콰해진 조합원한테 육두문자 듣기도 했고...이번 부산 방문 동안 카메라, 사진에 얽힌 이야기는 계속된다.

 

서울->부산 기찻삯  부산역->부산의료원 부산의료원->우리 집 차비로 받아 온 출장비는 동이 났다ㅠㅠ

 

그리고 다음 날 부산시청 앞 결의대회. 검정조끼에 검정바지 세무 전투화를 차려입은 화물연대 선봉대는 북파공작원 동지회를 방불케 할 정도 였지만 결의대회를 앞두고 골라잡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 선봉대원 이야기는 기가 찼다.

 

화물차 6년에 남은 것은 빚 2,400만원. 동생이랑 처남한테 빌려온 돈은 포함도 안 된 것이란다. 자기는 카드로 돌려 막다가 동생 돈 빌려서 부가세 막았고 김동윤 열사는 그거 못막은게 유일한 차이란다.

 

김동윤 열사가 생전에 몰던 화물차가 무대로 쓰였다. 집회 시작 전 냉큼 운전석에 올라가보니 그 신산한 삶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담배, 운송사 로고 찍힌 잠바, 화물연대 티셔츠, 사탕, ,커피믹스.

대쉬보드 위에는 주인이 먹다 남긴 농심 육개장 사발면 하나가 덩그라니 남아있다. 그 옆에 붙어있는 화물연대 스티커가 애처롭더라.

 

'화물차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오빠' 로 시작해서 '우리 오빠 살려내라'는 절규로 마무리된 고인의 동생의 추모사는 그예 시커멓게 그을린 화물운짱 3천명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더니 눈물을 뺐다. 그 절절한 사연은 TRS단말기로 운행중인 조합원들에게도 전해졌고...

 

결의대회가 이후 시가 행진 전에 성난 조합원들이 굳게 닫힌 시청 청사 출입문을 박살냈다. 한 바탕 할 것 같다는 긴장감으로 얼굴 굳어졌던 선봉대는 오히려 성난 일반 조합원들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이 와중에 지문날인반대연대 티셔츠 입은 노뉴단 활동가 한 명은 캠코더 들고 왔다갔다 하다가 몇 대 맞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 위험에 처했으나 기자란 말이 안통할 것 같아 민주노총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쳐 위험을 간신히 벗어났다--;;

 

집회 끝나고는 보통때는 소닭보듯 하다가도 객지에서(굳이 따지면 난 객지가 아니지만) 반가움이 더하는 몇몇 동지들과 시청 뒤에서 소주 일배. 항상 그렇지만 정보교환, 이렇다 할 대상이 없는 뒷다마,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은 정세전망이 뒤섞인 술자리였지만 꽤나 좋았다.

 

그 동지들은 부산역으로 가서 귀경, 난 집으로 귀가.

 

그리고 다음 날(목요일이다) 은 아펙반대부산시민행동(정확한 명칭인지...) 취재. 여러모로 열악한 상황에서 애쓰고 있는 활동가들에게 안타까움이...그러나 여기서 쓰기 힘든 황당함도 적지 않았고--;;;

 

그리고 어제, ,아펙 열리는 곳을 돌아밨다. 먼저 해운대 벡스코(부산전시컨벤션센터) 무지하게 덥더라. 나름대로 경비병력이 배치되어 있고 담배를 사며 고액권을 내는 사람, 갑자기 북한 사투리를 쓰는 사람 등등의 간첩식별법과 그닥 다르지 않은 테러범 식별법(아랫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사람도 테러범일 확률이 높단다!! 의심 받지 않으려면 다이어트가 필요하닷)0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지만

경비 서는 의경애들은 너무나 나른해 보였고 내 눈에도 구멍은 많아 보이더라.

 

그리고 해운대 동백섬의 누리마루(아펙 정상회의장). 일단 이 곳은 삼면은 바다고 진입로가 두군데긴 한데 하나는 산책로 수준이고 하나느 일방통행로 수준이라 듣던대로 경비하기는 아주 쉽겠더라. 경치도 그야마로 절경이고...저렇게 좋은 곳에서 헛짓거리들 할 생각하니 어찌나 배가 아픈지.

 

동백섬 입구는 출입금지라는 팻말, 바리케이트가 있고 역시 의경둘이 경비중. .동태를 살피니 대략 산책 운동 나온 사람들 겉보기로 별 이상 없어 보이느 사람들은 무사통과인 모양. 관광객으로 가장해 동백섬 입장 성공. 산책로 따라 쭉 나가며 눈치 보며 사진 촬영.

 

드디어 공정률 90%를 기록중이 누리마루가 눈 앞에 나타났다. 일단 나무 뒤에 숨어 찰칵 찰칵. 누리 마루 앞으로 접근하니 경비는 좀 더 철저해지고 사진및 비디오 촬영 엄금이라는 팻말이 떡하니 있다. .역시 동태르ㅡ 살피다 숨어서 찰칵찰칵. .저 쪽에서 카메라 메고 올라오느 할아버지한테 경비 의경이 뭐라머라 하는게 보인다.

 

그 틈을 타 나는 또 찰칵, ,앗 그러다 들켰다. 모른 척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빠져나오기 시작. .이럴때 일수록 긴장하거나 도망가면 의심을 산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아저씨 아저씨 하고 부른다. .못들은척 하고 계속 이동 ㅋㅋ 목소리가 좀 더 커진다. .돌아보고 영어로 답했다 "What?"' "What is problem? I'm sightseeing" 쉬운 영어지만 최대한 노력해 혀를 꼬며 계속 이동. 

 

지들끼리 투덜거리는 소리에 쾌재를 부르며 시야를 벗어나는 커브를 돌았다. 쫓아오지는 않는 모양. 나를 쫓아오면 경비장소를 비우게 될테니...그 때부터 안전 지대까지 질주.

 

근데 사진찍는 것은 그렇다 쳐도,, 지형상 아펙반대 투쟁대오가 해운대 접근하는 것도 쉽잖을텐데..괜히 걱정이 좀 되더라. .전 날 만난 활동가는 십만이 오면 다 해결된댔지만--;;

 

그리고 민주노총 지역본부 건물로 이동해 파산지원연대의 파산교육 취재. 이리저리 실무적 아쉬움은 엿보이지만 아무리 생가해도 파산지원연대는 '블루오션'을 잡은 것이 틀림없다고 다시 한 번 재확인.

 

이상으로 부산 취재는 끝(그렇지만 취재내용 기사로 풀어내야할 것은 최소 두건 남았다--;;)

 

그리고 오늘(금욜)은 온 식구가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 벌초및 성묘. 독립유공자 포상과 함께 대전현충원 이장이 울 아버지의 플랜이었지만 보아하니 그닥 쉬울 것 같진 않다. 예전엔 김해였던 할아버지 묘소 소재 집안 선산이 부산된지도 10년이 가까운데 산 바로 앞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이더라. 르노 자동차 공장인근도 모자라 무슨무슨 과학단지 조성한단다. 그 산의 실 주인인 8촌형은 부자 됐겠더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귀찮고 더운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백화점 가자는 말에 혹시 재수좋으면 머 하나 생길까 하는 얄팍한 생각에 군소리 없이 따라갔다가 팥빙수 먹고 귀가ㅠㅠ

 

그리고 모레 오전에 귀경. .모레 밤 기차에 새벽 도착인줄 알고 피곤하겠다 싶었는데 오전 기차로 오후 도착이더라.  

 

키는 화물녕하하물연.머다 남긴농심 육개장 사발면 하나가 주인 이에느,,운송.드삼ㄹ함 신.ㅈㅂ회무차ㅁㄹ던

 

라나ㅏ.마은게 시는 그게 비ㅣ려 .ㅏㄹ비려온 , 촤무하물차

 

우ㅜㄴ르 나누야ㅣ를붙잡아 르 ㅇㄴ 입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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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를 쓰기 귀찮은 이유에 대한 짧은 메모

왜 요즘 블로그 쓰는게 귀찮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소통을 갈구해봐도(근데 이 소통이라는 말 정말 맘에 안든다. 예전 임병수 노래 중에 '사랑이란 말은 너무 너무 흔해 너에게 만은 쓰고 싶지 않지만~' 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는데..그 가사랑 비슷한 심정이다. 도찐개찐 소통이니 이거 원 다른 말을 쓰고 싶지만 적당한 말이 없다) 별 소득도 없고 그러다 귀찮아져서 걍 케세라 세라 되버린 것이 아닌가 싶네. 사고방식이 정말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외눈박이 나라에 홀로 선 두눈박이라기보단^^ 두눈박이 나라에 홀로선 외눈박이 같애--;;

 

무엇의 전조나 징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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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애국가를...

어제 부산에 있는 일가들 거의 모두와 광복절 기념식에 갔더랬다.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이었는데 재밌는 것이 부산시민회관 옆에는 부산근로복지회관(민주노총 부산본부 사무실)이 있다.

 

뭐 그건 그렇고,,,, 제대 한 이후 거의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러봤다. 4절까지 부르라는데 되게 어색하더라. 하튼, 애국가도 부르고 광복회 부산지회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기념사도 듣고..(좋은 말씀 하시더라. 금전만능주의,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서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 땅에 떨어졌다던가..)

 

그 이후에 유족 대표로 아버지가 부산시장한테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부산에선 건국훈장, 포장, 대통령 표창 해서 10명에게 추서됐다. 대통령 표창을 받은 한 유가족은 대성통곡을 하던데 맘이 좀 짠하더라.

 

훈포장을 받는 유족들은 맨 앞줄에 앉았는데 아버지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자기 부친이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는데...감동이라기보다는 분개의 연속이었다. 보훈처에서 이거 가져오라 저거 가져오라 그러고 제대로 안되니 브로커한테 돈 주고 관계 서류 구비하고, 또 보훈처 공무원한테 급행료도 주고...뭐라더라 지금까지 한 오백만원 썼다나?

 

한국의 현대사란게 워낙 격변을 많이 거쳐 왠만한 가정이면 가족사 자체가 소설로 몇권이지만, 일제에 고생한 집안들은 그 소설 권수가 좀 더 늘어난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사람을 또 만난게다.

 

근데 광복절 기념식이 꽤 그로테스크 했다. 기념사를 한 부산 시장, 만세 삼창을 선창한 부산 시의회 의장은 입을 모아 '아펙 이야기'더라. 시장은 임진왜란때도 왜군이 부산에 주둔을 했고 개항도 먼저 됐으니 항일도 부산이 많이 했다는 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했고(친일파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가능성이 훨 높지) 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아펙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한다고 중언부언했고 부산시의회 의장도 만세 삼창하러 올라가서 아펙 찬양을 잊지 않더라.

 

골까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산시립합창단이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리운 금강산' 뭐 이거야 좀 냉전적 노래긴 하지만 장중하고 이런 행사곡으로 많이 불리니까 그렇다 치고, 그 다음 레퍼토리인 '상록수'는 훌륭했는데...그 다음은 뭔고 하니 CM송 메들리를 부르더라.

 

'손이 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팔도 비빔면' '열두시에 만나요 해태 부라보 콘' 그 밖에 '옴파로스' 무슨 이런 노래들을 쭉 부르더라.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광복절 기념식에서 개별 상품과 회사 이름이 나오는 CM송을 부른 건지 도통 이해가 안되더라. 맘 같애선 항의하고 싶었는데 걍 참았다. 내가 부산일보, 국제 신문 같은 부산 지역 언론사 기자였으면 아마 분명히 문제 삼았을 건데...지금까지도 이해가 안된다. 더 가과이었던 것은 CM송 메들리가 이어지니까 광복절 기념식 참석한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따라 부르려 했다는 것..ㅠㅠ

 

포장증, 건국포장(훈장 비슷하게 생겼더만)이랑 시장이 준 팔목시계를 받았느데 그 팔목시계는 싯가로 약 1만5천원 정도 되 보이더라. 뒷판에는 지 이름은 떡하니 새겨놓고 ㅋㅋ

 

기념식 끝나고 일가들이 기념식장 인근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나이 든 고모들은 서훈을 기뻐하시고, 이것 저것 구비서류 찾아서 성공했다고 나한테 칭찬하시던데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제 밤 엠비시 뉴스데스크가 사회주의자 훈격 일괄 강등에 대해 리포트 했다. 내 인터뷰는 빠졌지만(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뻘쭘하기도 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던 김철수 선생 손자분 등의 인터뷰가 나왔다. 보훈처 공무원들의 말도 안되는 헛소리도 직접 전파를 탓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그냥 기자 리포트로 처리됐고...

 

서훈 받은 것 자체보다 오히려 사회주의자 훈격 강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부족하나마 매체 몇 군데 보도된 것에 대해 나를 더 칭찬 해주고 싶다. 민주노동당 모 의원실로도 문제를 제기했는데, 거기선 '아이구 그러십니까 우리도 적극 대응하겠습니까'라고 응답했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아마 그 의원은 815 하느라 바쁘고, 국내`국외 사회주의 항일인사들이 이북이랑 그닥 사이가 안 좋게 종결된 탓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리라 짐작은 된다만...쳇

 

이번 서훈이 고생만 하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그리고 이 땅에 살아있는 그 분들의 자녀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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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꿀꿀해

비 오다 말다 한다. 간만에 일찌감치 출근해서 점심 먹은 직후 까지는 정신 없이 일 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없다. 심심하다. 

 

날씨도 꾸리꾸리하고 꿀꿀한 노래 무한반복 듣고 있으니 아흐 기분이 완전히 바닥을 파고 들어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을 뚫고 들어가 맨틀에 닿을 지경이다. 차라리 맨틀에 닿으면 거긴 온도가 높으니까 뜨거워지기라도 할텐데 그렇지 못한게 아쉽다.

 

아웅~ 오늘 같은 날이 굽굽한 날은  김치찜 혹은 갈빗살 아니믄 녹두전에 소주 or 오뎅 꼬치에 청주 or 노가리에 맥주를 먹어줘야 하는데...

 

지난 일요일 '젊은 인생을 술로 탕진하지 마라'는 사장님의 사자후가 있은 후 며칠 안 되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는 영....파이다. 하긴 휴가다 뭐다 해서 사람들도 얼마 없기도 하지만. 

 

집에 일찍 들어가서 맛있는거 해먹을까?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 낸 후 가쓰오부시로 좀 더 우려내는 것이야..그래서 멸치, 다시마, 가쓰오부시는 버리고 무 반개 나박나박 썰고 갖가지 오뎅을 넣고 끓이다가 양파 반개 납작납작 썰고 고추 3개, 대파 반개 쫑쫑 썰어서 한 소끔을 더 끓이는 것이지.

 

겨자를 푼 간장을 마련하면 준비 완료. 비 구경하면서 오뎅탕이랑 청주 홀짝 홀짝 캬~

 

아무리 생각해도 청승이다ㅠㅠ 접때 혼자 메밀소바 맛있게 만든 다음 맛없게 먹은걸 생각하니 또 그러긴 정말 싫다.

 

아 평소 인간관계가 이럴 때 뽀록이 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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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건국포장 받다. 그러나...

3일 보훈처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을 추서한다고 밝혔다. 이번 명단에는 우리 할아버지도 포함이 됐다. 국내항일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호적상 이름 윤억병, 가명으로 우병을 쓰기기도 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1938년 2월 일본경찰에 피체됐다. 정부공식 기록으로는 청년동지회 활동, 학계 자료에 따르면 칠곡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 경북지역 사회주의자 동맹 등으로 불리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년 8개월 동안 지낸 우리 할아버지는 1939년 10월 14일 90여명의 동지들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송치됐고 이 중 26명이 구속,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1941년 3월까지 7회의 구류갱신처분을 당한 끝에, 1941년 3월 1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미 경찰에서 20개월 형무소에서 17개월을 지냈기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으로 석방됐다.

 

당시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받았던 대구 경북 답게 큰 조직 사건이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대구에서 공부하던 인물들이 대거 향리인 칠곡, 왜관 지역으로 낙향해 조선공산당 재건에 나선 것이다.(프로핀테른의 떽을 받았단다.) 왜관은 경부선 개통과 함께 커진 신흥 상업도시였지만 일개 면에서 터진 사건에 연루된 조직원이 90여명이 넘고, 구속자가 20명이 넘었다는 것은 당시 그 동네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심지어 도쿄등지에 조직원을 파견하기도 했단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 였단 말이다. 적용받은 법규는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법이다. 20년대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하에서 급증한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 쇼와 시대에 만든 법이다.)

 

지금은 일흔을 훌쩍 넘긴 고모들, 생전에 할머니의 전언에 의하면 형무소에 면회 갔더니 손톱이 다 빠졌더라는 등 딱히 알만한 온갖 고문들을 다 받은 모양이다. 또한 듣기로, 해방 이후에 더 힘들었단다. 일제 때 치안유지법 위반 '전과자'는 예비 검속 대상이었고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10.1 항쟁등 사건이 계속 터진데다가 어찌나 못살게 굴던지 견딜 수가 없어 부산으로 식구들이 이사했단다.

 

하여튼, 뭐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들까지 서훈대상에 포함한 것은 전향적인 것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훈격이 문제로 터졌다. 경찰 유치장 20개월, 교도소 17개월 동안 옥살이 한 우리 할아버지는 아무리 보수적인 기준을 적용해도 건국훈장 애족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 등급 낮은 건국포장을 받은 것이다.

 

보훈처 공훈심사과 실무자는 '사회주의자는 한 등급을 낮추기로 결정했다'고 말해주더라. 공식적인 기준이냐는 말에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기준을 정했단다. 그러면서 이 전 정권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혀 포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일도 전향적 인 것이란다.

 

차라리 안주고 말던가 자기들이 선심쓰는 것도 아니면서 사회주의자는 한등급 낮춘다는 기준을 어떻게 삼을 수 있는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거지 동냥주는 것도 아니고...열받은 아버지는 이것을 받아야 되냐 말아야 되냐신다. 

 

게다가 청년동지회(보훈처 공식 표현), 칠곡공산주의자 협의회, 사회주의자 동맹으로 할아버지와 같이 옥고를 치룬 분들중 다수는 이미 노태우정권인 90년, 김영삼 정권인 95년에 훈장을 받았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보니까 역시 보훈처 직원은 '그때는 모르고 줬을 거고 이번엔 알았기 때문에 한 등급 낮춘거다' '형평성 문제는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 분들걸 하나 낮출 수도 없는것 아니냐'고 되묻더라.

 

결국 정부에서는 사회주의자 47명을 포상했다고 떠들석하게 선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훈격조작이 숨어 있고 사회주의자=2등 독립운동가 라는 기준이 서있는 것이다. 

 

옥신각신 끝에 보훈처 담당자는 "선생님 할아버님 같은 경우에는 순수 민족주의 활동을 한 것은 밝혀진 게 없고 사회주의건만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순수 민족주의 활동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있어야 사회주의의 흠집을 가릴 수 있단다. 

 

난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이 없으니 그 분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30년대 후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다. 민족해방의 경로로 사회주의를 택한 사람들인게다. 물론 그 안에서도 좌우 대립이 있어서 민족주의를 탈피해야 한다는 측도 있었고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 안에서 좌파였는지 우파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부에서 이런식으로 재단 당해야 할 행위를 한 것은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할 바는 전혀 아니라고 확신한다. 보훈처 직원은 심지어 '사회주의자였던거 아시죠? 재건공산당 사건이었잖아요'라며 비아냥 혹은 협박 식으로 이야기 하더라(그렇게 들린 건 내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나도 열받았다. 그래서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수훈 공훈록(서훈을 받으면 이러이러한 공적으로 이런 상을 수상한다는 공훈록을 작성하게 돼 있다)에 '재건 공산당활동 결과로 건국포장을 수여한다'고 명기해달랬다. 그니까 돌아오는 답은 '선생님이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 도 있지만 국민감정이나 또 일가 친척분들도 그걸 원하시지 않을 것'이란다. 하긴 그 말이 맞지 우리 일가 친척들이 그걸 원할런지는 나도 자신 없다.

 

도대체, 90년에 이미 같은 사건으로 동지들이 서훈을 받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연루자를 찾아 서훈을 해도 될까 말까한 판국에 개인이 쎄빠지게(국립문서보관소에서 관련 자료 찾느라 작년에 고생좀 했다) 찾아서 올린 것도 열받는데 사회주의자는 한 등급 낮춘다니 , 무슨 선심 쓰는 것인가?

 

열받는다. 이래 놓고 국민통합이니 사회주의자 재발굴이니 선전하고 앉았다. 그래 머 국가에서 주는 훈장 받으면 머하고 안 받으면 또 머하냐 싶긴 한데...이런 식은 아니다. 누가 누구를 평가하고 감히 사회주의자는 한 등급 낮춘다는 기준을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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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바 없고, 머 어쩌라고? 사발 풀기도 힘들고, 사발 푼 다음에 감당키도 힘들고, 니미럴...따져보니 약속은 딱 2주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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