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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살아야

원주민들은 아직도 나체지만, 지구상 존재하는 어느 동물도 속옷을 입거나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냉난방 장치와 두꺼운 옷을 입는다.   피부염과 아토피도 불결함이 원인이라고 매일 계면활성제의 세제로 피부를 씻으며 혹사시킨다.   인간은 피부를 통해 자연과 접점하며 산다는 것을 상기해야하고 피부를 쉬게해야 한다.   자연과 접점 부위 피부를 외부와 자주 노출시켜야 건강해진다.   몸에 페인트칠을 해보시라, 피부를 통한 호흡은 중지되고 심한 경우 사망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화장품 오남용의 심각성은  모두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생긴대로,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화장은 결국 모공을 메움으로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기능의 충족조차 검토해야 할 사안임에도 현실은 모두가 영화배우라도 될 양인 것 처럼 마구 변신을 향해 달리고 있다.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어줍잖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겠다니, 내실보다 형식을 탐하는 세태가 아쉽다.  사실 모공을 좁혀서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싶다면 비싸고 해로운 화장품 대신 세면이나 목욕시 마무리를 찬 물로 처리하므로 얼굴이나 몸통의 피부를 수축시켜서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피부는 배설시키는 가장 큰 기관이다. 적당한 배설을 못하면 간장, 폐, 장, 신장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노폐물 배설기관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기관들이 떠맡아야하고 그 기관들은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침에 피곤하고 추위도 더위도 잘 참지 못하고 근기도 부족하다면 나의 피부관리는 어떤가를 한번쯤 되돌아 보자. 그 첫째 단추는 피부에서 시작한다.   풍욕과 냉온욕은 못할망정 피부가 신선한 공기를 접할 수 있는 나름의 환경 조성과 건강법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 사우나에서 드라이기로 머리와 거시기를 말리는,  '두한족열'에 절대 반하는 이웃을 보고는 답답했다.  더우기 사우나에 비치된 크림으로 몸 전체를 쳐바르는 분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머리와 남자의 거시기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뇌세포나 정자의 생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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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내가 영문학 비평과 이론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근대성의 이분법과 후기근대성 혹은 말기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상대성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주의다,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는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의 근대성이나 후기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게 익숙해져서  “모든 사물을 유무의 상으로 보도록 익혀온”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이나 후기근대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탈근대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명진 스님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 등등의 모든 이분법과 상대성에서 벗어난 진정한 탈근대인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길목에서 일제식민지를 경험한 우리가 선진국과 후진국,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이분법이나 상대성에서 벗어나는 근대에서 탈근대의 시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길목에서 진정한 탈근대인,  명진 스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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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기본법칙과 흙

흙에 대한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 몸은 자연에서 생겨났으며 흙속에 인간의 씨가 있다는 것.   성경말씀에도 흙으로 사람을 빚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며 우리는 표토의 것을 먹고 살아간다.   한국 사람의 원소와 몽골사람의 원소가 다른데 그 지역의 흙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원소를 조사해보면 그 신토불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 평범하다. 장수마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신토불이 원칙에 따라 토종음식으로 살아간다. 그 지방 기후와 풍토가 그 지역인의 기호에 맞기 때문이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도 오천년 역사 속에서 봄에는 냉이와 달래 같은 산나물, 여름에는 텃밭에 나는 아침이슬에 젖어있는 각종 채소를 바로 따다 먹었다.   가을에는 채소와 사과 배 감 등의 과일을,  겨울에는 배추와 무로 김치와 동치미를 담가 먹었다.   또 겨울에는 콩을 삶아 메주를 띄우고 봄이 되면 메주로 간장과 된장을 만들어 먹었다.  어렴풋 그 시절이 그립다.   몸이 아프고 장에 탈이 났을 때 제 계절 식품과 전통음식을 먹어주는 것이 회복이 빠르다는 것을 누누이 경험하고 있다.

 

다 아시는 이야기...   연령이 낮을수록 된장도 김치도 담글 줄 몰라서 마트에서 사다먹는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지요. 

먹는대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염연한 법칙에도 불구하고 된장과 김치보다는 가공식품에 길들여지는 식문화 개선을 위한 각자의 노력이 절실한 과제인듯 하군요.

 

참터는 그 규모는 작지만 올해도 참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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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선생님

연락바랍니다.  일진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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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와의 소통

태교란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위한 부모의 노력이라고 한다.  즉 부모가 되는 준비과정을 행동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임신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포함해 임신 사실을 아는 그 순간부터 예비 엄마 아빠는 노력해야 한다.  임신기간 열달이 출생후 십년 교육과정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기의 인격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태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예비엄마의 안정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임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만큼, 태교 또한 예비 엄마만의 몫이 아니다.  임신사실을 주변에 알려 진정한 축복속에 지속적인 배려와 관심을 받아야만 한다.  예비엄마가 느끼는 자존감이 그대로 태아에게 영향을 미쳐 아기도 뱃속에서 편안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아기의 골격이 형성되는 임신초기부터 중기, 그리고 말기에 이르기까지 늘 예비엄마는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기에 맞는 적절한 음식물 섭취는 물론 가볍게 몸을 움직여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깊은 호흡을 해서 순산을 위한 출산준비를 하여야 한다.  건강하고 훌륭한 아기를 낳고 싶은 것은 모든 임산부들의 소망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될거라는 긍적적인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부부애도 다질 겸 서로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고 발바닥도 맛사지해주면 혈액순환에도 좋지만 예비엄마 아빠의 사랑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아기가 더 행복해 할 것이다.

 

그리고 임신부터 태어나서 3년까지 아기는 스스로를 기억 못한다고 한다.  그 기간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만 훗날 살아가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잘 극복할 수 있는 감정적인 힘이 생긴다고 한다.  출산 후 맞벌이 부부도 출산휴가를 받아 아기가 엄마와 떨어질 때 느끼는 두려움을  주지 않도록 곁에서 늘 보듬어 준다면 결국 큰 의미에서는 이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어른들의 문제다.  그럼으로써 좋은 태교는 예비엄마 아빠에게 매우 의미있는 일인 것이다. 심성이 바르고 나눔과 배려의 마음을 가진, 이 사회의 멋진 구성원이 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는  더할나위 없이 뿌듯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멋진 그림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세상에 태어나서 큰 업적을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하겠지만 훌륭한 한 생명을 제대로 잉태하고 잘 출현시키는 것보다 우선될 일이 또 있을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태아교육, 예비엄마 아빠에겐 특단의 결의가 필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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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참터에 영면하신 분이 조성민동지라는 사실을...  사고사로서 천수를 누리시지도 못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신 분이시라니 마음이 아프군요.  부디 다음 생엔 민중이 주인된 세상에서 참삶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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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

어린시절 일찍 배우는 습관중 하나가 이빨을 닦는 것인데 익히 알면서도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치과전문의들은 3.3.3을 강조한다. 하루에 군것질없는 정상적인 식사를 전제로 식후 3번, 식후 3분이내에, 3분동안 닦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닦을 것인가의 방법은 잇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각자 익혀 보자.

 

더불어 치아관리 및 치솔관리와 관련한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치솔에 약간의 치약을 묻힌 다음 준비된 소금(생활죽염은 저렴한 가격임 )을 찍어 두가지 재료로 양치질을 한다면 입몸과 치아의 균을 제거하거나 치솔에 찌들은 오염물질의 위생관리에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치약이 보급되기 전 우리 조상들은 천일염으로 양치질을 했다.  너무 거칠어서 입몸에 피가 나는 등 불편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치약의 보급으로 편리함은 얻었지만 소금의 이점을 병행사용함으로 튼튼한 치아관리로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나를 세상에 출현시켜주신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 의무일 것이다.

 

자연사의 경우 위장장애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소화기능은 치아에서부터 작동한다.  무언가 입에 넣고 충분히 씹어서 위장으로 보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본인의 장기를 혹사시켜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입에서 위장으로 전달되는 음식의 영양이 모두 내 것으로 된다는 기대는 착각이다.  건강한 치아로 충분히 씹어, 침샘을 가동시키고 여기서 멸균과 소화액을 분비하므로 위장의 일 량을 경감해주어야 한다.  치아를 튼튼히 하는 것은 치아의 건강뿐 아니라 위장은 물론 신체건강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임을 잊지말자.

 

3분의 투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우리 주변에 이를 지키는 이는 흔치 않다.  먹는 것의 소중함 만큼 치아관리에 변화를 주자.  천천히 꼭꼭 씹는 식습관만 지키어도 위장에 대한 괜찮은 예우이다.  잇몸은 재생이 안된단다.  잦은 술과 담배 군것질에 익숙한 형편이라면 더욱 실천해야할 과제이다.  이빨의 역할을 간과한채 입을 통해 부단히 무언가를 집어넣어 나를 이롭게 하겠다는 부질없는 욕심은 내려놓자.  연후에 깨끗해진 이빨로 거짓말, 발림말, 이간질, 쌍소리를 하지않는다면 우리의 이빨에선 아름다운 향기가 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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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과 실내 오염이

추워지니 사무실이나 집이나 창문을 꼭꼭 걸어 닫는다.   현대인들은 실외보다 실내에서 생활이 평균 90%다.   그런데 춥다보니 사무실에선 온풍기와 난로는 한껏 올려놓는다.   집에서도 역시 가스사용과 음식냄새가 섞여있는데도 환기가 적다.  

 

공기오염은 알게 모르게 몸을 삭게 한다.   만성질환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두통과 근육통, 우울증, 기관지염, 기관지천식, 메스꺼움 구토증상, 현기증 피로의 원인.   가족과 행복하게 보내야하는 시간에 신경질과 짜증을 내는 것도 신선한 공기부족이 그 일단의 원인일 수  있다.

 

공동주택의 필요 환기량은 0.7/hr 로 정해져 있지만 어느 사무실이 그러한가?   거의 하루 종일 닫아놓는다.   그러다보니 이산화탄소 농도는 사무실내( 평균 780ppm)으로 사무실외( 평균 350ppm) 보통 두 배 이상,  혈액속 산소농도를 떨어뜨리는 일산화탄소 역시 평균 2.6ppm으로 일본의 1.4ppm 보다 두 배다.   또한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도 실내(0.032ppm)으로 실외(0.007ppm)보다 4.6가량 높고, 미세먼지농도도 두 세배 이상이다

 

추운 겨울철엔 특히 집이든 사무실이든 환기를 때때로 해서 자신의 건강을 챙김은 물론 모두가 행복한 삶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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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냉해지는 사람들

가끔 겨울 산에서 조난을 당해 구사일생으로 구조되는 사람들이 있다.   추위에 지내다 보면 주위 환경에 열을 빼앗기며 체온이 떨어진다.   온도가 낮아지는 초기엔 손발의 혈액은 일시적으로 글로뮤로 내보내며 유지하지만, 추위가 오래되면 가장 중요한 뇌와 심장부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손발의 혈액은 차단된다.

 

체온이 30도 이하의 극 저체온증이 되면 부들부들 무의식적으로 떨리게 되거나 사고력이 떨어지며 의식에도 문제가 된다.   영화 한 장면에서 체온이 떨어지는 사람을 ‘자면 죽는다. 잠들면 안 돼!!!’ 라며 이마를 두드리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러시아에서는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쓰러져 겨울에 동사한 사람들이 많다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술을 마시면 오히려 체온을 더 떨어뜨린다.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는 심박동수를 늘리고 혈관을 확장하고 혈류흐름을 빠르게 하여 손발의 온도를 높여준다.  일시적 추위에 노출될 때, 또는 소량은 도움이 되겠지만 오랜 시간 견뎌야하는 상황에선 중심부의 체온을 빼앗아가므로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참고로 겨드랑이보다는 혀 밑 온도가 높고 체내 중심부는 약37도 가량이다.  

 

술 먹고 나면 더워서 열이 난다고 한다. 이 열은 몸에서 나는 열이 아니고 머리에서 나는 열인 것이다.  체온은 떨어지는  것인데 ...  착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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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저에게 ‘스님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기 위해 살고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청춘이라는 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할 수 있는 이단의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대학생들이 무조건 남을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끝없는 물음 속에서 자기만의 인생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고 저 사람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아류인생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길을 묻고 내가 나를 찾아가는 나 자신의 길을 가야합니다.


 

남들처럼 대학 들어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려 살다가 죽는 습관적인 삶보다 한 순간을 살더라도 내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길이고  더 행복한 길입니다.


 

MB시대에 와서 오로지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착각 속에서 더 많은 것, 더 편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만, 부자가 된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만 쫓아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은 마치 울타리 안에 주인이 주는 밥 얻어먹고 때로는 매질도 견디면서 사는 가축과 같은 삶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 길들지 않는 야생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21세기 청춘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 춥고, 때로 배고프고, 불편한 잠자리에 들더라도 울타리 속에서 편하지만 노예와 같고, 가축과 같은 삶 대신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스스로의 길을 가는 진정한 자유인,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참된 인생의 길이고 정말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2011년 9월 8일 충북대 특강 ‘21세기에는 혁명적 이단아의 길을 걷자’ 중


 

충북대학교에서 명사들을 초청해 옴니버스 특강을 한 달에 한 번씩 하는데 저에게도 한번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대학생과 시민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 특강에서 한 말입니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날 강연 첫머리에 학생들에게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물으면서, 저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기 위해 살고 있다.”고 답할 거라고 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누가 그 답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솔직히 모르기 때문에 “왜 사는지 몰라서 산다.”라고 답합니다.  우리가 사는 까닭은 정말 왜 사는지 몰라서 사는 것입니다.  만일 왜 사는지 안다면 공자의 말처럼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공자를 세계 4대 성인으로 꼽은 이유가 이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안다.”  정말 우리는 나 자신을 아는가라고 묻는다면 모른다는 답 말고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렁이가 왜 기어가는지는 압니까?  역시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우리가 모른다는 그 사실 하나뿐일지도 모릅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간명하고 변설은 화려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버리고 솔직하게 모른다는 그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물으면 된다? 나는 뭘까? 왜 살까? 묻고 또 묻는 것이 수행인 겁니다.  우리가 80년을 살건, 100년을 살건 내가 뭔지, 왜 사는지 모르고 살다가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가긴 가는데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체 그냥 가는 것입니다.


 

친구가 강남 가니까 나도 강남 가고 친구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나도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겁니다.  유행 따라, 친구 따라 살다 가고 있는 겁니다.  돈을 쫓아, 욕망을 쫓아다니다가 길어야 100년을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무엇 따라, 누구 따라 사는 삶은 아무리 잘해도 2류인생입니다.  내가 내 길을 가면 그건 아무리 못나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길이고 일류의 길입니다.  그런 일류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일류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명품으로 치장하는 그런 물질적 인생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재미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프라다라는 명품 가방을 올리고 한 번은 상표를 떼놓은 뒤, 또 한 번은 상표를 붙인 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더니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왔습니다.  상표를 붙이지 않았을 때는 ‘뭐 이런 싸구려 가방이 있냐’‘동대문에서 샀냐 남대문에서 샀냐’‘한 5만원이나 할까’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프라다라는 상표를 붙이고 올려놓자 ‘와 멋지다. 간지난다’‘어디서 샀어요. 나도 갖고 싶다.  샤방샤방’‘역시 명품이라 그런지 뽀대 나네요’라는 반응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방은 똑같은 가방인데 상표가 붙느냐 안 붙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가 난 겁니다.


 

사람들이 가방이라는 실제보다 어떤 상표가 붙었느냐 하는 이미지를 더 쫓는다는 말입니다.  프라다에서 만든 가방이 프라다라는 상표를 붙이지 않는다고 품질이 나빠집니까?  아닙니다.  가방은 가방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미지를 쫓습니다.  마치 불나방이 불을 쫓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지를 쫓다 보니까 짝퉁들이 나오는 겁니다.  짝퉁은 명품이 아닌데 명품처럼 거짓되게 꾸민 상품을 말합니다.  짝퉁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남들 따라 사는 2류인생이 다 짝퉁인 겁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길을 당당히 가면 그게 세상에 둘도 없는 명품이 되는 겁니다.

 

 

헛된 것을 쫓다 보니까 치장을 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게 되지요.  환상을 쫓아서, 남 따라 살다 보니까 자기 얼굴도 연예인 얼굴처럼 되고 싶어 그 사진을 들고 성형외과에 가서 그대로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모두들 그렇게 유행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니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은 세상이 된 겁니다.  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성형한 얼굴보다 자연적인 얼굴인 ‘생얼’이 더 호평을 받습니다.

 

‘생얼’이 뭡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가 받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꾸미는 데 치중하기보다 내실을 구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프라다 상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방의 실제적 품질에 노력을 쏟게 되면 좋은 가방을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남들처럼 상표나 이미지 쫓지 말고 자기만의 길, ‘생얼’의 길을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없는데 있는 척, 고상한 척, 성스러운 척 하지 말고 못나면 못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보여주며 살자는 겁니다.  솔직하게 살자는 겁니다.  변소간을 아무리 금단청, 은단청을 해놓는다고 똥냄새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삶은 변소간처럼 살면서 화장을 덕지덕지해서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죠.  삶이 부처님 같아지면 누더기 옷을 입어도 성스러운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물질적 욕망과 외적 모습만 쫓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삶의 실질적 내용보다 헛된 이미지를 더 중요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허상을 보고 달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물질수준이 높아지면서 더욱 그렇게 됐습니다.  인간이 물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인간을 부리고, 욕망이 인간을 부리는 사회로 전락한 겁니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유행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길을 가는 겁니다.  마치 레밍이라는 쥐가 앞의 쥐만 쫓아가다 강물에 모두 빠져죽는 것처럼 이 길로 가는 것이 옳은가라는 물음, 성찰을 잃어버리고 욕망만을 쫓아온 겁니다.


 

저 역시 그런 시류에 편승해, 스님이라는 어떤 환상적 틀에 맞춰 고상한 척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되묻고 있습니다.  왜 사는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우리가 과연 무엇을 옳다고 감히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면서 안다고 확신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재앙입니다. 안다고 확신하고 옳다고 맹신하는 순간 우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2009년 11월 30일 경향신문에서 마련한 작가 신경숙 씨와의 대담에서 “저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장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에 대해 늘 회의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위험합니다.  그런 태도가 전쟁까지 빚어냅니다.  확신을 갖고 하는 일이 갈등을 낳는 겁니다.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에 대해 항상 회의하고 돌이켜 보고, 끝없이 옳은 길을 살피며 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MB가 가장 나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한 적 있습니다.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에 대해 항상 회의하고 돌이켜보면서 끝없이 옳은 길을 살피며 가야하는 것은 비단 MB나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에게 가장 무겁게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끝없는 판단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갈 것인가’ ‘저렇게 갈 것인가’. 그런 갈림길에서 정말 이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정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더욱 겸허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겸허한 성찰과 물음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릅니다.  성찰과 물음이 있다면, 설사 잠시 잠깐 잘못된 길에 접어들더라도 다시 돌아 나와 바른 길을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옳다는 확신에 빠지지 말고, 늘 회의하는 혁명적 이단아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불회(但知不會), 다만 아는가 알지 못함을.  보조스님 <수심결>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가 인생의 좌표로 삼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도 왜 사는지 몰라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쯤 왜 사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처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걸 깨닫게 될 날이 올지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다만 저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다만 물을 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은 다만 이 하나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1년 11월 22일 명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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