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쓴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0건

  1. 0.5도씨 2006/12/13
  2. 2. 두더지와 화단 2006/12/07
  3. 백일야화 2006/12/06
  4. 소울메이트 (1) 2006/12/06
  5. 그녀에게 가는 길4 2005/07/23
  6. 그녀에게 가는 길3 2005/07/22
  7. 그녀에게 가는 길2 2005/07/22
  8. 그녀에게 가는 길1 2005/07/22
  9. 두더지 아가씨에 대한 추억 2005/07/19
  10. 3개월 2004/07/16

0.5도씨

from 2006/12/13 12:43

새벽3시, 그녀는 잠이 오지 않는다.

체온이 0.5도씨 정도 올라있다.

이 시간에 그녀의 체온은 언제나 0.5도씨 정도 더 높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0.5도씨의 차이로 더워진 피는 그녀의 몸에서 습기를 증발시키고 몸을 건조하게 만든다.

입술도 손끝도, 발끝도 부풀어 오른다.

낮동안 피가 돌지 못하던 곳까지 구석구석 피가 돌면서 그녀는 온전히 깨어난 새로운 사람이 된다.

피곤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대답해야할 너무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아주 오래 질문들을 외면해왔다.

질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질문들은 산더미처럼 그녀의 옆얼굴에 쌓여있다.

고개를 돌리자 질문들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린다.

 

나는 그와 잠을 자야하는 걸까? 혹은 자면 안되는걸까? 그렇다면 왜? 와 같은 대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부터 주문해둔 청소기는 언제 도착하는 걸까?, 나에게 맞는 진실의 크기는 얼만한 것일까?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 잠을 자야하는 걸까? 일어나서 책을 읽을까? 그에게 뭐라고 대답하면 성의있어지는 걸까? 내일은 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까? 회사에 가면 피곤할까? 의외로 피곤하지 않을까? 다음 프로젝트의 컨셉은 귤로 할까? 아님 레몬으로 할까? 다시, 그와 잠을 자면 뭔가가 달라질까? 대답하지 않아도 됨.

 

그런 생각마다에 각각의 대답들을 얼기설기 얹어두던 중에 그녀는 몸을 열심히 더듬고 있는

그를 문득 느끼게 된다.

몇시간 전부터(!) 무심히, 끊임없이 그를 밀어내는 그녀의 몸을 그는 끝도 없이 만지작 거린다.

허벅지에 놓인 손을 치우면 다른 손이 가슴으로 올라온다.

가슴에 놓인 손은 그 손을 밀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잠이 든 가운데서도 그는 집요하다.

그녀는 그에게 들리도록 끙끙대면서 그를 밀친다.

그의 몸이 활처럼 굽혀지고 등과 발은 멀어졌지만 그럴수록 머리와 손은 그녀에게 파고든다.

 

"제발 좀 개토를 내버려둬! 혼자있고 싶단 말야!"

 

그가 눈을 뜬다. 겁먹은 눈. "누구 손이 개토를 만졌지?"

 

그는 멀리 떨어진다. 이불도 3분의 1만 덮는다. 이내 잠이 든다.

그녀는 다시 상념에 잠긴다.

나는 어떤 진실을 말하게 되어있는걸까? 나는 언제쯤 내게서 죽음을 몰아내거나 함께 살아가게 되는 걸까? ...

 

그를 본다. 아이처럼 자고 있다. 그의 머리를 당겨, 그의 몸쪽으로 이동한다.

그는 추처럼 무겁다.

그의 손을 들어 등 뒤로 돌리고 그의 머리를 가슴에 묻는다.

그는 자연스럼게 몸을 움직여 그녀의 몸에 밀착한다.

와 같은 사랑이야기는 좀 그래...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바라본다. 아이처럼 자고 있다.

그의 머릴를 감싸 가슴속에 밀어넣고 그의 허벅지에 다리를 두른다.

그의 몸에서 달착지근한 땀냄새가 난다.

0.5도씨 때문이다.

 

그의 몸을 둘러싼 더운 호흡들이 미묘하게 자극적이다.

그는 자면서도 그녀의 감정변화를 쉽게 눈치채고 대담하게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얹는다.

"손치우지 못해!"

그의 손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 즐거운 인생.

 

 

 

 

 

글이나 그림은 정직하다.

나 이상의 것이 그려지지 않는다.

무모함과 무지함, 혹은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으로

그걸 그려보지만

나자신이 싫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미묘한 개인적 감정의 변화들을 공들여 표현하는 것에 대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아하면서도 기껏 할 줄 아는 것이 그뿐이다.

마음가짐의 변화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혼합프레스 컴플렉스 꿈을 꾸었다.

컴플렉스 덩어리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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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12:43 2006/12/13 12:43

2. 두더지와 화단

from 2006/12/07 08:20

두더지들이 내 골반뼈를 보고 있다.

내 뼈는 형광물질이라도 섞인듯 하얗다.

기형적으로 이지러진 오른쪽 골반에

관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빈약한 굴곡이 있고 그곳에 내 오른쪽 다리뼈들이

슬쩍 기대어 있다.

그래도 나는 그 관절에 의지하여 오랫동안 걸어왔다.

두더지들은 내 오른쪽 골반뼈를 보고 있다.

그들은 울고 있다.

그들에게서 내 하얀 뼈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내뼈는 그래서 그렇게 하얗게 된걸까?

 

아니다.

그들은 나를 먹고 있다.

내 뼈위로 그들의 침이 흐르고 있다.

뼈위에는 살점 한조각 남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다 먹고도 그들은 내 위로 침을 흘린다.

그들은 그저 내게 등을 돌린채

마치 우는 것처럼 내 살점을 뜯어 먹었다.

 

 

 

베란다 화단에 놓여있던 큰 화분 하나가 깨졌다.

작은 화분들은 작아서 그랬는지 멀쩡한데.

깨진 조각에 오공본드를 발라 얼기설기 맞춰서 다시 흙을 담고

흙과 함께 덩이진 고무나무의 뿌리를 다시 숨겼다.

 

오늘은 베란다 문을 닫아놔야겠다고 생각한다.

화분이 깨지면 손이 많이 간다.

 

 

일어나려는데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옷을 들춰 거울에 비춰보니 가로로 긴 멍이 들었다.

자다가 침대에 부딪친 걸까? 기분이 좋지 않다.

 

 

 

끔찍한 꿈을 꾸었다.

눈을 뜨니 내곁에 아버지가 누워있었다.

나는 내가 16살인 것 같다.

남편이 꿈인지 아버지가 꿈인지 모르겠다.

 

 

 

나는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회사생활을 2년 밖에 안해보긴 했지만, 나는 정말 집에만 있고 싶었다.

아이를 갖고 싶다.

남편은 왜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걸까?

나는 내가 임신을 한 장면을 상상한다.

그가 나를 소중히 다뤄주고 있다. 행복했다.

 

 

 

 

.... 나갔다 와서 다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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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7 08:20 2006/12/07 08:20

백일야화

from 2006/12/06 20:50

1. 꿈을 먹어치우는 페로시타스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잠을 자기에 앞서, 나는 이 글을 쓴다.

 

그 어떤 정의감이나 의무감 혹은 책임감, 확신도 없이 나는 그곳으로 간다.

나는 왜 그곳으로 갈까? 서글프게도, 나는 가야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거라고 믿었던 건 언제까지 였을까?

 

[나는 본다. 나는 창조한다. 그리고 나는 자유다.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쇠사슬까지도 내 것이다. 나는 내 고통의 주인이다.]

 

로망롤랑의 글귀를 노트에 적어 놓고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죽음까지도 내 선택에 의한 것으로 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마지막을 그려보곤 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내 고통은 커녕 내 즐거움조차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나는 파괴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에 구속되어 있다.

아무것도 내것이 아니다. 나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서글프게도, 정말 서글프게도 나는 그저 가야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

가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는 작은 기대조차 내게는 없다.

 

왜 나인가? 라는 질문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묻게 된다.

 

어젯밤의 꿈을 꾸기 전까지, 나는 몇년 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을 꿀 시간쯤이면 나는 언제나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있다.

운이 좋아 앉아서 가는 경우에

버스에서 달콤하고 깊고 짧은 토막잠을 잔다.

 

보통은 좁은 바닥에 의지하여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다른 사람들과 최소한으로 맞닿기 위해 애쓰면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고르는 게 귀찮아서 MP3 플레이어는 셔플로 해둔다.

 

나는 억울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랬다.

신체적 결함,10년이상 지속된 부모의 별거나, 말도 안되게 가난한 가정 형편,

정신적 결함이 있는 동생, 내세울 것 없는 외모,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버린 억울함들.

 

회사에서는 당연히 해고 당하게 될 것이다.

다시 취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 가족들은 가난의 공포와 막막함에 떨어야 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정도쯤, 스스로들 알아서 하면 된다.

내가 꿈을 먹어치우는 페로시타스와 싸우는 동안 그들은 가난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어쩌면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하루만에 나는 돌아와서 회사에는 사유서를 내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

나는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

 

거대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한 페로시타스의 꿈.

 

어둠 속에서 목걸이의 에메랄드 만이 녹색으로 반짝였다.

짐승의 눈처럼, 에메랄드는 두개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색.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의 윤곽이  나를 덮친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그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은 사지가 분리된 듯, 나는 대체 내 팔을 찾을 수가 없어

덮쳐오는 어둠을 망연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림자는 여러차례 나를 덮쳤다.

내 다리는 아주 먼곳에 버려진 듯 어느 곳으로도 나를 도망치게 해주지 않았다.

눈꺼풀조차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고

귀는 여느때처럼 무방비로 어둠의 적막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냄새.

냄새가 필요했지만, 물 속에서처럼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둠은 끈적하고 무거웠다.

목소리가 나지 않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작은 비명조차 낼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내게 다가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좁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내 앞을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나를 위협할 뿐이었다.

 

두터운 어둠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아무런 매개체도 통과하지 않고

내 깊은 심장속에 울렸다.

 

나를 찾아오겠노라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때까지 찾아오겠노라고.

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내 껍데기는 영원히 죽지 못할 거라고.

지금의 현실을 시지프스처럼 반복하게 되겠지만 결코 희망은 없을 거라고.

 

나는 그와 싸우는 수밖에 없다.

160cm도 안되는 작은 키에 좁은 어깨, 장애가 있는 오른 다리를 이끌고

조용히 그와 맞서는 수밖에 없다.

 

여느때와 같은 일상의 피로가 나를 잠들게 한다.

나는 잠이 든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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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 20:50 2006/12/06 20:50

소울메이트

from 2006/12/06 14:51

하늘이 단단하게 얼어있었다.

햇볕조차도, 공중에 그대로 얼어있어 그저 얼음처럼 눈부시게 반짝일뿐

어떤 온기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온기도.

 

너무 추워서 토할 것 같았다.

한걸음 한걸음 차갑고 단단한 공기를 체온으로 녹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코끝은 이미 햇볕처럼 굳어져서 내것이 아닌 것처럼 얼굴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하지만 곧 도착할거야.

 

 

어느날 일어나보니 모두가 죽어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어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여느때처럼 냥이들과 식사를 하고 혼자서 아파트 단지안을 산책할때는

수위아저씨는 잠이 드셨구나...피곤하셨나보다 했다.

날씨가 무시무시하게 추워서 거리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했다.

정말로 끔찍하게 추워서 나도 곧 집으로 돌아왔다.

 

3일동안은 몰랐다.

블로그 사이트에 아무 글도 업데이트 되지 않아도

네이버에도 다음에도 아무런 새로운 뉴스가 없어도

메신저에 아무도 새로 접속하지 않아도

혹은 모두가 자리비움으로 남아있어도

모두가 죽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보일러를 아껴 틀면서 이불속에 앉아 책을 읽고 냥이들 밥을 주고 인터넷 쇼핑몰을 구경하고

가끔은 12층 높이의 베란다에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하루에 8시간씩 규칙적으로 잤다.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잘못걸려오는 전화 외에는 원래 전화따위 오지 않았었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는 오후 3시경에 3번 벨을 울리게 한 다음 내가 받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오후 7시경에 전화했다.

 

 

안녕, 나야.

...

 

개토는 살아있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화하고 싶었어.

 

 

갑자기 지구전체의 무게가 내게 전달되었다.

나는 지구전체를 '혼자' 받치고 서있었던 것이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불쌍한 아틀라스처럼 지구전체를.

 

 

개토야, 나도 살아있어.

 

 

나는 그를 7년 전 시장에서 만났었다.

시장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겨울잠같은 건 자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하루하루를 10년처럼 열심히 살고 있었다.

심지어 하루에 8시간도 자지 않았다.

 

모든 의미는 하나의 시공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시공의 좌표에는 작은 점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나의 소울메이트였다.

그와 나는 시공의 좌표에 얼룩으로 조차 보이지 않을

작은 점들을 좌표밖을 향해 찍어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좌표의 어느 한 점에서 만난 것이다.

 

 

등뼈가 아파왔다.

나는 블랙홀의 입구가 된 것 같았다.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나는 숨죽여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개토야, 우리 만나.

 

 

그는 먼곳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서로 만나려면 아주 많이 걸어야 한다.

 

나는 네이버 지도 검색으로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차분하고 주의깊게 골랐다.

다리가 아프니까 나는 그보다 조금 덜 걷기로 했다.

우리는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죽은 사람들이 곳곳에 죽은 짐승들처럼 놓여있었다.

썩지 않은 그들의 얼굴이 눈동자가 부드러워 보였다.

하나같이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였다.

웃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얼어있었다.

 

모두가 죽은 것이다.

순식간에. 눈깜빡할 사이에.

 

그리고 그와 나는 살아남았다.

 

너무 추워서 수원역근처에 있는 가게들로 들어가 보았다.

실내는 따듯해서 이미 사람들이 부패하기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냄새가 지독하지는 않았다.

나는 주인혼자 죽어있는 카페에 들어가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주인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팔이 머리를 받치고 있는데

머리는 죽으면서 갸우뚱해진 듯 했다.

 

가게 안에는 온풍기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10분 후면 도착할거야. 미안해.

 

 

죽은 주인 옆에서 커피를 만들었다.

커피데우는 기계안에 뜨겁게 말라붙은 커피를 닦아내고

다시 물을 내렸다.

커피향이 코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역한 냄새가 급작스럽게 내 코와 머리를 강타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역한 냄새가 나는 가게 주인 옆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지구는 너무 무거웠다.

 

 

 

우리는 가게 주인을 복도로 옮겼다.

그녀는 더이상 창밖을 내다 볼 수 없는데도 여전히 팔을 굽힌채 였다.

가게 안에 있었는데도, 그녀의 몸은 나만큼 차가웠다.

 

 

우리는 카페의 3인용 의자에서 옷을 벗지 않고 긴 섹스를 했다.

그의 차가운 손이 루즈한 내 검은 스웨터 안을 헤매다녔다.

나는 아주 가만히 울면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그저 받아들였다.

 

허리가 부드럽게 들리고 머리처럼 배 아래쪽도 무겁게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그의 성기가 아주 뜨거워서 나는 흠칫 놀랐다.

사실은 그것이 뜨거워서, 마음이 놓였다.

 

 

담배는 맛있었고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맞은 편 소파에 앉아 그가 말했다.

 

 

나는 너의 19세기적인 어깨때문에 살아있어. 그리고 너의 촉촉하고 서늘한 눈때문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

 

살아있다는 건 좋은거야.

 

 

 

나는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다고 해서 좋지 않았다.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움직여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리고 카페 밖으로 나와 다시 내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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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 14:51 2006/12/06 14:51

그녀에게 가는 길4

from 2005/07/23 01:47
멀리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낮은 돌담과 공터, 작고 붉은 건물,
맨발에 조개껍질이 밟히는 것을 느끼면서
내달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버려진 집이었다.
곳곳에 유리창이 깨져있고
가구들도 완전히 망가진 모습이었다.

바닥에 버려진 기다란 나무막대를 들고
커다란 옷장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니 어둠속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옷장 안은 외부와 연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깨어진 유리 조각을 밟았는지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의 이곳 저곳을 뒤지면서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것이 쿵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옷장 문이 열렸다.
나무막대를 힘있게 휘둘렀다.
그가 넘어졌다.
이마에 맞았는지 머리쪽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혹은 어둠속에서 어떤 것이 그의 머리 아래로 흘러 나왔다.
유리창에서 길게 잘려나온 유리조각을 뽑다가 손이 베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 내가 다가와 나를 안았다.
유리조각은 그의 몸안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쑤욱 들어갔다.

그녀는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 옆에 나도 누웠다.
따듯했다.
그녀가 잠시 눈을 떠 나를 바라보고는
내 몸을 꼭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
장을 보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나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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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3 01:47 2005/07/23 01:47

그녀에게 가는 길3

from 2005/07/22 20:27
처음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내리는 문앞의 넓은 공간에 여행가방을 세워놓고 그 위에 앉았다.
그는 내 앞에 서있었다.
속내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많이 나서 와이셔츠까지 젖어있었다.
목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40여분을 지나자 버스 안에는 그와 나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닷바람이 머리를 확 뒤집고 지나갔다.
끈끈한 공기가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쥐어 감싸고
축축하면서도 미지근한 습기가 얼굴에 와 닿아
아찔했다.

그가 내 곁에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양복웃옷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일까
그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복웃옷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프린트한 그녀의 메일을 손에 들고
여행가방을 들고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바닷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여행가방은 무거웠다.
모래밭에서는 가방에 달린 바퀴가 오히려 불편했다.
나는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너무 멀리 왔어.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어.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음악을 들었다가는 정말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빠른 발자국 소리...
그가 서류가방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여행가방을 버리고
손에 그녀의 메일을 꼭 쥐고
바닷가를 달려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그의 불규칙적인 신음소리가 바로 귀뒷편에서 들려왔다.
곧 사정이라도 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짧은 '아'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우리와 함께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들이 발작적으로 눈과 코와 입으로 덮쳐드는 통에
나는 작은 구덩이들을 보지 못하고 자꾸 넘어졌다.
겉에 입고 있던 바바리가 벗겨졌다.
내 바바리를 잡아당긴 것이 그인지 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바닷물 속에 허리까지 빠져있었다.
치마가 풍선처럼 떠올랐다.
그가 나를 안아올렸다.
뜨끈하게, 옆구리에 그의 매끄러운 와이셔츠와 내의와 살이 느껴졌다.
그 다음에는 내 다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말랑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그리고 나서 내 허리쪽으로 그의 성기가 느껴졌다.
그의 가슴을 세게 물어 뜯었다.
나는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입안이 썼다.
코로 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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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20:27 2005/07/22 20:27

그녀에게 가는 길2

from 2005/07/22 19:18
그녀가 내게 보내준 이메일에는
간단하게 타야할 버스와 내려야할 장소만 적혀있었다.
언제 오라는 말도 없었다.
공항을 나와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그도 내 곁의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하늘은 짙은 회색의 구름으로 덮여있어서
오후 1시라기 보다는 어느 시간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구름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연한 하늘색이 낯설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생각했다.
헨리 4세가 죽을 때, 나는 너무 슬펐다.
자꾸 작아진다는 것...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
몸이 썩어가는 것...내게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것...

254번 버스가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공항에서 내리면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탈 수 있다.
그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뒷좌석에 앉았다.

셀로니오스 몽크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음습한 낯선 도시의 건물을 바라보자
이대로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고 계속 살아야 할 것만 같았지만
곧 시내였다.
시내에서 또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버스는 한시간에 한대뿐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낯선 얼굴로
줄지어 오는 버스에서 내리거나 또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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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19:18 2005/07/22 19:18

그녀에게 가는 길1

from 2005/07/22 14:53
그 남자를 내가 처음 본 곳은 시테 공항이었다.
그 남자가 나를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단 한마디도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가장 의미심장할 수도 있는 시간을 함께 했다.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꿈처럼 어떤 색깔과 느낌만이 선명할 뿐
실제로 그런 시간이 존재했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공항에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목구멍과 콧구멍으로
콧물처럼 혐오가 쏠려나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찝찝한 느낌.
그는 내가 본 동양인들 가운데 가장 뚱뚱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중국인일 거라 생각했다.
막연하게, 한국에서는 그렇게 뚱뚱한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중국인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공항의 철제 의자 2개를 차지하고 앉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가 햄버거 조각을 흘리기라도 하면
대책없이, 하얀 와이셔츠가 더러워질텐데...
보통 사람들처럼 몸을 피하거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는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고 둥근 은색안경테 안으로 두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은 빨간 점이 대각선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수놓인 감색 넥타이와
감색 양복,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보이는 투실투실한 팔과
그 아주 뚱뚱한 사람들 특유의 손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만.

옷이 예뻤다.
와이셔츠는 눈이 부시게 깨끗한 연한 푸른 색이었다.
아니 하얀색이었다...아니 푸른색일지도 모르고 하얀색일지도 모른다.
검은 반곱슬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무스나 스프레이로 머리위에 고정되어있었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뿐,
나는 멀리 떨어진 스시 바에서 남은 스시에 다시 집중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점심을 준비해 주는 타입은 아니다.
아마 자신의 위한 점심조차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가 고파지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것 저것들로
괴로워하면서 배를 채우고는 무언가에 또 골몰하겠지.
스시를 먹고 가는 것이 좋았다.
스시를 먹은 후에 간단하게 장을 봐서
그녀에게 먹을 만한 저녁을 차려주는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변변한 가게하나 없다고 들었다.

스시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가방을 끌고 게이트를 향해 그 남자의 옆을 지나치자 마자,
그 남자가 자신의 작은 서류가방과 양복 웃옷을 들고 일어나면서
공항의 철제 의자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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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14:53 2005/07/22 14:53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서로의 삶에 바쁘다보면 그리운 이, 소중한 이들이
소리도 없이 별다른 인사도 없이 잊혀지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작은 흔적으로부터 그를 기억하게 된다.
예전에 청테이프가 앞에 있기만 하면 조그맣게 자꾸 뜯는 아이가 있었다.
청테이프를 보면 그가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청테이프 쓸 일이 많지 않아
대형 마트에서 우연히 지나다 보거나 이사할 때가 되어 테이프 살 일이 생기면
그가 떠오르곤 했다.
유난히 손톱이 작고 손이 통통한 아이가 있었다.
흔치 않은 그런 비슷한 손을 어디선가 만나게 되면 그녀가 떠오른다.

최근에 뉴스를 보는데
한 영화배우가 고속도로를 건너는 고슴도치 가족을 구하려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 치여 죽었다고 한다.
고슴도치 가족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예전 내 방 지붕에 살던 두더지 세마리가 떠올랐다.
고슴도치와 두더지는 상당히 다르기도 하지만
왠지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방에서 이사한지 벌써 3년이 훨씬 넘었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길어야 6개월남짓이다.
그간 서로 얼굴을 보았던 날은 많아야 열흘 정도 뿐이다.

꽤나 과묵하고 예의발라서
내 삶에 슬쩍 들어앉기보다는
아주 가끔 작은 선물이 되어주었던 그들.

나는 특히 두더지 아가씨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알지 못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둘 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뿐.

오늘은 그녀와의 세번째 만남을 기억해 보려고 한다.

여름밤이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모기가 들어올까봐 불은 모두 끄고
존 콜트레인의 블루트레인을 들으면서
달을 보고 있었다.
춤이라도 한판 춰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겁고 느린 바람이 있었다.
하얀 달 둘레에 조금 푸른 공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머리위에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사실 벌거벗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지붕위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한것은
내가 벗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두더지이기 때문에 어차피 옷을 입지 않고
따라서 내가 옷을 입고 안입고는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나의 개인적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달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조금 힘겹게 숨을 몰아서 짧게 물어야 했다.
'달을 보고 있구나.'
'응'

나도 달을 바라 보았다.
무겁고 느린 바람조차 땀범벅의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달은 산속에 흐르는 개울 속의 하얀 돌처럼 차가와 보였다.
발을 대면 이까지 시릴 것만 같아.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만화속에 나오는 것처럼 검은 그림자같았다.
끝이 뭉툭한 작은 코.
달이 들어있는 작은 눈.
나는 그날의 그녀를 그렇게 기억한다.

콜트레인의 음악이 모두 끝났을 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들어서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지붕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마도 나에게 인사를 했던 것일 거다.
나는 그녀의 눈에 들어있는 나를 보았었다.

그날 밤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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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07:12 2005/07/19 07:12

3개월

from 2004/07/16 10:06
나는 원래 밤에 사는 타입이었어. 그녀는 생각했다. 쑥스럽지만 '밤에 피는 장미'라는 오래된 가요제목을 자신의 별명으로 소리 없이 불러보았다. 꽤 맘에 드는 별명이야. 월요일 밤이었다. 내일도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할텐데, 월요일에는 항상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주말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몸이 그새 적응되어 버린 것이다. 한 주를 제대로 살려면 일찍 자야한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어느 새 지방에 사는 가족이며, 남자친구와의 관계, 회사생활 등에 대해 늘 반복되고 답이 없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생각들이 한바퀴를 돌아 다시 자야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녀는 자세를 바꿔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S의 품으로 파고들어 오른손을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넣었다. 조그맣고 말랑거리던 페니스가 S의 의지와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어찌되었건 꿈틀꿈틀 생명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키우려고 했던 것은 아니어서 그녀는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페니스를 잡고 한동안 다시 잡념에 빠져들었다. 페니스도 그녀의 무관심을 알아채고 다시 작아져 갔다. 그녀는 지난 10년 간 자신이 사귀어왔던 남자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들이 잊혀져 있었다.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때는 너무 많은 상처를 서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이전 남자친구였던 K와 그녀는 너무 많이 싸웠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신이 K와 S, 둘만 사랑했던 것도 같았다. 그 이전의 남자들은, 사실 자신의 삶에 대한 광기의 표현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면 그들은 매우 하찮은 존재들이었다. 그녀는 사랑, 그 자체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받은 자신에 대한 숭배를 사랑했던 것이다. 진짜였던 가짜였던, 그녀는 대학에 들어간 이래로 최소 5번, 최대 10번 정도의 연애를 해왔고, 대부분이 상당히 진지한 관계였다. 그 10년 가운데 누구와 지냈던 것이 가장 행복했을까 - 그녀는 현재의 남자친구와 이전의 남자친구를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다시 10년을 통째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남자들을 차근차근 순서대로 정리하다가, 그 3개월을 기억해냈다. 택해야 한다면, 누구와 함께도 아니었던 그 3개월을 택하겠어.
그 3개월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남자친구 없이 보낸 유일한 기간이었다. 그녀 주변에는 남자들이 널려있어 한 남자와 끝나면 대기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음 남자친구가 되곤 했다. 그녀가 그들을 가볍게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너무 무겁게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남자들은 그녀의 남자친구이기를 포기하고 떠나서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대부분 그녀를 숭배하거나 미친 듯이 사랑했지만(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자주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랬다. 그 3개월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직장동료와 술을 먹었다. 헤어짐이 그녀의 감성을 풍족하게 해주어 술은 끝도 없이 들어갔다.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는데, 그가 그녀의 입에 키스를 했다. 술기운인지 욕정인지에 묻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섹스를 하다. 그녀의 인생에 최초의 '그냥 섹스'였다. 아무도 그녀의 섹스를 막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그녀는 그 남자의 페니스가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육체에 대해서 객관화시켜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것이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남자친구들과 섹스를 했지만, 그것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3개월이 가장 자유로운 시기였어. 어찌 생각해보면 그녀는 단 한번도 한 남자를 사랑한 적이 없는 것도 같았다. 그들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늘 어떤 삶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강요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그 3개월 동안 그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상태였고, 그녀는 회사구석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살았었다. IT붐으로 많은 회사에서 직원들이 잠을 자며 일을 하던 때였고 회사 분위기도 자유로워서 그녀가 여자인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소지품이라고는 조그만 가방하나가 다였다. 보름에 한번쯤 집에 가서 다음 보름동안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책이나 잡지를 읽었고, 음악은 인터넷에서 MP3를 다운받아 들었다. 일하고 노는 데 사용하는 PC와 간이침대가 그녀의 것이라고 불리기는 했어도 결국은 회사 물건이었다. 심지어 안경조차 없어서, 모니터에 바싹 붙어 두 시간쯤 일하고 나면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도 그녀는 그것이 불편한 줄도 잘 몰랐던 것 같다.
희망도 없었지만, 절망도 없었다. 그렇게 평생 살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다시 S의 페니스를 조물락거리기 시작했다. 페니스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약해졌어. 그녀는 시멘트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던 한기를 기억해내고 몸이 오싹해졌다.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대도 두렵지는 않았지만, 귀찮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때 그 섹스일까. 술자리와 그 섹스를 생각하자 몸 중심부로부터 미묘한 욕망과 쾌감, 전율 같은 것이 순간 전류처럼 지나갔다. 그녀는 자위를 할까 생각했지만, 생각을 끊고 싶지 않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약간 몸을 기울이자 S의 체온이 따듯하게 전해져왔다. 그녀는 그 남자의 몸을 기억하려고 해 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의 페니스는 아직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S가 괴로워하겠지? 그녀는 S를 사랑했다. 벌써 3년째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한 그의 헌신은 적어도 그녀에게는 소중한 것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S의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를 묻고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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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6 10:06 2004/07/16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