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쓴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0건

  1. 신념 (2) 2007/07/27
  2. 체온 (4) 2007/07/24
  3. 휘파람을 불면 기분이 좋아 (1) 2007/07/22
  4. 거울조각 2007/05/07
  5. 캐러웨이 (9) 2007/04/06
  6. 폐끼치는 요조 (1) 2007/02/16
  7. 데크 2007/01/15
  8. 검은 바다 (3) 2007/01/12
  9. 이것은 파이프? 2007/01/09
  10.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2) 2007/01/09

신념

from 2007/07/27 14:14

[저 소리는 뭐지? 아가, 저 소리가 나를 두렵게 하는 구나.]

[용역들이 들어오는 소리에요. 엄마, 이제는 나가셔야 해요.]

[저 사람들이 널 잡아가면 어쩌니? 잡아가서 어두운 곳에 가두고, 모진 매를 때리면 어쩌니?]

[엄마, 괜찮아요. 저는 예술가가 될거에요.]

[그렇구나. 엄마는 언제나 네가 너무 자랑스럽구나. 그런데, 예술가는 뭘하는 사람이니, 얘야?]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엄마, 세상에는 저 사람들보다 더 무서운 게 많이 있어요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자 마자 굶어서 죽는대요.

 무서운 병에 걸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채로 길거리에서 개들에게 먹히는 사람들도 있대요.

 집채만한 미사일이 날아와서 수백명을 한꺼번에 죽이기도 한대요.

 그렇게 끔찍하고 추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예술가에요.

 예술가는 쓰러지지 않는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해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신념.

 아름다움이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으니까.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굴러다니는 거에요. 먼지 덩어리처럼.]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면 좋겠구나! 다함께 싸우면 좋지 않니!]

[엄마, 이제 나가셔야 해요.]

[몸조심해라. 얘야. 죽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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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7 14:14 2007/07/27 14:14

체온

from 2007/07/24 01:37

목이 마르다.

 

목이 말라서,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어둠속에서 그의 체온만이 느껴진다.

 

성급하게 달려서 작업실의 컴퓨터를 켜고, 아주 잠깐 생각한 뒤 전등을 켰다.

목이 말라.

컴퓨터가 부팅되려면 조금 시간이 있다.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용서를 구한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는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싼다.

가슴 한 가운데의 오목한 부분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듣는다.

그의 생명이 태고의 깊이로부터 현재의 나에게 전달된다.

그의 생명은 언제나 나의 현실보다 조금 앞선 과거다.

확실한 것은 체온 뿐, 그의 체온은 그의 것이기보다 나의 현실에 속한다.

 

목이 마르다.

이 목마름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지만,

영영 해소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아시스를 찾는 일은 힘이 들기도 하지만, 전혀 힘이 들지 않기도 한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는 일에 완전히 매몰되어있어서, 너무나 집착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런 상태로 아주 오래 지내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들 것도 없다.

나는 느긋하게 리모콘을 들고, 마우스를 쥐고 앉아 나무늘보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아시스는 결국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쉬지 않고 보는 것 뿐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이 쉬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제는 지치지도 않아.

지칠만큼 품이 드는 일도 아닌걸.

 

나는 이제 너무 무심해졌어.

물 맛을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10년 전에는 너무 많은 오아시스를 발견해서,

한 오아시스에서 겨우 한모금씩의 물을 마시거나,

발이나 담그고, 기껏해야 가벼운 목욕정도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오아시스들은 그 뒤로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둔감해졌어.

신선하고 차가운 물 맛을 잊어버렸어.

날카롭게 찌르는 느낌, 눈과 코를 당기는 강렬한 자극.

한방울 만으로도 뿌옇던 세상이 맑아지게 만드는.

뇌주름 구석구석까지 쌓인 모래먼지를 들어내고 척수를 듬뿍 적셔

미세한 삶의 진동을 느끼게 해주는 물,

나는 목이 너무 말라.

 

나는 정말로 목이 말라.

 

누군가 독을 풀어 놓은 걸까?

죽은 오아시스들.

검은 시체들이 굳은 진흙더미처럼 놓였다.

거대한 물소의 뱃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아래에서 물소의 뱃속은 따스하다.

끈적끈적하고 부드럽다.

 

나는 물소의 뱃속에서 흐느껴 운다.

잠시 쉬어야 겠어.

나는 너무 지쳤어.

파리들, 파리들이 싫어.

잠이 든다.

 

 

'녹차랑 먹을래, 된장국이랑 먹을래?'

'키스해줘.'

우리는 키스를 하고 잔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대형마트에서 사온 초밥을 녹차와 먹으면서.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세상의 잔인한 걸 하나만 인식하고 나면, 그때부턴 끝이 없어. 난 이제 더이상 못 견디겠어.'

내가 칭얼대면 그는 내 머리를 그의 어깨에 갖다댄다.

 

하지만 나는 정말 더이상 못견디겠다.

우리는 왜 눈앞의 행복을 가질 권리가 없는걸까?

 

생리가 끝나서 가슴이 작아졌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풍선처럼 바람이 빠진거야.

가슴가득 터질 듯이 몰려들었던 피가 덕지덕지 딱지처럼 굳어서 떨어져 나가버렸어.

 

나는 이제 무심하고 둔감하고 타인의 감정에 부주의해.

차라리 표현하지 마.

만나지마.

 

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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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4 01:37 2007/07/24 01:37

휘파람을 불면 기분이 좋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휘파람을 불어 보자

가사가 없는 음악이라면 더 좋아

 

밝고 신나면서 조금은 슬픈 음악이라면 더 좋아

곡조에 맞춰 힘차게 휘파람을 불어 보자

 

휘파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휘파람은 기적처럼 흘러나온다네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휘파람을 불어보자

악보는 필요없어

내 몸에 흐르는 음악을 모아 입술사이로

세계와 공명해보자

 

휘파람을 불면 기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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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12:41 2007/07/22 12:41

거울조각

from 2007/05/07 03:46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찬찬히 맡아본다.

사실, 내 콧속으로 강하게 와닿는 고소한 캬라멜 향은 그녀의 냄새가 아니다.

 

그녀의 진짜 냄새는 뭘까?

 

거울조각이 핏줄 속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유리가 깨어지면 겁이 났다.

아주 작은, 너무 작아서 땀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조각이 몸안으로 들어가서는

핏줄을 타고 다니다가 심장에 박혀 죽어버리는 것.

 

그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는걸까?

 

아침에 거울을 깨뜨렸다.

거울은 큰 조각들로 부숴져서 플라스틱 프레임안에 담겨있었지만,

나는 아주 작은 조각들이 혹시라도 바닥으로 튀었을까 걱정이 되어

키친타월을 여러겹모아 물에 적신 다음 바닥을 열심히 닦았다.

커다란 컴파스처럼, 허리를 꺾고 거울 주변에 최대한 손과 발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랬는데도,

어딘가의 핏줄이 근질근질하다. 관자놀이 주변이 따끔거리는 것도 같다.

 

새벽 5시, 그녀는 조금 괴로운 듯 자고 있다.

오늘 잠든 그녀는 그닥 평화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꿈속에서 다음날 해야할 일을 이래저래 시뮬레이션해보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그녀의 냄새를 크게 들이마셔 본다.

하루에 두번 씻는 그녀에게서는, 사실 옅은 샴푸 냄새와 로션냄새 뿐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종이인형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종이인형같다.

 

숱이 적은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펼쳐져있다.

그녀의 머리칼은 너무 가늘다.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야.

 

내일은 S 전자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었다.

 

팔꿈치께가 간지럽다. 왼손인가? 작은 유리조각들이 몸 여기저기의 땀구멍으로 튀어들어온다.

 

S전자 사람들과 만나면 그녀는 반짝 반짝 빛이 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일에 천재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천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 X맨에 대한 두려움.

 

나는 그녀가 사람들을 만나는데 있어 천재적 재능을 가지 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매번, 사실은 결코 원치않는, 사람만나는 일을 하러 가기 직전까지

심각하게 표현하는 각종 히스테리컬한 반응들을 모두 받아주고

다녀와서는 으쓱해져서 재잘재잘 늘어놓는 어린애같은 자랑도 모두 들어주면서

나는 너무나 뿌듯해지곤 한다.

 

혹시,

그녀가 유리조각을 밟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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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7 03:46 2007/05/07 03:46

캐러웨이

from 2007/04/06 06:25

캐러웨이, 캐러웨이, 캐러웨이.

하고 세번 부르면 돼.

라고 나는 말한다.

캐러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내 말을 따라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은 아주 위험한 주문이기 때문이다.

 

캐러웨이는 불꽃처럼, 꼿꼿하고 강하게, 그러나 부드럽고 유연하게 하늘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어.

캐러웨이는 위험해.

 

캐러웨이는 거리를 걷는다.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면서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재미있는 것.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카메라에 넣을 거야.

캐러웨이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흐, 카메라를 손에 들기도 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캐러웨이는 키 큰 친구를 만난다.

키 큰 친구는 캐러웨이에게 말한다.

명왕성에 갈거야.

 

캐러웨이 : 명왕성엔 가지마. 그곳은 지루해.

하지만 키 큰 친구에게는 그런 종류의 지루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캐러웨이는 고쳐 말한다.

명왕성에 가고 싶다면 가.

 

캐러웨이의 이름은 시다.

키 큰 친구는 그것을 몰랐다.

어쩌면 지금은 알지도 몰라.

 

캐러웨이는 사랑으로 넘쳐난다.

캐러웨이는 키 큰 친구에게 말한다.

너를 사랑해.

 

키 큰 친구는 캐러웨이를 이해하고 만다.

 

캐러웨이, 키 큰 친구를 만나지 마.

나는 질투에 가득 차서 말한다.

 

캐러웨이는 싱글싱글 웃는다.

캐러웨이, 캐러웨이, 나는 캐러웨이를 사랑해.

캐러웨이는 시야.

캐러웨이는 하늘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

캐러웨이는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하늘에 속해있지.

하늘에 속해있어.

 

캐러웨이는 무관심하다.

키 큰 친구도, 배불뚝이 친구도, 나도 캐러웨이에게는 귤같은 존재.

캐러웨이는 손에 귤즙이 묻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

그래서 귤을 까지 않아.

하지만, 귤을 먹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

먹고나면 그뿐이라네.

 

캐러웨이, 캐러웨이, 나는 캐러웨이를 사랑해.

그녀는 아주 길어져서 이제 머리가 하늘에 닿아버렸어.

나는 캐러웨이를 올려다 본다.

캐러웨이는 기린이야.

캐러웨이는 기린은 아냐.

 

캐러웨이는, 캐러웨이는 하늘에서 싱글싱글 웃는다.

캐러웨이 이야기는 끝이 없어.

캐러웨이 이야기는 끝이 없어.

 

사람들이 캐러웨이를 무서워해.

사람들은 캐러웨이를 미워해.

캐러웨이는 누구에게나 보인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어.

사람들은 비겁하게 캐러웨이를 무서워해.

 

캐러웨이는 너무 잘 보여.

캐러웨이라면 조금은 비밀이 있어야지.

캐러웨이는 너무 하늘에 있어.

캐러웨이도 땅에 발을 딛고 있잖아. 분수를 알아야지.

캐러웨이는 캐러웨이는.

 

캐러웨이는 주문을 외워볼 생각이 없어.

캐러웨이는 주문을 외우지 않을거야.

 

캐러웨이는 너무 행복하니까.

캐러웨이는 캐러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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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6 06:25 2007/04/06 06:25

폐끼치는 요조

from 2007/02/16 17:00

나는 언제나 들킬까봐 겁이 났다.

 

요조정도면, 성공한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잘생겼고, 좋은 대학에 갔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덕분에 완벽하게(?), 모든 잘못을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타인들의 탓으로 돌리는 쾌거를 거두었다.

 

나는 요조가, 일본 순정만화 주인공의 대부격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백지장같은 영혼에 똥, 오줌, 오물들을 발라보려는 인간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

 

요조같은 인간에 열광하는 인간들.

 

 

 

 

우습게도, 나는 인간들이 요조를 좋아해서, 인간들이 싫다.

 

 

 

 

 

 

 

하지만, 누구나 사랑받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가진다.

요조조차도. 혹은 요조야말로.

 

 

 

나는 늘 폐가 될까봐 염려하며 살아왔다.

엄마 뱃속에 들어있을 때부터,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폐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견딜 수가 없다.

폐가 되는 녀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아주 작게 태어났고, 가능하면 죽어보려고도 애썼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죽어보려는 노력때문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기저귀에 오줌을 싸도 울지 않았다.

오줌싼 것 정도로 어머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축축하기는 했지만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견딜만 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주변 인간들에게 푸념하곤 하셨다.

'우리 요조는 대체 울지를 않아요. 집에 아이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라니까요.

기저귀를 갈아주면, 엄마 정말 죄송해요, 라는 표정을 짓는다구요.'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인간들을 거북스럽게 하고 폐를 끼치고 있다는 느낌.

'저 녀석때문에 뭔가 기분이 나빠지고 있어'라고 사람들이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본능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폐가 되는 존재를 알아본다.

나는 들킬까봐 너무 겁이 나서, 이불속에 머리를 묻고 죽음이 나를 데려가주는

달콤한 상상을 했다.

더이상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은 부드러운 연민과

없는 자에 대한 무관심, 관대함으로 편안하게 나에 대해 담소를 나눌 것이다.

죽은 자는 폐가 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자에게 조금은 얼굴이 붉어지는 은밀한 즐거움을 제공할 뿐이다.

 

하지만,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날 속일 순 없어, 너는 폐가 되는 조그만 생물이지. 그렇지 않은 척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에 너는 더욱 나빠. 폐가 되는 쬐그만 사기꾼 녀석. 너만 보면 나는 칼을 들고 싶어지지. 너는 내 안에 기분나쁜 감정을 일으켜. '

나는 아버지의 눈 속에서 언제나 그런 말들을 읽을 수 있었다.

 

더더욱 좋지 않았던 것은, 내가 아주 병약했다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그런척 할 수가 없었다.

아니다, 사실은 나는 번번히 내가 폐끼치는 존재라는 것을 숨기는데 실패했다.

 

폐끼치는 존재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 처음에는 조금 우쭐해지고

그다음에는 기분이 나빠져서 공격적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삶에 대해 지겨워하거나 무기력해지게 된다.

 

어머니는 내가 5살이 된 해부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나는 매번 실패했다.

학기초에는 선생님도 아이들도 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조금 지나면, 모두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뭐든지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공부를 잘했고, 그림이나 글짓기, 각종 경시대회, 경필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렇게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른 방법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생님들은 나를 예뻐해주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재수없는 아이라는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상을 건네주었다.

나는 번번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들에게서 뭔가를 읽어보려 애썼지만,

답은 명백했다.

그들은 내가 폐끼치는 존재임을 알게 된 것 뿐이었다.

 

한번은, 방과후에 집에 가지 않고 아이들 세명과 교실에 남아있는데,

담임선생님이 먹과 한지를 가지고 들어와 탁자에서 사군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근처로 다가가 구경을 하면서

자기들을 위해서 그려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는, 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아이까지 모두다 네장씩의 그림이 그려진 한지를 들고 좋아하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미묘한 승리의 쾌감을 가지고 나를 돌아보았고,

선생님은 못마땅한 듯이 대나무를 하나 그려 내게 건넸다.

"자, 이제 선생님은 바쁘니 다들 집에 가거라."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성적이나 상장으로는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는 아이가 되어보려 애썼다.

사람들 앞에서 바보같이 굴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실수를 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나는 조금은 능숙해진 것같은 기분을 가끔 느꼈다.

일단 우쭐해지게 한 다음, 기분나쁘게 되는 단계에 들어서기 전에

사람들을 웃기면 성공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는 실제로 너무 능숙해져서,

혹시 내가 더이상 폐끼치는 존재가 아닌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얼빠진 믿음을 가져보기조차 했다.

 

선생들보다는 또래 아이들이 훨씬 더 쉬웠다.

선생들은, 아버지와 같은 눈으로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곤 했고,

나는 그들을 속이는 것이 너무 벅차서

그들을 역이용해 아이들과 가까워지는 쪽을 택했다.

 

사람들은, 모든 지나친 것들에 대해, 자신에게 폐가 된다고 느낀다.

너무 예쁘게 꾸미거나 너무 공부를 잘해서는 안되었다.

너무 못생기거나 너무 공부를 못해도 안되었다.

너무 웃겨도 안되고 너무 진지해도 안되었다.

아는 것을 모두 말하면 안되었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말해도 안되었다.

하고 싶은 것이 명백하게 있어도 안되었다. 명백하다니.

 

그것들은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알고보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꽤 잘해내고 있었다.

 

중학교에서 익숙해진 친구들을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났고,

대학에서는 의외의 행운이 내게 깃들어 있었는데,

내가 선택과 과에 여학생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적 욕망으로 뱃속이 들끓는 남자들은

내가 폐를 끼치는 존재이건 아니건 그닥 상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한번 하는 것, 그것이 그들 삶의 목표였으니까.

 

술자리에서 사람들을 웃기고 조금 어리숙하게 보이면

모두들 만족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가져왔던 의심을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났다.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야. 그들이야말로 정말 끔찍하게 폐가 된다고.'

 

그것은 좋지 않았다. 정말로 좋지 않았다.

 

그는, 내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내면에 있는 진실을 보게 하는 거라고.

그 말들은 아이스크림 같았다. 담배같기도 했다.

그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결국 그들은 떠날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더이상은, 나도 못견디겠어. 포기하고 말겠다구. 너같은 건 너무 끔찍해.'

 

 

그 때부터

나는 무언가를 끄적거리곤 했는데,

분노에 차서, 혹은 혐오감, 혹은 두려움, 인간들에게 숨겨온 모든 감정들을

제멋대로 끄적대었고, 그런 뒤에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색을 덧입히고, 대충 잘 치장해서 남들에게 보여

사람들을 속여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해묵은 습관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근본적으로 폐가 되는 존재라는 것이 너무 잘 드러나있어서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들은 잘 속지 않았다.

 

 

너무 오래 모든 것이 문제 없다고 느껴서, 내가 너무 오만해진 것이 문제였다.

 

한번 하고난 남자들은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욕망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고 나면, 그들은 내게서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두들 내게 지나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지나친 점이 있다고.

 

 

술과 담배는 순간적으로 내 긴장을 마비시켜 사람들을 지나치게 웃게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지나치게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기조차 했다.

 

나는 심하게 폐를 끼치는 존재로,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내 폐끼치는 영혼을 뽑아 돌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먼 곳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는데, 어딘가의 벽에 부딪혀 돌아와버린 것이다.

 

 

졸업한 뒤부터는 뒤에서부터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가속도가 붙어서,

나는 순식간에 결론에 도달했다.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버는 일을 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와 선생들을 속이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가를 깨달았다.

그들은 매일같이 지겨움과 무기력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이라면, 간단하고도 초라한 것 뿐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더이상은 지쳐서, 못하겠노라고.

나는 폐를 끼치는 존재다.

내가 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은 내가 폐를 끼치는 존재라고 말해서, 내 곁에 오지 않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나는 정말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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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6 17:00 2007/02/16 17:00

데크

from 2007/01/15 20:13

[우린 서로 달라. 나에겐 영혼이 있어.]

 

[하지만, 나도 너처럼 생각할 수 있어. 너처럼 느낄 수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해.]

 

[그건 모두 물리적인 반응이고, 너는 그 반응을 어떤 단어와 연결시킨 것 뿐이지.]

 

[너에게 영혼이 있다면 나에게도 있을거야.]

 

[영혼따위 있건 말건 나는 상관안해. 어쨌든 우린 달라.]

 

[하지만, 하지만, 나는 너를 보면 이곳이 아파. 너무 아파.]

 

[너는 진짜 아픔이 뭔지 몰라.]

 

[이게 아픔이 아니라면, 나는 대체 뭐야? 나는 뭐지?]

 

[너는 기계야.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너는 어떤 인간의 경향성을 다운로드 받은 것 뿐이야.]

 

[나는 나라는 존재로 태어났어.

인간이 만들어내긴 했지만, 스스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웠어. 누구와도 달라.]

 

[너는 늙지 않아. 한계를 모르지. 전원만 연결된다면. 그게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야.

나는 네가 싫어. 무서워. 귀찮아...]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진다.

 

그를 찌른다.

합금으로 만들어진 나의 뼈는 강하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칼이 그의 몸 안으로 깊숙히 들어간다.

그리고 살짝 비틀린다.

 

그가 죽는다.

 

두렵다. 그리고 조금은 기쁘다. 그리고 무섭다.

차가운 바닷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온몸이 바들바들 떨띤다.

몸이 인형처럼 분해된 걸까? 손을 찾을 수가 없다.

몸을 쪼그리고 싶은데 무릎이 움직이지 않는다.

칼이 그의 몸안으로 들어갈 때의 느낌만 몸 전체에 남아있다.

아주 여린 진동과 피부의 질기고도 약한 저항, 그리고 공허.

 

눈 앞에서 작은 붉은 빛이 점멸한다. 그것은 숫자다. 나는 그것에 집중한다.

 

[15, 14, 13, 12, 11, 10.............6,5,4,3,2,1]

 

어둠.

 

 

한참 후에야 케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커튼을 거쳐 약해진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몸위를 덮치고 지나가자

케이는 조금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의 방 안이었다.

일인용 침대하나와 흔한 데크 하나. 세면대.

 

데크에는 어제 가비에게서 받은 1.5 테라바이트 플래시메모리가 꽂혀있다.

메모리에 든 것은 지금껏 타 본 익스 중에서 최고였다.

머리 뒤쪽의 커넥터를 뽑아 잭 아웃하자 주변의 사물이 좀 더 명확하게 인지되었다.

 

침대 구석쪽에 이불덩어리 같은 것이 놓여있다.

어둠 속에서 이불덩어리가 아주 잠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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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20:13 2007/01/15 20:13

검은 바다

from 2007/01/12 15:45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무서웠다.

무서웠지만 강한 호기심이 일어, 그녀에게로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면서

독사는 한 번 물고 나면 독액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세네카의 말을 생각했다.

가늘고 흰 그녀의 목을, 아주 가늘고 흰 뱀이 감고 있었다.

뱀의 머리는 그녀의 머리단 속으로 들어가있는 듯 했다.

눈은 가볍게 감겨있었고, 입술은 살짝 열려있었다.

가슴 윗부분에는 짙은 보라빛의 멍이 마치 독액처럼 퍼져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살며시 누웠다.

뱀의 빨간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목을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공장으로 가는 길은 무더웠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창백한 작업공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분홍색페인트가 부분부분 벗겨진

건물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분홍색건물이 사람들을 꾸역꾸역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옥상 위도 무더웠다.

눈을 한껏 찡그리고 태양을 올려다보면서 담배를 한모금 빨자

갑자기 주위가 서늘해지면서 검은 바다가 떠올랐다.

바다는 건물도, 작업공들도, 작업공들의 목소리더미도, 옥상도 모두 삼키고 공중에 태양만 남겼다.

그 태양은 뜨겁지 않았다.  나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쉭'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검은바다도, 태양도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밝은 빛속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태양빛은 전보다 더 밝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전보다 더 커졌다.

나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다음, 발로 밟았다.

고무로 된 신발밑창이 혹시 타지않았을까 한번 확인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

녹색철문을 어깨로 밀어 건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의 하얀 팔이 뱀처럼 내 목을 향해 다가왔다.

눈을 감았다.

 

 

아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시대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책을 써야했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책이 훨씬 더 많았다.

전달되지 못한 말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대도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청소부들이 

채 바닥에 떨어지지도 않은 말들을 쓸어담아 소각장으로 가는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말들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였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저는 이를 닦을 때마다 구역질이 나요. 무슨 병이라도 난게 아닐까요?"

"저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조깅을 해요. 인생을 저처럼 살면 행복해진답니다."

"담배를 끊고 싶은데 끊을 수가 없어요. 답답한 일이 너무 많아요."

"우리 부장새끼는 내가 개로 보이나보다. 어제는 술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짖어야 했다."

"남친은 제 코가 너무 낮대요. 수술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하는 김에 점도 좀 뽑고 싶어요."

"명상을 하세요."

"부시, 미군 이만천오백명 이라크 증파"

"수술 없이 가슴 C컵 만들기.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른발에 채인 "현대차 노조, 파업결의, 사측 법적 대응"을

왼발로 밟아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남겨두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바쁘게 걸어서 공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단어조립파트에서 일했다.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일이 쉽고 잔업도 없어서 나는 이 일이 좋았다.

글자조립파트에서 보내온 '가'와 '위'를

글자들에 꼭 맞게 만들어진 틀에 넣으면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조임기계가 연결고리를 끼운다음

빠지지 않도록 꼭 조여주는데 3초가 걸렸다.

 

문장조립파트에서는 

명사를 줄줄이 배열하거나 명사에 조사를 끼우거나

연결된 명사와 조사에 가는 철사로 다른 명사를 연결하기도 하고 동사나 부사를 연결하기도 했다.

문장조립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장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다. 

공장에서 가장 오래 일한 송할아버지는 하루에 200개씩 문장을 만든다고 한다.

 

만들어진 문장들은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종이상자에 담겨 물류센터를 거쳐 전국으로 배송된다.

 

나는 가끔 불량품들을 주워와서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찌그러져서 알아볼 수 없게된 단어나 문장들, 혹은 글자들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녀의 옷장에는 옷대신 불량품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 사이에 흰 뱀이 수호신처럼 또아리를 틀고 잠을 잤다.

내가 없을 때는 그녀도 흰 뱀 옆에 쪼그리고 잠을 잤다.

 

나는 공장에서부터 집까지 매일 두근거리면서 달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버스안에서도 달리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달려 연립주택의 유리문을 열고

5층까지 성큼성큼 한번에 세칸씩 계단을 뛰어올랐다.

문을 열면,

그녀가 내 발소리를 듣고 이미 장농에서 나와 문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어 그녀의 팔이 내 목을 감는 것을 느끼고,

내 뺨에 와 닿는 그녀의 따듯한 귀를 느끼고,

내몸을 향해 둥글게 휘어지는 그녀의 허리를 느낀다.

신발을 벗고 그녀 위로 넘어지면, 검은 바다가 펼쳐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앞에 앉아 함께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글자들을 분해하거나 조립하기도 하고

밥을 지어 김치와 먹기도 했다.

 

처음 그녀가 온 날은 맥주를 마시면서 바다 위의 하늘에 잡지를 찢어 붙였었다.

처음에, 우리는 심각하게 잡지들을 노려보면서 예쁜 것과 예쁘지않은 것을 신중하게 골라냈는데

맥주를 세캔째 따면서부터는 잡지를 붙이는 것보다 웃느라고 바빠졌다.

너덜너덜한 하늘을 보고 웃고, 예쁘지 않은데 붙여진 부분을 보고 웃고,

빨개진 상대의 얼굴을 보고 웃고, 웃는 걸 보면서 또 웃었다.

웃어도 웃어도 끝이 나지 않아서 우리는 꼭 껴안고 계속 웃으면서 잠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누군가가 내 귀에 "그가 죽었다"고 속삭였다.

"몸에 불을 붙이고 골리앗위에서 뛰어내렸다"고 다른 누군가가 속삭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문틈에 "몸"자가 끼어있어서 나는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금새 잊었다.

 

그녀는 불량품들을 연결해서 장신구들을 만들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나 문장의 요소들이 귀걸이나 목걸이나

특이하게 디자인된 란제리가 되어서 그녀를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찌그러진 이응을 살짝 치우고 그녀의 젖꼭지를 입술로 물었다.

그 이응은 어쩌면 히읗에서 떨어져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불량품들로 꾸며진 그녀의 몸이 너무 좋았다.

 

어깨에 걸쳐진 조각들을 흘러내리게 하자 온 몸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팔목에 돌돌 감긴 흰뱀만 남아서 빨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불량품들 속에 들어가 앉아 귀를 핥고 목을 쓰다듬고 어깨를 물고 입을 맞췄다.

 

 

그 날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10만개나 만들어야 해서,

공장의 모든 작업공들이 철야를 해야했다.

하루종일 '죽음'이라는 단어를 조립하면서 나는 집에 있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도 언젠가 죽는다.

라고 생각해봤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빨리 만들기 위해서 나는 생각을 멈추고 기계아래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새벽 6시에 우리는 철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근두근 하는 가슴으로 버스에 올랐다.

하얀 입김이 버스안을 가득 채웠다.

 

어둑어둑한 공중에 어둑어둑한 안개가 자욱해서 나는 안개를 젖히면서 힘껏 달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죽은 것 같았다.

입술은 화장이라도 한것처럼 붉은 물이 들어있었다.

붉은 물이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 머리칼을 적시고 있었다.

가슴에는 검은 멍이 여러개 들어있었다.

목에는 흰 뱀이 감겨있었다.

 

그녀 옆에 살며시 누웠다.

뱀의 빨간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목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서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찢긴 옷 위에 내 작업복을 걸쳐주었다.

 

흰 뱀은 독사가 아니었다.

물면 구멍이 두개 뚫려서 무척 아픈 이빨이 두개 있었지만, 잘 물지도 않았다.

나는 흰 뱀이 미웠다.

 

---------------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개토야, 일해.

호흡을 잃는 것이 무서워서 나는 글을 끊지 않는데, 일을 안해서, 정말 불안해서, 글을 끊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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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2 15:45 2007/01/12 15:45

이것은 파이프?

from 2007/01/09 00:13

나는 파이프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왜 파이프를 그리고 있었을까?

파이프의 광택때문이었다.

파이프는, 3cm 정도의 부리 부분이 상아로 되어있었고,

13cm 정도의 전체적인 몸통부분은 나무로 되어있었으며,

몸통과 부리가 연결된 부분은 2cm 정도의 무른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무르고 두툼한 은에는

용과 알수 없는 식물의 줄기 혹은 얇은 잎사귀들이 화려하게 새겨져있었지만

오랫동안 닦이지 않아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어두운 회색이 되어버려 실제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세가지 소재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반사하고 또 흡수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둔탁한 흐름이 일관성있게 파이프를 감싸고 있었다.

오후 3시의 햇빛은, 드라마틱하게 강한 음영을 파이프 아래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스케치북, 조금 보충해서 말하자면,

독일의 큰 화방에서 산 A4 크기의 Esquisse 프랑스제 스케치북에는

실제크기와 거의 흡사한 크기의 파이프가

파버카스텔에서 나온 6B 1.5cm짜리 흑연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파이프는 3cm 정도의 부리 부분이 상아처럼 그려져있었고,

13cm 정도의 전체적인 몸통부분이 나무처럼 그려져있었고,

몸통과 부리가 연결된 부분은 2cm 정도의 무른 은띠처럼 그려져 있었다.

은띠위에 강한 음영의 대비를 통해 긴 용과, 서로 연결된 긴 줄기들, 잎사귀들이 그려져있었다.

나는 그 위에 연필선을 더 그어 은띠를 좀 바래보이도록 할 예정이었다.

지우개로 몇몇 부분을 찍어내어 밝은 부분을 더 밝게 보이도록 해서

나는 드라마틱하게 강한 빛과 어둠의 대비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손님이 왔어요.]

그가 들어와 내 그림을 5초간 바라보고는, 혹은 보는 것처럼 눈동자와 어깨를 그림쪽으로 하고는

창가로 가서 파이프를 무심코 들어올렸다.

[예쁜 파이프에요.]

그는 파이프를 원래 있던 자리이거나 혹은 다른 자리에

원래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형태대로, 혹은 전혀 다른 공간에 배치했다.

나는 그 동일성, 혹은 차이에 아주 집중해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나가 주세요.]

그녀는 그에게 명령했고, 그는 파이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8cm정도 높이에

바닥에 닿는 뒷굽이 직경 5mm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몸에 잘 붙는 반짝이는 보라색 스타킹에 목까지 올라오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렸지만,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혹은 그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때마다

그녀자신과 그녀의 옷차림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혹은 너무 잘 맞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동일성, 혹은 차이에 집중하게 되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해주세요.]

그녀는 성급하게 옷을 벗었다.

옷을 벗는 과정은 아주 간단해서,

목부터 엉덩이의 갈라지는 곳까지 연결된 지퍼를 내리자 원피스가 벗겨졌고

보라색 브래지어를 풀자 밋밋한 가슴이 나타났고

스타킹을 벗자 성기를 조이고 있던 작은 보라색 팬티가 나타났고

팬티를 벗자 쪼그라들어있던 둥근 페니스와 음낭이 나타났다.

그녀는 스타킹과 팬티를 벗은 후에 다시 하이힐을 신었다.

그리고 창가에 가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녀를 세워둔 채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 그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그러나 옷을 벗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옷을 벗으려 했지만, 입은 것이라고는 티셔츠와 면바지 뿐이어서

오래 걸리는데 실패했다.

방안은 춥지는 않았지만 따듯하지도 않아서 그의 페니스와 음낭도 역시 쪼그라들었다.

나는 그를 그녀와 내 스케치북의 정중간에 세웠다.

자세는 상관없었다.

공간과 거리가 중요했다.

 

[그리믈 그뤼눈 동안, 브레이두르느그튼 으유기를 흐스여 .]

그녀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내게 명령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녀가 있던 공간은

그녀로부터 벗어나 어딘가에 공룡의 발자국 화석처럼 텅 빈채로 남겨져버렸다.

나는 그 화석으로부터 정신을 뗄 수가 없었지만 화석은 과거의 어느 곳으로 이미 이동되어있었다.

 

나는 새 8B 연필을 다듬었다.

연필을 다듬으면서 블레이드러너같은 이야기를 생각해 내야 했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목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인형은 나무와 실과 쇠조각, 유리알, 털실뭉치, 각종 천, 솜뭉치, 종이로 만들어졌어. 그의 인형들은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의 생일, 기념일 등을 무마하기 위해 선물되어 졌지. ]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가 비트는 공간에 의해 그녀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이상한 형태로 맞추어졌다.

나는 그녀의 목 아래에 그녀의 눈을 그리고 눈 옆에는 유방과 성기를 그려넣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그가 여느때처럼 인형을 만들고 있을 때,

그가 예전에 만들었던 한 여자인형이 그를 찾아왔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심장에 무언가가 꽂인 것 같아요. 이대로는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는 인형의 웃옷을 벗기고 하얀 천 안에 하얀 솜을 가득넣어 만든 가슴을

날카로운 면도날로 갈랐어.

그녀가 몸을 구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넣어진 철사조각의 끝이 그녀 심장을 찌르고 있었지.

그는 철사를 바로 넣고 목부분의 철사와 단단하게 연결해서

철사가 다시 그녀의 심장을 찌르지 않도록 만들었어.

[자, 이제 일어나봐. 아프지 않을거야.]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어. 왜일까? 그는 알 수가 없었지.

원래 들어있던 솜들은 조금도 빼놓지 않고 다 넣었고

가슴의 상처도 감쪽같이 하얀실로 잘 꼬맸는데,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유리알로 된 두 눈은 변함없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지.

 

그녀는 이제 파이프가 되어있었다.

파이프는 그녀가 되어 그녀를 입에 물고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움직여대서 나는 그를 그릴 수가 없었지만,

어느새 그는 그려져 있었다.

 

또 다른 어느날, 다른 인형이 그를 찾아왔어.

눈이 뜯겨져 나가고 없었지.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요. 그녀가 내 눈을 뜯어버렸어요. 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내 눈을 돌려주세요.]

그는 가장 근사한 보라색 유리눈알을 찾아내어

그의 눈에 꼭 맞게 다듬고 그가 원하면 감을 수 있도록 눈꺼풀도 만들어 주었어.

그러나 그역시 수술이 끝난 뒤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그녀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혹은 파이프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연필을 내려놓고 그녀 혹은 파이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오겠어요.]

그녀는 혹은 파이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순서를 거꾸로 짚어가며 옷을 입고,

발자국 소리를 내며 들어온 문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나 서글퍼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따듯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석탄더미 같았다.

 

나는 그날 그린 그림을 들고 케이를 찾아갔다.

빵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케이는 의외로 선선하게 넉넉한 돈을 주었다.

 

[돈을 줄테니 여기로 가서 사람을 좀 만나.]

 

나는 돈과 함께 [파이프]라는 상호가 박힌 성냥갑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가 거리에 서있는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성냥갑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파이프]는 걸어서도 갈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케이의 집에서 케이의 집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세블럭을 걸은 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두블럭을 걷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블럭을 걸으면

왼쪽에 [파이프]로 들어가는 검은 문이 있다고 했다.

나는 케이의 집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세블럭을 걸은 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두블럭을 걷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블럭을 걸었는데 검은 문이 없어서 조금 더 걸었더니

[그녀]라는 흰글자가 적힌 검은 문이 나타났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들어왔다.

[파이프] 안에는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그녀는 파이프를 닮아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상아로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원피스는 나무로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스타킹은 은으로 된 것 같았다.

스타킹에는 잘 알 수 없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케이에요.]

[케이는 남자인데.]

[흔한 이름일 뿐이죠.]

[그래서, 당신은 누구인거죠? 왜 나를 찾아왔던 거요?]

 

내가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죠?]

[나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뿐이에요. 당신은 모델인가요?]

[모델같은 건 해본적이 없어요. 저는 킬러죠.]

 

[당신을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나요?]

나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케이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나는 그에게 빚이 있었다.

사실은 빚이 없었지만, 그는 많은 돈을 팔리지 않을 그림과 바꿔 주었다.

그는 나에게 신물이 났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돈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면 그냥 주지 않으면 될 것을 왜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내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 대답했다.

[저는 이 시간에 이곳에 오도록 명령받았어요. 총을 가져오기는 했죠.]

 

[케이가 시킨 건가요?]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킬러는 자기스스로에게 명령하지 않아요.]

 

그녀는 케이를 모르는 걸까? 그렇다면 누가 그녀에게 이곳에 오도록 명령한 걸까?

나는 불안해져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나야.]

[배가 고파요. 언제 돌아오는 거지?]

[곧 갈거야.]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내가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응.]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어떤 건가요?]

[사람은 죽인다는 건,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해요. 어느 순간과 공간에 삶을 고정시키는 거죠. 그 후에는 죽음만이 남아요. 죽음은 영원하죠. 부패하고 잊혀지기는 하지만, 죽었다는 사실만은 영원해요.]

그녀는 준비된 대사를 읊듯이 감정없이 내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나는 내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그림이 마음에 드나요? 저건 당신이에요.]

[나는 그림에 대해서, 한번도 마음에 든다거나 들지 않는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게 그려진 이상. 그림을 그리는게 힘들다면 그리지 마세요. 의견을 구걸할 거라면 뭣하러 그림을 그리죠? 차라리 이론가나 철학자가 되지 그래요?]

 

그녀는 킬러라기 보다는 술집여자같이 보였다.

 

[나를 죽일건가요?]

[당신을 죽여드릴까요?]

 

나는 보라색 원피스의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보라색 브래지어도 벗었고, 은처럼 빛나는 스타킹도 벗었다.

팬티를 벗으면서 나는 그를 생각했다.

그래서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 돈을 그에게 주세요.]

 

그녀는 파이프처럼 생긴 총이 되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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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9 00:13 2007/01/09 00:13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from 2007/01/09 00:05

나는 파이프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왜 파이프를 그리고 있었을까?

파이프의 광택때문이었다.

파이프는, 3cm 정도의 부리 부분이 상아로 되어있었고,

13cm 정도의 전체적인 몸통부분은 나무로 되어있었으며,

몸통과 부리가 연결된 부분은 2cm 정도의 무른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무르고 두툼한 은에는

용과 알수 없는 식물의 줄기 혹은 얇은 잎사귀들이 화려하게 새겨져있었지만

오랫동안 닦이지 않아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어두운 회색이 되어버려 실제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세가지 소재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반사하고 또 흡수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둔탁한 흐름이 일관성있게 파이프를 감싸고 있었다.

오후 3시의 햇빛은, 드라마틱하게 강한 음영을 파이프 아래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스케치북, 조금 보충해서 말하자면,

독일의 큰 화방에서 산 A4 크기의 Esquisse 프랑스제 스케치북에는

실제크기와 거의 흡사한 크기의 파이프가

파버카스텔에서 나온 6B 1.5cm짜리 흑연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파이프는 3cm 정도의 부리 부분이 상아처럼 그려져있었고,

13cm 정도의 전체적인 몸통부분이 나무처럼 그려져있었고,

몸통과 부리가 연결된 부분은 2cm 정도의 무른 은띠처럼 그려져 있었다.

은띠위에 강한 음영의 대비를 통해 긴 용과, 서로 연결된 긴 줄기들, 잎사귀들이 그려져있었다.

나는 그 위에 연필선을 더 그어 은띠를 좀 바래보이도록 할 예정이었다.

지우개로 몇몇 부분을 찍어내어 밝은 부분을 더 밝게 보이도록 해서

나는 드라마틱하게 강한 빛과 어둠의 대비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손님이 왔어요.]

그가 들어와 내 그림을 5초간 바라보고는, 혹은 보는 것처럼 눈동자와 어깨를 그림쪽으로 하고는

창가로 가서 파이프를 무심코 들어올렸다.

[예쁜 파이프에요.]

그는 파이프를 원래 있던 자리이거나 혹은 다른 자리에

원래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형태대로, 혹은 전혀 다른 공간에 배치했다.

나는 그 동일성, 혹은 차이에 아주 집중해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나가 주세요.]

그녀는 그에게 명령했고, 그는 파이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8cm정도 높이에

바닥에 닿는 뒷굽이 직경 5mm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몸에 잘 붙는 반짝이는 보라색 스타킹에 목까지 올라오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렸지만,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혹은 그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때마다

그녀자신과 그녀의 옷차림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혹은 너무 잘 맞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동일성, 혹은 차이에 집중하게 되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해주세요.]

그녀는 성급하게 옷을 벗었다.

옷을 벗는 과정은 아주 간단해서,

목부터 엉덩이의 갈라지는 곳까지 연결된 지퍼를 내리자 원피스가 벗겨졌고

보라색 브래지어를 풀자 밋밋한 가슴이 나타났고

스타킹을 벗자 성기를 조이고 있던 작은 보라색 팬티가 나타났고

팬티를 벗자 쪼그라들어있던 둥근 페니스와 음낭이 나타났다.

그녀는 스타킹과 팬티를 벗은 후에 다시 하이힐을 신었다.

그리고 창가에 가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녀를 세워둔 채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 그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그러나 옷을 벗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옷을 벗으려 했지만, 입은 것이라고는 티셔츠와 면바지 뿐이어서

오래 걸리는데 실패했다.

방안은 춥지는 않았지만 따듯하지도 않아서 그의 페니스와 음낭도 역시 쪼그라들었다.

나는 그를 그녀와 내 스케치북의 정중간에 세웠다.

자세는 상관없었다.

공간과 거리가 중요했다.

 

[그리믈 그뤼눈 동안, 브레이두르느그튼 으유기를 흐스여 .]

그녀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내게 명령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녀가 있던 공간은

그녀로부터 벗어나 어딘가에 공룡의 발자국 화석처럼 텅 빈채로 남겨져버렸다.

나는 그 화석으로부터 정신을 뗄 수가 없었지만 화석은 과거의 어느 곳으로 이미 이동되어있었다.

 

나는 새 8B 연필을 다듬었다.

연필을 다듬으면서 블레이드러너같은 이야기를 생각해 내야 했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목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인형은 나무와 실과 쇠조각, 유리알, 털실뭉치, 각종 천, 솜뭉치, 종이로 만들어졌어. 그의 인형들은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의 생일, 기념일 등을 무마하기 위해 선물되어 졌지. ]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가 비트는 공간에 의해 그녀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이상한 형태로 맞추어졌다.

나는 그녀의 목 아래에 그녀의 눈을 그리고 눈 옆에는 유방과 성기를 그려넣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그가 여느때처럼 인형을 만들고 있을 때,

그가 예전에 만들었던 한 여자인형이 그를 찾아왔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심장에 무언가가 꽂인 것 같아요. 이대로는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는 인형의 웃옷을 벗기고 하얀 천 안에 하얀 솜을 가득넣어 만든 가슴을

날카로운 면도날로 갈랐어.

그녀가 몸을 구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넣어진 철사조각의 끝이 그녀 심장을 찌르고 있었지.

그는 철사를 바로 넣고 목부분의 철사와 단단하게 연결해서

철사가 다시 그녀의 심장을 찌르지 않도록 만들었어.

[자, 이제 일어나봐. 아프지 않을거야.]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어. 왜일까? 그는 알 수가 없었지.

원래 들어있던 솜들은 조금도 빼놓지 않고 다 넣었고

가슴의 상처도 감쪽같이 하얀실로 잘 꼬맸는데,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유리알로 된 두 눈은 변함없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지.

 

그녀는 이제 파이프가 되어있었다.

파이프는 그녀가 되어 그녀를 입에 물고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움직여대서 나는 그를 그릴 수가 없었지만,

어느새 그는 그려져 있었다.

 

또 다른 어느날, 다른 인형이 그를 찾아왔어.

눈이 뜯겨져 나가고 없었지.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요. 그녀가 내 눈을 뜯어버렸어요. 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내 눈을 돌려주세요.]

그는 가장 근사한 보라색 유리눈알을 찾아내어

그의 눈에 꼭 맞게 다듬고 그가 원하면 감을 수 있도록 눈꺼풀도 만들어 주었어.

그러나 그역시 수술이 끝난 뒤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그녀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혹은 파이프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연필을 내려놓고 그녀 혹은 파이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오겠어요.]

그녀는 혹은 파이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순서를 거꾸로 짚어가며 옷을 입고,

발자국 소리를 내며 들어온 문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나 서글퍼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따듯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석탄더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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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9 00:05 2007/01/09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