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쓴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0건

  1. 그림자 이야기 (3) 2007/01/06
  2. 희귀종 앵무새의 광기없는 혁명 2007/01/01
  3. 케이 2006/12/20
  4. Fake plastic trees 2006/12/19
  5. 플라나리아 (1) 2006/12/18
  6. 해왕성에서 온 편지 (2) 2006/12/17
  7. 창세기 2006/12/17
  8. 쓰레기 2006/12/17
  9. 용의 눈물 (1) 2006/12/15
  10. 담배 2006/12/14

그림자 이야기

from 2007/01/06 13:31

어제, 옛날 물건들을 들춰보다가 초등학교 5학년때 쓴 일기장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존앤 비장하면서도 허무한 성격은 그때부터였던건가 봐요.

 

198X년 10월 4일 금요일

 

주제 : 그림자 이야기

 

밥 11시 학교 운동장에 그림자들이 모였읍니다. 이 학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읍니다.

이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그림자 회의를 열었읍니다. 드디어 모두 모였읍니다. 느티나무 그림자가 입을 열었읍니다.

"여러분 저는 정말 불행합니다. 내 나이 100살이 넘도록 여행한 번 못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더 불행한 그림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힘으로는 도와줄 수 없는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는 주인이 아프기 때문에 누워만 있습니다. 우리 그림자의 신에게 우리가 그 그림자와 교대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봅시다.

"좋습니다!" "그럽시다" "옳아요!"

모두들 찬성했습니다. 그림자의 신에게 이야기를 했읍니다. 그림자의 신도 승락했읍니다. 느티나무 그림자는 제일 먼저 교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잠시동안에 느티나무 그림자는 아이의 그림자로 바뀌었읍니다. 그 순간 아이는 죽었읍니다. 느티나무 그림자와 함께.....

 

 

 

 

"~니다" 시설이었네요...일기장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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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6 13:31 2007/01/06 13:31

나는 어렸을 때 내가 예수라고 생각했다.

내 몸에는 세개의 못자국이 있다.

손과 발은 아니고, 오른쪽 다리에만 세 개다.

깁스를 고정하기 위해 박았던 못들이다.

 

나는 길거리에서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아보기도 하고

내가 지지 않은 빚을 갚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나는 온갖 시험에 놓였다.

 

그러고도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를 위해 내가 이 모든 것을 겪는 거야.

 

 

그런데, 나는 완벽한 신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항상 뭔가가 부족한 인간들의 딸이다.

 

서른을 넘긴 뒤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한동안 느꼈다.

예수가 서른을 넘긴 뒤 곧 죽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이가 들었다면 아마도 스스로가 예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렸을 것이다.

 

지저스인지, 예수스인지, 예수인지

어쨌든 나는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평범한 남들처럼 살짝 미쳐있다.

내 블로그에 누군가 덧글을 남겼다.

"미친년, 밤길 조심해."

훗, "미친색희, 올테면 와보라지. 자지를 물어뜯어주겠어.'

미친 색희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미친 색희.

 

대략 10년 전쯤에,

나는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서 희귀종 앵무새들을 쫒아다니고 있었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다.

희귀종 앵무새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가까스로 잠이 들어 아침이면 기분나쁜 상태로 깨어 또 생각했다.

 

나는 그들을 10년째 쫒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먼곳으로 도망을 가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돌아오고 말았다.

 

그들은 희귀종의 멸종위기 앵무새들이다.

얼핏, 다른 앵무새들보다 수가 너무나 적고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속기 쉽지만,

결국 그들도 앵무새들이다.

 

나는 "닮은 것"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닮았다.

 

사실은, 그들은 희귀종이고 멸종위기이고 아름답다.

닮은 게 뭐 대수인가.

나도 될 수만 있다면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앵무새가 아니다.

될 수 없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 멋지구나. 나는 부끄러워..."

 

앵무새가 되어보려 했던 적도 많았다.

아니, 사실 매일처럼 그들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점잖고 잘 날지도 않는다.

조용조용 서로의 말을 옮긴다.

싸움이 날 일도 없다.

어쩌다 잘못 만나 싸움이 날 듯도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처럼 조용하게 문제를 해결한다.

 

내가 10년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완전히 미쳐있다.

그런데도 어찌나 자신들을 잘 포장하는지

남들도 다 그들이 이성적 존재라고 믿게 생겼다.

누구보다 미쳐서 살면서도, 안그런 척 하는데 도가 텄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앵무새들을 지켜보고 있다.

 

감옥은 탈출을 위해 존재하는 것.

탈출 계획을 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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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3:11 2007/01/01 13:11

케이

from 2006/12/20 19:58

아침에 케이가 사라졌다.

불의 제단 위에 스스로 올라가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나의 열여섯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알몸으로 불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이제 완전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불 속에서 웃고 있었다.

 

 

 

케이는 나의 여자다.

그녀는 나와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

나를 위해 태어난 여자다.

나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신과 같은 존재로서 여성과 남성이 하나인 존재이고

그녀는 나의 여성인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잉태하기 위한 밤을 보낼 때

다른 6명의 아이들과 함께 잉태되었다.

주술사는 그의 스승인 주술사로부터

한 남자가 한번에 7명의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게 하는 마술을 배운다.

그리고 평생에 단 한번, 혹은 두번 그 마술을 사용한다.

 

그 때 만들어진 아이들 중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어떤 남자아이도 나와 함께 태어날 수는 없다.

여자아이들 중에서도 케이만이 살아남았다.

그녀는 운 좋게 나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조금 일찍 태어나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

나온 자리에서 물 속으로 집어넣어졌다. 나온 곳으로 돌아가 버리게 하는 것이다.

케이를 낳은 여자는 아마도 말이나 소에게 사용하는 약초다린 물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죽었다.

왕이 내린,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약을 먹고 죽었다.

 

케이에게 연결된 사람은 이 세상에 나뿐이다.

그녀를 돌보는 유모는 눈도 보이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한다.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늙어 케이에게 옷을 입히고 있는지

나무토막에게 옷을 입히고 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그녀는

케이를 처음 돌보기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늙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세상에 없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케이는 아주 작다.

나는 자주 그녀의 빵이나 고기조각을 빼앗아 먹곤 했는데

그녀는 그냥 빼앗기기만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떼쓰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은 야채와 빵부스러기를 먹고나면

나같은 것은 관심도 없다는 듯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성안에는 방이 아주 많아서 나는 그녀를 찾아 온 방을 헤집고 다녔다.

할머니가 계셨다는 어두운 방의 녹색커튼 뒤에서

도자기로 만든 커다란 화덕 안에서,

그녀 방에 있는 오래된 옷장 속에서 나는 그녀를 찾아냈다.

그러면 그녀는 그 서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자신만의 세상속에서

성안으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것이 못내 야속하다는 듯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녀는 작고 까맣고 단단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발견하면 그녀 곁에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 옆에 앉아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작은 숨소리를 숨죽여 들었다.

 

그녀는 옷을 벗어 잘 펼치고 모아 그 안에 편안하게 들어가 앉는다.

자신의 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만지기 시작한다.

왼손 두번째 손가락끝을 오른손 새끼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움직여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손목에서 엄지손가락끝으로 움직인다.

손가락은 나비처럼 가볍게 앉아있다가 다시 둥글게 날기 시작한다.

손가락 하나 하나를 건드리며 날아서는 손바닥 가운데를 거쳐

손목의 돌출된 부분위에 가 앉는다.

손바닥과 손가락 전체를 이용해서 팔전체를 빠르게 흝는다.

그리고 두번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팔안에 든 굵은 뼈들과 힘줄들을 음미한다.

양팔을 다 끝낸 후에는 머리채를 틀어올리며 머릿속을 헤집기도 한다.

눈뼈와 콧날, 귓볼, 살짝 열린 입술과 그 사이의 이까지 손가락들로 잘근잘근 씹고나면

양손의 두 손가락으로 목 뒤의 파인 곳을 거쳐 어깨와 가슴골, 가슴 아래의 흉골을

신중하게 더듬는다.

잃어버린 뼈조각이라도 찾듯, 그녀는 매우 심각하게 보인다.

흉골에서부터는 조금 빠르게

허리와 엉덩이를 지나 종아리까지를 스치듯, 그러나 빠뜨리지 않고 지나간다.

그녀의 손은 모든 순간을 아쉬워 하는 듯 하면서도 단호해서 나는 숨이 멎는다.

그리고 나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발이 등장한다.

그녀는 손가락 전체를 이용해서 발가락들과 손가락들을 만나게도 하고

작은 뼈들을 조곤조곤 쓰다듬는다.

 

그 의식은 언제나 그녀의 가장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이 난다.

가늘게 열린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그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고

그녀 내면으로만 열려있다.

입술과 이와 혀를 통해 새어나오는 작은 숨소리 역시 그녀만을 위한 것이다.

가슴이 하늘을 향해 휘어진다.

 

단 한번, 나는 그녀의 팔을 만진 적이 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너무나 즐거워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진 것일 뿐이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눈길한 번 주지않고 옷을 입은 뒤 옷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커튼이나, 옷장, 화덕 밖의 그녀는 벽난로위의 유리인형같다.

투명하고 무겁고 위태롭다.

 

 

 

나는 이제 불완전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내 안에서 차가운 불꽃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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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0 19:58 2006/12/20 19:58

Fake plastic trees

from 2006/12/19 19:12

나는 나무에 올라가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농촌에도, 어촌에도, 산골에도, 공장지대에도 살아본 적이 없다.

나는 집들이 서로 등돌리고 붙어있는 도시에서만 태어나고 살아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대해 무지하다.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것을 사용하거나 남에게 팔거나 나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파트 맞은 편에는 사무실이 빼곡한 회색 건물안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나도 한때 사무직 노동자였는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체 알 수가 없어서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

만들어낸 것의 무게와 길이를 재고, 만들어낸 과정을 압축하여 스티커를 붙인 다음

숫자로 쪼개서 컴퓨터속을 통과하게 하거나

그것이 쓰이지 못하도록 막는 여러가지 장치를 만들어

숫자를 부풀리고 끝내는 사용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멋진 일이라고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직접"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음식하나도 나는 만들어 낼 줄을 모른다.

대학에 가기 위해, 엄마가 하는 일을 눈여겨 보고 배울 시간이 없었다.

졸업을 한 다음에는 만들 줄 모르는 음식을 사먹고

만들 줄 모르는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사무직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결코 배가 불러지지 않았다.

소비해야 할 것은 끝이 없었고 나는, got tired of it!

 

사람들에게 나를 "직접" 전달하는 방법조차 나는 모르게 되었다.

글을 쓸 때는 한글로만 쓰려고 애쓰지만

먹물이 잘 빠지지 않아 한글만으로는 스스로를 표현하지도 못한다.

감정에까지 먹물이 든 것이다.

나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전달하고 전달받는 사람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도 못한다.

 

나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집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한 존재(나는 언제나 이 단어대신 다른 말을 쓰고 싶은데)인가를

우선 생각해보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없애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크리스마스 철이다.

성탄절이 가까운 시기이다.

예수가 태어났다는 날에 가까운 시기이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아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면 혹시 옳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선 김치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가 해주는 김치는 정말 맛있다.

그런데 나는 그 김치를 만들 줄 모른다.

엄마가 해주는 김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30년 후에는 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김치를 만들 줄 모른다.

세상에서 엄마표 김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김치가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하지만 김치를 배우기엔 너무 늦었다.

 

나는 사무직에 걸맞는 인간형으로 개발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개발된 프로세스, 아니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너무 복잡한 과정이고, 굉장한 트라우마, 아니 삶을 파고든 아픔들이 있어서

나는 그 과정으로부터 벗어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나는 돼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소설에서 돼지에 대해 읽었다.

형광등불 아래 돼지만한 우리에서 가만히 서서 끝없이 먹는 돼지들에 대해서.

내가 돼지를 먹지 않으면 돼지들은 자유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똥과 오줌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자동차와 에어컨과 공기청정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나는 누워있다.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을 한다.

 

어느 순간 내 배위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예수가 태어날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잘라내 사용했다는 그 나무들을 닮았다.

나무들은 싱싱하게 보인다.

나는 나무에 달린 잎파리들을 만져보았다.

잎파리들은 플라스틱이었다.

나무도 역시 플라스틱이었다.

내 몸에서 플라스틱 나무들이 자란다.

나는 "직접" 플라스틱 나무들을 키우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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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9 19:12 2006/12/19 19:12

플라나리아

from 2006/12/18 20:06

너무 배가 고파서 플라나리아를 먹었다.

아껴먹으려고 반으로 잘라 먹었다.

그랬더니 나머지 반이 플라나리아가 되었다.

이럴수가!

 

어쨌든 남은 플라나리아를 잘 보관하기 위해 냉장고에 넣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플라나리아 뿐이었으니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점심때 냉장고를 열어보니,

플라나리아가 알을 낳았다.

 

알까지 낳는 생물을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어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 가서 플라나리아에게 줄 계란과

내가 먹을 당근, 양배추를 사왔다.

 

플라나리아와 그 알.

나는 갑자기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 건가?

 

플래시백 때문에

며칠째 잠을 잘 수가 없다.

7년전쯤에 본 단어나 문장, 그 종이의 질감, 조명, 책의 두께감까지,

오늘 본 웹사이트의 색감이나 글자체, 분위기,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시,

오스카 와일드, 괴테, 투르게니에프, 타란티노, 피오나 애플, 히치하이커, 스밀라,

미로, 플라나리아, 이런 걸 적고 있는 내가 바보다.

 

결코 쫓아갈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이 빠른 속도로 플래시백 된다.

흥분감은 오래 지속되어 천상에 다다를 것도 같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상태로 오래 갈 수는 없다.

육체의 피곤이 플래시백을 조장한다는 걸 알지만

이번 휴가 동안은 그대로 두기로 한다.

적게 먹고 적게 잔다.

어차피 휴가가 끝나면 모든 걸 다른 방식으로 조율해나가야 하고

그 조율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은 그냥 둔다.

 

 

 

 

 

 

 

감기에게 일백번의 구타를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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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20:06 2006/12/18 20:06

해왕성에서 온 편지

from 2006/12/17 14:07

편지를 받고 있다.

 

남은 시간 3499일 4시간 50초, 49초, 48초, 47초...(1MB / 3500MB 복사됨)

전송속도 : 1.574074074074074074074074074074e-5 MB / 초

 

나는 그 편지를 3500일동안 기다리며 설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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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14:07 2006/12/17 14:07

창세기

from 2006/12/17 12:14

태초에 눈이 있었다.

 

그는 동쪽에서부터 햇수로 8년을 걸었다.

그녀는 남쪽에서부터 햇수로 8년을 걸었다.

 

확실한 것은 불확실함 뿐이었지만,

그들은 확신을 갖고 걸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났다.

 

바닥에도 하늘에도 사방으로도 온통 눈이었다.

그들이 걸어온 길에 찍힌 두줄의 발자국은

그들이 서로를 비스듬히 보고 있는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만날 때를 대비해서 매일 세번씩 자위를 했다.

8년이나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린 만남.

그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어색함 속에 그는 그녀의 허리를 살짝 잡고 머리를 그녀 어깨에 묻었다.

그녀는 뻣뻣하게 서서 불편한 자세로 그를 견딘다.

 

처음 만난 두 마리의 야수들처럼

그들은 서로의 눈을 피한다.

꼬리를 내리고 냄새를 맡고 다시 조금 떨어져서 곁눈질로 상대의 눈동자 주변을 살핀다.

 

그녀의 입술에서 거칠지만 단호한 입김이 쏟아진다.

그는 그녀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눈위에 앉아 사방을 바라본다.

그녀는 아까부터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잃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오른속 새끼손가락은

그녀의 왼손 새끼손가락으로부터 1m 정도 떨어진 곳에 놓여

그녀의 손가락들이 눈보다도 더 차갑다고 느낀다.

 

그녀는 하나씩 옷을 벗는다.

길고 검은 외투를 벗고, 약간 큰 스웨터를 벗고, 너덜너덜한 스니커를 벗고

검은 양말을 벗어 스니커 안에 넣는다.

코듀로이 바지도 벗는다.

그녀는 하늘색의 남방만 입고 있다.

 

그는 아무 것도 벗지 않는다.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두손으로 그녀의 오른발을 잡아 조심스럽게 문지른다.

그녀의 발은 거칠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아주 작다.

그는 손가락끝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그녀의 발안쪽에 있는 가는 뼈들을 인식한다.

그는 발기하지 않는다.

제대로 준비가 된 것이다.

두개의 심장이 같은 속도로 강하고 빠르게 펌프질을 하고 있다.

핏줄이 확장되면서 얼어있던 모든 세포들이 뜨거운 피의 세례로 새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녀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핥기 시작한다.

그를 중심으로 눈이 녹는다.

눈은 엄청난 속도로 녹아 간다.

내리는 눈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작은 물방울로 변해서 그들을 적신다.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입속에서 완전히 젖었다.

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이가 그 손가락끝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피를 마신다.

이제 그들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둥글고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바다를 만들어 그 안으로 숨었다.

그녀는 그를 아주 조금씩 오랫동안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그를 양분으로

그녀는 상상의 아이들을 만들어 물에 띄운다.

아이들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기위해 자신의 길을 떠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일부를 잘라준다.

아이들은 그것을 먹고 기운을 내어 먼 곳까지 갈 것이다.

 

이것이 세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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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12:14 2006/12/17 12:14

쓰레기

from 2006/12/17 00:58

1996년 여름 뉴욕 웨스트 112번가의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내가 가진 짐이라고는 티셔츠 3장과 청바지 2벌,

이모가 남긴 황토색 트위드 재킷 한벌,

엠마뉘엘 카레르의 '콧수염'이라는 페이퍼백 한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들어있는 낡은 갈색 가죽가방 한개 뿐이었다.

 

그나마 티셔츠 하나, 청바지 하나는

이삿짐을 나를 때(?)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짐이라고 하긴 뭣한 면이 있다.

소설책은 뉴욕으로 오는 버스를 타기 전에 대합실에 있는 간이 서점에서 산 것이었다.

 

대학 수업이 시작되기까지는 2달 정도 남아있었지만,

나는 그 전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도시를 나에게 친숙한 곳으로 만들어 두고 싶었달까.

 

부엌 겸 침실 겸 응접실의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는

허리높이 정도의 냉장고 한개와 매트리스 하나가 놓여있었다.

내게 필요한 전부였다.

 

빨래하기가 싫어서

일주일씩 같은 옷만 입고

뉴욕의 온 거리를 쏘다녔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 뿐이어서 옷에 케찹과 마요네즈의 기름때가 묻어있어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스니커의 뒷축은 거리의 아스팔트에 닳을 대로 닳아서

걸을 때면 아스팔트의 우둘투둘한 면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고등학교때부터 쟈니 조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모든 돈은

뉴욕에서 빠듯하게 생활할 경우 3개월 안에 바닥날 터였다.

하지만 겁날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잃어버릴 게 없어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아침에 집 앞의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먹고는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하루종일 아낀 식비로 길거리 문구점에서 질 좋은 노트와 데생용 연필을 사기도 하고

서점에서 얇은 화집이나 소설책을 사기도 했다.

일주일만에 45kg에서 43kg으로 몸무게가 줄었지만

얼굴과 머리칼에서는 윤기가 돌았다.

 

나는 모든 것을 노트에 그렸다.

심지어 타임즈 광장의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던

펄프픽션까지도(나는 그 영화를 두달동안 서른번쯤 보았다) 보이는 대로 노트에 옮겼다.

내 노트의 펄프픽션에는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에 나오는 인물들보다 더 펄프픽션적인 인물들이 출연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시절이었다.

 

나는 그 여름의 뉴욕에서 쓰레기를 만났다.

센트럴 파크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파란 새를 그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내가 앉은 벤치 반대편 끝쪽에 앉아서

내가 그리는 파란 새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가까이 오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라고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쓰레기야.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내가 쓰레기임을 인식하기도 훨씬 전에

우주의 어느 한복판에

누군가의 손으로부터 아주 가볍게 던져졌지.

그것이 누구였는가는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

나는 누구인가 하고.

나는 이곳에 왜 던져졌는가 하고.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오른손에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스타벅스의 종이컵이 들려있었지만

커피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들어있는 것처럼

아주 가벼워 보였고

컵바깥쪽에 커피자국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흔적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왼손에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것이 틀림없는,

베어 문 부분이 심하게 갈색으로 변한 사과를 들고 있었다.

눈을 뜨고 파란새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쓰레기로 살아왔지.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관심갖지 않았어.

거리를 굴러다니면서 가끔은 밟히기도 하고

쓰레기통에도 몇번 들어갔었지만

용케 살아남아 이곳까지 왔어.

 

지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깊은 곳부터 우러나오는 가벼운 냄새가 그녀에게서 내게로

바람을 타고 전달되었다.

 

그 냄새가 너무나 당연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꽤나 찢겨져 있었지만

그런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언뜻 키치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클리셰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이 때를 기다려 왔어.

 

그녀의 목이 잠겨있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조절한 뒤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 안에 찬란히 빛나는 무언가가 있어서

때가 되면 드러날 거라는 걸.

나는 그래서 내 주름을 몇번이고 접고 다시 접었어.

더 멋지게 아스팔트에 문질러지기 위해서 사람들의 발밑으로 뛰어든 적도 많았지.

무서웠지만, 하이힐 아래로도 들어가 본적이 있어.

나는 정말로 오래 기다려 왔어.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여러번 포기하고 싶었어.

소각장으로 가는 쓰레기차안으로 뛰어들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어.

하지만 나는 기다렸어.

 

나 역시 그녀를 오래 기다려 온 듯 했다.

 

나는 노트에서 새 종이 한 장을 찢어 그녀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없이 노트에 집혀 내 집까지 옮겨졌다.

 

냉장고에서 피클 병을 꺼내 내용물을 비우고

따듯한 물을 틀어 수세미로 문질러서 병의 겉면에 붙은 종이를 깨끗하게 떼어냈다.

종이타월로 병의 물기를 완전히 닦아낸 뒤

쓰레기통에서

며칠전에 산 책에 끼어있던 크림색 두꺼운 광고지를 꺼내어

피클병 뚜껑보다 약간 작게 오려 뚜껑에 적힌 글씨를 가렸다.

풀이 없어서 한블럭 건너에 있는 문구점에 허겁지겁 달려갔다 와야 했다.

남은 광고지의 여백에 나는 아주 공들여 두꺼운 글자를 그렸다.

G.A.R.B.A.G.E.

그리고 글자들을 오려내어 피클병에 붙였다.

제법 깔끔했다.

 

그녀를 병에 담아 창틀에 올려 놓았다.

검은 하늘 바탕에 색색의 조명이 반사되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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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00:58 2006/12/17 00:58

용의 눈물

from 2006/12/15 02:16

그는 그녀의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살색 골진 내복을 입고.

칼은 무딘 부엌용 도루코.

지겹다.

 

[왜 말리지 않지? 왜 바라보지 않지? 너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니?

울어. 울면서 나를 말리란 말이다. 눈물을 흘려. 나를 보고 울어!]

 

 

그는 대륙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75kg에서 53kg의 몸무게로.

22kg은 어디로 간걸까?

세계의 전체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22kg은 무엇으로 변환되었을까?

 

굉음, 어디에도 굉음 뿐이다. 누군가의 손이 눈앞으로 날아간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총은 어디간 걸까?

 

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6개의 총알이 몸에 박힌다는 것. 오른손이 날아가서 왼손으로 총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이 까맣게 된다는 것.

 

그들은 왜 싸웠을까? 혹은 왜 그곳에 있었을까?

 

스위스의 병원에서 그는 몰핀대신 알코올을 주입당한다.

몰핀은 비싸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 알코올 중독. 중독. 중독.

 

그는 그 엄청난 역사적 무게를

내게 지운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듯이.

그리고 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듯이.

 

나는 전쟁통의 고아처럼

이리저리 튀어다닌다.

숨을 곳을 찾아서.

죽음이 드리워져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되어

나는 그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엄마의 고통도 보지 못한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장치다.

 

 

 

물을 삼키는 법을 잊어버렸다.

물을 삼키지 못해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다.

아무도 내가 물을 삼키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어느 부분인가가 말라가고 있다.

음식물에 섞이지 않은 신선한 물만으로 적셔질 수 있는 곳.

갈증을 느끼지만 물을 삼킬 수는 없다.

내 몸은 아주 작은 자살을 한다.

 

그는 나를 보고 있다.

들킨 걸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나는 다 알고 있단다.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하렴. 혼내지 않을께.]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알코올냄새가 짙게 뿜어져 나온다.

 

[말하라고 했다.]

[...]

[말하지 않으면 때려준다.]

[...]

[말하라고 했잖니. 왜 말을 안해! 말을 하란 말이다.]

 

무언가가 내게 날아든다.

나는 공처럼 둥글게 몸을 만다.

마음으로 아버지를 죽인다.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눈물이 아니다.

육체가 흘리는 피일 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센다.

숫자가 아득이 멀어져 간다.

멀어져 가서는 사라진다.

 

 

 

잉크는 얼룩진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아준다.

 

눈물에 그의 얼룩이 내 얼굴로 옮겨질 것 같아.

 

잉크의 손에는 PEACE 라는 글자가 공업용 잉크로 찍혀 있다.

물론 잉크가 스며들게 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칼로 그 글자들을 새겼기 때문에

잉크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가 깊은 곳은 깊은 만큼 잉크자국이 넓다.

 

소각로에 사람들이 또 들어갔어.

 

그건 사람들이 아니야. 이미 죽었잖아.

 

... 소각로 옆에 또 장이 섰어. 난 시계를 갖고 싶어. 진짜로 움직이는 초침이 있는 시계. 언니, 구경하러가. 이번에 들어간 ...그...그 ..그 [사람]들 중에 진짜 높은 [사람]들도 있었어. 시계가 있을꺼야.

 

어차피 사지도 못해. 갖고 싶어지기만 할껄 뭣하러 봐.

 

잉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작게 얼버무린다.

잉크는 내 손을 이미 이끌고 있다.

잉크는 작다. 나도 작지만 그 아이는 더 작다.

작은 머리 뒤쪽에 칩이 박힌 자리에는 투명한 실리콘 뚜껑이 덮여있다.

우리는 시계를 살 필요가 없다.

그래도 잉크는 시계를 갖고 싶어 한다.

부자들은, 그런 옛날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

소각로 옆 장에는 그런 물건들이 나올리가 없다.

크게 손상되었거나 덜 손상된 칩들이 일련번호에 따라 값이 매겨져서

늙은이들에게 팔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총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총을 갖고 싶다.

 

칩은 우리의 전부다.

나는 칩으로부터 말을 배웠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면 누구나 아이의 머리 뒤쪽에 칩을 설치하게 되어있다.

칩은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한다.

우리에게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칩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칩이 고장나면 새 칩으로 교환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소각로에 서는 장에서 칩이 교환된다.

칩이 없다면 우리는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시간이 몇시인지,

아침이 언제 오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칩은 나이에 맞춰 프로그램된 수학과 언어, 과학, 역사 등의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모든 칩이 같은 것은 아니다.

부자들은 정부에서 칩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칩을 만들어 쓴다.

 

잉크는 소각로 지기의 딸이다.

그녀는 매일 들어오는 시체들을 확인하고 매일 내게로 달려온다.

 

시계는 없네...언니가 천천히 걸어서 그래. 아까는 있었던거 같은데. 언니가 천천히 걸어서...

 

말꼬리가 사그라든다.

총도 없다. 있다 해도 우리같은 어린애들에게 보여지지는 않는다.

 

소각로주변에는 때때로 유리구슬같은 것이 뒹굴곤 한다.

시체들의 몸에서 나온 유리조각이 녹아 둥근 유리알이 된 것이다.

가끔은 아주 동그란 것도 있다.

나는 유리구슬을 찾아 바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있다!

 

파란 유리구슬이다. 이물질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투명한 푸른색이다.

모래나 머리카락같은 것이 섞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총알처럼 둥글다.

구슬치기를 하기에는 총알이 좋지만, 이런 유리구슬은 그냥 갖고만 있어도 좋다.

 

잉크에게 구슬을 준다.

 

이거 가져. 용의 눈물이야.

 

잉크의 눈이 구슬만해진다.

 

용이 뭐야?

 

나는 잉크의 질문에 깜짝 놀란다. 잉크는 내 말을 놓치는 법이 없다.

 

용이 뭐지?

나도 모르게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용이 뭔지 급하게 생각하면서 

잉크를 데리고 늙은이들 틈을 지나 하수도 골목으로 가

비어있는 둥근 하수도 안으로 들어갔다.

 

용은 바다에 사는 거대한 동물이야. 이 구슬처럼 바다색깔이라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바다색깔이 이런 색이야?

 

응, 바다는 이런 색이야.

용은 바다 밑바닥에서 가끔 하늘로 솟아오르는데

우리 머리보다 훨씬 더 먼곳에 있는 투명한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대.

 

투명한 하늘까지?

 

응, 투명한 하늘까지.

 

정말 투명한 하늘이 있어?

 

그럼. 거기서 용이 눈물을 흘리면 이렇게 파란구슬이 되어 떨어지는 거야.

 

용은 왜 울지?

 

...

 

용은 왜 울어?

 

용은 전쟁때문에 울어. 사람들이 쏘는 총에 맞은 용들이 죽어서.

사람들은 서로를 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보이지 않는 용들을 죽인 거야.

용은 죽은 용들때문에 울어.

 

잉크야, 우리도 언젠가는 전쟁때문에 죽어.

네가 죽으면 내가 널 위해 울어줄게.

 

잉크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잉크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한번 울기 시작하니 멈춰지지가 않았다.

잉크의 손에 꼭 쥐어진 눈물 위로 잉크의 잉크가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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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5 02:16 2006/12/15 02:16

담배

from 2006/12/14 23:16

엄마는 오늘 담배를 피운다.

피우면 안되는데.

아빠가 없기 때문이다.

아빠는 먼 곳에 있다.

다용도실에서 찬바람에 얼굴도 손도 발도 내놓고

차갑게 빛나는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하얀 입김과 연기를 내밀었다.

나는 다용도실 유리문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엄마는 내가 없는 것처럼 다시 하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돌아와. 내게서 죽음을 몰아내줘.

나는 무서워. 어둠이 다가오고 있어. 차가운 불빛들은 진짜가 아니야.

나는 이곳에 혼자 있어선 안돼.]

 

엄마는 유리로 된 성안에서 나와 온기가 도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단단한 소파위에 나와 함께 앉았다.

나는 엄마를 지킬 수 없다.

엄마의 차가운 손이 내 무릎에 놓인다.

처음에는 그냥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무릎을 움직일수가 없게 되었다.

깊은 호수의 표면이 겨울빛에 얼어가듯이

내 몸은 조금씩 조금씩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얼어간다.

호수에서처럼, 얇게 언 수면아래로 미지근하거나 혹은 뜨거운 피가 천천히 흐르고 있다.

 

엄마는 페로시타스에게 걸어가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걷는다.

 

 

[나를 데려가. 아이는 내버려둬.]

 

 

발끝은 페로시타스의 그림자 아래 있다.

그림자가그녀를녹이고있다아니벗기고있는걸까?

그림자에닿은부분이까맣게타들어간다.

 

[그것이 되찾아졌다

무엇이? 영원성이

그것은 태양과 함께

가는 바다] *

 

하늘은 검다.

백합의 독기가 가득한 좁은 방

육각의 석영으로 된 방안에서

태양의 낙하지점에 앉아

용처럼 날고 있는 프테라노돈을 바라본다.

 

혹은

 

하늘은 하얗다.

습기가 가득한 뜨거운 대지위에

초록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마란타인 한송이만이 신기루처럼 박혀있다.

 

나를 데려가 줘.

타는 듯한 삶의 빛으로부터 거둬가 줘.

 

영원이 두렵지 않은가?

 

나는 순간이 두려워.

 

너는 태양을 품고 있어. 붉은 화염에 휩싸여 하늘을 나는 그것은 배인가?

아니, 그것은 용이구나. 미스릴로 만들어진 심장을 가진 기계용인가?

질투로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온기가 없는 석회가루로 화장한 달인 줄 알았더니

들끓는 용암으로 가득한 끝없는 동굴이었구나.

나는 너를 품을 수 없어. 나는 너를 거둘 수 없어.

내앞에 내민 발을 거두어라.

 

너는 물체의 온기를 빨아들여 무게를 없애주는 존재가 아니던가?

태양은 그저 작은 별일뿐. 언젠가는 스스로를 태워없앨 나약한 존재.

나를 받아들여. 나를 받아들여.

 

지옥이 있다면 그러하겠구나. 그 고통 속에 죽음이 너를 데리러 올때까지

부조리속으로 쉴틈없이 내던져 지거라. 내 그늘에는 네가 쉴 곳이 없다.

 

그녀는 그곳에 그대로 있지만

페로시타스는 에메랄드 속으로 사라진다.

두개의 에메랄드는 쩡 소리를 내며 어둠의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가는

잉걸불이 사라지듯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둠속으로 녹아든다.

 

그녀는 또 담배를 피우러 간다.

심장에 담배끝을 대어 불을 붙인다.

 

 

* 랭보의 영원 마지막 구절. 번역은 정확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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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4 23:16 2006/12/14 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