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본 영화'에 해당되는 글 31건

  1. 도그빌 2004/01/13
  2. 브루스 올마이티 2004/01/12
  3. 매트릭스[2] - 거짓말 2003/11/26
  4. 매트릭스[1] 2003/11/20
  5. 집으로 2003/08/26
  6. 환타스틱 소녀백서 2003/06/11
  7. Ghost World 2003/06/11
  8. 전주국제영화제 I 2003/04/29
  9. 전주국제영화제 II 2003/04/29
  10. 리리이 슈슈의 모든 것 2002/09/16

도그빌

from 영화에 대해 2004/01/13 11:35
라스 폰 트리예의 작품은 폭력적이다.
핸드헬드 카메라의 시선에서부터
진실과 순수의 여주인공에 대한 잔혹하고 구차한 폭행들까지.
부패하고 있는 날고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구역질이 난다.

어둠속의 댄서를 보다가는 중간에 극장에서 뛰어나와 구토를 했다.
보는 동안에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더니
끝나고 나서 가슴속에 얹혀있던 응어리같은 것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한 이틀은 앓았던 것 같다.

그가 싫었다.
굳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이 싫었다.
그가 보여주는 폭력들이 싫었다.
한없이 나약한 진실과 순수가 싫었다.
모든 인간들의 죄를 떠안고 죽어가는 예수의 은유가 싫었다.

인간은 너무 나약해서 진실을 지킬 힘이 없는가?
라스 폰 트리예의 영화가 폭력적인 이유는
나 자신을 극단까지 몰아가서 질문하게 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는 진실을 지킬 힘이 있는가?

[미국 삼부작]의 첫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의 최근 작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속의 댄서와 비슷한 듯 하면서 많이 다르다.
우선은 핸드헬드 카메라가 대단히 절제된 고정 카메라로 대체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차갑게 응시한다.
무대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장소가 아닌 연극 무대로 대체되었다.
인간들이 서로를 가리기 위해 만든 벽 같은 것은 허상일 뿐이다.
가장 큰 변화는 결말 부분이다.
'또 이런 식이야, 아~ 짜증난다!' 싶을 때
여주인공이 갑자기 냉정한 시선으로 도그빌을 심판하기 시작한다.
그 심판은 통쾌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절망이다.

얄팍한 해석인지 몰라도, 그러한 변화들은
그의 시선이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 신의 시선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느껴졌댜.
[미국 삼부작]이라는 타이틀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9.11과 그에 잇따르는 반응들을
이 영화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이상은 인간이라는 싸구려 변명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지저분하게 감추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하고도 진부하고 거창한 소망이 감독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과도한 모욕인 것일까?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냉소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다음 영화에서 그는 어떤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줄 것인가?
미치도록 괴롭히면서도 또다시 다가가게 하는 그의 영화가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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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3 11:35 2004/01/13 11:35
볼 필요 전혀 없는 쓰레기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도사인양 설교하는 영화따위 딱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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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2 16:03 2004/01/12 16:03
1.
어린 시절, 개토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자주 하는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거짓말 한 번 했다하면, 아빠한테 개패듯이 맞으면서도,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으면서도, 개토는 거짓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개토는 근본적으로 나쁜 아이인 거라고,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소한 거짓말로 삶을 지속하던 어느날,
제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굉장한 구절이 담겨있던 책을 읽었던 것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아이는 작가가 될 소질을 가진 아이다'라는 것이 그 구절의 요지였다.

개토는 그 구절로 인해서 꿈을 바꾸기로 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개토는 운명적으로 작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소설가가 되어야 하는구나, 대단한 소설가가 될테다, 그래서,
나를 방구석으로 쥐몰듯이 몰아 빗자루로 패곤 하던
아빠에게 보란듯이 거짓말이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리라.

아빠는,
거짓말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 개토는 얼마나 비뚤어진 아이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어설픈 조각가처럼
개토의 마음을 보기흉하게 여기저기 깎아내고 상처주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꼭 소설가여야할 필요는 없었건만...)

인간은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가? 하는 거창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지만,
개토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거짓말에는 아름다운 점이 있다.
그 안에는 진실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은유와 호소와 슬픔, 유머가 진실을 포함하면서 담겨있다.
완벽한 거짓말에는 완벽한 진실보다 더 많은 내용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거짓말은 유리로 만든 도미노 같은 것이다.
가장 완벽한 거짓말조차도 그 본질적인 속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하나의 전체를 이룬 거짓말이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거짓말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대중을 속이자면 거대한 거짓말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 감탄하는 것이다.

2.
예술을 한다는, 혹은 표현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완벽한 거짓말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뉴로맨서>를 쓴 윌리엄 깁슨은 해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술을 이해하기 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적으로 묘사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체계를 가진 거짓말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실의 그 무엇도 닮지 않은 예술,
가장 거짓이어야 하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예술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사람들은 왜 퍼즐을 맞추는가?
맞추어진 퍼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이 진실이다?
매트릭스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영화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운동권을 위한 영화라고도 하고, 철학을 이야기 한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은 개토는 <저수지의 개들>을 페미니즘 영화로 만들 수도 있다.

5.
여기에서 멈추는 순간,
그 거짓말은 하찮은 것이 된다.
개토는 매트릭스가 하찮은 거짓말임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속상해 한다.
매트릭스라는 거짓말은 진실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있기는 커녕 진실조차 담아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6.
천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열이다.
그의 완벽한 거짓말은 진실과 그 이상의 것들로
나라는 작은 세상을 빛처럼, 오르가즘처럼 채워주며
그것을 구하는 것은 나의 가장 인간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희열을 준비하던 개토에게
매트릭스는 또하나의 하찮은 실망이다.

7.
무지하게 재미있는 매트릭스는
채워질 수 없는 허전함을 잠시 채워진 듯 잊게 해주고 무지하게 맛있는, 라면과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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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6 15:51 2003/11/26 15:51

매트릭스[1]

from 영화에 대해 2003/11/20 20:57
1. Matrix는 자궁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Matrix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연두색 발광 글자들의 흐름, 우리가 사는 사이버 스페이스, 가상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육체는 기계 자궁안에 갇혀있고 우리의 정신은 가상의 세계에 갇혀 있다.
우리는 Matrix안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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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20 20:57 2003/11/20 20:57

집으로

from 영화에 대해 2003/08/26 03:50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에게 바칩니다'

마지막 문구를 읽으면서 '딸꾹 딸꾹'거려가면서, 그 후로도 한참을 꺽꺽 울었다.

참 오래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벼르던 영화였는데,
꽤 오래 비디오로 출시가 안되었더랬다.
최근에 기회가 되어 보는 내내 내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워낙에 내가 영화를 볼때만 잘 울기는 하지만,
최근 본 영화가운데 가장 눈물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녀의 이전 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은 상당히 못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집으로'는 어느 정도 잘 만든 영화였다.
그녀는 시골 깡촌에 사시는 할머니와 서울 아이가 만나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담담하면서도 매우 긴장감있게 펼쳐낸다.
별 대단한 이야기도 없건만 영화가 지루하지 않다.
구구절절 설명은 모조리 빼버리고
자잘한 사건들(사건이라기 보다는 이미지에 가까운)만 얼기설기 엮어놓았는데
그게 참 탄탄하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간다.
할머니의 연기는 내가 본 그 어떤 배우의 연기보다 훌륭했다.
할머니는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실컷 울기는 했는데, 감독이 말하려는게 뭔가 싶다.
생각해 보면 사실 별거 없다.
그런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나는 왜 그렇게 울었나 되물어본다.
첫째는 할머니가 사무치도록 고독해보여서 였다.
할머니는 정말 그렇게 고독했을까? 사실은 잘 모르겠다.
상우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마을 분들과의 단조로운 관계들 속에서
잘 지내셨겠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상우가 폭풍처럼 왔다 감으로써 할머니 맘에 흔적이 남아
삶의 의미가 늘었을 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둘째는 짜장면 때문이었다.
먹을 걸로 차별하는게 세상에서 젤 슬픈 거 아마 아는 사람은 다 알거다 싶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동생만 맛난 거 주면 진짜 맘속에서 서러움이 북받쳤다.
상우가 짜장면을 먹는데, 할머니가 안 드신다.
돈이 없으셔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있었어도 안 드셨을게다.
있으면 그 돈으로 딴 거 사주셨을 게다.
그게 참 눈물났다. 왜 눈물이 났을까?
할머니 자신보다 상우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해서였을까?
그러는 할머니가 안스러워서였을까?
가난하니 마음 짠 한 일이 있다. 그게 아름다운가?
그걸 모르겠다.

셋째는 할머니가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상우가 쓴 엽서들은
할머니가 잊혀질 것임을 더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로써 훌륭하게 작동했다.
상우의 할머니에 대한 맘이 간절해서,
그 간절한 마음이 하찮은 편리에 의해 사라질 거라는 게,
할머니를 돌볼 이는 없을 거고
상우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할머니를 막연하게 그리워 하며 눈물을 지을 거라는 게
눈물을 쏟게 했다.

시골마을은 그렇게 아름다운가?
외할머니들은 모두 그렇게 헌신적인가?

참 현실적인 영화같지만 참 동화같은 영화다.
참 예쁜 것만 보았구나 싶기도 하다.

이정향 감독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잊혀진 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 거 말고
어떤 손녀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외할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녀는 이 영화에 그런 대답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게 하려 애썼을 것이다.
나름대로 리얼리즘 영화인 것이다.
그대로 보여주기 리얼리즘 영화인 것이다.

굳이 명확한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작품에는 저자의 시선이 엿보이게 마련이다.
사라져가는 외할머니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석연치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이제 저런 헌신적 외할머니 상은 사라져야 해 라고 용기있게 외칠 자가 있을까나

마지막으로, 그녀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한없이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왜 그에 대한 감사의 말 한 마디 없는 것일까 싶었다.
우연이었는지 모르나 그다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는 길의 카메라 구도라던가 '집으로'라는 제목이라던가
메시지를 직접 던지기 보다 짧은 이미지들의 연속을 통해 보여준다던가
소재도 배우도 진짜 삶속에서 찾아낸다던가, 동네 아마추어 배우들을 쓴다던가
모든 것이 키아로스타미에게 진 빚이 아닌가?
리얼리즘에서 비판을 제외시켰기에 자신은 키아로스타미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도시 중산층 지식인이란 대체 믿기가 힘든 존재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무사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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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6 03:50 2003/08/26 03:50
어제는 '환타스틱 소녀백서'를 보았다.
상당히 우울했다.

원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즐거운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완전히 잘 못 고른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주인공은 완전히 나잖아.

우울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내 입장을 설명할 수가 없다.'

입장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가
즉흥적이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기껏해야 투덜대고 비웃는 것 밖에는

이해를 요구할 생각도 없다
할 수 없으니까.

여기저기에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있지만
늘 그렇듯이 자기가 원할때만
뻔뻔스럽게 나타나서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감정을 쏟아붇고 나면
너무 무서워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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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1 23:50 2003/06/11 23:50

Ghost World

from 영화에 대해 2003/06/11 00:00
이상하다.
'환타스틱 소녀백서'의 원래 제목은 'Ghost World'란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만든 것일까?

이니드의 삶에서 무엇을 건지라는 말인가?
Ghost World를 떠나면 무엇이 있는데?

세상은 Weird하다.

레베카가 원하는 나만의 집과
그것을 위해 참아내는 것들

시모어가 수집하는 희귀한 것들
자기만의 세계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나도 이니드의 나이때에 알았어.

Ghost World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서
여전히 Ghost World를 떠돌아 다닐 이니드가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언가를 하려면 그곳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야
머물 수 없기 때문이야

나를 괴롭히지 말아줘...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아무것도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모두를 너무 좋아하지만
함께 있을 수는 없어
나는 그것들을 원하지 않아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그 무엇도 소중하지 않아

벗어날 수 없다.
미국 사회의 풍자라고? 어딘들?

영원히 부조리한 세계의 '이방인'일 뿐이야.

이제 지겹다.




짜증나는 건,
제목을 '환타스틱 소녀백서'라고 바꾼 것과
여기저기 이상하게 소개된 내용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 의미부여들.

그리고 이니드의 삶에 대한 기분나쁜 동경이다.

그것은 젊은 날에 대한 동경
단 한 번도 실물로 존재한 적 없는 그 젊은 날
제목도 그래서 '소녀백서'다.

이니드의 삶을 '소녀'에 가둬두는
그 무의식적이고 대단한 시스템이 무섭다.

나는 이니드이지만 이니드일 권리는 없다.
물론 권리가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지만,
비현실의 세계인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할 때만은
권리가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권리는 있더라

그들을
'Ghost World'라고 부르는 것은
이니드의 무기력한 시선일 뿐이다.

사실, 그들은 이니드를 'Ghost'라고 부른다.
무서워하는 척 하지만 존재조차 의심하고
요새는 받아들여 주는 척 하면서 존재를 부정한다



울어보고 손을 놓아보고 떠나보아도
영원히 반복되는 Ghost World를 떠날 단 하나의 가능성마저
그 반복의 한 과정일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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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1 00:00 2003/06/11 00:00
전주에 다녀왔다.
전주는, 무엇보다, 맛있다.

25일(금요일)부터 27일까지 짧고 긴 3일.

맛있는 것만 먹으면서 영화를 보다니, 그보다 행복한 시간이 있을까!

지난 1년 5개월간 노동의 후유증으로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서
결국 3일동안 개토는
'자다가 일어나서 영화보고 밥먹고 자기'만 반복했다.
전주는 밥과 영화관과 묵었던 방밖에 못봤다는 슬프고도 행복한 이야기.

첫날,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방에 짐을 풀고 용감하게 전주 영화의 거리로 나간 개토는
추위와 무거운 잠과 아픈 다리를,
10분만에 절절히, 정말 뼛속까지 느끼며
보는 순간 바로 필이 꽂힌 막창구이집으로 들어갔다.
아아~ 전주관광호텔 뒷골목의 그 막창구이 집,
오독오독 씹히는 그 맛, 오그라드는 모습이 정감어린 막창의 누드,
맛난 김치와 소고기 무우국, 아아~ 정말 아아~인 것이다.

따듯한 숯불과 맛난 음식으로 몸을 데우고 나니
잠시 힘이 솟았으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을 만큼의 힘이었다고나 할까
돌아오자 마자 부른 배를 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밤 11시에 일어나,
12시에 예매해 둔 '전주 불면의 밤 -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보기위해
또다시 용감하게 일어났다.
전북대 문화관에 도착했는데, 불면의 밤은 그야말로 불면의 밤이었던 것을
개토는 예매하면서 몰랐던 것이었던 것이다.
밤 12시에 시작해서 아침 6시 30분에 끝나는 것을...

늘 그렇지만 영화제의 영화들은 의외로 재미있다.
기대하지 않고 미심쩍어 해두고 나면 감동의 넓이가 달라진다.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블랙 필름은 황당 그자체였다.
미국의 인공적인 백인 문화,
내가 접해본 백인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날 것의 느낌,
솔직하고 과격하고 처절하다.
한 번도 TV에서 본 적이 없는 장르, 이상하다...이상해...

네 편 중에 마지막 편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
4시가 좀 넘었을 때 방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뻗어서 낮 1시에 일어나
2시에 덕진 예술회관에서 키에슬롭스키의 단편 3개를 보았다.
필름 담당자가 보다가 끊겨도 책임안지겠다는 선언을 길게 하고 나서
조용하고 엄격한 키에슬롭스키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개막작이 '여섯개의 시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어쨌는지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개토는 '시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나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
그것만으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 싶다.
모든 좋은 영화들은 아주 냉정하게 하나의 시선을 유지한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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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29 23:41 2003/04/29 23:41
전주 비빔밥을 먹고 나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를 보았다.

전주에서는 일인분에 만원 넘는 건 먹지 않는게 좋다.
가격과 맛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싼 걸 먹으나 비싼 걸 먹으나 똑같다.

비빔밥은 4천원. 맛있다.

매우 원시적이고 동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기계.
크로넨버그는 이미 기계와 한몸인 인간을 절망적으로 인정하는 작가다.

실을 풀고 조여 숨통을 끊는 스파이더 역시
이미 실이라는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스스로를 파괴하는 존재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자아 형성과정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두편을 보고 나니 너무나 피곤해서....
역시 몸이 견뎌주지 않아서, 그냥 방에 돌아가 자버렸다.
11시 30분에 가까스로 일어나 '불면의 밤 - 미하엘 하케네'를 보러갔으나
도저히 견딜 힘이 나지 않아 표를 팔고 야참을 먹으러 갔다.
굉장히 굉장히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이다.

전북대 문화관 옆 거리에 있는,
'상추튀김'집, 전세계에 혹시 단 하나뿐인 것이 아닐까?
튀김을 양념간장에 찍어 상추에 싸먹는 것이다!!
떡볶이와 상추에 싼 튀김. 야옹~

그리고 또 잤다.
온 몸을 늘씬하게 두드려 맞은 것처럼 정신없이 잤다.

아침에 10시에 또 가까스로 일어나
11시, 애니 매트릭스를 보았다.
애니메이션이 좋다.
하지만, 전형적이었다. 부족했다.
오만하게도, 저정도라면 쉽게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시 영화가 영화제 측의 사정으로 취소되어
한정식을 먹고(배불러 죽을뻔 했다.)
5시에 '피카소와 스튀레의 모험'을 보았다.
풍요롭고 한가롭고 지적이고 위트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리고.....
쥐포를 먹으면서...포카리스웨트를 마시면서
집에 돌아왔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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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29 00:00 2003/04/29 00:00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혹은 리리이 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감독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 이상의 '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들이 완벽하게 분열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분열을 꿈꾸며 살기도 한다.

'나'들은 각기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갈망한다.
현실은 하나이기도 하고
어쩌면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자의 '나'들이 살고자 하는 현실.

인터넷이라는, 또다른 현실세계가 자리잡은 덕에
적어도 두 개의 '나'는 각자의 현실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속에서 살고 있는
- 믿음이라기보다 강력한 고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라 -
내 몸의 현실과

몸과 연결되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써 떼어놓고 싶은
내 '어떤' 욕망들의 현실.

내 몸이 살고 있는 현실은, '나'를 괴물로 만들어 간다.
그 현실은 더럽고 추악하고 냄새나고 폭력적인데다가
심지어 엄청나게 잘 포장되어 있어서 진실하지조차 못하다.
그 안에서는 '나' 역시 잘 포장된 오물이다.
포장이 벗겨지면 촤르르 무너지리.

내 욕망의 현실, 인터넷 안에서 '나'는 '에테르'이다.
어쩌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순수한지도 몰라, 진실할 지도 몰라...
몸의 현실을 부정하는 아름다운 나 자신.

에테르는 빛의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전파하는 맑고 깨끗한 대기.

'에테르'인 '나'는 너무 눈부셔,
감히 '나'라고 부를 수 없어.
그를 '리리이 슈슈'라고 부르리.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는 일본 현실의 극단적인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현실을 꿈꾸게 마련이다.

일본 특유의 왕따 문화 역시 일본 현실의 극단적인 폭력성에서 기인한다.

소외된 삶이 타인의 삶을 잡아먹는 일은 끊임없이 연결된다.

주인공 유이치는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리리이 슈슈'를 만나고 그 안의 현실을 살아보려 하지만
결국은 몸의 현실이 '리리이 슈슈'를 만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의 현실이 욕망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사실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몸의 현실을 스스로 부수기 시작한다.
'리리이 슈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을거야.
하지만 모두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돼, '리리이 슈슈'까지도.
'리리이 슈슈'를 만나게 해준 그 어떤 현실도.

그리고 처음으로 몸의 현실 속에서
'리리이 슈슈'에게 말을 건다.
'리리이 슈슈'의 다른 이름은 '쿠노', 혹은 또다른 '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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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6 13:04 2002/09/16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