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아침

잡기장
건강검진을 금요일 오전까지 받아야하는데, 아침 8시~9시반 사이에 오면 기다림 없이 할 수 있을거라고 그랬다. 귀찮지만, 안하면 벌금이 나온단다. 벌금 낼 돈 한푼도 아껴야 밀린 활동비가 나올테니 가긴 가야하는데, 쫓기듯이 하기 싫어 오늘 아침에 바로 가기로 맘먹었다. 다운받아놓은 "환상의 커플"을 주룩 보다보니 어느새 밤 11시 반.

건강검진 받으려면 전날 밤 10시부터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물도? 그렇다는 말이 있는데 지식검색 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물도 안마셨다. 10시 전에 든든히 먹어두려 했으나 저녁 먹은 후 계속 드라마에 빠져있었기에 10시를 넘겨버렸다. 꼬로록~ 소리가 들린다. 아.. 더 괴롭기 전에 일찍 자야겠구나. 아침 8시에 일어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 삼실에서는 귀신의 영험함 덕인지 알람 소리에 바로 잠이 깨고 움직일 수 있으니 삼실에서 자고 근처 병원에 가는게 나으렸다.

자는 도중 베란다로 가는 문이 바람에 열렸다. 베란다 창문은 한여름처럼 죄다 열어 놨고. 냄새를 빼려 함인지. 그 덕에 자면서 추워 잔뜩 웅크리고 잤다. 알람 소리 듣고 한방에 일어났는데 몸이 굳어있다. 하필 오늘부터 추워지는 날이지 뭔가. 그 생각을 진작 했으면 문을 확실하게 닫아놓고 잤을텐데. 배도 고프고 몸이 얼어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움직이기 귀찮지만 억지로 몸을 풀고는 빨랑 밥먹으러 가려고 검진을 받으러 갔다. 갔는데 서류 한장을 안가져와서 다시 빽.. 제대로 안 갈켜준 사람을 원망하며 투덜투덜댔다.

엑스레이찍고, 소변검사하고, 피뽑고, 혈압재고, 키 몸무게 재고, 소리나는 쪽으로 손들기, 시력검사 하고 나왔다. 이제 밥먹으러 갈 수 있다. 제일 가까이 있는 식당으로 갔다. 그게 어제 포스팅이 나온 식당이다.

지각생: 계란 뺀 비빔밥 주세요.
아주머니: 밥이 찬데.. 돌솥비빔밥으로 해요

돌솥비빔밥은 500원이 비싸다. -_-

지각생: (아 놔) 그럼 돌솥비빔밥으로 주세요. 계란, 괴기 빼구요.
아주머니: ㅎㅎ 밥이 차가워서 그래요. 잠시 기다려요.

여긴 선불이라 돈을 먼저 냈다.

지각생: (돌아서다) 계란 괴기 꼭 빼주세요.
아주머니: x*#@^*&

왠지 불안했지만, 세번을 얘기했으니 괜찮겠지. 모처럼 새벽에 안먹고 피도 뽑은 탓에 심약해졌나. 아님 어제 드라마 보다 너무 좋아서 기분이 들뜬 상태라 그런가 -_- 이제는 익숙능숙하게 셀프 서비스를 해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내 엠피삼 플레이어는 "환커" OST가 많이 들어있다. 그걸 들으며 어제 본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금새 밥이 나왔다. .. .. .. 울컥한다. 계란이 들어있다. 고기도 들어있다.

아주머니. 제가 계란 빼달라고 세번을 말씀드렸잖아요.
잉? 그랬어 아이구 이런.

당황하며 어찌할 지 몰라하시지만 사과는 없다. 그러더니 조그만 반찬 접시를 가져와 얹혀진 계란 노른자만 건져간다. 흰자는 이미 밥안으로 스며들어가는 중. 슬슬 화가 나며, 지금 채식하는데 고기와 계란은 조금도 입에 안댄다고, 그정도로 될게 아니라고 말했다. 소란스러워지자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느새 나타나 그 아주머니를 나무란다. 아니 왜 세번이나 얘기했다는데 그걸 넣고 그래요. 그러면서 내게 하는말이, "조류독감 때문에 그런가 보죠?" 아뇨. "그럼 알레르기가 있으신 모양이군" 하며 밥에 남아 있는 고기와 계란 흰자를 조금 더 던다.

아놔.. 여기서 내가 왜 채식하는지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슬슬 다시 열이 차올라 "그릇 주세요. 직접 할테니." 이 말도 잘 안나온다. 사장이 "이거 안되겠네. 새로 해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럴려면 차라리 진작 그랬어야 했다. 화를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그럼 나왔던거는 버릴게 아닌가. 얼릉 주방으로 달려가, "그거 어떻게 했어요. 버릴거죠. 그냥 주세요" 했다. 그냥 됐단다. 새로 해주겠다고 한다. 음식 쓰레기 버리기 싫다고 얘기해도 계속 새로 해주겠다는 말만 하다가 자기들이 먹겠다고 한다.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는 말은 제대로 귀담아 듣는게 없다. 분명 버릴걸 아는데. 조금 있으니 벌써 버렸다고 실토한다. 화가 치솟았다. 새로 밥을 덜어 논게 눈에 들어온다. 이제 저기에 다른 게 얹어지면 다 먹던가 버리던가 해야한다. 먹을 생각이 사라졌다. "안 먹겠습니다!!" 크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음식 쓰레기도 많이 생겼다. 내 기분도 상했다. 쉽게 열이 가라앉지 않는데, 차라리 새로 한 밥이라도 먹을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돈이 아깝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사천원이 적은 돈이 아니지만, 왠지 그 새로 나온 밥을 먹는 건 아니다 싶다. 이러고 나왔으니 그 사장이란 작자가 아주머니들한테 심하게 그러는거 아닐까. 아니면 별 미친 놈, 혹은 채식하는 놈은 까다로운 놈이야. 아침부터 재수없네. 이러진 않을까. 젠장.

역시 직접 밥을 해먹어야 해. 한국에서 채식하려면 말이지. 삼실로 돌아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김을 샀다. 밥을 안치려다 보니 삼실 주방이 엉망이다. 음식 쓰레기는 말라 비틀어지고 썩어가도 누가 갔다 버리지도 않는다. 그 안엔 담배 꽁초도 잔뜩이다. 또 젠장. 담배 뒤처리 안할거면 피우지도 못하게 해야돼. 그 담배 꼬나 물고 세상을 논하고 혁명을 꿈꾸었을까? ㅤㅌㅞㅅ. 그래봤자 나도 음식 쓰레기 오래 방치한 사람중에 포함되니 할말이래야 별로 없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사람은 나뿐이고, 아침이라 그런지, 그리고 빈속으로 잠을 자 속이 편해져서 그런지, 검진 받으러 갔다 오다 찬바람 쐬서 그런지, 또 식당에서 싸우며 열이 오른 탓인지 귀차니즘을 누르고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쓰레기를 치우다 보니 계속 욕이 나온다. 아놔. 장난하나. 너무한거 아냐. 투덜투덜 대다보면 그동안는 "아~ 내가 왜이러지. 이러면 안돼" 하고 맘속으로 착한 생각하려고 하기 마련인데, 이젠 그러는게 별로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 욕이 나오는대로 신경질이 나는대로 냅두며 쓰레기를 치웠다. 고무 장갑 손가락 안에 물이 차는 느낌이 예술이다 -_- 보니 끝이 다 닳아 있다. 바쁘다 바쁘다 하며 계속 방치해 둔 댓가다. 근데 이 댓가를 계속, 아니 대부분 내가 치러야 하지. 다른 장면을 상상해본다.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사랑방에서 세상을 한탄하고, 혁명을 논한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 사람들 뒤치닥거리한다. 볼꼴 못볼꼴 다보겠지. 그러면서 이럴 것 같다. 웃기고 자빠졌네. 자기 앞가림 뒷처리도 못하는 무능력자, 의식 수준이 그 정도 밖에 안되고, 자신의 현재 처지가 누구의 노동 위에 있는지, 누구를 어떻게 착취하고 있는지도 의식 못하는 사람이 무슨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바꿔갈 수 있다는 건지. 그래도 우리 단체가 뻔뻔하게 혁명 운운 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하는 건지. 실컷 속으로 욕을 하지만, 일단 기분이 가라앉고 차갑게 생각하게 되면 이제 그 욕이 죄다 내게 돌아올 차례다. 아 젠장. 집에 있을때도 좀 이렇게 청소도 자주 하고, 내 옷 내가 빨고, 음식도 해먹고 해야 되는데 머야 밖에 나와서만 이렇게 하고 말야. 그러고 가끔 하면서 남 욕이나 해대고. 어휴..

한참만에 청소를 끝내고, 냉장고를 비우고, 밥을 해 먹었다. 딱 정확히 한 공기 만큼만 했다. 그걸 하기 전에 오래된 밥을 조금 버린 탓이다. 사람들이 온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볼때마다 왠지 부아가 난다. 화를 내며 말해서는 효과도 없다. 어떻게 잘 문제를 환기해야할텐데.. 계속 얘기를 못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단체에 대한 애정도 모두 말라버릴텐데. 그리고 곧 떠날건데. 떠나기 전에 마무리 잘하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힘을 내서 좀 바꿔나가고 싶은데. 아.. 하지만 이제 슬슬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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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8 12:08 2006/12/2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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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nPlease 2006/12/28 12:52 URL EDIT REPLY
그래도 돈은 돌려받고 나오셨어야죠.
kong 2006/12/28 12:58 URL EDIT REPLY
채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식당 얘기를 읽으면서 많이 공감합니다. 자신의 뜻, 혹은 뜻과 무관한 필요(가령 섭생에 주의해야 하는 질환 등등)를 짓밟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런지요. 사무실 일은 '기린언어'를 연습하면서 풀어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기린언어에 대해 한번 들어봤을 뿐이지만, 왠지 상황에 딱일 것 같고, 지각생께서 잘 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내일 아침은 좋은 의미에서 '환상의 아침'이 되시길~ 참, 검진 전에 맹물은 마셔도 되요.
지각생 2006/12/28 14:46 URL EDIT REPLY
ScanPlease// 돈을 돌려 받았을때 제 분노를 좀 더 그곳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게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혹시 채식하는 사람에 대한 악감정으로 굳혀질게 우려되니까요. 그걸 제쳐놓고도, 돈을 돌려 받지 않은 것 자체가 하나의 표현입니다. 제 불만이 내가 지불한 돈에 상응하는 상품과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으로 생각되고 싶지 않았어요.

kong// 그랬군요. 목말랐는데 ㅋ 식당에서 정말 답답하더군요. 돈이 오가는 것 외에 그 사람들과 제가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것인가 싶었습니다. 미움보다 답답함때문에 견딜 수 없어 뛰쳐나왔습니다. 기분은 안 좋아도, 그런 제 자신이 좋게 보이는 "환상의 아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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