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서비스

잡기장
사무실 사람과 한바탕 했다. 싸우는 것도 오랫만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서로 한마디씩만 덜해도 안 싸웠을 것이다(아예 얘기하길 싫어하니까). 또 단어 한 두개만 쓰지 않았다 해도 금방 끝났을 것이다. "왜 너는 항상". 그 말을 듣고 나도 "당신이 늘" 그랬지 않냐고 맞받아쳤고..

싸우고 나면 기분이 더럽다. 차라리 속이나 씨언하게 다 퍼붓고 싶지만 오랫만에 싸우는 거다 보니 내가 부들부들 떨리는게 느껴져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 적당히 마무리하고 말았다. 점심 보통 먹는 시간을 넘어 출근했기에 밥을 먹어야 하는데, 사무실에서 먹기 싫어서 은행 갈 일이 있어 돌아오다 식당에 들러 사먹었다.

계란 뺀 비빔밥을 시키고, 셀프 서비스인 물과 국물, 반찬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비폭력 대화란 역시 내게 거리가 있는 걸까. 기린 언어 워크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니 화는 가라앉고, 그러고 싶지 않지만 멋적은 느낌과 약간의 부끄럼이 또 든다.

모처럼 분노에 찼고, 그게 가라앉고 나니 일순간 고요가 찾아왔다. 오늘 해야할 일, 피곤한 관계들이 멀리 밀려난 일시적 평화. 주위를 둘러본다. 직전의 내 행동을 생각한다. 셀프 서비스.

식당이던, 술집이던, 지각생은 남들이 오버한다고 할 만하게 움직인다. 요즘은 줄긴 했지만, 가만히 자리에서 기다리는게 아니라 서빙 알바를 하듯 직접 음식이나 술을 날라오고, 사람을 불러 할 일을 직접 가서 처리하고 온다. 의식적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자동으로 그러기도 한다. 몸에 밴 탓도 있고, 그게 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순 노동, 소외 노동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하는지 조금이나마 아는 나로서는, 누군가 약간만 주의를 기울여주고, 내 서비스에 "응대"해 줄때, 혹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게 그 노동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 모든걸 받기만 하는것, 나는 숟가락만 들어 먹기만 하고, 다 먹은 뒤에는 접시를 정리해서 치우기 좋게 한다거나, 직접 갖다준다던가, 쓰레기를 모아 정리하거나 직접 버리지 않는 이 행동을 보면, 약간 답답하다.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그거에 요리를 해주는 노동과 차려주고 치워주고 친절히 대해주는 모든 서비스-감정 노동의 댓가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식 있는 사람, 활동하는 사람도 대부분 그렇게 가만히 받아 먹기만 한다.

내가 셀프 서비스를 할때(정해진 것과 무관하게), 그건 그 사람의 단순 소외 노동의 일부를 내가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것과 내가 하는 것은 강도와 성격이 다르다. 내가 하는 것은 내 삶을 유지하는 활동과 연결된 필요노동이다. 좀 더 오버해서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게 자신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걸 그 사람이 하게 하면 하루의 단순 소외 노동을 더 하는 것이고 이건 아무리 숙련된다고 해도 쌓이면 쌓일 수록 급격히 증가하는 피로의 원인이다. 그래서 난 좀 더 오버해서 반찬을 가져오고, 먹은 다음엔 직접 그릇을 갖다주거나 최소한 치우기 좋게 정리해주는 작업을 조금이라도 더 해주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노동을 받는, 대처하는 자세다. 돈을 지불한다. 그러면 거기엔 음식을 만드는 노동과 차려주고 치워주고 친절히 대해주는 갖가지 노동이 다 포함된 것인가? 어차피 그 사람의 노동도 진정으로 나를 위해 한 것이 아니라 내 돈에 대해 한 것이니 차갑게 돈을 건네 주는 것으로 그 노동을 정당하게 수용한 것일까? 이런 생각은 얼핏 보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자본주의적이고 소유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 시스템에서 나 혼자 할 수 있는게 없다고 하더라도, 내 돈은 돈대로 주더라도, 나는 그 사람이 내게 해준 노동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감사하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자본주의 질서를 따르지 않은게 된다.

택시를 가끔 타면, 내릴때 요금을 지불하며 "감사합니다" 그런다. 남들이 이상하다고 그러고, 기사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듯하고, 사실 내 자신도 왠지 어색하다. 하지만 그 어색함 자체가 내가 깊이 자본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분명 그 사람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이동시켜 줬다. 난 그 사람의 노동에 힘입어 원하는 것을 이뤘다. 그것에 가치를 판단하고 수치화해 돈으로 환산시켜 그걸 받아내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다. 물론 나도 그걸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돈은 준다. 하지만 난 그래도 그 사람의 노동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자본주의가 끝장나는 세상을 원한다. 그러면 자본주의를 마음 속에서부터, 밀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머리 속에서만이 아니고.

나는 내 경험에 바탕해, 식당 노동자와 운수 노동자의 심정을 지레 짐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대신 해준다. 그건 내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떳떳해진다. 그건 내가 그 사람의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생각의 표현이니까. 내게 해주는 모든 노동에 감사하며 식당 노동자와 운수 노동자에게 친절히 부탁하고, 예의를 갖추며, 마음으로 감사한다. 물론 항상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무지 피곤하고(몸이던 맘이던), 같이 있는 누군가와 끊을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던가 할때, 그리고 감정이 완전히 부정적으로 되는 주기, 이럴땐 극히 형식적으로 억지로 (사실 나쁘게 말하면 항상 그런거라 할 수 있겠지만) 조금 해서 자신을 속이고 말아버린다.


요즘 "빼앗긴 자들"을 읽는 중인데, 사회주의(아나키스트) 행성에서 자본주의 행성으로 온 첫번째 사람이 느끼는 것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소유주의적인 생각을 하다니." 소설 속 사람이 중얼거릴때 나도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도 지금껏 그래왔잖아. 사람에 대해서도. 요즘 사람들 만나면 나도 SF를 권하곤 하는데, 딱딱한 사회과학 서적, 기술서적만 읽게 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런게 정말 좋은 영향을 준다.

배어 있는 것을 어디까지 발견할 수 있고, 어디까지 원하는대로 바꾸어 갈 수 있을까. 그저, 역시 나도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할 밖에, 지금껏 해오던 것이 이젠 몸에 밴 무의식적인 자동반응으로 되버렸다고 해도, 그게 좋다고 생각되면 계속 할 밖에. 의식 안하고 살면 점점 그런 생각이 약해진다. 다른 사람의 노동을 그냥 받아들이고,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모든게 끝난다고, 더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여기서 다시금 맘을 다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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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7 16:40 2006/12/2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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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양이 2006/12/27 17:37 URL EDIT REPLY
이 얘기 되게 좋네요. 지각생님 말이 맞는 걸요. 저는 앉아서 '서비스'라는 걸 받는 게 정말 불편해요. 더 불편한 건 '서비스가 너무 나쁘잖아요'라면서 따지는 사람들이지만-_-;
re 2006/12/27 18:42 URL EDIT REPLY
당고~ 지각생님은 '되게 좋은' 글 '되게' 많이 써요. ㅎㅎㅎ
지각생! 몸은 좀 괜챦은건가요? 넘 무리하지 마시고, 연말 잘 보내세요!
derridr 2006/12/27 19:00 URL EDIT REPLY
추천 추천
토토 2006/12/27 19:06 URL EDIT REPLY
지각생도 요즘 까칠해지고 있는겨?^^ 살면서 싸우기도 하는거지.
머리에서 김 나는데 말이 곱게 나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근데, 셀프 서비스 잘하네. 친절한 지각이...^^
지각생 2006/12/28 11:17 URL EDIT REPLY
칭찬 감사 추천 감사. 그치만 부끄 ;;
연말 잘 보내삼.
로이 2006/12/28 12:37 URL EDIT REPLY
정말 그렇군요.. 그동안 쉽게 생각했었는데.. 하나 배우고 갑니다.. 무의식이 역시 제일 무서운거 같아요. 이렇게 행동하는게 어떤 건지 생각조차 안해보는 것.. 바보는 되지 말아야하는데..ㅜ.ㅜ
지각생 2006/12/28 14:49 URL EDIT REPLY
전 바보가 되고 싶은걸요? :) 의식하지 않고도 생각과 행동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곰탱이 2006/12/28 20:35 URL EDIT REPLY
지각생 님의 생각에 깊이 공감공감!!! 지각생 님의 생각과 행동을 일단 의식적으로 열심히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삼^^!!!
시치프스 2006/12/28 21:44 URL EDIT REPLY
공감하며 읽고 갑니다.
지각생 2006/12/29 05:51 URL EDIT REPLY
곰탱이님, 시치프스님. 와주셔서 고마워요. 전 요즘 다른 사람들 블로그에 잘 가지도 않는데.. 그냥 생각나는 말 있으면 휘갈기고 사라지는데.. 전 지금 술에 취했답니다. 솔직한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 굳이 변명을 합니다.
에밀리오 2006/12/29 06:43 URL EDIT REPLY
오! 저도 공감!! 생각지도 못했군요... 저도 자본주의 끝장내고 싶으니까 마음 속으로부터 그런 생각들을 밀어내렵니다!!! 우워!!!
다꽝 2006/12/29 10:10 URL EDIT REPLY
저도, 항상 비스꼬롬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돈 낸다고 그 사람의 노동을 전유하는 건 아니고, '인간의 얼굴을 한'
그 뭔가가 서로 오고가는 거잖아요. 읽고 나서 많이 생각하고 갑니다. :)
구름 2006/12/29 10:37 URL EDIT REPLY
글 참 잘 보았습니다. 정말 지금 사회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마움을 갖기 어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각생 2006/12/30 11:26 URL EDIT REPLY
에밀리오, 다꽝, 구름// 고마워하지 말고, 네 삶을 떼어주라고 하는게 자본주의인 듯.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이 다른사람이 뜯어가느냐보다, 그런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더 무섭.. 그렇지 않게 될 수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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