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정보통신활동가가 되었나?

사회운동
이제 거의 3년이 되어 간다. 상근활동과 자활을 합친 기간. 지금껏 난 저 질문을 당당하게 그 자체로 던져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막연히, 늘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을뿐.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보낸 그 동안 깊게 질문을 던지는 법, 출발점을 기억하는 것, 온 길을 돌아보는 것을 잊고 살았다. 두려움이 빚은 망각일까.

나는 왜 정보통신활동을 할까? 이 질문을 진작 던졌어야 했다. 그랬다면 좀 덜 흔들렸을 거다. 기운이 빠졌을때 다시 불어넣을 수 있었을거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이 질문에 답을 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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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는 생산수단이다. 저렴한 개인용 생산수단. 전기외에는 지식과 개인의 노력만이 필요한. 컴퓨터 자체에 대한 지식을 알면 쓰레기장을 뒤져 나온 부품으로 조립해 한푼도 안들이고 만들 수 있지만(먼지는 뒤집어 쓴다), 내 하기에 따라 역량은 무한대가 된다. 서버를 구축해 온라인 토지를 다지고, 프로그래밍을 통해 그곳에 집을 짓고, 길을 털 수 있다. 부족한 하드웨어, 오프라인의 재물이 필요한 것을, 정신노동을 통해 부족하게나마 보완할 수 있다. 무지 삽질하지만, 어떻게든 현실의 넘지 못할 차이 - 출발 위치, 달리는 수단 - 를 극복할 수 있다는 꿈을 품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생산수단이 필요했다.

공정한 기회를 원했다. 내가 가난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돈 가진 사람들 토해내라는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해서 그들을 따라잡겠다는게 아니라, 그저 난 살고 싶을 뿐인데, 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뿐인데, 어떻게든 살려 아둥바둥해도 더 막막한 느낌만 들게 하는 건 잘못된 거다. 오프라인 질서는 이미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격차가 있고, 그걸 극복할 길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된)다. 나는 새로운 질서, 가능성의 공간, 길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온라인이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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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 두가지는 출발점이 아니다. 난 단지 컴맹을 면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닥치는데로 기술서적을 읽었다. 등록금 내는게 버겁고 아까워 휴학한 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재밌었다. 게임을 해서 재밌고, 문제 해결해 가는 과정이 재밌다. 그걸로 소통하고 관계 형성하고 하는게 재밌다. 비장애인 남자의 관점에서는 온라인에서는 기존의 차별 구조, 한계들이 극복되는 것 같았다.

컴퓨터 공학과를 원해서 간건 아니었다. 그리고 출발은 기계-전자-공학부, 기계기계설계 전기전자전파 산업공학컴퓨터 전공이 합친 어이없는 학부. 난 기계쪽으로 시작했다. 남들처럼 돈 벌어 먹고 살 궁리외에 심각한게 없던지라 운동은 조금 해보려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에 주변만 맴돌고, 무슨 말 하는지만 나중에 따로 혼자 알아냈다. 휴학중 알바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은 과방에서 후배들과 노는데 보내고 그래도 남는 시간은 도서관에서 당장 필요한 실용 기술 공부하다 알게 된게 리눅스다.

리눅스를 다룰 줄 알면 고물 PC로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다고 했다. 난 남들처럼 좋은 최신 컴은 사기 어려우니 그렇게 상쇄하는게 낫겠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책이 GNU -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을 얘기한다. 리눅스 이거 정말 괜찮다. 이걸 알면 서버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그땐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면 가능성을 더 키울수 있었다. 내 컴을 더 자유자재로 동작시킬 수 있었고, 웹 프로그래밍을 하면 온라인 공간을 내 입맛에 맞게 만들고, 바꿔 볼 수 있다. 물론 그 집을 짓는데 들어가는 재료는 전자 비트, 전력 뿐이고, 내 정신노동만 투여되면 된다. 즉 돈이 안든다. 잘 못 지으면 헐고 다시 지어도 환경을 배신하는게 아니다.


체계적이지 않고, 되는대로 배웠지만 어쨌든 정보통신기술을 어느 정도, 일부분 습득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내가 기회를 놓치고 있으며, 이제 와 바둥거려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대기업에 들어가려 애쓰는 동기와 후배들이 서서히 학교를 떠나는 걸 보며 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졸업은 틀렸고 기술은 인정받기 어려웠다. 나는 천재는 아니었고 강한 의지와 추진력을 가져 그걸 만회할 사람도 아니었다.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나를 더 과소평가해서 알바하듯 시작해 계속 죽어라 삽질헤딩하고 착취당하다 어디에선가 지친 내 몸을 기댈 곳을 찾고, 돌아봤을때 이미 늙어가고 있던가, 아님 이 불합리한 구조를 바꿔보려는 노력을 기울여보던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강한 신념과 의지 따위는 없다. 하지만 어릴때부터 알바하며 왜, 얼마나 내가 착취당하는지도 모르게 착취당해온 경험이 내 등을 밀었다. 이제 그런건 끔찍해, 싫어. 돈을 덜 받고, 계속 가난하게 살더라도 착취당한다는 느낌 없이 살고 싶어. 인간답게, 존중받으며 살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건 얼마든지 뽑아내 줄테니.

그래서 시작한 활동이다. 정보통신활동에 대한 뭔가 개념이 잡혀 시작한 건 아니다. 물론 전혀 없진 않았다.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역시 그래도 활동을 할때 더 방향을 홱 틀어버렸을테니. 환경단체에서 자활하면서 내 수준의 기술로도 할 수 있는, 해얄게 많다는 걸 알고 자신감을 얻고, 우연히 알게된 지금의 단체 - 정보통신으로 노동운동하는 단체를 표방한 (그래서 내 귀에 쏙 들어온) 단체 - 에서 몇달 자활을 하다, 정식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정보통신활동"을 하려고 했다기 보단 정보통신기술로 할게 가장 많을 듯 싶은 노동운동단체에서 그저 "활동"을, 아니 "노동"을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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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른다면, 그래서 무력감과 두려움이 든다면, 아무리 관심이 있어도 뭔가에 참여하긴 어렵다. 내가 뭔가 했을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점쳐지지 않으면 뭔가 나서서 하긴 어렵다. 그런 내게 정보통신관련 기술은 두 가지를 다 극복하게 해준다. 한국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과소평가하며 정보통신기술로부터 멀어져 있다. 조금만 할 줄 알아도 그들을 위해 많은 걸 해줄 수 있다. 당당하게. 그리고 뭔가 해주면 신비와 경외에 찬 눈빛을 받을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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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래서 난 계속 운동하는 단체에서 노동함으로써 "활동"을 한다고 생각했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며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에 관심 있다는 것으로 "정보통신활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2년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난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활동하는 단체에서, 활동가들과 일한다고 바로 활동이 아니었다. 내 스스로 깨어 있고, 목적을 찾고, 길을 결정하고 직접 움직이는게 활동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한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다고 정보통신활동이 아니었다. 그 기술이 과연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만들 수 있는가. 그 가능성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고민하고, 그렇게 되게끔 노력하는 것이 정보통신활동이다.

그래서 지금, 뒤늦게나마 질문을 던진다. 물론 아주 늦은 건 아니다. 다만 지난 3년간의 부침을 생각하면 많이 아쉬울뿐. 난 왜 정보통신활동가가 되었나? 아니 되려하나?

현실 오프라인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옴짝달짝할 수 없다.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려 하는 노력은 대개 수포로 돌아가고 점점 더 스스로의 처지를 곤궁하게 만든다. 그 간극, 벌어진 격차,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 까마득한 높은 벽.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이 자본주의 세상에는 "모아진 힘"이 필요하다. 모아진 돈이던, 모아진 사람의 협력이던. 하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다. 새 집을 지으려 해도 모든 땅이 다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 있고, 모든 재료와 공구들도 내 삶을 뜯어 줘야 얻을 수 있다. 그 땅을 사고 재료와 공구를 마련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 이제 집을 지을 필요가 없을때나 되서 겨우 생길지도 모른다. 영영 안 생길 수 있고. 무제한의,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 필요하다.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쉽게, 작은 대가로 구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집을 짓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하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다.

정보통신활동은 그런 공간을 찾아주고, 소유주의자들의 무차별 공세를 막아낸다. 온라인. 재료와 공구를 사용하는 법을 알려준다. 컴퓨터. 자유소프트웨어 운동. 집을 짓는 방법을 함께 연구하고, 기록해 공유한다. 그래서 마을을, 공동체를 이룬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한다. 여전히 나는 값싸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싶고, 공정한 2라운드를 시작하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익힌 것 중 가장 익숙하고 많은 시간을 투여한게 정보통신기술이다. 나는 하고 싶은게 여전히 많다. 빼앗긴 자로서의 원통함과 욕구불만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이미 빠른 속도로 잠식되고 있을 망정, 난 온라인 공간, 컴퓨터, 정보통신기술에 희망을 걸고 계속 나갈 뿐이다.

그리고, 이제, 2년간 몸 담으며 익숙해진, 더 이상 자극을 얻지 못하는 이 단체를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적게나마, 불안정하게나마 받았던 상근활동비가 끊길거다. 다시 나는 불안한 하루하루 일상에 던져질 거다. 몇년 전에 비해 뭔가 에너지가 부족하거나 정신이 부분마비 증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흐물흐물해져버린 생활패턴을 다시 가다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것이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언젠간 다시 다른 단체에 들어가거나 일반 회사에 취직하게 될거다.. 그때까지, 개인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것, 하고 싶은 것을 후회없이 할 수 있기를 바랄 뿐.

그저 그런 하루에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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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30 02:01 2007/01/3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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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2007/01/30 10:32 URL EDIT REPLY
저와 컴퓨터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아무것도 없는 기반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점이 재밌어서 컴퓨터를 좋아하게 되었지요..

이런 지각생님의 고민이 굉장히 저에게도 자극이 되네요. 저 또한 열심히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봐야겠어요... 화이팅하세요!
ScanPlease 2007/01/30 12:52 URL EDIT REPLY
앗, 로이는 컴퓨터를 좋아하는구나~ ㅋ
torirun 2007/01/30 20:13 URL EDIT REPLY
잘지내나유?~
저번에 정보운동과 관련한 활동가들이 쫘악 모이는 자리가 있었는데요. 얼굴 봤으면 좋았으려만.
지음 2007/01/31 04:05 URL EDIT REPLY
오~~ 멋진걸?
지각생 2007/01/31 11:30 URL EDIT REPLY
로이// 격려 감사 ^^ 로이님도 홧팅!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오프에서는 궁핍하면 실패가 곧 끝장이 되어 두렵고, 소극적으로 보수적으로 임하게 되곤 하는데, 컴으로는 실패의 두려움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거에요.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게, 적극적으로 사고해 볼 수 있죠. 물론 그래도 성격상 한계는 있습니다만 ^^

스캔// 로이님이 스캔보다 컴퓨터를 좋아할까봐 걱정? 스캔도 이제 마음을 열어바바요 ㅋ

토리// :) 아마 일때메 꼼짝 못할 때였을거임. 아쉬웠지요. 자주 모일 기회를 만들면 좋겠죠.

지음// 멋진..건가?;; ㅋ 금욜에 바퀴 찾으러 갈거임.
ScanPlease 2007/01/31 20:47 URL EDIT REPLY
걱정은요.ㅋㅋ 가짜 컴과생으로서 진짜 컴과생을 대하는 기분이랄까..ㅋㅋ
꿈속에서 2007/02/06 03:18 URL EDIT REPLY
댓글 남겨주신 분이 누구신가 하고 찾은 공간에 주옥같은 글들이 가득하네요. 많이 배워갑니다. 행복하셔요.
지각생 2007/02/07 18:32 URL EDIT REPLY
꿈속에서// 감사합니다 :D 꿈속에서도, 밖에서도 행복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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