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리 집을 지나갈 일이 잇으면

SF
neoscrum님의 [어둠의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 에 관련된 글.

네오가 이 책을 내게 소개해줬을때, 이렇게 슬픈 이야기라고 말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앨저넌에게 꽃을.

지난주에 2박3일간 동원예비군훈련에 다녀왔다. 지루하고 짜증나는 동원훈련이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사놓고 읽지 못했던 두권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컴퓨터도 없고(이게 크다) 오직 책 읽는 것만이 즐거울뿐. 그 덕에 하루에 한권씩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둘째날 실내교육이 있었는데, 세번의 경험이 있어 그게 얼마나 따분한 줄 알았기에 이 책을 가지고 갔다.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걸 마저 읽지 않고 그 지루한 교육을 듣는 건 너무나 괴로울 터였다. 그래서 너는 떠들어라 나는 읽을테니 하고 마저 읽기 시작했는데, 아 끝부분으로 갈수록 무섭게 날 빨아들이더니 결국 눈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왈칵 솟았다. 드라마를 보며 펑펑 우는 평소의 지각생이라면 대놓고 울었을텐데, 아무래도 그곳은 그러기엔 역시 거시기한 "군대"였고, 주변 사람들 모두 따분 몽롱해 하는데 티가 나게 울기엔 왠지 부끄러워 책으로 눈을 가리고 "끅끅.." 하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처리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겟지만 그거슨 중요한 일이고 그러면 나를 쓸 수 잇는지 어떤지 알수 잇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빵가게 점원 찰리의 "경과 보고"다. IQ 68, 32살. 그는 머리가 나쁘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기와 쓰기를 공부한다. 그는 "머리가 좋아지는 뇌 수술"을 받는 첫번째의 사람이 된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몇 달 동안은.

머리가 급격히 좋아지면서 찰리는 많은 지식을 쌓게 되고,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기억해내며, 모르는게 나았을 사실들을 알게 된다. 찰리가 좋아했고,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사실은 자신을 괴롭히고 이용했다는 것을. 빵가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점점 똑똑해지는 찰리를 두려워하고 혐오해서 그를 내쫓는다. 또한 찰리는 자신에게 시술한 연구원들을 뛰어 넘는 지적 능력을 갖게 되며 그들이 사실은 편협한 지식과 좁은 시야를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임을 깨닫는다. 그러던 중 그보다 먼저 수술을 통해 머리가 좋아진 생쥐 친구 "앨저넌"의 이상 행동을 발견하고, 수술의 부작용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앨저넌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을 알게 된 찰리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활용, 수술의 문제점을 발견해서 더 이상 수술이 행해지지 않도록 하고는, 점점 퇴행해가는 자신을 지켜보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찰리의 시점에서 기록된다. 점점 변해가는 그의 지적 능력은 문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서, 처음에는 맞춤법도 틀리고 어눌한 말투에, 글쓰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정확한 표현에, 어려운 지식도 담기고, 섬세한 감정의 변화들이 잘 기록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시 처음처럼 변해가는데, 왜 자신이 그렇게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싶어했는지 알게 된 이후였기에 그것만은 잃고 싶지 않아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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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야, 로즈, 이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둬. 이 아이에게 겁을 주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 늘 그런 식으로 아이를 대하니, 이 아이가 불쌍..."
"그럼 왜 날 도와주지 않는 거에요? 왜 난 모든걸 혼자 하지 않으면 안돼요. 매일 이 아이를 가르쳐서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이 아이는 이해가 느릴 뿐이에요. 보통 아이들처럼 공부하면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야, 로즈. 그건 당신과 나에 대해서도, 이 아이에 대해서도 비겁한 일이야. 이 아이가 정상이라고 당신은 믿고 싶어해. 마치 동물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것처럼 이 아이를 몰아세우고 있어. 제발 그냥 내버려두면 안돼?"
"보통 아이들처럼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p.89~90



... 나를 위해 당신이 해준 것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나를 실험용 동물처럼 다룰 권리는 없다는 거요. 나는 인간이오. 그리고 찰리도 그랬소. 연구실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말이요...
...나는 당신들이 간과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인간적인 애정의 뒷받침이 없는 지능과 교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오.... 지식을 구하는 마음이 애정을 구하는 마음을 배제해 버리는 일이 너무 많아요.. 애정을 주고 받는 능력이 없는 지능은 정신적, 도덕적인 붕괴를 초래하고..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그 자체에 흡수되어 그 자체에 관여할 뿐인 마음,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마음은 폭력과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거지요... 내가 정신지체자였을때는 친구가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도 없어요. 물론 나는 분명히 많은 사람을 알고 있지요. 정말 많은 사람들을.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한 사람도 없어요... p276~278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생각이 날 것 같은데. 머릿속의 몽롱한 안개가 걷히면 생각날 텐데.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알 수 있을거야. 배운 것은 기억하고 싶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다. 그는 진심으로 그것을 원한다.
"됐어, 찰리." 김피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에서 칼을 거두어갔다.
"이제 됐어. 신경 쓰지마.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1분만 있으면 생각이 날 텐데. 어서 하라고 재촉만 하지 않는다면. 모두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p.80



(방황하다 들른 식당. 예전의 자신과 같았던 소년이 실수를 하자 그를 놀리며 재밌어하는 손님들. )
"그만해! 이 아이를 그냥 내버려둬! ... 부탁이니 제발 이 아이의 인격을 존중해 줘! 그도 인간이라구!"
... 태어나면서부터 지능이 낮은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학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 그리고 나는 거의 잊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바로 최근의 일이었으므로, 그런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웃고 있는 사람들 편에 가담하고 있었다. p.225.


"그렇지만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짓을 했다는 겁니까?"
"무슨 짓을 했냐고? 자네가 무슨 짓을 했나면 고든씨, 자네는 말야, 온갖 생각이니 뭐니 하는 것을 여기 들고 와서 우리를 모두 바보로 만들었어. 하지만 자네한테 한가지 일러두지. 나한테는 자넨 아직도 얼간이야."
...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다... 나를 조롱할 수 있는 한, 나를 노리개 삼아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백치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 나는 그들을 배반한 것이며, 그들은 그래서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p.126~127


(돌팔이 의사 구아리노의 병원에서. )
... "야, 대단하구나. 끝까지 하기도 전에 이 근방에서 제일 영리한 아이가 되겠다."
찰리는 이 칭찬과 관심이 기뻐서 뺨이 발그레해졌다. 남이 그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고,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그는 찰리의 어깨를 힘있게 잡는다. "... 네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 넌 지금 이대로의 너이고 착한 아이야."
...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의 표정을 보고 찰리는 떨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나쁜 아이인지, 부모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아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p.164~165.



(자신이 가게될 워렌양호학교를 미리 가본 찰리.)
"...자신의 일부를 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말입니다."
"'자신의 일부'란 어떤 걸 말합니까?"
그는 한순간 나를 탐색하듯 쳐다보았다. 피로의 그늘 뒤에 분노가 번뜩였다.
"돈이나 물질을 주는 사람은 많지만 시간과 애정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지요." 목소리가 씁쓸하다.
p. 256



...가까스로 무슨 말인가가 나왔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말이 아니라(그 자리를 주도하고 모든 과거와 고통을 날려보내는 위로의 말이나 격려의 말이 아니라), 갈라진 목구멍에서 나온 것은 "엄마아아..."하는 호칭뿐이었다.
내가 배운 모든 지식, 내가 마스터한 모든 언어를 두고 현관에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던 그녀를 향해 할 수 있었던 말은 "엄마아아"라고 하는 외마디뿐이었다. 어미 젖에 매달리는 목마른 어린 양처럼.
..."찰리..." ... "엄마" "나에요".. "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냐?" "그냥 만나고 싶어서...얘기가 하고 싶어서..." 혀가 뒤엉켜서 평소와는 다르게 코가 꽉 막힌 소리, 우는 소리가 나왔다. 옛날의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는지도 모른다.
 p290.




앨리스가 문밖에 왓지만 만나고 십지 안으니까 돌아가라고 말햇다. 그녀는 울고 나도 울엇지만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안은 것은 조롱 당하고 십지 안아서이다. 이제 당신이 실타 이제 영리해지고 십지 안타고 말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잇고 영리해지고 십기도 하지만 그렇케 말하지 안으면 돌아가지 안키 때문에 그러케 말했다. 앨리스가 나를 보살필 수 잇는 돈과 집세를 두고 갓다고 무니 부인이 말햇다. 그런 건 바라지 안는다. 일자리를 찾아야겟다.
 제발.... 제발... 일끼와 쓰기를 잊어버리지 안토록 해주세요......



... 내가 빵가게에서 해고당해 나가지 안으면 안되었을 때 무척 슬펏던 일이 생각난다. 클라우스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이제 나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안을 거라고 말햇다.
나중에 김피가 아픈 다리를 끌고 와서 찰리 만약 누가 너를 괴롭히거나 속이면 나나 조 카프나 프랭크를 불러 우리가 해결해줄테니까 하고 말햇다. 너에게는 친구가 잇다는 걸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걸 잊지 말라고 말햇다. 고마워요 김피 하고 나는 말햇다. 그래서 기분이 조아졋다.
친구가 잇다는 건 조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나가 워렌 학교로 가기로 합니다...
....키니언 선생님 만약 이 글을 일더라도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나는 영리해지기 위해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잇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잇는 줄도 몰랏던 만은 것도 배웟고, 아주 잠깐이지만 그것을 볼 수 잇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가족과 나에 대해서 잘 알게 된 것도 기쁨니다. 모든 걸 기억해 내어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가족 같튼건 업는 것이나 마찬가지엿지만 지금은 가족도 잇다는 걸 알고 잇고 나도 다른 사람하고 같튼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잇습니다...
p.s. 어쩌다 우리 집을 지나갈 일이 잇으면 뒤뜰에 잇는 앨저넌의 무덤에 꼿을 바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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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말고, 찰리. 언제든지.. 이걸 옮겨 적는 순간에도 눈물이 나올것 같다. ㅠㅠ

옮기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찰리의 정서적 성숙. 사랑에 대해서는 한번 더 읽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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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5 14:06 2007/07/2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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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 2007/07/25 14:41 URL EDIT REPLY
네오가 이야기 해서 봐야지 했는데. 음 제5도살장도 잠깐 봤는데 완전 재미있을거 같더라구요. 지금은 고양이 요람 보고 있는데..
지각생 2007/07/25 15:12 URL EDIT REPLY
제5도살장 되게 재밌어요 ^^ "앨저넌" 보고 질질 짜다 "도살장" 보고 낄낄거리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데요. 고양이 요람도 보고 싶네요 :)
케산/세르쥬 2007/07/25 17:18 URL EDIT REPLY
글과는 상관없는데... 산오리님이 좋은 자전거 도로를 하나 알게되신 모양인데 주말에 시간있으면 함 타자. (산오리님 블로그 함 가봐)
지각생 2007/07/26 02:43 URL EDIT REPLY
케산// 글쿤. 근데 이번주말이나 담주초에 새만금 내려갈듯. 케산도 같이 가는건 어때?
케산/세르쥬 2007/07/26 12:46 URL EDIT REPLY
아, 맞다! 그걸 깜박했네 -- ; 2일로 확정된거야? 타고 내려가는 사람은?
지각생 2007/07/26 12:49 URL EDIT REPLY
나는 돕과 30일날 내려갈 듯. 포스팅을 해야겠다
케산/세르쥬 2007/07/26 12:51 URL EDIT REPLY
월요일이네...근데 애초 얘기했던 사람들은 안오나?
지각생 2007/07/26 12:53 URL EDIT REPLY
그사람들은 따로 갈것 같아 (실시간 ㅋ)
케산/세르쥬 2007/07/26 12:54 URL EDIT REPLY
좋아...그럼 서울에서 부안까지 가는거지? 함 진지하게 고려해서 이런저런 일정 함 째보지(오우 실시간~채팅하는 듯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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