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1

잡기장
귀를 뚫었다. 10일, 종로에서.
한쪽만 뚫을까 하다 양쪽을 다 했는데 아주 이쁘다.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게, 살짝 따끔하니 벌써 끝났다. 특히 왼쪽은 거의 느낌조차 없었고.
씻은 후 잘 말려주고, 소염제를 사먹으라고 하네.
아예 잘 안씻는 사람은 잘 안말려도 되나
어쨌든 기분이 퍽 좋아졌다. 양쪽에 "G"를 달고 거울을 보니
그것이 내 입을 땡기는 효과가 있나보더라. 내 입이 사정없이 벌어져 위로 치켜올라가 있었다. 씨익
같이 가 준 채경, 땡큐. 덕분에 더 안 미루고 할 수 있었어요.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에코캠프+살살페 갔다가 무게를 줄이려고 실어보낸 내 텐트(일인용) 두동을 가지러 망원동의 모 단체로 가고,
거기서 유기농 밤호박 2개를 선물 받아 모처럼 청파문으로 놀러갔다.
비가 개자 마자 날씨는 무척이나 뜨겁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지각생은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됐다.
비맞고 잘 안 닦아줘서 자전거 상태가 안 좋다. 그래서 더 힘들다.
청파문 아래쪽의 가게에선 아이스크림이 반값이다. 모처럼 한 무더기 사들고 갔다. 불과 어제만해도 잔고 만원이 전재산이었으나 새로 5만원이 들어오고, 전에 참가했다가 소홀히 한 프로젝트 단위가 정리되면서 약간 돈을 받기로 해, 급한 불은 껐다. 마음이 푸근하고, 청파문 사람들 볼 생각에 들떠 볼 것없이 주머니를 털고.


청파문에 잠시 있다가 종로로 갔다.
이때 귀를 뚫었다.
4시에 종로에 있는 모 단체로, 회의에 가는 채경. 들어보니 나도 가볼만 하다. 솔깃했다.
그런데 5시에 있는 한 작은 워크샵이 조금 더 나를 잡아당겼다. 조직내 민주주의. 게다가 상황극에 급 캐스팅까지 됐으니 재밌기는 이쪽이 더 재밌을 듯하다. 왜 이런건 늘 겹칠까.


아주 재밌었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이고, 분위기도 좋았다. 모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어디가서 오늘처럼 적극적으로 얘기한적도 많지 않다. 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겪은 것들, 어이 없던 것들과 좋았다 싶은 것들을 얘기했다. 물론 함께 있으면 힘을 받는 사람들이 있으니 가능했다.
근데 나도 그만큼 힘을 주고 있는걸까.


끝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더 술을 한잔 하자는 은근한 분위기였지만
내일 MT가 있어 참기로 했다. 아직 지난주까지 놀고 온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또 놀러가다니.
게다가 이번엔 이런 저런 이유로 요근래에는 회의도 안나가다가 놀러가는데 불쑥 나타나는 꼴이다.
다음 다음주는 노조 야유회가 있고..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질 않는다.
자꾸 멈추고, 뒤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난 여전히 조급하다. 그래서 여전히 늦는다. 뒤늦게 후회하면 뭐하나 싶으면서도 후회한다.
모처럼 다시 부정적인 에너지에 살짝 휘감겨 버렸었다. 질투, 불안, 위축. 그것이 이해를 방해했다.
쿨하게.. 맘쓰지 않으려해도, 거의 성공하다가도 다시 내 마음은 붙잡고 싶은 무엇으로 가득 찬다.
자전거를 돌렸다.


때마침 서버 관련한 전화가 온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모른척 하지 못한다. 쌩쌩 달리는 차소리에 겨우겨우 알아들으며 통화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꽤 흘러있다.
멈춰서 잠시 생각한다. 다시 자전거를 돌린다.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저 차들과 함께 20분만 달리면 되지만
번잡한 내 마음은 그걸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차와 나란히 자전거를 타면 사고가 나거나 싸움이 날지도 모른다. 홍제천으로 내려가 천천히 남쪽으로. 불광천을 만나 다시 북쪽으로. 집에 도착하니 11시 반.

형은 컴퓨터를 하고 있고 TV는 보는 사람 없이 켜 있다. "놀러와". 놀러가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만 그대로 엎어져 유재석과 신화를 본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티비를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낮에 켜놓고 나온 컴퓨터가 아직 돌아가고 있다. 요즘 내 컴퓨터가 다시 속을 썩인다. 주워온 PC는 전력공급이 약한건지 비실비실하고, 부활한 내 놋북(경배하라~)은 무선랜 브릿지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는데, 괜히 갈아엎는 내게 심통을 부리는지 리눅스가 설치되지 않는다. 인터넷 연결 안되고 내 시간과 애정을 계속 쏟아줄 것만 기다리고 있는 컴퓨터들.


씻지도 않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판판히 펴지도 않고, 베개가 어디갔나 찾지도 않고, 귀걸이가 어찌될지 0.5초 생각하곤 그대로 쓰러져 잤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베개가 없으니 아무래도 불편하다. 잠이 깨서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조그만 생수통이 있다. 그걸 이불 밑으로 집어넣으니 머리를 괼만한 둔턱이 생겼다. 머리를 괴고 다시 잠을 잤다.


꿈을 꾸지 않고, 언어화된 생각을 하진 않는데 잠은 자꾸 왔다갔다한다.
머리를 괴고 있는 생수통의 둥근 형태가 느껴진다.
그게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지면서 어떤 환각을 느낀다. 그것의 정체는 불안이다.
눈을 뜨진 않은채로 마음을 추스린다. 난 지금의 내 감정을 알고 있다. 오랫동안 느껴왔던 익숙한 느낌.
의식적인 노력으로 밀어내고, 걷어내고, 제 몫을 돌려줬던 것. 모처럼 기회를 잡아 내 무의식을 다시 사로잡으려고 하는 듯하다. 다행히도 난 그걸 어떻게 대처할지 알고 있다. 서서히 불안과 두려움이 제어된다.
그러면서 생수통의 크기도 점점 작아진다.
크기가 손가락 두께만큼 작아진다. 역시 이것도 환각이다.
숨을 쉬듯, 심장이 뛰듯 생수통은 계속 커졌다가 작아진다.
문득, 내가 아침 알람을 맞추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냈다. MT를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블로그에 들어온다.
이런 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낫다고 속으로 되뇌인다.
그냥 담담히 쓰기로 한다.


요즘의 나는 정말 좋아졌다.
전처럼 위축되지도 않고,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이런 저런 계기들을 통해 계속 거듭나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용기를 내고, 더 이해하고 싶어지고.
그러다 어쩌다 살짝 균형이 무너졌다. 그래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다만 그 짧은 순간을 견디지 못한게 아쉽고,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게 아쉽다. 심통나고, 조급하게 확인하고 싶어하고 했던 것이 아쉽다.


차를 얻어타고 가기로 했으니, 가면서 좀 자면 되겠지. 2시간 정도 더 잘 수 있겠다.


누구도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기분좋았던만큼 나를 만나는 사람들도 기분 좋아지고
내가 우울해진만큼 누군가의 마음의 짐을 덜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언제나 내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잠은 더 오지 않을것 같다. 미안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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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1 04:08 2007/08/1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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