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이랜드 총력집회를 갔다가 2명의 조합원을 만났다. IT노동자에겐 주말이 따로 없어서 토요일 오후 집회지만 모일 수 있는 사람은 이정도. 건대에 왔다가 간 사람도 있고.
노조 사람들과 얘기할때 지각생은 대체로 딴 세상 사람이다. 단체 상근 활동하는 IT노동자로서 파견, 고용안정, 구속 등의 문제에 대한 감성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대부분 일하는 IT노동자들이 어렵게 한자리에 모이면, 서로 사는 이야기,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얘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노조 운영에 대한 얘기도 모였을때 왕창 하는편이고 이런 저런 세상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되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 어떻게든 집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가운데서 "문화부"가 할 게 뭘까. 문화부랍시고 하는건 대체로 혼자 '즐기는'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다른 사람들이 맡은 일이 대개 지금 노조 상황에선 시급하게 느껴져서 그걸 돕는게 낫다. 물론 그걸 강요하지 않고,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나마 스스로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계속 딴 얘기를 한다거나, 다른 관점을 얘기해서 논의를 조금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오바 재롱을 부리며 적절히 분위기를 업시키는 것도 내가 스스로 하는 역할 중 하나다. 물론 거의 나만 업되는 경우가 많긴 하다. 대신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오랫만에 만났고, 투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시점에서 그것만 갖고도 할 얘기가 적진 않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보통 조용히 듣기만 하고 슬슬 때가 됐다 싶으면 다른 화제를 던지거나 분위기를 바꾸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토요일에는 화제가 금방 나에 대한 얘기로 돌아왔다.
그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가. 누구 표현대로 "한국에서 좀처럼 만들어지기 어려운, 브라질에서 볼 법한" 색으로 얼굴과 팔이 변색되어 있고, 팔에는 온통 생채기가 가득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에코캠프+살살페 얘길 꺼내기 시작하면, 그저 신기해하는 사람들과 다시 얼굴에 행복이 가득해져 침튀기며 떠들고 있는 지각생을 상상할 수 있을터. 그 얘기가 끝나니 묻는다. "일자리 구한다면서요. 어케 되고 있어요?" 흠.. 이제 본격적으로 구해야죠. 모든 걸 제쳐놓고 에코캠프에 빠져들었는데, 이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통장 잔고는 계속 5만원 아래도 유지되고 있는데 폰 요금도, 교통카드도 낼 수 없는 상황. 지금 괴로운 것보다, 하고 싶은게 점점 많아지고 구체화되고 있는데 이래저래 내가 위축될 것이 더 문제다.
일자리. 구해야지. 그런데 막막하다. 3년전, 앞으로 어느 단체던 상근활동하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을때,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은 적어도 좋다, 어케든 생계만 유지하고 내가 하는 일이 스스로 즐겁고 누군가를 이롭게 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다, 는 것이었다. 일반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면 어떻게 하던 그런 것을 많이 포기해야할 것을 알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알바야 이것저것 계속 했고, 일단 시작하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처음 들어갈때가 항상 어려웠다. 낯을 가려서가 아니다. 지각생은 누구와도 서슴치 않게 말을 시작하는 편. 그것보다 첫 접촉 이후 생성되는 긴장, 서로가 서로를 파악하려 하고, 자신을 포장하려 하고 초기에 기세를 잡기 위해 하는 온갖 유무형의 행동들. 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압박감과 위축. 나를 있는 그대로 내세우자니 평소에 비관적인지라 잘하는게 뭐가 있더라 싶고,난 뭐 이러냐 그러기도 하고. 괜히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면서 알아서 설설 기고,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을 은근히 탐색하고 경쟁하려하는... 여튼 일자리를 구하는 초기 행동이 도무지 전혀 맘에 들지 않는다. 아.. 그냥 일단 일하게 해줘바. 잘할건데. 꼭 이런 걸 해야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뭐가 담길 수 있지. 첫 면접으로 어떻게 날 알 수 있지. 내가 느끼는 구직과정은 "불신의 바다를 오버로 헤쳐나가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어느 단체에 들어가 적당히 자원활동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잘 어울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일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처음에 한 환경단체에 자원활동을 시작했는데, "환경을 살리기 위해 봉투붙이는 것이라도 하겠노라"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할 수 있다면 상근하고파"하는 심정이었다. 돈이야 언제나 쪼들렸으니. 진보넷도 관심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거랑 가장 잘 맞는 단체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너무 위축된 상태에서 오버해서 정성을 담아 메일을 보냈던 탓인지 잘 안됐고, 그 환경단체에서 상근하는 것도 어렵겠다 싶어 다시 근로기준 위반 알바의 세계로 들어갔다. 우연히 노동넷이 내 시야에 들어왔는데 (KLDP에 활동가 구인광고를 냈다가 터무니없는 임금이라고 거기서 엄청 논란이 된 바람에 알게됐다) 여기가 내가 바라는 형태로 됐다. 자원활동을 하며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거기서 뭐가 필요한지 알게 됐고, 몇달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정식으로 상근활동을 하게 됐다. 서로를 충분히 알만한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1년은 함께 있어야 정말 어느정도 "안다"고 할 수 있겠다.
정보통신노동자가 호혜적으로 활동하며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모델을 만드는 건 지금까지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정보통신활동은 그 역할의 중요성과 의미, 모든 사람에게 퍼져 나가고 공유되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피드백"의 부족으로 다들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동체 문화가 깨지고 활동 단체들부터 벽을 높이고 단절되서 살아가는 경향이 강화될수록 정보통신활동이나 여타 비주류활동은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다. 노동넷 재정이 파탄난 것은 운동사회 특히 노동계가 힘을 모아 책임질 만한 면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결국 스스로 살 길을 찾고, 그 안에서도 살 길을 찾기 위해 나처럼 조직을 빠져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한 활동비가 나올때는 그 안에서 부대끼면서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이젠 지난일이다.
다른 단체로 들어가 다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항상 고려했던 가능성이다. 하지만 사실 어디 가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어떻게든 쥐어짜내서 한동안은 버틴다 해도 뭔가 새로운 모델을 만들지 않으면 결국엔 버티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실험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 한 1~2년 정도 세상이 어케 되던 잠시 냅두고 돈을 좀 벌어놓고, 그래서 좀 버틸만한 여력을 쌓아놓고 다시 돌아오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다. 또 IT노조 활동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에 "현장 활동"을 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기도 하다. "어차피 잠시 스쳐갈 뿐"인 마음으로 임했던 그 알바들과, 단체 상근 활동 말고, 보고 듣기만 했던 "일반적인 노동자의 삶"을 직접 겪어보려는 것이다.
얘기가 샜다. -_- 계속하면,
또 막막한 이유가 뭐냐면, IT노조 활동때문이다. KLDP등 IT커뮤니티만 알고 있을때는 사람들이 힘들다 힘들다 해도 그게 얼마나 힘든건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 곳에 있다보면 IT기술이 주는 느낌, 변화와 혁명의 분위기, 세상과 동떨어져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 중 하나, 전문가주의 여타 그런 다양한 것들이 어떤 막연한 환상을 형성하고, 그것이 많은 IT인들에게 공유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IT인들이 스스로를 "IT노동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정말 실제로 얼마나 그런 것이 만연한지, 문제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구조라는 것, 내가 부족해서 이런 어려움을 느끼는게 아니라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내가 IT노조에 있으며 보고 듣는 얘기란, IT란 허울 좋은 이 바닥이 얼마나 황폐한지, 얼마나 사람들이 빼앗기고 고통받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고소득을 올리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사람도 임금 외에 나머지 노동조건들은)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를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밥먹듯 야근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일하는 것도 너무나 흔하다. 그러면서 연장근로수당, 휴일수당을 챙겨 받는 IT노동자는 거의 없다. IT산업은 "비정규노동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구조적으로 뒤틀려 있다. 흔히 "SI"라고 말하는 형태로 많은 개발자들이 이곳저곳에 파견돼서 일하는데 그러면서 정당한 노동조건을 보장받지 못하고, 정부-대기업으로 시작해 내려오는 줄줄이 하도급 구조에서 영세 업체에서 일하는 IT노동자는 죽도록 일만해주고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게 비일비재다. 해고투를 했던 한 조합원이 근로감독관에게 "당신들 IT노동자들은 참 바보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일하고 있었어"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얼마전에 모 포탈에서 "IT노동자의 야근을 없애주세요"란 청원이 있었는데, 그 즈음에 약간 바람을 타서 IT노동자의 현실이 조금 가시화되긴 했다.
IT노조가 만들어진지 벌써 3년이 됐는데 아직 조합원도 많지 않고,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지금 사회에서 IT노동자들이 단결했을때 그 사회적 파장은 정말 적지 않을텐데. 많은 걸 할 수 있고, 지금도 필요한 부분이 많은데 하는 생각에 아쉽다.
인터넷 실명제, 통신비밀보호법 개악(휴대폰/인터넷 감시감청 강화), 생체(전자)여권 등 한국 사회는 지배층에 의해 급격히 감시 사회로 가고 있는데 그런 감시 시스템을 만드는데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IT노동자들 아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IT노동자들이 스스로 어떤 관점을 갖고 생각을 말하고 행동을 하는게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럴 수 있는 역량이 흩어져 있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쓰다보니 신변잡기 글에서 갑자기 주장 글이 되고 있는걸 느끼는데 -_-;;
여튼, IT산업의 어두운면을 계속 보고 들어온, 그리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사람이 다시 그 바닥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깝깝하다는 말. 좀더 포스가 있는 활동가라면 "굳은 결의"를 다지고 거침없이 들어갈지 모르지만 난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난 여전히 내가 실제로 뭔가 하기 전에는, 행위하기 전에는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그렇게만이 실제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날 팔겠다고 내놓아야되는 때가 오니 "잘 모르는, 알 수 없는, 규정하기 싫은" 나를 안답시고 규정짓고 떠벌리고 다녀야 한다는게 짜증이 나는구나. 오늘 신문보니 항만노조의 "클로즈드 샵"이 깨졌다고 하는데 사실 jachin 을 비롯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IT노조의 상으로 최근에 구상하게 된게 "유니온 샵" 모델이다. 물론 꿈같은 얘기다. 하지만 꿈은 꾸라고 있는거지. 아 이말 저말 필요없고 누가 개인후원좀 해주면 지금 하고 싶은 것들 열심히 좀 해볼텐데. 돈 벌기 위해 내 노동력을 독점적으로 제공하는거 정말 싫다. 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힘 닿는 데까지 구별 없이 제공하고, 나는 대신 다른 식으로 보상 받아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게 내가 언제나 바라는거다. 이런 생각은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구나. 오히려 그런게 더 옳다고 확신하게 되니 내 개인적으로 봤을땐 참 안타깝다. 그렇지만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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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10/03/29 10:24 | DEL
몇 달 전에 소득공제 때문에 내가 후원하고 있는 단체들과 후원회비금액을 보고 완전 깜놀! 한 달에 5만원 이상 민우회 포함 타단체 후원금이 나가고 있었다. ;ㅁ; 후원/회원 단체 리스트 중에서 활동하지 않는 곳도 많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 세상만나기[각주:1] 로 유령회원으로만 되어있던 단체인 여성환경연대[각주:2]에서 자원활동을 하기로 마음 먹고 갔다. :)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각을 했다. ㅋ 도착하니 점심시간이었다. 자원활동을 하겠다던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