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체인

자전거
지난주, MT 준비물을 뒤늦게 사러 마트를 갔다. 버스 타긴 애매하고, 걷기엔 지루하며, 무엇보다 내 모습이 꾸질꾸질하다. 이럴땐 휘익~ 사람들을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이 자전거의 좋은 점 중 하나다. "그냥 집에 있다 잠깐 나온거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안기며 내 꼬질한 모습을 변명하는 거지. 정말 몇 달만에 집 뒤 틈바구니에 묶어두고 혼자 눈 바람 다 맞아가며 날 원망했을 법한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었다. 미안함 반, 반가움 반으로 안장에 올라타고 페달을 밟았다.

지난 늦가을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타던, 많이 탈때는 며칠간 밥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 계속 붙어 있던 자전거였는데, 올라타고 페달을 밟으니 느낌이 낯설다. 뻑뻑해서 안나가는 건 둘째치고, 그 낯선 느낌에 당황했다. 오랫만에 타는 거라곤 해도, 마치 처음 타는 듯한, 내 자전거가 아닌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자전거야.. 너가 날 많이 원망했나 보구나. 마치 슈퍼보드가 손오공을 받아들이지 않듯.

너무 뻑뻑해서 자전거를 멈추고 들여다보니 체인이 온통 녹슬어 있다. 앞 뒤 바퀴 바람도 약간 빠져 있고, 그외 먼지와 녹이 곳곳을 덮고 있다. 그렇게 먼 거리를,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했을때는, 조금씩 상채기는 날 망정 언제나 젊고 펄펄한 녀석이었는데.. 몇 달 동안 사랑을 못 받으니 아주 파삭 늙은 것만 같다. 에구 미안 미안, 그나저나 곧 돈 다 떨어지면 교통비도 빠듯한데 이 자전거로 홍제 무악재를 넘어 출퇴근하는 건 무리겠구나. 마트에서 물건을 사곤 집에 돌아와 그전처럼 집 뒤 틈에 묶어두곤 돌아서다 한번 더 곳곳을 쓰다듬어주었다.



모처럼 주중에 규칙적으로 일 한 후, 혼자 있는 주말 연휴다. 어제 토요일은 어케 보냈는지 모르겠다. 티비만 보고 잠깐 누워 자다 또 티비보고... 음악이나 들을까 해서 켠 내 우분투 놋북은 잘 되던 소리가 안나 한참 붙들고 씨름했다. 결국엔 게으름의 승리...포기다. -_- 다시 또 자고, 책을 읽으려 했으나 역시 엄청난 게으름의 포스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것을 강요하여 덮고 다시 잤다. 그런 흐름이 오늘까지 이어져 마냥 늘어져 있다가 시계가 2시를 알렸을때, 난 후배 결혼식에 가겠다는 약속을 펑크냈다는 걸 알았다. 이걸 위해 오늘은 기름 제거하러 안간건데... 아.. 바보.

간만에 멍청하게 그냥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중요한 약속을 빵구내고 나니 이렇게 있어선 안되겠다 싶다.  꼭 해달라고 부탁 받은 일도 있고 하니 노동넷 사무실로 나가 일이나 해야겠다. 시간은 그나마 하루 중 제일 따뜻할 때이고, 가려는 장소는 한강을 따라 달리면 도착하는, 2년 넘게 다니던 익숙한 코스. 일주일 동안 또 잊고 있던 자전거를 탄다. 그래 휴일에 자전거 손보고  있으면 되잖아. 이런 좋은 꺼리를 두고 티비나 보고 있다니. 바람 넣고, 간단히 닦고, 기름 살짝 치니 그럭저럭 달릴만 하다. 참으로 오랫만인 것 같다. 자전거로 한강에 나온게. 해가 저물어 갈때의 한강변과 강물은 언제봐도 아름답고, 오랫만에 보니 더 아름답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자전거를 닦기 시작했다. 바퀴를 빼고, 체인도 풀고 구석구석 닦는다. 기름걸레는 WD-40을 싣고 자전거의 표면을 달린다. 걸레가 지나간 곳마다 흙과 먼지, 때가 사라지고 자전거의 피부가 온전히 드러난다. 전에 닦을 때보다 엄청 많아진 생채기가 보인다. 이게 하루 아침에 생기진 않았을건데, 이렇게 내가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꼼꼼이 닦아준게 그렇게 오래됐나 싶다. 자전거 좋아한다던 사람 맞냐 각생? 그래 사실 내가 좋아한 건 자전거보다 "자전거타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앞으론 좀 더 아껴줄께. 자전거야. 이제 깨끗해졌구나. 사진 한장 새로 찍어 두고 싶지만 디카가 지금 없다.

컴퓨터를 켜고 예전에 찍은 자전거 사진이 있나 찾아봤다. 찾다보니 처음 자전거 여행을 갔던 태안반도 사진이 있다. 안 그래도 서해안 기름제거 시민구조단 도우미 역할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 때 얘기를 해주곤 했다. 그때 만리포와 천리포, 백리포까지 올라가면서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 멀었었다고. 그래서 한 2년이나 3년쯤 후에, 꼭 자전거 여행을 다시 이곳 태안반도로 올거라고, 그때는 구석구석 해변마다 돌아다니며 얼마나 상처가 치유됐는지, 생태계가 회복되는지 보겠다구.




아직 날은 풀리지 않았지만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지. 흠냐. 작년엔 오덕케 추운겨울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지. 오랫만에 자전거와 시간을 보내며 예전 생각에 감상에 빠진 지각생. 그 덕에 포스팅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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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7 21:55 2008/02/1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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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 2008/02/17 22:25 URL EDIT REPLY
자전거는 사람의 애정과 페달링을 먹고 살지요. 각생... 언제 시간 되는 날에... 나랑 같이 치빙하자. 같이 갈 데가 있어.
지각생 2008/02/17 22:35 URL EDIT REPLY
ㅋ 그리고 블로그는 덧글과 트랙백을 먹고 살지 :) 땡큐여
상용 2008/02/18 06:14 URL EDIT REPLY
곧 자전거 타기 좋은 계절이야
산오리 2008/02/18 17:12 URL EDIT REPLY
지각생의 자전거가 녹슬다니...있을수 없는 일이야요..ㅎ
산오리도 겨우내 자전거 베란다에 방치해 두고 있는데.ㅠㅠ
봄이 빨리 왔으면.
리우스 2008/02/18 18:41 URL EDIT REPLY
지음/ 치빙이 뭐에여?
지각생/ 지각생의 자전거가 녹슬다니...있을수 없는 일이야요..ㅎ(2)
나에게도 봄이 빨리 왔으면... 입춘이 벌써 지났는데도 이리 춥다니 말이죠... 봄에 잔차 벙개 내삼... 수요일이랑 금요일 빼고요.
적린 2008/02/18 20:22 URL EDIT REPLY
불가사리 넘이뽀 +_+
지각생 2008/02/20 18:33 URL EDIT REPLY
상용// 슬슬 달려볼까 ㅎㅎ
산오-리-우스// 그러게요. 어제 오늘 날이 풀려 참 따뜻하고 좋네요. 봄에 잔차 벙개 내겠삼 ㅋ
적린// ㅋ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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