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SF 걸작선을 단편 하나빼고 다 읽어간다. 24개의 단편 중 좋은 것도 있고, 별로인 것도 있는데 지금까지 읽어온 것과는 다른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 읽은 것들은 대개 네오스크럼이나 달군 등 SF에 관심 많은 진보불로거들이 추천한 것들을 기초로 해서 어느정도 사전지식을 갖고 선별해서, "먼저 좋아하고" 읽었다. 그리고 역시 추천한 것들은 틀림 없이 날 만족시켜줬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이것은 거의 처음으로 "마구 잡히는대로" 읽어본 셈이라 할 수 있다.
사전 지식이 없는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소재와 형식의 작품들을 읽다보니 SF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새삼, 깊어지며 어느정도 넓어진 느낌이다. 전에는 그냥 감탄하며 읽고 넘어갔던 네오스크럼 블로그의 SF관련 포스트를 다시 꼼꼼히 읽어보고 내 위키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 http://latecomer.pe.kr/mwiki/index.php/SF )
첫번째로 실린 "지구의 푸른산"은 마치 이 묶음집 전체의 "서장"이랄까. 부담없이 따라가며 분위기에 젖을 수 있는 작품이다. 우주를 방랑하는 눈멀고 늙은 음유시인의 이야기. 임팩트는 없었지만 그냥 편하게 봤다. 두번째 작품은 "죽은 과거",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인데 이 책을 읽기 직전에 "바이센테니얼 맨(200살을 산 남자)" 을 봐서(원래 유명하기도 하고) 기대를 갖고 봤다. 시간 탐사. "엑설런트 어드벤처"나 "백투더퓨처" 식으로 사람이 직접 물질과 함께 이동하는게 아니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소립자"의 흔적을 재구성해 과거의 모습을 3D 입체영상으로 만들어 본다는 얘기. 그리고 그런 기술이 실제로 쓰이게 될때 어떤 참혹한 결과가 일어날지, 과거란게, 시간이란게 뭔지 생각해보게 해줬다. 작품 자체의 구성은 좀 엉성하고 맥빠지긴 하지만 소재는 괜찮았다.
그 다음부터 몇 작품은 그다지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냥 가볍게 보고 몇가지 생각할 꺼리만 꼽아보고는 넘어갔다. 그러다가 필립 K.딕의 작품을 만나 재밌게 읽고, "두 운명" 같은 기분나쁜 이야기도 읽고, 어슐러 르귄의 소설을 만나 다시 놀라기도 하고..
이 책에 수록된 작품으로 그 작가들의 모든 것을 알 순 없겠지만, 역시 좋은 소리가 전해지는 사람의 것은 정말 좋고, 그저 그런 평을 받는 사람의 작품은 역시 그저 그러하니, 앞으로 계속 읽을 SF, 그 장르에 대해 따로 알아가면서 골라보는 노하우를 쌓아야겠다. 내 맘에 든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필립 k. 딕 - 이 사람 소설은 무엇보다 "재밌다". 이 단편선에는 "사기꾼 로봇", "두번째 변종" 두편이 실렸다. 영어공부를 해서라도 원어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이야 반전이 있는 작품, 영화를 볼 일이 많고 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잼나게 풀어나가는 능력이 뛰어나 반전에 감격했다. 이 사람 다른 소설도 더 읽어봐야지.
어슐러 k. 르 귄 - 이 사람은 역시 나를 "놀라게" 한다. 나를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밀어넣어 버리는 그가 존경스럽다. "아홉 생명"은 "바람의 열두방향"에서도 아주 인상깊게 읽었는데, 인간 존재에 대해 이보다 더 깊은 (물론 잠깐이었지만 -_-) 생각을 하게 하고, 두둥!하는 느낌을 받게 한게 이전에는 없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한다음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여 얘기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라쿠나 셀던 -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째째파리의 비법"이라는 작품이 실렸는데 알고보니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꽤 되는 것 같다. 나도 재밌게 봤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을 할때 부부간의 대화를 너무 "한국식"으로 한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이제 그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 그것에 기인한 폭력성과 공격성(물론 이 작품에서는 "폭주"가 다른 미지의 요인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걸 보면서 "이갈리아의 딸들" 맨 마지막 대목이 떠올랐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거야." 흠. 근데 사실 큰 연관은 없는 것 같다 -_-
파이어즈 앤터니 - "은하치과대학"이란 작품이 실렸는데 뭐 줄거리는 금방 예상이 가능해서 나중엔 피식 웃음까지 나왔는데 (완전 뻔해! 완전 뻔해~) 뭐 이 작품 자체가 엉성해서라기보단 "허준"류의 드라마가 한국에 많았던 탓이겠지. 다른 건 모르겠지만 다양한 외계 종족들을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어서 일단 뽑아놨다.
코니 윌리스 -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가 실렸다. 한번 더 봐야겠다. 이거 보신 분들 만나면 좀 물어봐야지.
브루스 스털링 - "스파이더 로즈". 카우보이 비밥의 "헤비메탈 퀸"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많이 다르다. 그래도 이런 인물에 대해선 묘하게 끌리는게 있단 말야. 고독이 녹아내린다. 사랑과 이해를 갈구해 사랑 그 자체가 되는 외계 종족이라. 특별한 차이가 있는진 모르겠는데 왠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 그림이 제법 생생히 그려졌다. SF를 쭉 읽다보니 그런 걸까.
조지 R.R. 마틴 - "두번째 종류의 고독". 이 사람도 평이 좋아 기대를 하고 봤는데 역시 괜찮다. 스스로 유형을 떠난 남자가 형기를 마쳐간다. 두번째 종류의 고독의 끝(?)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유배자. 돌아가고 싶지만, 아직 그는 두려운 것 같다. 이 작품은 묘했다. 최근 몇 달간 내가 느낀 것, 생각한 것들과 너무나 흡사한 심리 묘사가 이어져서. 역시 어떤 고민도 온전히 혼자만 유별나게 느끼는 건 없는건가. 역시 얘기를 해야하는 건가. 조금만 더 일찍 이걸 봤으면 조금은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르는데 다행이라 해야하나. ㅋ 내 심정을 살짝 들여다 보고 싶은 분은 이 작품을 보면 80%는 알 수 있을 겁니다. :)
나머지 작품들도 나를 새로운 상상과 사고의 영역으로 날려 보내주는 훌륭한 Speculative(사색) / Science(과학)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몇 개빼곤 다 좋다. 빌려 보고 싶은 분은 말씀하삼. 대신 제가 잊더라도 꼭 돌려주세요. (바람의 열두방향 정말 어느 분이 가져가셨나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