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하기로 이순간 나를 소외시키지 마

잡기장
유이님의 [내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에 관련된 글.

요즘 블질도 그나마 잘 안하니 표현하는 게 두려운 정도가 아니라 멍~하고 텅빈 느낌, 아예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생각들은 나를 거쳐 쉭쉭 지나가버리고 언어로 전환할 시간마저 주지 않는 듯한.

가르친다는 것이 뭘까. 내 주위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 사생활이 별로 없이 일과 직간접적으로 (활동이랍시고 하는 것도 "일"이라고 한다면) 연관되서 사람을 만날때가 많다보니, 대화는 피상적이다가 갑자기 서로를 가르치고 뽐내는 식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오히려 "가르침" 없는 대화가 더 적게 느껴지고 그만큼 목말라하기도 한다.

꼭 어떤 내용을 얘기하기 때문에, 사회와 철학과 뭐 어려운 뭔가를 얘기해서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고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관심 있고 지금 내게 필요한, 그래서 내가 원하던 내용에 대해서는 누가 뭘 얼마나 많이 얘기하던 한동안은 거부감없이 기꺼이 얘기를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근데 내가 관심이 없거나, 어느 정도는 아는 얘기를 A부터 Z까지 한다거나, 내가 듣던 안 듣던 자기가 신나서 하는 얘기는 금방 싫증이 나고, 계속 되면 짜증이 나고, 그래도 안 그치면 이후 한동안 계속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듣기 싫어지게 되기도 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어떤 관계로 "대화"를 하느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명하면서 주고 받느냐, 얼마나 서로 이해를 추구하며 말 이상의 말을, 생각을 나누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닐까 한다. 듣는 사람의 상태, 관심, "대화 기술적 훈련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얘기한다던지, 얘기가 진행되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계속 인식하면서 조율하지 않는다던지. 즉 "혼자 마이크 너무 오래 잡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가르치려 들지 말아라"라는 말은 "얘기에서 나를 소외시키지 말아라"는 말이고, 워낙에 운동하는 사람 중 그런 개념이 미탑재된 사람들이 일대다의 말하기, 글로 자기 생각만 끊김없이 한참 말하기 방식만을 고집한 것이 오래되서, 그런 사람들이 하는 내용, 그런 방식, 상황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피로가 쌓여 있달까.

길게 쓸게 아니었는데.. -_-

"일대다"의 말하기, 확성기와 마이크 잡고 연단에서 말하기, 이런 말하기는 그 순간에 한명의 목소리가 여러 청중을 압도하고, 일방적으로 개입없이 끝까지(자기 성찰 때까지) 말하게 된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아예 안할 순 없을 거다. 텔레파시를 통해 비언어적 수단으로 "즉각적인" 소통이 이뤄지거나, 공각기동대에서 나온 것처럼 하지 않는 바에야 이런건 필요하겠지. 대신 그런 말하기 방식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다 아는 얘기하지 말고 자기 생각, 의견을 깔끔하게 얘기하고 마이크를 더 많은 사람들이 잡을 수 있게 돌려주는 것. 기왕 마이크 잡았으면 모두가 공명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 (노래를 하던가 ㅋ) 그런게 필요하지 않을까?

"몰(mole)과 분자"에 대해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마이크 잡고 일대다로 말하는 것은 "몰"이고, 인터넷 게시판에서 너도나도 동시에 생각을 꺼내고 말한 순서와 위치와 상관없이 계속 뭔가 오고갈 수 있는 방식은 "분자"다.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청중"에 대한 말하기는 "몰"이고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 그리고 몇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분자"다. 자기 말 다 끝날때까지 듣고만 있으라고 하는 것은 "몰"이고, 내가 말하는 도중에 듣는 사람이 더 들을 필요 없이 이해를 했거나 더 좋은 생각과 표현이 떠올랐는지 관심 갖고 말할 기회를 넘겨주고 다시 넘겨 받는 것은 "분자"다. 87년과 08년이 뭐가 달라진 것이냐면, 이젠 "몰"의 정치에서 "분자"의 정치로 넘어가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뀌길 원해? 그럼 나를 이해해봐. 나를 이해할 마음 없이 바뀌기만을 바라지마. 이렇게 얘기하는 누군가를 상상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겹치는 모습이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가르쳐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찾아서 그 사람이 필요한 방식으로 가르치면 된다. 그런 노력 없이 그냥 주위에 모든 사람에게 목소리만 높여 얘기하는 것은 당연히 폭력적이다. 요즘 인터넷 보면 필요한 말은 다 나온다. 굳이 똑똑한 몇 사람이 아니래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주고 받다 보니, 정말 "필요한 말은 누군가가 거의 다 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하게 된다.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꼭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물론 지금의 상황에서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나는,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유를 갖자"고 제안한다. 분노가 치밀면 분노를 담아 원껏 싸지르는 거 좋다. 건강에도 좋고 듣는 사람도 시원할 지 몰라. 대신 설명을 너무 오래할 필요는 없다. 든는 사람들이 지금 바로 모든 걸 이해하고,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행동으로 옮겨질 것을 기대하지 말자. 시간이 필요하고, 더 주고 받고 오고가며 확신이 필요하고, 그 동안 개인의 역사적 흐름을 바꿀 만한 동기와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얘기를 오래 하고 그 말에 스스로 무게를 더한다고 해서 바로 되는 건 아닐꺼다. 과연 듣는 한 사람의 일상 전체와 마주해서 바꿔 놓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종교 지도자는 될 수 있겠지.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말은 듣게 만들려는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일방적인 것 말고 서로 조금씩 계속 주고 받는 대화를 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안될 것 없다고 본다. "너 나 알어?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어? 너의 말하기로 이순간 나를 소외시키지 마"

근데 이 글도 가르치는 방식인가... 요즘 글이 계속 길어지니 큰일이야. 옛날처럼 짧게 자주 생각나는대로 싸지르는 블질을 해야... orz 유이님이 마침 계기를 제공해서 옛날에 하고 싶었던 말을 좀 꺼내놨네요. 내 스스로도 안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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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3 14:51 2008/06/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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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 2008/06/14 04:19 URL EDIT REPLY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유를 갖자"고 제안한다 --> 참 공감이 되는 부분입니다...^^
지각생 2008/06/15 04:49 URL EDIT REPLY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잘 안되죠 ^^;;
18송이민들레 2008/07/15 11:47 URL EDIT REPLY
히~...굉장히 공감되는 글입니다...이번에도 저희 연대회의 뉴스레터에
글을 좀 훔쳐가겠습니다...^^; 연대회의 김희웅 간사(011-786-2411)
지각생 2008/07/16 22:57 URL EDIT REPLY
아이고... 여기 글들이야 얼마든 맘껏 가져가셔도 좋으나.. 어찌 이 부끄러운 글을..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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