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 수업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에 의왕시로 간다. 추석 전에 할일을 안하고 추석은 당당하게 놀아줬더니 이번주 들어 일이 또 많아졌다. 밀린 일을(다 급하다지) 잠 못자가며 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해서, 오늘 수업준비도 부실해졌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평소처럼 책을 읽거나 상념에 빠지지 않고 놋북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다. 책만이 아니라 코딩도 지하철에서 좀 잘되는 것 같다. 왜일까? 혹시 검은 화면을 두고 광속 타이핑을 하는 내 자신이 스스로 멋있어서? ㅋ
목적지가 가까워지는걸 이제 본능적으로 아는지 한 역을 앞두고 정신이 들었다. 컴퓨터를 끄면서 감각을 회복시켰더니 내 앞자리가 시끌시끌하다. 앞에는 나랑 비슷하게 탄 것 같은 젊은 여자 셋이 앉아 있었는데, 그때 분명 여자들끼리만 있었다. 근데 지금 보니 왠 아저씨가 그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응? 저 아저씨는 분명 조금 전 탄 모양이고, 저들과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계속 기분 나쁘게 얘기하네. 반말하고 훈계조. 기분이 나빠 조금 더 들어보니 대강 이러했다.
그 전 역에서 아마 노인분들이 좀 타신 모양이다. 그런데 빈자리가 없어 이곳저곳 흩어져 앉을 분은 앉고 다른 객차로 이동했는지 어쩐지 한 것 같은데 그때 그 젊은 여자 셋에게 눈치를 줬나보다. 그들은 책보고 뜨개질도 하고 있었던지 그걸 못 본것이고. 그런데 마침 옆에 있던 아저씨(아주 나이 많진 않고 그냥 "양복입고 일하는 아저씨" 타입이다)가 그때 짜증이 났는지 "아이씨" 그러면서 그들에게 훈계를 시작한 것이다. 딱봐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니 말은 그냥 놓고, 대놓고 더 심한 욕은 안한모양인데 하여튼 아무것도 못 알아채고 있던 세 여자에게 갑자기 야단치는 형국이 됐다.
모르고 있다 갑자기 왠 아저씨가 기분나쁘게 야단치니 누가 기분이 좋으랴. 당연히 그들은 발끈해서 그 남자에게 따졌다. 난 평소 양보 많이 한다, 아까는 그냥 못봤을 뿐이다. 근데 왜 you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욕섞어가며 함부로 얘기하느냐 나도 성인이다. 한 명이 얘기를 시작하자 어느 정도 참고 있던 다른 두 명도 화가 나서 같이 얘기한다. 그 남자는 그래서 니들이 잘했다는 거냐 내가 무슨 욕을 했냐 아이씨가 욕이나 시발년이라고 안 한걸 다행으로 여겨랴 이러고 있다.
앞자리에 있던 나는 그 전 상황은 모르지만 이 상황은 뭐 뻔하다. 남자가 여자, 특히 자신보다 어린 여자에게 전혀 존중함 없이 함부로 말하고 있었던 거고, 나이가 좀 많다 하여 함부로 주위 사람에게 가르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거고,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닥치고 양보"하라는, "미덕"을 남에게 강요하는 중이었고, 마땅히 잘못함을 뉘우치며 기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대드니까" 분에 치밀어 올라 자신의 잘못(잘못이라 생각도 안하겠지만)은 생각도 안하고 오직 이기려는, 상대를 찍어누르려고 하는 중이었다.
난 원래도 정말, 남자들이 여자에게 막하는 것, 특히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여자에게 함부로 하는 것, 희롱하는 것을 끔찍이 혐오하고 있는데 요즘 들어 특히 주변에 그런 경우가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바로 일어나 그 남자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다가, 워낙 지금 몸과 마음이 피곤해 기력도 없고, 금방 내려야 하기도 하고, 또 젊은 여자 두둔하는 젊은 남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에(이 생각은 부끄럽다 -_-), 그리고 일단 그 여자들이 잘 싸우고 있었으므로 (사실 한쪽은 계속 존대하고 한쪽은 계속 반말하며 목소리 높이고 "내가 시발년이라 했냐 뭐라고 했냐"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간접 욕을 하고 있으니 공정한 싸움일리가 없다) 내가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근데 내릴 역이 코앞에 다가 올수록 점점 목소리가 높아져서 견딜 수 없게 됐다. 난 누가 큰 목소리로 말하는게 싫다. 빈집의 복돌이가 손님 오고 갈때 크게 갑자기 짖는 것도 짜증나 구박하고 있는 판인데 사람, 특히 이렇게 내가 정말 싫어하는 태도로 사람이 말하고 있으니 더 견딜 수가 없다. 일단 일어나서 그 남자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말하면서 그냥 뜯어 놓으려고 했다. 사실 속으로는 욕이 나오려 했지만 참으면서, 대놓고 조목조목 따지고 싶지만 그러면 내가 당장 피곤해진다는 걸 알기에 비겁하게 그냥 말리기만 했다. 결국 한참을 더 큰 소리로 싸우다 어떤 할머니가 그 여자들을 말리고, 그 남자보고도 그만 하라고 하니까 겨우 수습이 됐다.
참 답답하다. 나이로 찍어누르고, 자신이 항상 옳다고 하는 생각,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문제 있는 사람은 "계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말이 옳으면 상황과 맥락과 상관없이 할말을 다 해야하고, 그 사람의 말은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그저 닥치고 듣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되고, "더구나" 그리고 "그래서" 남자라고 여자들에게만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특히 나보다 나이도 어린 여자라면, 그리고 그 여자들이 대학생이나 그보다 젊게 보이는 "학생"이라면, 어른 남성으로서 당연히 무슨 말이든 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말하는 식이.
자신의 생각과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그리고 처한 상황이 얼마나 일관성을 갖는지 스스로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이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냥 할 말만 하는 것, 자신의 기분이 풀리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만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의 기분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이런 것들.. 무엇보다 특히 일상 속의 권력 관계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서 한 꺼풀만 속을 들여다보면 늘상 할 얘기 다 못하고 참으며 남을 배려하거나 속병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 날 답답하게 한다. 사실 난 그 여자들이 존대를 하지 않으며 싸우길 바랬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침묵하며 지켜만 보는 상황에서, 어쨌든 도덕적 이슈로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어른 남성"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으로 그런 말투까지 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 불리해질 수 있을 거라는 걸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저 옆에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꽥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시끄러우니 조용하라는 것보다는 당연히 "원/인/을 제/공/한" "나이 한참 어린 여자"가 "대드는 것"에 대해 한말이었으리라.
여와 남, 그리고 다양한 정체성간의 권력 관계,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의 권력 관계. 그리고 "도덕적" 우월감 이런 것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까 아주 가관이다. 정말 꼴보기 싫다. 나이 많은 남성들 제발 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말아주시오. 짜증 난다. 일상 속에 가득한 그러나 살짝 아슬아슬하게 위장되어 있는 "폭력". 조두순 사건도 희대의 사이코가 일으킨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 언제나 차 넘치는 "폭력"이 극명히 드러난 사건이라는 생각이다. 하여간 요즘 들어 점점 모든게 폭력적으로 보이니 힘들군. 그래도 내가 그런 걸 염려하고 분노해서 힘든거와 그런 폭력의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힘든 게 쉽게 비교될 순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