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

잡기장

팔당에 다녀왔다. 자전거타고. 처음부터 마음 먹고 간 건 아니었는데, 조금만 더 가자 가자 하니 어느새도착해 있더라. 마음 먹으면 언제든 다녀올 수 있는 곳이건만, 요즘엔 혼자서 어딜 잘 안가게 된다. 혼자 다 챙기고 알아보고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기획하는데 발만 담그는게 편하니까.

 

요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뭐가 요즘이냐 늘 그렇지 하는 분들 있겄지만 그래도 요즘엔 상태가 꽤 괜찮았다. 마음의 병은 육체적 피로와 함께 찾아왔는데, 조금 회복되는가 했더니 이번주들어 몸을 좀 혹사했더니 단박에 중증이 되었다. 작은 일에도 분노, 좌절하며 근거없는 망상을 하고, 의심과 질투로 몸이 달아올라 녹아내린다. 어제도 그랬다.

 

분에 찬 상태로 빈집 아랫집에 만든 옥탑방에(짐들 사이에 박스만 깔아놨다) 모기와 추위, 불편함도 생각 못하고 잠들었다. 얼마나 잔 건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옥상을 오가는 소리에 깼다. 잠을 특별히 잘못 잔건 아니지만 그리 썩 잘 잔 것도 아니었고, 험한 꿈을 꾸느라 몸에 기운이 없다. 일어나자마자 잠들기 전 기억이 확 나면서 바로 열이 오른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곤 옷을 갈아 입고 가방을 챙겨 빈집을 나선다. 그렇게 자다간 몸 버린다는 베라의 말에도 네. 한마디, 어디 나가는거? 에도 네.

 

딱히 갈 곳을 정하지 않았지만 한 며칠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 오고 싶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나을 뻔했다) 문득 목요일에 만난, 팔당 부근에 사는 사람이 생각났다. 그래 거기도 빈집이나 마찬가진데 답사를 겸해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한강대교 쪽으로 가면서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마신다. 지각생은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입이 마르는데, 바로 나오느라고 물 한모금 안마시고 자전거를 탔더니 입이 쩍쩍 갈라진다.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앉아 있으니 내가 지금 집을 나온 모양새가 썩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해서 걱정 말라고 할까. 망설이다 폰을 접는다. 

 

자전거를 달리는데 제 정신이 안든다. 어케 길을 가고 차를 피했는지도 모르게, 용산 참사 현장도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한강대교를 건넌다. 어디로 갈까. 가방이 무겁다. 괜히 짐을 많이 챙겨왔다. 일단 서쪽으로 달린다. 집에 도착해 놋북을 내려놓고 다시 집을 나선다. 이번엔 동쪽이다. 어디 마음 내키는대로 가보자. 중간 중간 볕 잘 받는 벤치가 있으면 누워 하늘을 본다. 이 짓도 오랫만이다. 하늘이 썩 괜찮다. 스르르 졸음이 온다. 잠깐 잔 것 같은데 기분이 조금 괜찮아 졌다. 아직 불길은 여전하지만.

 

한강대교 북쪽을 지나면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 찾는 터가 있다. 그곳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면 효험이 있다. 앉아서 또 생각과 기억때문에 괴로워하며 돌 속에 뻗어나온 풀을 쥐어 뜯는다. 뜯은 풀을 접고, 끊어 멀리 던진다. 그 걸 두번째 할때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뭔지 깨닫는다. 뜯겨진 풀을 보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때 난 마음도 없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은 온통 번잡한 생각들로 황폐해지고 있고 분노와 질투, 좌절로 가득 차 있는데 어디서 내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까. 그런데도 나는, 그런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 착해보이는 - 행동을 무심코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느끼자, 내가 평소에도 늘 이런식으로 사나. 마음을 담아 말하고 행동하는게 아니라, 항상 그 상황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기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 같다.

 

잠실대교 밑에서 또 한참을 잤다. 돗자리가 있다면 흙바닥에서 자도 될텐데, 짧은 벤치에 낑겨 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낮 세시. 기분은 조금 더 가라앉았다. 일어나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니, 오늘 내 기분을 만들었던 어제의 일이 사실 별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증상은 완화되고 있으나 병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도.. 벌써 돌아가고 싶어진다. 대놓고 낸건 아니지만 내가 짜증을 낸 만큼 사람들도 신경이 쓰이겠지. 돌아갈까 계속 동쪽으로 나갈까. 문득 어제 다시 본 카이지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래 오늘은 더 갈 수 없을때까지 가보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만화에 이 대사가 나온 건 아니다)

 

정동진 영화제 때 양군, 꼬미와 같이 달리던 생각이 난다. 본격 출발 전 마지막 보급을 하던 쉼터에서 또 한참을 쉬었다. 해가 어느새 기울고 있다. 그만 돌아갈까. 또 이 생각. 연습장을 꺼내 마구 낙서와 메모, 글을 쓰고 다시 동쪽으로 간다. 가면서 전환점이 나올때마다 계속 고민한다. (나중 생각하면 암사동 들어가기 전에 돌아갈 것을 그랬다) 암사동으로 들어간 후에는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미사리로 달린다. 이제는 완전 익숙한 길이라 무리 없이 길을 찾아 달린다. 그렇게 결국 미사리 도착.

 

강변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하늘이 흐리다. 아래를 보니 자전거 길이 근래에 새로 포장된 것 같다. 넓적 시원한 길을 달리니 기분이 좀 더 좋아지다가 다시 미칠듯한 좌절과 분노가 솟구친다. 다시 멈추고 벤치에 앉아 연습장을 꺼내 몇자 쓰니 또 거짓말같이 분노가 사라진다. 분노에 마비됐던 감각이 살아나니 주변이 참 좋다. 조용하고. 서울의 한강은 사람이 너무 많아 조용히 쉬기도, 글을 쓰기도 어렵다. 이쪽에 살면 좋겠다 싶지만 내년에 자전거 길이 서울부터 쭉 뚫리면 여기도 사람이 바글바글하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노트를 접고 페달을 밟아 팔당대교를 건너니 금방 팔당역이 나온다.

 

목요일에 만난, 팔당에 사는 사람을 떠올려 전화해본다. 주말엔 거의 집에 있다고 했고, 목표를 정하고 오기 싫어 미리 연락하지 않고 그제사 전화한건데, 집에 있긴 한데 곧 나간다 하신다. 그럼 다음 추석때나 한번 다시 올께요. 해가 곧 질 시간이다. 지하철이 나 있으니 돌아오는 건 문제 없다. 약 30분마다 한 번씩 차가 있다. 금방 돌아가기 싫기도 했으니 주변을 돌아다니기로 한다. 예봉산이던가 올라가는 길이 있다. 조금 올라가 보니 지역주민들이 만든 쉼터가 있는데 태양광발전으로 가로등을 켜고 있었다. 괜찮네 저거. 빈집도 저거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풍력발전기 하나 태양광발전 하나. 물론 그림의 떡이다.

 

해가 지는 산에서 노트에 글을 쓴다. 내 마음이 집 나간건 꽤나 오래된 것 같다. 마음을, 정말로 담아 무언가를 해본게 오래됐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다시 찾기 위해 끙끙댄다.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부치진 않을 편지도 써본다. 그러다보니 옛생각이 나네. 직접 말하는 건 너무 겁나고 서툰 지각생이 앓다 앓다 죽겠으면 써서 보냈던 예전의 편지 몇 통. 그제나 이제나 직접 말 못하는 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서툴고 겁많아서 어케 하겠소. 해가 지고 벌레가 많아지니 팔당역으로 돌아와 열차를 탄다.

 

돌아와보니 빈집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아침에 그렇게 집나간것도 별로 신경 안쓰는 모양이군. 뭐 그럴거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사람들이 관심 가져줄 걸 기대라도 했는지 살짝 실망스럽다. 조금 있으니 아주 속상한 사실을 알게 된다. 옥상으로 기타를 들고 간다. 나는 김광석 노래를 조금 흉내내는 편인데, 오늘의 테마 - "마음을 담아서" 불러본다. 안 올라가던 것도 올라가더라. 속이 좀 나아지는 것 같더니 다시 불이 난다. 마음의 병의 역전승이다. 오늘 하루 종일 한강에서 날려 보낸, 띄워 보낸 분노와 원망이 나를 차지한다. 악의는 없지만 너무나 부주의하게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어 집을 또 나온다.

 

증산동 집으로 오며.. 이젠 체념이 된다. 불은 다시 꺼져 간다. 그리고 그 불이 다 꺼지고 나면 내 마음은 재만 남아 있을 것이다. 내 고통을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냐만 그래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 야속하구나. 오늘 적은 내 노트엔 희망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이렇게 상황에 쉽게 휩쓸리는 내 마음, 굳건하지 못한 마음, 병을 이기지 못하는 내 마음이 안타깝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은 나아지겠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9/27 01:52 2009/09/27 01:52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2dj/trackback/656
비밀방문자 2009/09/27 03:47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지각생 | 2009/09/27 12:01 URL EDIT
감사합니다 같이 자전거여행 함 가요
비밀방문자 2009/09/27 11:14 URL EDIT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지각생 | 2009/09/27 12:02 URL EDIT
괜찮소 ^^ 나중에 얘기해줄께 큰 걱정 안해도 돼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