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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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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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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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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앉았다.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두고 가만히 손가락의 느낌을 기다렸다. 손끝, 지문돌기의 아래에서 하얀 건반이 따뜻해지고 있다. 모든 물질은 자체의 파장을 갖는다고 그애가 말했었지. 소리를 내고 싶은 것은 건반일까, 손가락일까, 아니면 우리 둘의 파장이 일치해서 일어나는 신기인걸까. 진은 소리없이 건반을 반쯤 눌렀다.

 

" 사계, 어때? 봄, 여름, 가을, 겨울... "

 

진은 피아노 앞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애는 창 앞으로 가져다놓은 의자 위에서 무릎을 감싸안은 채 앉아 있었다.  짧아진 해 어스름이 창턱에서 그애의 옆얼굴을 지나 한쪽 어깨를 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여름, 여름이 좋아. "

 

그애가 말했고 진이 손을 움직였다. 아버지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피아노였지만 우아한 검정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민감하게 공명해주고 있었다. 그애는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여름은 어둡고 불안하면서도 끈기있게 진을 끌고 갔다. 소리는 말처럼 뜻처럼 영혼을 가진 것처럼 방 안에 가득찼고 창문을 넘어갔으며 긴 계단을 지나 플라타너스 낙엽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그애를 찾아갔다. 파장이 맞으면 반응하는 전기석처럼 그애는 귀를 기울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연습실 앞에까지 온 그애는 소리없이 문을 밀고 한발 두발, 그리고 멈춰선 채 피아노치는 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깨, 춤추듯 너울대는 팔꿈치와 길고 긴 손가락. 그애는 벽 앞에서 무릎을 구부려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가을의 짧아진 해가 이울고 장막처럼 노을이 연습실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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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바람이 차다. 몹시 가을 타는 그애는 어쩌고 있을까. 진은 피아노 앞에 앉았으나 선뜻 손을 올리지 못했다. 생각이 내달리고 있다, 그애는 지금...

늦은 가을이다. 플라타너스는 온몸을 흔들어 벌거벗은 채 승천무라도 추고싶다는 듯 끊임없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연습실을 나와 사범대 앞의 계단을, 호숫가를 돌아 학생회관 별관이랑 문과대의 뒷담을 살폈으나 그애는 없었다. 집에선 분명히 학교 간다고 나갔는데, 얼굴을 아는 같은 과의 사람들을 만나 물었으나 하루종일 어떤 강의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워낙 자주 빠지는 지라 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의 동기들, 오히려 선배라는 여자들이 더 성실히 답해 주었다.

 

" 동아리실에 있을 것 같은데? 점심도 거의 그쪽 선배들이랑 먹으니까. "

 

단발 머리가 길어져 목과 어깨에 닿을듯 말듯한 여자선배는 얼굴 넓데데하고 눈도 코도 입도 다 커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아, 언젠가 살풀이춤을 추는걸 본 것 같...진은 아는체를 했다. 그애가 어찌나 잘 묘사를 했는지 문과대 풍물패를 하면서 장구는 기본이고 무당춤의 전승자라고.

 

" 그건, 과장이 심하네요. 그냥 동아리에서 하는 수준이에요. "

 

"  예뜨락에 있는 거 아냐? 전에 거기서 같이 막걸리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거기서 책 보다가 막 자구 그러던데? "

 

숏컷트의 정말, 자격지심 있을 것처럼 못생긴 다른 선배가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동그마하니 호박모양인데 깨가 많아서 그리 보이나, 선배들 중 가장 생각이 깊고도 선하다. 라고 그애는 각주를 붙여주었었다.

 

" 니넨 파전이라도 놓고 먹었었지, 난 그냥 생두부만 달랑 놓고 먹었다. 것도 설립자 동상 아래에서 커피 마시는 커플들 구경하면서. "

 

중동? 비스무리한 어디쯤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사람인가 싶을 만큼 가무스름한 피부에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여자선배가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곱슬곱슬한 머리도 그렇고, 아랍풍인데 아주 섹시미가 넘친다. 고 말하면서 그애가 실눈을 뜨고 미소짓던게 생각났다.

모두들 그애를 사랑하고 아끼는 듯 진에게 친절히 그리고 벌써 안 보인지 며칠 된 것 같다며 걱정스레 함께 행방을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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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 나는 독신주의자야. "

 

그애는 자신없이 말했다. 결혼이란 남과 여의 제도적 결합이니, 이를 좋다할 것인가 싫다할 것인가. 진은 끌듯이 물었다.

 

" 왜? "

" 나를 받아줄 남자는 없을 것같아서, 말하자면 피동적 솔로이스트지. "

"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과선배가 맨날 밥 사준다고 쫓아다닌다며? "

" 나를 모르고 접근하는 것뿐이야. 알고나면 도망갈 꺼야. "

 

허나 그애는 알게 하고 싶지도 않은 듯, 누구와도 길게 만나지 않았다. 인사치레의 관계 이상 무엇도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그애가 그나마 얘기하는 사람들은 동아리에서 세미나를 같이 하는 선배들과 동기들이었다. 조금 잘 생긴 과의 학생회장과 문학써클의 키 크고 우수에 찬 표정의 한,두명의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긴 했다.

 

"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째 하나같이 여리여리한 걸까? "

" 그래, 얼굴 허옇고 손가락 가늘고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지. "

 

진은 거기다 안경까지 쓰면 완전.

 

" 브나로드야! "

 

하하하. 같이 웃었지만 진은 사실 러시아의 지식인운동도, 김기진의 시도 알지 못 했다. 그애가 읽고 있는 책은 대체로 역사책류였지만 가끔 소설을, 더 가끔 시집도 있었고 한번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읽어보았지만 뭐.

 

카페-의자에 겉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우 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앞에 있다.

 

그 시를 읽고 있었던지 그 애의 표정은 어두웠고 비감에 차 있었다. 물론 우리가 그때 아담한 까페에 앉아있긴 했었지만, 민들레찻집이라는 조그마한 걸이팻말처럼 정말 테이블이 두 세개 밖에 없는 그것도 학교 담장 아래 쓰러질 듯한 단층주택의 주차장을 개조한, 그런데에서 김치볶음밥을 먹는게 뭐 그리 부르조아틱하진 않을터인데.

 

"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부끄러워. "

" 나두."

 

그애는 얼굴을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진은 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애는 5월을 지나면서 무척 진지해지고 있었다. 두꺼운 한국현대사를 1권, 2권, 3권까지 읽어내더니 다음권이 안 나온다면서 비평잡지를 사 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끌어대며 대화를 잇곤 하던 그애에게 익숙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프라던가 OSS요원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자 그애에게 심중의 공감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진을 그애는 사랑했다.

 

"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대학을 다녀야지. 너는 왜..."

 

그애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작년 수험생 시절, 엄마보다 담임보다 더 화를 냈던 것은 그애였다. 왜 피아노과를 안가고 음교과냐구,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그럴게 뭐냐구, 나중엔 난 사범대 얘들은 다 싫어해! 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하긴...사대 분위기가 좀 실용적이긴 하지, 반권위주의를 기치로 하는 그애의 컨셉엔 안 맞기도. 하지만 그애는 사범대로 가는 긴 계단을 좋아했다. 그늘도 지고 낙엽도 지고 바람도 땅 가까이 포복하듯 불고 가는 언덕 아래 사범대 앞의 계단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들으며 진을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 음악을 듣고 있는게 좋아. 주변에 무엇이 있던, 말 거는 이 없이 내버려둬 준다면... "

 

그애의 빨간 스테레오카셋트는 아직은 책상 위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고, 93.1 메가헤르쯔의 클래식이 계속 흘러나오는 한은 대학생이라는 그애의 신분이 유지될 것이었다. 아무리 백수의 탄식을 저를 향해 읊으며 괴로워한다 해도, 페미니즘의 끝을 이어 독신의 생애를 예감한다 해도 갓 스물의 그애가 바람부는 계단에 앉아 읽던 책을 덮고 녹턴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진의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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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꿈없이 자고 일어난 아침.

하늘거리는 창가, 아사의 면커텐이 사랑스럽다. 잔꽃무늬 은사의 수가 테두리에 한줄로 박혀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햇빛은 부드럽게 덩쿨담장을 기듯이 넘어 호두나무색깔의 창틀 위를 물들이고 있다. 눈부신 빛의 폭포처럼 창문 프레임을 녹이고 있는 역광 아래에서 부신 눈을 깜빡이다 진은 안온히 미소지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진은 오랫동안 뒤척이며 궁량해온 난제의 답을 찾은 듯 장담하고 마음에 품었다. 누구나 좋아해서 결혼하고 함께 하지만 때로 서로의 행복을 위해 따로따로가 되기도 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엄마처럼 아빠를 인정했다. 그렇다해도 다 알 수는 없었다. 마음은 늘 허공에 뜬 듯 안정감이 없었고 눈과 귀는 열렸으나 입으로 손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부레없는 물고기처럼 심해에 가라앉아 꿈벅꿈벅 살폈으나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누가 있어 꼬리없는 상어의 깊은 잠을 지켜줄 것인가? 이승을 살듯 꿈속을 살고 잠에서 깨듯 저승을 보는 신내림의 애기무당처럼 제 삶을 내다볼 수 없어 괴로웠다.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른되기가 두렵기만 한걸까.

그애가 큰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좋아. 라고 입술은 말하는 듯 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애의 울림없는 말은 가슴을 적시고 깊고 푸른 너머를 가진 눈은 심장에 불을 붙이는 걸까. 너를 위해 내가 산다. 이것이 사랑이다. 진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붓다처럼 가슴에 사랑을 품었다.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듯 자신을 구제할 것이다, 사랑이란.

 

그애는 보자기를 돌려주러 왔다. 곱게 접어 손바닥 만해진 것을 쪽지편지처럼 매듭지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속에 이야기라도 둘둘 말아온 듯 진을 보고는 한번 눈을 들었다가 내리고 입술모양을 응. 하는 것처럼 가벼이 붙였다.  알지 않느냐는 듯, 나쁘지 않았다는 듯? 부끄러우니 더 길게 잇대지는 말라는 듯. 그애는 패스트푸드점의 메뉴판을 찾는 듯 주위를 휘 둘러보며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저기...뭐라고 써 있는거야? 천연스레 묻는다.

" 치즈버거, 아니 치킨버건가? "

" 배고파? 너는? "

그애가 양상추샐러드와 치킨버거를 먹는 동안 진은 오렌지쥬스를 마셨다. 포장지를 옥수수껍질처럼 벗겨내어 꽃모양으로 만드는 그애의 손놀림을 보고있자니, 넌 왜 안 먹어? 하면서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 폼 잡을라구. "

그애가 웃는다. 그럼, 와인잔을 들어야지. 하면서 눈을 마주친다. 어젯밤 있었던 일 이후 처음이다. 진의 눈길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애는 상긋 엷은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비꼈다.

진은 보자기를 매듭지은 그대로 책상 아래쪽 서랍에 넣었다. 편지와 선물상자 위에 살폿이 올려둔 채 닫았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향을 낼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내가 너의 향취를 잊지 못하니 다시 찾아 안은 녘에는 필히. 하고 진은 마음 속에 음각을 하듯 깊이 새겼다. 너와 결혼할 것이다,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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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가 품에 안겼다.

진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듯이 포근하다, 피아노의 음율이 천사의 날개처럼 감싸는 듯 그애와, 그애를. 안은 진을 안온하게 한다. 음악은, 노래는, 가슴을 저미고 마음을 띄우는 천상의 가락은 그들을 위해 있는 듯하다. 원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 너도 음대 지망이니? "

차랑하고 새로 한 매직스트레이트의 단발을 흔들며 정원은 최대한 순수한 낯빛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애는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 응, 그래? 그럼 피아노를 같이 배우는가 보구나? 윤진이랑은 친한가 봐? "

지나가는 말처럼, 의례히 묻고 받는 대화처럼 정원은 콕콕 집어 물었다. 그애는 아니. 아닌데. 별로. 하고 또 짧게 대답했다.

" 어머? 그럼, 어떻게 아는 사인데? 그냥 울 학교 아니라니깐 궁금해서? 중학 동창이야? 초등 동창에 같은 동네? 난 지금 같은 반이거든, 근데... "

" 같은 중학교 나왔어. "

목소리도 곱다. 정원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갔다. 여인천하의 중전이 희빈을 보듯? 아님 억울하게 무수리를 잡다가 헛다리인 걸 알고 놀라는? 지금은 상감도 잘 모르나 이 여인의 매력을 알게되면...하고 속을 태우는.

" 정말이야? 나도 윤진이랑 같은 중학 나왔는데 ! "

" 응. 알어... "

넌 나를 몰라도 괜찮아. 하는 평범한 상민의 얼굴로 그애는 잠깐 건너다 보았다. 미소를 띄며, 미워하지 말라는 듯이.

" 너, 나를 알아? "

" 피아노 치쟎아. 반주 하느라고 우리반에도 왔었으니까. 중학교 합창대회, 해마다 달반을 두고 연습했으니까..."

" 아, 그렇지, 윤진도 너네반에 반주하러 갔었구나, 나처럼. "

정원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애와 선약이 있다던 윤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토요일 두 시 이후 브레이크타임의 패스트푸드점에서 고등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예대지망의 한갓진 놀이. 그애는 피아노도 못 치면서 왜 윤진을 만나러 왔을까.

 

" 왜? "

정원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목과 함께 눈물도 터지고 있었다.

" 왜 그애를 좋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는데! "

정원이 울고 어깨를 떨며 무너지듯 무릎을 껴안고 주저 앉았다. 그 앞에 선 채 까딱도 않는 윤진은 참...어쩌지. 하는 표정이었으나 동정의 빛은 전혀 없다, 공감의 얼굴도 연민의 느낌도 미안함조차 없는 그저 낭패한 표정.

" 정원아, 그만 해. 이러다 소문나겠다. "

" 무슨 소문! "

정원은 한 쾌 걸렸다는 듯 물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그 한 마디를 가지고 너를 옭아 나의 사랑을 온천하에 알리고 함께 죽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를 품으며, 눈빛 매섭게 윤진을 쏘아보았다.

" 내가 너 좋아하는게 뭐 잘못 되었는데? 난 그딴 거 하나도 겁 안나. 넌 그런 기만과 허식이 좋아? 그딴게 뭐가 중요해? 남의 시선이나 뒷담화가 두려워? 자신이 당당하면 되는거 아냐? 사랑하는게 뭐... "

감흥없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화를 내고 성난 목소리를 높이고 속엣말을 끄집어 감정 실어 소리치나 정원, 그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진은 한숨 한번 쉬면서 속말을 감추고 이어 말했다.

" 동성연애하는 거 말구, 너...바람 맞았다구 소문난다구. 이 정원, 이제 그만 목소리 좀 낮춰. "

내가 네 맘 모르는 거 아니니. 하고 윤진은 사려깊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부드럽게, 포근히, 반쯤 눈꺼플을 내리고 말하는 걸 정원은 목격하고 말았다. 그애와 있을때, 그애를 향해서, 그애가 어찌 하는지를 조바심치며 그리도 조심스럽게 윤진은 대하는 것이었다. 왜, 그애에게?

" 내가 왜 바람맞아야 해? 너, 나랑 입학하고부터 계속 친했쟎아. 우리 중학시절부터도 인연 있었고 그래서 서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쟎아. 우리가 어떤 사이야? "

" 친구 사이지. 중학동창이고, 같이 피아노치고 그러다 보니 친해진. "

윤진은 아까부터 울고 눈물 범벅이 되어 속쌍까플 아래 칠한 속심 두꺼운 아이펜슬 자욱으로 까매진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 한 뼘 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허벅지를 짚고 일어나는 정원은 새빨개진 콧잔등 아래 더욱 붉게 부푼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그럼! 그애는?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도 아니고 피아노를 친 것도 아니고 말 한 마디 나눈 적도 없는 그애가 왜 지금 너한테 ! "

정원은 무릎  위에서 한참 올라오는 스커트 끝단을 잡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윤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따져, 논쟁하여 할 말 없게 만들고, 그도 안되면 추궁하고 비난하고 따를 시키고 싶었으나 그러면 내 사랑이 될 것인가? 싶어 감히 어깨가 들어올려지진 않았다. 키가 큰 윤진은 그래도 정원에게 마음을 주겠다 거짓표정 만들지 않을 것이며 누가 뭐라 하든 제 사랑을 숨겨 쉬쉬하며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자였던가, 윤 진이? 사춘기 소녀들의 히어로였고 속내 동쳐 맨 처녀들의 선망이었고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신사였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응대하던 아이돌이었다. 결코 한사람을 위해 시선 고정하는 이가 아니었다. 스타라면 당연히, 매니저 외에 어느 한 개인을 곁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난 너를 위해 피아노를 버릴 각오도 되어 있어. 네가 치는 연주곡을 위해 모든 걸 다할 꺼야. 내가 너의 발판이 되어도 좋다구, 나야말로 널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어! "

정원은 말했다. 말이 안 되어도 문장을 만들었다. 비문이 되더라도 마음은 내비쳐질 것이다. 열정을 갖고 노력하고 간절히, 간절히 소망하는 자에게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현실에서 성취하게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추구해 온 자에게, 열과 성을 다 한자에게 선택권을 쥔 자가 무어라 말하는가? 뭐라고 하는 건가?

 

" 네가 사랑한 나를 가져가? 그리고 남은 나는 내 사랑을 만나러 갈테니. "

" 야! 윤진! "

많이 기다리지도 더 보아주지도 않고 윤진은 가 버렸다. 정원을 학교 뒷뜰의 우거진 잡목 사이에 남겨두고. 바람난 애인을 불러 훈계하여 계도하려던 건 실패했고 뼈저린 후회, 낙담, 분노와 탄식만이 남아 정원을 괴롭혔다.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어째서 노력하고 원하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는가, 사랑은 또한 사람의 심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던가? 한눈에 보아도 그애가 무얼 말하는지, 바라는지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게 숨은 계략 위에 떳씌워진 아마포라면 더욱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무릇 자연의 섭리가 아닐 것이다. 그애가 그리 내숭을 떠는데 어찌 사랑은 그리로 기우는가. 내가!

정원은 홀로 엎디어 울었다. 누가 허리 아래 숨은 상처가 없으랴, 심장의 이면에 눌린 자욱이 없겠는가, 이 땅에서 어린아이로 천대받고 어깨 위 견장으로 가린 청춘의 숨소리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법이다, 그것도 사랑한다 점찍은 자에게서.

봐라, 저 애가 어떻게 가녀린 손목을 들어 입과 턱을 가리고 아니다, 싫다. 하면서 품에 안기는 지를. 저런 내숭과 저런 안일과 한번 알은 체를 하지 않고 표표히 군중 속을 뚫고 나가는 저 애의 기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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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 가을 바람 소슬하다. '

이 진은 고개를 약간 기우뚱. 이건 아니구...

' 가을바람 솔솔분다.' 

다시 머리를 곧추 세우고 생각을 해 본다. 솔솔 부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음.

신음처럼 꾸웅 하다가 공책을 밀어놓고 펜도 던져놓고 일어난다. 이나저나!

문득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열씸히 쓰던, 아니 써야해서 애먹으며 숙제검사용으로 두 줄씩 채웠던, 일기장을 책꽂이 구석에서 발견하고 한 줄 써 보던 참이었다. 역시나.

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대문 안쪽 마당의 가으로 보이는 건 들장미처럼 우직스러운 덩쿨나무의 가시 돋친 줄거리들이 여기저기 엉켜있는 담장이다. 여전히 엄마는 화단손질을 소홀히 하고 있다...하고 생각하지만 스테레오테이프의 이중 트랙처럼 머릿 속의 다른 구석에선 커다랗게 뜬 눈을, 흘낏하듯, 잽싸게 보였다가 고개를 돌려 뒷머리만 보인 채 체육시간을 마감하던 그애에 대한 생각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그애가 훔쳐보는 걸 처음 안 것이 아니다. 봄부터 여름내, 방학 지나고도 변함없이 같은 반도 아닌 윤진을 오랜 벗이라도 되듯 익숙하게 찾아내서 언제부터? 라고 느낄 만큼 시선을 꽂고 있었다, 그애는. 뒤통수가 따가워...하고 느끼면서 윤진이 휙 돌아보면 벌써 재빨리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그 애는 또, 쉬이 낮은 목소리로 말 건네기 어려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었다. 그 애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서, 또 실상 알지도 못 하는 복도 저쪽 끝반의 여자애에게 큰 소리로 불러 할 말은 없으니, 윤진은 결근한 체육선생을 대신해서 합동수업을 진행하는 그 애네 반의 담임, 키 쪼꼬만 늙다리 여자체육의 시야를 벗어난 양팔벌려 4줄 횡대의 끝줄에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뭐, 말 그대로 히히덕. 이었다. 앞 줄에 선 아이가 어제 본 개콘을 얘기하자 옆엣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슬쩍 몸개그를 흉내내기도 해서...좀, 웃었다. 킬킬 거리고. 저만치 앞에서 지도하는 체육꼰대의 하얀 모자 끝만 가끔 들썩거리니 뒷줄 170센티 그룹의 딴 짓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헌데...

 윤진은 다시한번 으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절로 이마가 찡그러졌다. 쿨하고 싱겁기로 이름난 1반의 꺽다리인 윤진이 어쩌다 합동수업하게 된 저 앞줄의 범생이 소심녀 땜에.

'승질 나네!'

맨 뒤에서 킬킬거리는 일단의 꺽다리들을 슬쩍 돌아보더니, 한번 더 돌아보더니 눈 마주치자 얼른 고개 돌리고 교실 들어가는 길에서도 저 앞에서 혼자 척척척척 가 버렸다. 평소엔 흘낏흘깃 잘만 보더니.

그냥 딱 보기에도 조용하고 얌전하고 애들하고 어울려 수다같은 거 안 떨것 같더니, 아닌게 아니라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해서 체육담임이 좋아한다더라구, 그애와 초등 동창이며 죽마고우라는 중간줄 앞에 앉던 애가 말했었다. 그래 그런가, 저의 죽마고우와도 별 알은 체를 안 하더니 시종 조용히 수업에만 열중하고 4열 횡대로 서서 옆엣 아이와 말 한 마디 않고 앞엣줄 아이의 뒤꿈치만 보더니 슬쩍, 운동장 바닥에 떨어져있던 휴지조각이나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킬킬거리며 소음을 더해가던 뒷줄의 무리들을 돌아보다가 윤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표정 하고는!

한순간 윤진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도무지 생각이라곤 없어 강건너 마을이 수해로 초토화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도 건성으로 넘기며 대학가요제의 웨이브에만 신경쓰는 꺽다리 수다꾼들 속에 서 있는 자신을 그애가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니...대체 열 서넛의 중학생 여자애가 뭐 그따위로 사람을...얼마나 한심하게 보던지, 츱!!

윤진이 얼마전 주니어콩쿨 대회에서 1등하고 월요일의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과 트로피를 받으며 돌아나오면서 흘낏 그애의 얼굴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질 노릇이었다. 인어공주가 바다 위로 처음 나들이 나와 뱃전에 선 왕자님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감동과 환희, 동경과 열망에 가득찬 시선이었다. 보통, 동급생이 상을 타거나 하면 부럽다거나 고깝다거나 아님, 맨숭맨숭 딴나라 사람이려니 하고 쳐다보곤 하는데, 윤진은 그애의 시선 땜에 한껏 가슴이 뿌듯이 차 올랐었다. 근데...괜히 운동장에서 킬킬대 가지군...완전 이미지 배렸다.

또 바로 지난 주 가을백일장에서 뭐...윤진은 할 말이 없어 대중가요를 베낀 시를 한 편 내고 말았지만, 그 공부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 한다는 그애는 산문 부문에서 금상을 받아서 단상에 섰었다. 산문이라 시 부문의 입상작처럼 액자에 넣어져 걸리지는 않았지만 학교신문에는 실려서 함 읽어보았다. 시험범위 외에 교과서 정독도 해 본 적 없는 윤진이었지만.

징검다리 놓여있던 개천가를 넘어 산으로 들로 풀따고 꽃따고 잠자리도 잡으러다녔었는데, 그 산을 깍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천을 복개하여 물도, 징검다리도 없어졌다며 슬퍼하는 얘기였다. 내 산아, 어디 있니...하고 끝나는. 뭐, 그애가 쓸 법한 글이었다. 쌩하고 말도 없이 운동장을 가으로 돌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맨날 쉬는 시간마다 독서중이던 그애는, 흠.

윤진도 한 번 써 볼까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오늘처럼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기분 더럽고 마음 착찹한 날에는. 가을 바람 쓸쓸히 휘익 부는 데, 거...곁눈 한 번 없이 지나가던 그 애 땜에, 완전 가을 타는 사춘기다, 이 윤진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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