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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23
    진의 노래 1
    외딴방
  2. 2012/10/21
    1990년대 노동운동 ( 네이버 지식인에서 )
    외딴방
  3. 2012/10/21
    연애소설 1
    외딴방
  4. 2012/10/20
    홉스봄,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나다
    외딴방

진의 노래 1

그녀가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노래가 다 하고 남은 것은 행동 뿐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노래하기를 그만 두고 있다. 본시 부르기보다 듣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혼자 가면서 노래를 내어놓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울음 우는 새처럼 혼자만 들리게 노래하다가 누구라도 들을라치면 입을 다물고 이내 먼산만 바라보던 소녀였기에 더욱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갈 것이다. 집을 버리고, 귀속계급으로 범주화하는 대학을 두고, 아무도 사랑이 있다.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공간, 삶의 피폐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경쟁의 장에서 탈락하여 다른 공간으로, 마치 차원의 틈새를 넘어가면 신세계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기대에 찬 눈을 들고, 나는 사랑한다. 고 읊조리며 간다.

 

그녀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찾는다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와 함께 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출근하는 그녀를 배웅하는 것 이상 빈집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말했듯, 모두가 다 운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 나처럼 그녀에게서 이상적인 예술가라고 인정받은 경우에는 더. 그녀가 심미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한다 할 지라도 그 날 선 눈초리는 나를 피해갈 것이다. 예술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그 누구라 할 지라도 나와 같이 그녀에게서 인류를 위해 네 자신의 길을 가라고 등 떠밀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피를 노래하지 않는다. 민중의 함성도, 억압받는 자의 고통도. 그리 하지 않고 대신 사랑을 노래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차원에서도 통용되는 에로씨시즘의 노래를 말이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생각키는 이유다. 생각하느라 턱을 고이다 보면 사랑 또한 따라오는 법이고 그렇게 열망한 결과 나는 태어났다. 그녀의 머릿 속에서 기타와 칩을 들고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이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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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노동운동 ( 네이버 지식인에서 )

1990년대 노동운동

파워 boolingoo
2007.02.2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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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말 경기가 침체국면에 들고 노동집약적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위기 노동자 책임론과 함께 무노동 무임금, 인사경영권 참여금지 등 노동운동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강화된 가운데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이 결성됐다. 이날 경찰은 전노협 결성을 봉쇄하려고 갑호 비상령을 발령했다. 이미 노조운동은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가맹노조들은 탄압과 구조조정으로 상당이 와해되어 있었다. 더구나 1월 22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한 날이었다. 전노협의 운명은 탄생부터 험난하였다.

정부는 전노협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가입노조에 대한 탄압에 집중했다. 지도부에 대한 구속 수배는 물론이고 소속 노조에 대한 탈퇴강요, 행정관청을 동원한 업무조사,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파업사업장 공권력투입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 와중에 90년 5월 전노협 탈퇴를 거부하다가 구속된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교도소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전노협은 비록 14개 지역협의회, 2개 업종협의회에 456개 노조 16만 6,307명에 불과했지만 정권의 탄압에 총파업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노협은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1995년 공식해산까지 1989년 결성된 업종회의, 대기업노조들과 더불어 민주노총 결성의 산파 역할을 했다.

정부가 1991년 10월 UN과 ILO에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에 발맞춰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결성했다. ILO공대위는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 단결을 목표로 공청회, 국민청원운동, 전국노동자대회 등의 투쟁을 벌였다. 결국 정부는 ILO로부터 노동법개정 권고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처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었다.

전노협 결성과 때를 같이하여 1989년 말 집행부가 바뀐 7개 대기업 노동조합이 전국대기업노조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그해 임투과정에서 발생한 직권조인 파동으로 와해되고, 그해 12월 9일 민주파로 교체된 대기업 노조들이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회의(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사회적 파장이 큰 주요 대기업이 포함된 연대회의를 정권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990년 12월 전노협 중앙위원회 회의장에 경찰이 난입했고, 1991년 2월에는 연대회의의 공동간부수련회장에 경찰이 들어와 참가자 67명 전원을 연행, 구속시켰다.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연대회의 소속 노조들이 전노협과 함께 대정부투쟁을 벌였으나 정권의 집요한 탄압에 연대회의는 결국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기업 노조들의 민주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대기업 노조들의 투쟁과정에서 노조 간부들이 대거 구속, 수배되면서, 상당수 노조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여전히 민주파가 당선되었다. 1993년 6월에는 이들 대기업 노조와 전노협, 업종회의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여 민주노총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민주노조운동이 마치 ‘봄 소풍과 가을운동회’처럼 상반기에는 임금, 단체협약 투쟁, 하반기에는 노동법 개정투쟁을 으레 진행해온 문제점을 반성하면서, 사회개혁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를 기반으로 1994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공식발족하고, 업종별 연맹이 모인 업종회의, 지노협이 모인 전노협, 그룹별로 모인 대기업을 산업별연맹과 지역본부라는 두 축으로 재편해, 1995년 11월 11일 마침내 ‘전국민주노조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되었다. 861개 노조 40만 조합원에 15개 업종,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협의회를 가맹조직으로 둔 민주노총의 창립으로 한국노동조합운동은 50년 동안 유지됐던 대한노총, 한국노총 단일체계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1990년 4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 1990년 5월 KBS노조 파업은 1990년 상반기를 뒤흔들었다. 또 1991년에는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의 의문사에 항의하여 벌어진 전국적 투쟁뿐만 아니라 전국택시노련의 서울, 광주, 인천, 여수 지부 등이 총파업을 벌였다. 이들 지부들은 이후 전국민주택시연맹의 핵심동력이 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초기에는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총액기준 임금가이드라인 4.7%를 깨고자 하는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의 공동 임투를 계기로 정부 내 강경파와 자본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적 노동정책은 좌초되었고 노동계에 대한 공세는 그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1994년 6월에는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교통공단노동조합 그리고 1988년 기관사들의 파업 이후 철도노조민주화운동의 구심이 된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등 궤도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가 변형근로제 폐지를 위한 연대총파업에 들어갔다. 이 연대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의 선제공격에 의해 발생했다. 파업예고 날짜를 나흘이나 앞둔 6월 23일 새벽 3시 30분 김영삼 정권은 용산 전동차사무소를 비롯해 전기협의 20개 사무소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농성 중이던 611명의 철도기관사들을 연행했다. 이에 전지협이 그날 새벽 4시를 기해 총파업을 선언하게 된 것이었다.

파업 건수는 전년도에 비해 줄었지만 1995년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완강하고 치열했다. 민주노총준비위가 전국투쟁을 주도한 1995년에는, 연초에 본조 위원장과 지방본부장 선거를 동시에 실시해 민주파를 당선시킨 한국통신노조가 정부의 선제공격을 당해 투쟁을 벌이다가 39명이 구속되고, 31명 해고, 3천여 명이 징계를 받았다. 김영삼 정권은 이때 한국통신 지도부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병력을 투입시켜 노동자들을 연행함으로써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의 거센 반발에 처하기도 했다.

전노협과 업종회의 그리고 대기업 노조들의 투쟁은 한국노총 내부의 변화를 추동해냈다. 유신헌법에 대한 지지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정권 말기 4?13호헌 지지선언까지 독재정권에 무릎을 꿇어왔던 한국노총은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심각한 내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밑에서는 개혁의 목소리가 시끄러웠으나 위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운데 1988년 11월 9일 대의원대회에서 개혁을 표방한 박종근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박종근 집행부는 부당노동행위 규탄대회(1988년 11월29일), 노동악법개정 및 경제민주화촉구대회(1989년 11월5일) 등을 개최하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노총은 복수노조 금지조항, 제3자개입 금지조항 유지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개정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노총의 내부 변화는 1992년 정부의 총액임금제 실시방침과 노동유연화를 위한 노동법개정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종근 위원장의 단식농성, 20개 산별위원장과 15개 지역본부의 철야농성, 연이은 집회와 시위 등의 투쟁 속에서 이탈조직을 재흡수하기 위해 대우조선, 서울지하철, 현총련 등 민주노조진영과 유대와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중앙노사임금 및 정책, 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체결하면서 한국노총은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산하 단위노조로부터의 비판과 반발은 물론 조직이탈이 일어났고,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합의분쇄를 목표로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결국 한국노총은 1994년 11월 사회적 합의 포기선언을 발표하고 내부에 노총발전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주성, 민주성 확립 강화와 노동운동대통합 등의 발전전망을 발표하고,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교류 협력을 추진하였다.

이런 흐름은 박종근 위원장이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면서 중단되었으나, 1996년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한국노총 내에서 개혁적인 사람으로 평가받던 박인상 금속노련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장과 함께 강한 노총건설’을 표방했던 박인상 위원장은 지속적인 노총 개혁과 노동계통합을 강조했으며, 그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복수노조 금지조항의 철폐를 공식 결의했다. 내용적으로는 민주노총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고 김말룡 의원 사회노동장을 민주노총과 공동으로 집행하면서, 양대 노총은 대중적 공조의 길을 텄다. 이같은 한국노총 내부의 개혁 움직임은 96년 말 신한국당이 노동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을 때 이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하고 민주노총과 공동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1996년 12월 26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기록이 씌여진 날이었다. 그 불길은 김영삼 정권과 여당인 신한국당이 지폈다. 이날 새벽 영등포에서 집결해 단체로 국회 본회의장으로 출석한 신한국당 국회의원 154명은 노동법, 안기부법 개정안 등 총 11개 법안을 단 7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날 아침 출근과 동시에 민주노총은 소속노조 전체에 즉각적인 총파업을 시달했으며 이튿날인 27일 한국노총도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미 24일부터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통해 전체 단위노조가 비상대기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후 약 1달여에 걸친 노동계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초기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에 착수했다. 첫 노동부장관이었던 이인제는 노조의 정치활동과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법개정을 검토하고, 전교조 해직교사와 해고노동자 복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노동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총련의 공동임투를 계기로 정권 내 강경파와 자본은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며 경제 활성화를 볼모로 잡고 나섰다. 수세에 밀린 이인제가 교체되었고, 노사관계에 대한 중립, 합법적 노조활동 보장이라는 두 축을 내용으로 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적 노동정책은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노동법개정 시도도 물거품이 되었다.

노동법개정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996년 4월 국회의원 총선 직후였다.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하여 노사정이 참여하는 노동법개정 논의를 진행했다. 그 내용은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제3자개입 금지조항의 철폐,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3권 허용 등 집단적 노사관계법과 자본 측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변형근로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개별적 노사관계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경총,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정부가 참여해 줄다리기를 벌인 노동법개정 논의에서 정부 개혁파가 노동계 안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긍정적인 방향에서 논의가 이뤄지는 듯 했었다. 그러나 법안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 정부 경제팀의 목소리가 강화되었고, 이에 반발해 민주노총이 노개위를 탈퇴했다. 결국 98개 합의안과 미합의 공익안 43개항에 대한 정부의 수정을 거쳐 12월 11일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양대 노총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 시점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그런데 신한국당이 정부안보다 더 개악된 안을 만들어 12월 26일 새벽 기습 처리한 것이다.

26일 아침 전체 단위노조에 총파업 지침을 내린 후 민주노총 지도부는 명동성당에서 무기한농성에 들어갔고, 기아자동차노조가 가장 먼저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오전 10시였다. 오후 1시부터는 현총련 소속 현대그룹 노조들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날 85개 노조 14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오후 4시부터는 12개 지역에서 집회가 열려 연 10만여 명이 참가했다. 둘째 날에는 21만 명이, 28일에는 173개 노조 22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지하철도 멈춰 섰으나 시민들은 불편을 참았다.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안기부에 수사권을 돌려준다는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시민들도 분노하고 있었다.

문제는 연말연시였다. 서울지하철노조 등이 내부 사정으로 파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연휴에 이어 주말이 붙어 있었다. 민주노총은 일단 1997년 1월 3일 2단계 총파업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정권은 노동자들이 한풀이로 파업을 며칠하고 연말연시를 경과하면서 기세가 꺾일 것으로 예상했다. 민주노총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꺼지려는 불꽃을 김영삼 자신이 되살려 놓았다.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선진국 어느 나라에 노동쟁의가 있느냐?”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고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질문 그만하라”며 나가버렸다. 원인무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저버린 것이다. 총파업 13일째인 이날 언론노련 산하 방송4사 노조, 병원노련 24개 노조 그리고 사무금융노련이 파업에 가세하는 등 범국민적 투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권은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영장 발부, 압수수색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미 전국 각지의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지식인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노동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 서명운동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3단계 총파업이 시작된 1월 15일에는 388개 노조 35만 명이 참가하였다. 1단계 투쟁으로 단위노조별 규탄집회, 토론회 등을 벌였던 한국노총의 2단계 총파업도 이날 시작되어 1,510개 노조 38만 조합원이 참가했다. 1월 26일에는 양대 노총이 공동으로 여의도 둔치에서 약 15만 명이 참가하는 공동 집회를 개최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1월 말 종교지도자와의 만남과 영수회담을 거쳐 국민에게 사과하고, 2월에 임시국회를 열어 3월 10일 노동법, 안기부법을 다시 개정했다. 극히 부분적인 재개정이었지만 명실 공히 6?25전쟁 이후 첫 정치총파업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에게 뜻하지 않은 재난이 찾아왔다. 1997년 11월 터진 외환위기였다. IMF는 구제금융조건으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민영화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인수위 시절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 구성을 제의했다. 국가위기 앞에서 노동자에게 이른바 고통분담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강요되었다.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로, 총파업까지 벌여가며 막으려고 했던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등이 법제화되었고 대신 상급단체부터 단계적인 복수노조 허용, 교원의 단결권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등의 내용이 포함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합의 되었다. 그렇지만 이튿날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 협약은 부결되었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비상대책위 주관으로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가운데 정리해고제는 국회를 통과했고, 양대 노총은 노사정위 참가와 철수를 반복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구조조정은 거침없이 진행됐다. 전국적으로 ‘고용보장이냐, 임금삭감이냐. 택하라!’는 자본의 공세에 단체협약도 후퇴했다.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는 노동운동가요의 가사는 자본가의 노래가 되었다. 1987년 이후 10년 동안 조금씩 개선해 온 근로조건과 권리를 한꺼번에 자본에게 되돌려준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6월 29일 4,830명의 정리해고 신고를 낸데 대해 노조가 파업으로 맞섰지만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도기계, 기아자동차, 인천제철, 한양공영, 서울지하철, 대우조선, 쌍용자동차, 금융권과 공공부문 그리고 대우그룹 워크아웃까지 구조조정은 거침이 없었다. 노동자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공권력에 의해 구속, 수배만 될 뿐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노동자들은 혹한의 거리로 내몰렸다. 거리마다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흘렀다.

이 시련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비로소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총파업기간 동안 매일 계속된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권영길을 청와대로! 노동자가 국회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해 하반기 민주노총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여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운동방침은 권영길, 투표방침은 김대중’이었고, 한국노총은 정책연합을 추진하여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한국노총과의 정책연합은 김대중 당선 이후 곧 파기되었고, 외환위기는 고통분담이 아닌 노동자에 대한 고통전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구속, 수감되었다.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이 투여됐고 각종 규제가 풀렸다.

1997년 대선이후 민주노총은 본격적으로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로 들어섰다. 국민승리21에 대한 배타적인 지지, 지원을 결의했고, 2000년 1월 30일에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으며, 4년 뒤에는 50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이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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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1

' 내게 80년대란 무엇인가. '

 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것은 과거에 침잠하여 현실을 잊고 싶은 나태함의 변명인가. 하고 이어진다.

 90년대를 일관하는 세태의 변화를 무시하고 표표히 한 길을 걸어오게 한 것이 그 80년대의 정서였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스무살을 넘긴 세대는 소련의 붕괴에 흔들리기엔 과거의 유산이 너무 크고 깊었으며, 그것이 없었더라면 지탱하기 힘들었을 자존심으로 똘똘뭉쳐 있었다.

그래서 90년대를 어떻게 살아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패배했더라도 순결은 지켰다. 라고 그녀는 자위했다. 허나 세상은 알량한 민주화보상 운운으로 비정규노동자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줌마의 스무살을 희화화시켰다.  마치 업종회의가 주도하는 민주노총 창립의 이면에서 총액임금제분쇄투쟁이 밀려난 것처럼, 개량은 일반이 되었고 정통은 이반이 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에서 당은 진보하고 전위는 퇴락했다. 그녀가 서른 셋에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커리어우먼처럼 절망하다가 전선을 이탈하고 후위에서 서성이며 보낸 것이 바로 2000년대의 첫 십년이었다. 현재를 착목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에서 연원하는 바, 앞말이 뒷말을 배태하는 서투른 글쓰기처럼,  전망없이 오늘을 사는 혁명마니아에겐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혁명을 사랑하였는가. 라고 말하며 그녀는 습하게 차오르는 눈길을 돌린다.

 

 

 그녀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지식인, 에릭홉스봄이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서전 중에서 인상깊은 말.

 

 “제아무리 소련을 회의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에 속한다.” 

“자존심.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면 틀림없이 더 잘나갈 것이었지만,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았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타협이란 무엇인가'  천일을 넘게 투쟁했어도 일하던 그 자리로의 복직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자회사나 하청으로의 재입사란 결국, 그게 핵심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아웃소싱을 달성할 때 현장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소속을 따라 분열되는 것, 1997년에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십년이 지나고 더 지나도 소속이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은 같은 브랜드네이밍을 쓰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나 서로를 소, 닭 보듯 하고 있다. 타협이란 그런 것이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눈을 감고 부차적인 이득을 취하며 절반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 위로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면서,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쫓겨난 초기에 비해선 엄연히 투쟁의 성과다라고 우기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침을 뱉으며 우스갯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 만한 놈은 다 알았다. 그 공장거리에서.

그녀는 ' 나는 순결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선 회의한다. ' 라고 쓰고 있다.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패배는 노정된 것이었을까? 천일에 천일을 더, 그리고도 더 천일을 투쟁했다면 혹시,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자괴감 혹은 패배의식이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었다고 인식할 때 생기는 것이다. 할 수 없었던 다른 원인이 있었다면, 그래서 원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면 절망이라것이 자신을 잠식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설득할 수 없었고 그것이 천일 동안 현장을 함께 했고 다시 천일 동안 투쟁을 함께 한 동지들과의 관계의 정도였죠. " 그녀는 입술을 깨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도 바보같이. 하고 이어 말했다.

" 천일을 더 동지들을 붙잡고 있었어요. 마치 바람난 서방을 쳐다보며 집에 들어오기만 해 달라고 애원하듯이. 우리의 결말이 어땠을 것 같아요? "

그녀는 망신창이가 되어 결별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십년쯤 지나고 보니 말이 목구멍을 넘어 나오기도 하는 군요. 하고 덧붙이며.

나의 사랑은 반쪽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온전히 하나의 사랑을 구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몇 장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계급 전체를 천민으로 전락시키는 협상안에 싸인을 하고 나왔다. 속으로 모다, 내가 저 시민권을 가지리라. 생각하며.

" 내가 그들을 분할해서 사랑할 수 있을 꺼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물론 공지영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쌍차의 노동자들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니랍니다. "

사랑을 잃고 어찌 노래가 가능하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순결을 지키는 것에도 지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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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나다

 

체 게바라 대신 룰라를 택한 역사가
 
타고난 반골이었으며 반평생 공산당적을 유지한 구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세상을 떠났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사와 사회사의 새 시대를 열어젖힌 거장의 생애를 살펴본다.

 

기사입력시간 [265호] 2012.10.15  09:51:19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10대 때부터 취향이 독특한 ‘조숙한 별종’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록 음악의 역사를 섭렵하거나, 전문가 뺨치는 컴퓨터 마니아가 되거나, 혹은 마르크스를 흠모하고 혁명의 역사에 푹 빠져들거나.

마지막 종류의 별종들은 대학에서 거의 백이면 백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을 만났다. 그가 쓴 책 <혁명의 시대>는 국내에 첫 번역된 1984년 이후 ‘마르크스 보이’ ‘혁명사 마니아’라면 한번쯤 꼭 들춰보는 필독서 대접을 받았다(끝까지 읽었는지는 물론 다른 문제였다. 제목과 달리 읽어서 피가 끓어오르는 책은 아니어서 오히려 ‘혁명사의 쓴맛’을 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홉스봄 본인부터가 ‘조숙한 별종’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한 1917년에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열아홉 살에 공산당에 들어가 거의 50년 동안 당적을 유지했다. 지성계의 일급 시민권자 중에서 스탈린의 만행이 폭로(1956년)된 이후로도 공산당에 남은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 1980년대에 영국 공산당이 해산한 후로도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살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 역사학의 거장이 10월1일 숨을 거뒀다. 향년 95세. 주저인 19세기 3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을 비롯해 고전으로 기억될 숱한 저작을 남겼고, ‘이중혁명’ ‘장기 19세기’ ‘만들어진 전통’ 등 역사 해석의 새로운 틀을 여럿 제시했다. 거의 모든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되는, 역사가로는 유례가 없는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서도 그를 거쳐간 ‘피 끓는 청춘’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정치사의 헤게모니를 부수다

1980년대 한국의 진보적 역사 연구자와 지식인들은 홉스봄이 주도한 역사방법론의 혁명에 열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홉스봄이 속한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사와 사회사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무슨 왕이 몇 년도에 어디를 정복했다는 식의 정치사가 역사의 본령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홉스봄은 ‘진짜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했다. 산업혁명과 대공장 노동이 이름 없는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노동자들이 어떤 모자를 썼고(‘앤디 캡’이라는 납작한 모자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뭘 먹었으며(악명 높은 영국 음식 ‘피시 앤 칩스’도 노동계급 음식이었다), 무슨 오락을 즐겼는지(오늘날 세계적 스포츠가 된 프로 축구는 원래 노동계급의 오락으로 성장했다) 연구해 ‘노동자들’이 언제 어떻게 왜 ‘노동계급’으로 한데 뭉쳤는지(혹은 끝내 뭉치지 못했는지)를 밝혔다. ‘왕과 기사의 영웅담’에 가려진 사회사의 물줄기를 찾아냈다.

사회사 혁명은 대성공을 거뒀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20세기 역사학의 가장 유명한 구호가 되었다. 정치사에 천착하던 정통파는 퇴조했고,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은 프랑스의 아날 학파와 더불어 20세기 역사학을 양분했다(아날 학파는 정치사에 관심 없기로 한술 더 떴다).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에게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준 충격은 상당했다. 광복 직후 한국 역사학 1세대들이 찾아 헤매던 핵심 화두가 ‘발전’이었다면(선진국의 발전 경로 연구가 초창기 국내 사학계의 주류였다), 민주화 요구가 높아가던 1980년대 신진 연구자들의 화두는 ‘변혁’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이들에게 꼭 맞는 무기였다.
 

80학번인 이용재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홉스봄은 변혁의 시대, 역사학도들의 바이블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변혁을 꿈꾸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사회사·노동사를 하는 시대였고, 홉스봄은 최고의 길잡이였다. 마르크스주의 텍스트가 해금된 후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가 중 하나였다.”

1980년대의 황혼기에 터진 두 사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붕괴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도 큰 숙제를 던진다. 지적 혼란의 시기에,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살아온 홉스봄은 일종의 ‘고정된 좌표축’ 구실을 했다. 다시 이용재 교수의 회상이다. “홉스봄이 그냥 고집 센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면 시대 변화를 못 따라간 늙은이 취급을 받았겠지만, 그는 사학계에서 누구도 부인 못할 업적을 쌓아올린 거장이었다. 반평생 공산당원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교조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학문이 시대 변화를 견뎌냈고, 후학들에게도 지표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50년을 공산당원으로 살았던 홉스봄의 책 대부분은 정작 소련에서 금서였다. 소비에트의 악명 높은 ‘공식 역사관’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에 비판적이어서 유대인 주류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쯤 되면 태생이 반골이다.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

하지만 이 위대한 반골에게도 ‘자기 검열’은 있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20세기에 대한 소련의 공식 견해가 엄존하는 한 1917년(러시아 혁명) 이후의 역사를 썼다가는 정치적 변절자로 매도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업 역사가로서 나의 역사는 1914년(1차 세계대전 발발 연도)에서 끝났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19세기 연구자가 된다. 그의 주저인 ‘19세기 3부작’은 1914년까지의 이야기다.

자기 검열은 1991년 소련 붕괴 후에야 풀린다. 1994년 홉스봄은 20세기사를 다룬 <극단의 시대>를 내놓는데, 이 책은 40개 언어로 번역되어 가장 널리 읽힌 역사서 중 하나가 된다. 사학계에는 “오래 사는 것도 역사학자의 중요한 재능이다”라는 농담이 있다. 홉스봄은 1991년을 넘기며 오래 산 덕에 20세기사를 다룰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용우 동덕여대 교수(85학번)는 “1994년에 쓴 이 책에서도 소련에 대한 애잔함은 은근히 묻어 있던 기억이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1956년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새 총서기 흐루시초프는 이 해에 대량학살 등 스탈린의 만행을 고발한 연설로 전 공산권을 충격에 빠트린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다. 한때 혁명의 전위로 존중받았던 소련 공산당의 위신은 돌이킬 수 없이 떨어지고,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탈당 러시가 벌어진다. 공산당에 남은 일급 지식인은, 학문 분야를 통틀어서도 홉스봄 하나 정도였다. 그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했지만, 탈당은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인터뷰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왜 그때 탈당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자서전에 나온 그의 답은 두 가지다. “제아무리 소련을 회의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에 속한다.” 두 번째는 더 홉스봄스럽다. “자존심.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면 틀림없이 더 잘나갈 것이었지만,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았다.”

이 타고난 반골은, 묘하게도 학문 세계에서는 확고한 정통파였다. 그가 주도한 사회사 혁명은 어느 순간 ‘정통’이 되어버렸다

 

한국 사학도들이 홉스봄에 열광하던 그 즈음부터, 정작 사회사는 후학들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문화사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의 경제 중심적 해석(경제 환원론까지는 분명 아니었으나)은 점차 인기가 떨어졌다. 21세기 들어서는 프랑스 혁명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홉스봄식 해석이 다시 소수파로 고립된 듯한 인상을 준다.

현실 세계는 더 가혹했다.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강단의 소수파 외에는 의미를 찾기 힘든 이념으로 전락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계보도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진보 세력도 더 이상 마르크스에서 답을 구하지 않는다. 이에 맞서 홉스봄은 2011년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숙고하다>를 낸다. 그의 나이 아흔넷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반골이었고 투사였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문화적으로도 그는 굳이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정통파였다. 어릴 때부터 재즈 팬이었던 그는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 평론을 썼다. 1950년대 록 음악이 떠오르자 그는 록을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는 오판을 했다. 록이 확고한 주류로 자리매김한 후에는 “미국 대중음악에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죽였다”라는 가시 돋친 논평을 쓰기도 했다. <옵저버>는 “이 표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홉스봄이 역사를 이렇게 쓰지는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 신좌파의 아이콘 중 하나였던 청바지를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이른바 ‘68 혁명’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신좌파의 물결에 구좌파 중의 구좌파 홉스봄이 얼마나 시큰둥했는지는 유명하다. 홉스봄은 축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정통파 혁명가의 정서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의 책 중 하나가 68 세대의 필독서로 간주된다는 말에 그는 뿌듯해하기보다 놀라고 당황했다. “나이든 좌파인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 친구들은 정치적 목표를 이뤄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였다.”(자서전)

68 혁명의 ‘문화적 해방’에 냉소

젊은 시절 늘 스스로를 혁명 활동가로 생각했던 그는 신좌파가 정치적 목표 대신 문화적 해방(그의 눈에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 보였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특유의 삐딱한 영국식 유머로 이렇게 쓴다. “학생들이 정부의 타도나 권력 장악과 같은 하찮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68 세대의 아이콘이었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홉스봄은 냉소적이다(“그것은 극적으로 잘못 구상된 전략이었다”). 반면 그는 브라질의 룰라를 “구좌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라며 집권 전부터 주목했다. 무장 게릴라 특유의 낭만주의를 배척하고 제도권 정당을 통한 집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분명 그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던 홉스봄이 게바라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는 농담 같은 논평도 있기는 하다). 1968년에 51살이었던 홉스봄은 자신은 68 세대를 이해하기에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토니 주트와 같은 68 세대 출신 역사가도 홉스봄의 ‘68 무용론’에 동참한다.

‘정통파 반골’ 홉스봄은 한국에서도 1990년대를 거치며 일종의 ‘제도권 편입’을 겪는다. 그의 책으로 공부한 연구자들이 홉스봄을 강단으로 들여왔다. 사회사·노동사·19세기 유럽사에서 홉스봄은 필수 커리큘럼이 됐다. 사학도들 사이에서는 “군대에 책을 들고 들어갈 때 <혁명의 시대>는 혁명이라서 걸리고 <자본의 시대>는 자본이라서 통과된다더라” 하는 농담이 자연스러워질 만큼 익숙한 텍스트가 되었다.

묘하게도, 그때부터 다음 세대의 ‘조숙한 별종’들은 이 ‘강단의 텍스트’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강상구 진보신당 창당준비위 부대표(91학번)는 “우린 더 빨갛고 불온한 거 보느라(웃음) 홉스봄은 볼 시간이 없었지”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마르크스 보이’와 ‘혁명 마니아’의 공급도 예전 같지 않았다. 사학도들에게 홉스봄은 두 가지 의미로 ‘교과서’ 대접을 받았다. 익숙해졌지만, 1980년대만큼 열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러시아 혁명의 해에 태어나,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고,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경쟁의 한 축을 대표하는 역사가로, 1991년 소련 붕괴까지 목격한 그는 20세기의 화석이자 압축파일이다. 홉스봄은 그 특유의 역사 구분법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1991년 소련 붕괴까지를 ‘단기 20세기’라고 부르는데, 이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의 증인으로 그보다 어울리는 사람을 떠올리기는 무척 어렵다. 정말로 여러 가지 의미로, 다시 나오기 힘든 역사가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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