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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2/05
    <깔로> 계절사이로 걸어가다(3)
    제이리
  2. 2006/02/05
    <바간> 백마 탄 기사를 만나다(8)
    제이리
  3. 2006/02/04
    <양곤> 남자도 치마를 입는다(2)
    제이리
  4. 2006/02/04
    <끄라비/피피>아쉬운 시간이 흘러간다(5)
    제이리
  5. 2006/02/04
    <치앙라이> 호의도 짐이 된다(5)
    제이리
  6. 2006/02/01
    <치앙마이> 트레킹을 하다(14)
    제이리
  7. 2005/12/24
    <방콕> 일산주민과 만나다(23)
    제이리
  8. 2005/12/17
    <시판돈> 시간이 멈추다(22)
    제이리
  9. 2005/12/17
    <짬빠삭> 영어가 웬수다(4)
    제이리
  10. 2005/12/17
    <빡세> 다시 길을 떠나다(3)
    제이리

<깔로> 계절사이로 걸어가다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갈까.. 깔로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 다시 양곤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짧은 쪽을 택하니 깔로로 가기로 결정이 난다. 깔로는 인레호수 가는 길에서 조금 못 미처 있는 해발 1350미터의 조그만 산동네다. 이곳 역시 다른 식민지들과 다를 바 없이 조금 시원하다는 이유로 영국의 식민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곳이라는데 대체적으로 고원지역이 그렇듯이 별로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다. 여행객들이 여기에 머무는 이유는 거의 트레킹 때문인데 태국의 트레킹처럼 코끼리타기나 뗏목타기 등등의 화려한 놀거리는 없어도 아직 때묻지 않은 자연과 소수 민족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새벽에 깔로행 버스를 타러 나서는데 호텔직원이 도시락을 건네준다. 새벽에 나가니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는 아침은 그냥 못 먹는구나 싶었는데 의외의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열어보니 식빵 두 쪽, 커피믹스 하나, 오렌지 그리고 삶은 계란이 들어 있다. 삶은 계란이라.. 어디 먼길이라도 떠나는 것 같다. 버스를 타니 교장 선생님이 보인다. 결국 이렇게 일정이 맞는구나 싶다.


게스트하우스표 도시락.. 새로 산 카메라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어두운데서 찍으면 사진이 이 모양이다.


깔로에 도착해 트레킹을 알아보니 일박 이일에 한 명은 15달러, 두 명이면 10달러 란다. 물론 식비와 숙박이 포함되어 있다.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네 하면서 교장선생님과 나 둘이서 트레킹을 신청한다. 신청을 해 놓고 설마 둘이 가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아침에 가이드를 따라나서니 정말 둘 뿐이다. 아니 이래도 남는 게 있나 했는데 뭐 안 남을 것도 없는 것이 그냥 냅다 걷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깔로가 이미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트레킹 코스는 오르막이 거의 없는 산길이라는 점이다. 산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마을이 있으면 들러 보고 점심 먹고 학교가 있으면 들어가 보고 하다가 하루가 간다.


트레킹 도중 들른 마을


마을아이들. 한국에서 안 입는 옷이라도 수거해 가져다주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는..


산정상에 있는 산장인 뷰포인트에 올라 선셋을 본다. 간만에 산 너머로 붉게 지는 일몰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감흥이 밀려온다. 미얀마에서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유독 일몰 챙겨 볼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산장주인인 네팔 사람이 만들어 주는 네팔 음식을 먹고 모닥불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의 인도인들이나 네팔인들은 주로 영국식민지 시절 영국인 주인을 따라왔다가 독립 이후 그대로 눌러 앉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 네팔 아저씨도 예외는 아니다. 치앙마이 트레킹의 추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기도 추위가 만만치 않다. 저녁을 먹고 별이나 보려고 나섰더니 전기도 없는 산장이 온통 환하다. 오늘이 보름이란다. 쏟아질 듯한 별을 기대했건만 달빛에 가려 별은 그저 그런 빛이다. 치앙마이에서는 흐려서 별이라곤 안보이더니 여기선 풀문이라니 이래저래 별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뷰포인트에서의 선셋


산장 주인 아저씨


전기도 없는 산장에서 긴 밤을 보내고 다음날은 다시 걸어서 마을로 돌아간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건설했다는 철로 위로는 영국식민지 시절부터 다녔을 법한 기차가 아직도 굴러다닌다. 그 기차길을 따라 가다 기차역에서 점심을 먹는다. 기차역에는 기차가 들어오는 시각에 맞춰 작은 간이장이 열리는데 점심이며 꽃, 야채를 파는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제법 간이역 같은 북적임은 기차가 떠나자 금새 가라앉는다. 오후에는 다시 논길을 따라 걷는다. 이미 추수가 끝난 누런 논 옆으로 새파란 야채가 자라고 있다. 산은 가을 산이고 밭을 보면 봄인데 정작 날씨는 한여름인 곳에서 세 계절을 넘나들며 트레킹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사흘이 지나 있다.


뷰포인트에서의 아침. 셀프로 찍었슴다.


기차가 들어오면 작은 장이 선다.


이 곳 깔로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한 팀은 여선생님 세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 한팀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다. 그 중 여선생님팀과 일정이 맞아 같이 인레 호수로 함께 떠난다. 으.. 전직 교장선생님 한 분과 현직 선생님 세 분이라.. 지금이 겨울방학이긴 겨울방학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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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간> 백마 탄 기사를 만나다

양곤에서 오후3시에 출발한 버스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바간으로 들어선다. 바간은 도시전체 입장료가 10불인데 새벽에 징수원들이 버스로 올라와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만 내리라고 한 뒤 표를 판다. 즉 표를 사지 않고서는 도시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다. 자다 내려 표를 구매한 뒤 바간 지도가 있길래 1000짯을 주고 하나 산다. 10달러나 받으면서 그냥 하나 줘도 되겠구만 궁시렁거리며 지도를 펴보니 버젓히 프리맵이라고 써 있다. 참 가지가지로 챙긴다 싶다. 이건 어째 민간인들은 이리도 순박한데 공무원들이 더하냐 말이다. 열받아봐야 나만 손해니 그냥 1000원 버렸다 생각하기로 한다.


바간은 11세기부터 13세기 몽고의 침입이 시작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5,000여 기의 불탑이 세워졌다고 하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이다. 뭐 지금은 세월의 풍화에 따라 2,500여기만 남아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2,500개지 야트막한 평원지역에 불탑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붉은 흙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탑들이 붉게 물든 석양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물론 2,500개를 다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몇몇 유명한 사원을 중심으로 하루 이틀 돌아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래도 밤새워 버스를 탄 뒤 바로 투어를 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내다 한국인 아저씨 한 분를 만난다. 라오스에서 한 번, 태국에서 한 번, 그리고 미얀마에서 세 번째 부딪히는 데 정년퇴직한 교장선생님이다. 방콕에서 만났을 때 미얀마에 나보다 4일이나 먼저 간다고 해서 만날 일이 없겠지 했는데 어찌어찌 또 만나버린 것이다. 아무리 한국 사람이 그리워도 사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게다가 전직 교장선생님이 일행으로서야 그리 반가울 턱은 없는데 대충 다음 일정이 비슷하다. 그래도 다음 일정이 트레킹이니 혼자 가는 거 보다야 낫겠지 싶어 다행이다 생각하기로 한다.


첫날은 혼자서 호스카-뭐 별 건 아니고 말이 끄는 차 즉 마차다-를 타고 사원이 밀집되어 있는 올드 바간 쪽을 돌아보기로 한다. 조조라는 호스카 드라이버가 끌고 나타난 마차는 으아.. 백말이다. 내 인생에 백마 탄 왕자님이야 있을 리 만무하지만 비록 드라이버이긴 해도 -뭐 드라이버가 우리말로 하면 기사 아니던가- 백마 탄 기사 하나는 등장한 셈이다^^. 여튼 백마가 모는 마차를 타고 하루종일 탑들을 돌아본다. 아난다사원, 술래마니사원, 탓빈뉴사원, 담마얀지사원, 고도빨린사원, 밍글라쩨디 사원, 부바야 파고다, 쉐산도 파고다 등등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사원과 탑들이 저마다의 모양과 사연을 가지고 나타났다간 사라진다. 말이 모는 오솔길을 따라 이름 없는 사원에 들어가는 느낌은 그럴 듯한데 사원에 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뭐 당연하게도 물건을 파는 상인들인데..


이것이 호스카다


사원에서 바라 본 바간의 탑들


미얀마 사람들은 순박하면서도 집요한데가 있어 묘하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데 바간에서는 그 정도가 지나쳐 거의 이성을 상실할 지경까지 만든다. 일단 이 상인들은 나전칠기 그릇이나 페인팅을 파는 것이 주목적인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들이 사원을 관리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벽화를 보려면 이들이 따주는 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데 그러면 일단 물어보는 말을 무시하기는 어렵게 된다. 대략 질문은 종이에 써서 외운 것처럼 동일한데 어디서 왔냐.. 바간은 처음이냐.. 미얀마는 얼마나 오래 있느냐.. 이름은 뭐냐.. 그리고 그 다음이 예쁘다이다. 그럭저럭 가족 관계까지 파악당하고 나면 사원 구경은 대략 끝이 나는데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페인팅 뭉치가 어디선가 등장하고 백여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페인팅을 들춰가며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한다. 다 들어주려면 한 시간은 걸릴 것 같다. 미안하지만 대략 그냥 가려고 하면 하나도 못 팔았다.. 니가 이 그림을 사주면 나는 정말 해피할 것이다 등등 이제까지 이야기를 나눈 인정상 차마 그냥 갈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끝끝내 뿌리치고 돌아서면 마지막으로 프레젠트라는 말이 나온다. 안 살거면 볼펜이라도 주고 가라는 것이다. 물론 미안한 표정으로 준비된 게 없다고 하면 또 그런대로 웃으면서 노프라블럼 이라는데 괜시리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처음엔 볼펜이나 좀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은 한 열 번쯤 반복되면 니가 나한테 볼펜 맡겨놨냐는 마음으로, 스무번쯤 들으면 짜증으로 삼십번쯤 들으면 사원 들어가기가 두려워지는 것으로 바뀐다. 참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겠고 여튼 아름다운 만큼 상인들도 꽤나 집요한 곳이 바간이다.


점심때  먹은 미얀마 백반. 향이 조금 달라 그렇지 한국 백반과 비슷하다.


사원에서 만난 아이들


담날은 자전거를 빌려 조금 먼 뉴바간을 둘러 본다. 관광객들은 유명사원이 몰려 있는 올드바간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나머지 사원들은 거의 방치된 채 버려져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들렀다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다니니 상인들에게 시달리는 것 보다는 이것이 훨씬 낫지 싶다. 뉴바간 어느 식당인가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신다. 강변에 있는 식당인데 음료수가 1000짯이나 하는 나름 고급 식당이다. 의자가 반쯤 젖혀져 깜빡 잠이 든다. 눈을 떠 보니 음료수를 가져다 준 웨이터가 그대로 서 있다. 이곳 식당은 고급일수록 웨이터가 곁을 안 떠나서 좀 불편하다. 민망하다. 자고 있는데도 안 갈 줄을 정말 몰랐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포장도로라도 군데군데 패인 데가 많아 일몰을 보고 나면 너무 어두워질 것 같아 해질녁에 맞추어 숙소로 돌아온다


사원에서 바라 본 바간의 탑들2


바간의 일몰


저녁에는 숙소에서 만난 부산에 사는 남학생과 거리를 걷다가 또 다른 선생님 한 분을 만난다. 가족과 함께 오신 사회 선생님이다. 누가 방학 아니랄까봐 선생님들 참 많이 본다. 전교조 활동을 하신다는 사회 선생님이 사주시는 맥주를 마시며 미얀마 현실에 대한 얘기를 잠시 듣는다. 미얀마 정부가 독재 정부는 분명한데 이 정권이 무너지면 바로 개입할 세력은 미국이고 민주화 세력의 대모격인 아웅산 수지 역시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이 나라 사람들이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내기 전에는 이 정권이 무조건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 역시 대안이 없다는 것인데.. 그저 여행자일 뿐이라고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듯이 가급적 그런 애기들은 나누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고민하기 싫었던 것의 핑계는 아니었을까 싶다. 참 지하자원도 많고 땅도 넓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나라인데 이 나라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잠시 복잡한 마음이 된다.    


바간이 너무 좋아 며칠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아직 일정이 가늠이 되질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떠날 준비를 한다. 앙코르와트도 좋았지만 바간은 색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다. 바간에 오면 좋아서 죽을 몇몇 인간들이 떠오른다. 첫 번째로 바이러스, 이 녀석은 아직 앙코르도 안 갔다와서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오면 제일 좋아할 것 같고.. 다음은 쿠.. 어느 파고다 밑에서 술병 끼고 앉아 세월 가는 줄 모를 것 같고 마지막으로 조커.. 비교적 정상적으로 공부도 하고 와서는 행복해.. 행복해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 같다. 언젠가 미얀마에도 직항이 생기면 아니 그건 더 비싸겠고.. 육로가 열리면 중국에서든 태국에서든 밤버스타고 와서 바간에서 며칠이고 빈둥거리다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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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 남자도 치마를 입는다

안숙을 캄보디아로 떠나보내고 하루를 방콕에서 뒹굴거리다 미얀마행 비행기를 탄다. 여행 시작하고 처음 타는 비행기라 그런지 비행시간이 한 시간 남짓인데도 어디 다른 대륙이라도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비행기라는 이동 수단이 아니었으면 <안숙부재로 인한 여행 우울증>에 한동안 시달렸을텐데 환경이 변하니 안숙의 부재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 양곤 공항은 익히 들어왔던 대로 뭐 우리나라로 치면 좀 큰 읍내 터미널 같은 분위기다. 당연 수순대로 삐끼님들의 안내를 받아 택시를 타고 화이트게스트하우스 소위 말하는 백악관으로 향한다.


양곤은 같은 동남아인데도 사람들의 옷차림새부터 거리 풍경까지 인도차이나의 다른 나라들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먼저 옷차림은 남녀 구분없이 룽지라는 긴치마를 입는 것이 특징이다. 뭐 여자들의 것은 타메인이라고 부른다지만 대략 그냥 룽지라고 불러도 시비거는 사람은 없다^^. 이 룽지라는 옷은 직사각형의 커다란 천의 양귀퉁이만 꿰매놓은 것으로 다리를 사이에 넣고 적당히 접어서 시접부분을 둘둘 말아 허리께에 밀어 넣으면 그만인 편리한 옷이다. -뭐 룽지속에는 속옷도 안 입는다는 미확인 보도도 있다- 남자들 옷은 대략 체크무늬가, 여자들 옷은 꽃무늬가 주종을 이루는데 여튼 이 치마를 입고 자전거도 타고, 축구도 하고, 더우면 걷어서도 입고, 목욕할 땐 가슴께로 올려서 가운으로도 입고 등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다음은 특징은 미얀마만의 특유한 화장 방법인데 여자들과 아이들 가끔 남자들까지 온통 얼굴에 노란색 가루를 칠하고 다닌다. 따렌까라는 나무수액으로 만든 이 화장품은 메이크업이자 썬블록의 역할을 한다는데 처음엔 액체지만 마르면서 얼굴에 노란 가루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아마 이 흔적이 남아야 더 예쁜 것으로 인정이 되는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특히 볼부분과 코부분에 간혹 나뭇잎 모양이나 특이한 무늬를 그려넣은 제법 세련된(?) 화장법이 선보이기도 한다. 여튼 이 화장법 역시 마얀마 사람을 구별짓는 독특한 전통이라 할 수 있겠다.


사진에서 보이는 치마가 룽지다


사원에서 만난 아이. 얼굴에 묻은 노란 흔적이 따렌까 자국이다.


이 동네 남자들의 특징은 주로 우리가 죠스바를 먹고 났을 때나 볼 수 있는 벌건 입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처음 보면 흠칫 뒤로 물러나게 될 만큼 섬찟하다.  이는 꿍이라고 부르는 입담배 때문인데 나뭇잎에 하얀 가루를 바르고 무슨 열매인가를 잘게 썰어 싸서 씹는 이 잎담배가 입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입담배는 어느 정도 씹다가 뱉아 줘야 하는데 벌건 물이 입에서 확 쏟아지는 걸 보면 비위가 확 상한다. 단지 비위만 상하는 게 아니라 가끔 파편이 튀기로 하는 데 뭐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이 덕분에 그리 깨끗하지 않은 거리는 온통 벌건 물이 들어 있다. 누군가의 조언에 의하면 외국인들에게만 징수되는 비싼 사원입장료를 내지 않으려면 룽지를 입고 입담배를 씹은 다음 징수원을 향해 씩 웃어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지인들이 애용 상품이다.


양곤 거리는 매우 낡은 건물들이 그래도 무슨 유럽 뒷골목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미얀마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영어도 비교적 잘 통하고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영어 한마디 못 하는 사람이 없는 재밌는 곳이다. 하지만 수도라고 해야 영국 식민지풍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전역이 거의 슬럼화 되어있고 보도블록이며 맨홀뚜껑이 거의 깨져 있어 걸을 땐 발밑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대책이 안서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나마 여기는 수도라고 전기나 들어오지 양곤을 제외하면 저녁 두세 시간을 이외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그나마 수도시설이 없어 우기에 내린 비로 이루어진 웅덩이 물을 그냥 길어다 마셔야 되는 열악한 나라이기도 하다.


숙소 옥상에서 본 양곤시내


양곤에서는 쉐다곤 파고다만 보러간다. 만달레이의 마하무니 파고다. 짜익띠요의 골든락과 함께 .미얀마 3대성지로 불리는 이곳은 현지인들은 무료지만 외국인은 5달러인데 굳이 매표소를 찾지 않아도 징수원들이 귀신같이 외국인들을 찾아내 입장료를 받는다는 곳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준 지도대로 버스를 타본다. 미얀마버스는 숫자가 아라비아로 되어있지 않고 자기나라 고유의 글자로 되어 있어 버스타기도 쉽지 않다. 쉐다곤 파고다야 워낙 유명한 성지라 어째 물어물어 타기는 했으나 헉 이 버스 도무지 발디딜 틈도 없다. 5분 남짓이니 어찌어찌 견디긴 했지만 다른 버스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앞으로 미얀마에서 버스 탈 일이 꿈만 같다. 나중에 수도 없이 보게 되는 익숙한 형태의 불탑 주변에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는 사람들 수백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전 지식도, 가이드북도 없이 탑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뭐 별로 할 일도 없어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서 잠시 졸다가 자다가 다시 나온다.   


쉐다곤 파고다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다음엔 쉐다곤 파고다가 우기에 잠길 때를 대비해 일부러 언덕을 쌓아 만들어서 그 흙을 판 곳은 인공 연못이 되었다는 깐도지 호수 쪽으로 가본다. 호수 주변에 철망이 쳐 있고 입장료가 1000짯 이다. 내지 뭐.. 하고 들어가 호수에 들어간다. 데이트 할 곳이 그리 많지 않은 듯 곳곳에 청춘남녀들이다. 에구 아주 염장을 질러라 하며 호수를 반쯤 도니 다시 입장료 내는 곳이 나온다. 이번엔 1300짯이란다. 살짝 약이 오른다. 뭐 그리 크지도 않은 호수를 부분부분 나눠서 곳곳마다 입장료를 받는단 말인가. 온 길을 되짚어 가기는 싫고, 입장료를 다시 내기는 더더욱 싫어 그냥 밖으로 나와 철조망을 따라 걸어본다, 길은 한산한데 이 호수 크지 않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땡볕을 두시간이나 걸어서 간신히 입장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삽질을 하고서야 양곤에서의 하루가 간다.


깐도지 호수. 저 다리 위를 걸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니^^


여튼 아침식사만 훌륭하다는 화이트게스트하우스에서 -미얀마는 거의 모든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을 준다- 이틀을 묵으며 여행 루트를 짠다. 가이드북도 없고 인터넷도 무지 느린 이 동네에서 의지할 건 노트북에 내려받은 정보가 전부다. 일단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인도네시아의 보르도부르 유적과 함께 아시아의 3대 불교 성지로 불린다는 바간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정해서 움직이면 될 일이다. 바간으로 가는 밤버스를 끊어놓고 시간이 남아 인터넷에서 누군가 추천한 강건너 달라시로 가 본다. 이곳도 외국인은 따로 돈을 낸다. 왕복 2불. 국가가 앞장서서 달러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달라시에 다녀오니 터미널로 갈 시간이 다 되어 있다. 양곤에서는 한국 사람을 하나도 못 만났다. 미얀마에서도 혼자 여행할 팔자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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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라비/피피>아쉬운 시간이 흘러간다

 

새벽에 방콕에 도착해 그날 저녁 끄라비 가는 표를 끊는다. 12월 30일 밤차는 성수기 가격이라며 차비가 1/3정도 더 올라있다. 그래도 31일과 1일에는 차가 운행을 안한다니 새해를 남부 해변에서 보내려면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 치앙라이에서 하루만 덜 놀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그냥 표를 끊는다. 게스트하우스 아저씨는 남부로 가는 밤차가 험하니 지갑이니 하는 것들은 자더라도 바닥에 깔고 자라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다. 낮에 두시간 마사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틀 연속 타는 밤차는 고역이다. 게다가 맨 뒤자리에 이스라엘리로보이는 상태 몹시 안좋은 남자들이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확 패 주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역시 불의(?)를 보면 참는 게 최고라는 진리를 되뇌며 그냥 꾹 참고 잠이 든다. 이 버스는 남부로 가는 모든 인간을 싣고 달리더니 수랏타니에서 인간들을 분류하는데 푸켓.. 끄라비.. 피피.. 푸켓.., 끄라비.. 피피.. 이 세마디로 모든 인간의 분류가 이루어진다. 그래도 끄라비가 사람이 적은 편이다. 다시 세시간쯤 가니 끄라비다.


안숙이 인터넷에서 찍은 숙소인 반짜오파게스하우스를 찾아 헤매다 너무 덥다.. 배낭 무거워 죽겠다는 나의 징징거림에 못 이겨 결국 반짜오파는 찾지 못하고 그냥 짜오파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푼다. -나중에 보니 반짜오파는 바로 앞집이었다는^^- 결국 한해의 마지막날 남부에 도착을 하긴 한 것이다. 숙소 주인의 말로는 저녁에 파티가 있으니 참석하란다. 그러면서 한국남자 하나가 숙소에 있는데 오늘 투어를 나갔으니 저녁에 올 거라고 한다. 잘 생겼냐고 물었더니 이 아저씨 자기를 가리키며 잘생긴 건 자기란다. 원 농담도.. 왕 느끼하게 생기셨두만^^ 그러지 뭐 하면서도 파티라야 서양애들이나 벅적거릴텐데 싶어 시장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저녁을 먹고 맥주까지 한 잔 마시고 느즈막히 숙소에 들어선다. 숙소 로비에는 서양애들은 간곳이 없고 동네 주민들이 가득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빨리 들어오는 건데 쩝.. 막 방으로 올라갔다는 한국 남자라는 친구를 방까지 찾아가 불러냈지만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 친구 이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다시 방에 올려 보내고 동네 주민들과 합석해서 술을 마시면서 해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동네의 또다른 게스트하우스 주인이라는 아저씨가 -그 아저씨의 느끼함도 만만치 않다^^- 안숙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짜식..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결국 새해맞이 폭죽이 터지고 해피뉴이어를 외친 뒤에야 술자리는 끝이 난다. 드디어 해가 바뀌었다. 아듀 2005.. 그리고 2006년 드디어 나는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불혹하기엔 수양이 부족한 나는 어느 소설에 나온 그만큼 혹할 일이 많아지는 나이라는 해석에 동의하기로 한다.


새해 첫날에는 그 남학생과 함께 근처에 아오낭 비치로 간다. 이 친구 태국에 오자마자 끄라비로 내려와서 일주일 가까이 끄라비에 있었다는데 아오낭 비치만 못 가봤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동행을 자처하는 데 결국 아오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자신은 이미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레이리라는 해변까지 같이 다녀온다. 덕분에 한국어 가이드 데리고 여행하는 듯 편하게 다닌다. 레이리 해변은 섬은 아니지만 제법 남쪽 해변의 바다 같은 느낌이 난다. 에메랄드빛 바닷물이며 야자수가 사진집에 보던 바로 그곳이다. 더구나 제법 근사한 방갈로가 자리 잡고 있어 한적한 휴가를 보내기엔 <이보다 좋을 순 없다>이다. 담에 밀월여행 오면 여기가 딱이겠다 해가며 서로 밀월여행 못 온 걸 아쉬워한다. 새해 첫날인데 떡국은 커녕 한국식당 하나 없는 이곳에서 뭐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시장에 들러 상추며 오이, 고추 등을 사서 방에서 쌈밥을 해 먹는다. 고기까지 구워 먹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럴 수는 없어 그냥 참치캔을 사서 고추장과 함께 상추에 싸 먹는다. 그래도 한 병 남겨 둔 소주와 함께 제법 한국에서 먹는 것 같은 저녁 기분을 낸다.


이렇게 이틀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1월 2일이다. 안숙이 1월 5일에는 앙코르와트로 가야 하니 1월 3일 밤차는 타야 방콕에 돌아갈 수 있어 피피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뿐이다. 아.. 하루만 더 있었으면 이 근처 섬을 다녀오는 보트 투어를 했으면 좋았을 텐테 특히 이 남자 친구 말로는 피피도 좋지만 그 근처 섬에서 하는 스노쿨링이 환상이라는데.. 여행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 마지막에는 날짜가 아쉬워지는 모양이다. 치앙라이에서의 하루가 새삼 아쉬워진다. 끄라비에서 만난 남학생과는 방콕가는 버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피피에서 보낼 마지막 밤을 기대하면서 아침 일찍 피피로 가는 보트에 몸을 싣는다.


피피에 도착하니 성수기중에서도 최성수기답게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선착장에서 숙소를 예약해서 이동하는 모양인데 좀 비싼 숙소에 묵자고 미리 생각했음에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사진만 봐서는 숙소의 상태를 알 수가 없어 그냥 한 바퀴 돌면서 직접 숙소를 고르기로 한다. 배낭을 짊어지고 해변을 따라 걸어도 해변에 면해 있는 방갈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친 김에 좀더 걸어보자 해도 그럴 듯한 숙소는 나오질 않는다. 가이드북의 지도를 보며 한시간쯤 걸으니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결국 원하는 모양의 숙소는 눈에 띄질 않는다. 방갈로를 찾으려면 조금 떨어져 있는 해변으로 가야 하나 보다 하고 배를 알아보니 가격이 터무니없다. 별 수 없이 다시 걷다보니 어라.. 처음에 내렸던 선착장이 다시 나온다. 어이가 없다. 결국 한 바퀴를 돈 셈이다. 다시 선착장에 있는 여행사에 들어간다. 피피섬에서도 제법 안쪽에 있는 롱비치의 숙소를 알아본다. 해변에 면한 방갈로는 전부 풀이고 언덕에 있는 방갈로는 에어콘방만 있단다. 예약을 할 경우 무료로 실어다 준다고 한다. 다른 대안에 없어 1500밧이라는 거금을 주고 언덕에 있는 방갈로를 예약한다.


여행사에서 태워다주는 보트를 타고 도착한 롱비치는 파란 바다빛과 하얀 백사장이 인상적인 해변이다. 방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새 오후다. 아 무슨 시간은 이리도 빨리 흐르는 건지.. 게다가 날씨가 그리 맑지는 않다. 잠깐이지만 슬쩍 비까지 내린다. 그래도 애써 빌려 온 수영복을 안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흐린대로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나가본다. 물에 들어가니 바닥까지 보일만큼 물이 맑은 것은 물론 해변에서 일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는데 고기들이 노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두달 배운 수영실력으로 수영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 물장구만 치다가 그냥 백사장에서 누워 논다. 오히려 쨍한 날씨보다 그리 많이 타지 않을 것 같아 더 나은 것도 같다. 결국 사람들이 다 돌아갈 때 까지 백사장에서 누워 놀다가 들어온다. 아. 피피까지 와서 하루 밤밖에 못 자다니.. 아쉽다. 하지만 내일 배가 두시니 아침나절에 다시 한 번 해변에 나와 아쉬움을 달래기로 한다.


다음날도 날이 그리 맑질 않다. 그래도 아침을 먹자마자 다시 해변에 나가 한동안 놀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짐을 싼다. 첨에는 나가는 보트까지 무료라더니 막상 나갈 때가 되니 나가는 보트는 돈주고 타야 한다기에 그냥 배시간까지 롱비치에 머물기로 한다. 배낭을 모래사장 한 곳에 던져두고 수건 하나 깔고 앉아 있으니 그제서야 해가 난다. 여튼 날씨도 협조를 안 해준다. 우째 수영복 입고 있을 때는 얼굴도 안 뵈주더니 옷 다입고 앉아 있으니 해가 난단 말이더냐. 그래도 해는 보고 떠나네 하며 위안을 삼는다. 여튼 카메라는 아무래도 우리의 수영복 사진을 거부하기 위해 고장난 것처럼 보이니 정 궁금한 사람은 안숙의 비디오카메라에 찍힌 테잎을 재주껏 입수하도록.. 그 테이프는 이미 내손을 떠났으므로 더 이상 나에게 사진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마시기를^^


결국 아쉬움을 뒤로 하고 피피를 나와 다시 방콕으로 돌아온다. 20여일을 같이 다녔는데도 헤어지는 시간은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언제까지 같이 다닐 수도 없는 일.. 결국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안숙은 끄라비에서 만난 남학생과 방콕에서 만난 여자 둘과 함께 앙코르와트로 떠난다. 나도 내일이면 미얀마로 간다.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더 나았을까 안숙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냥 견뎌 봐야지.. 안숙이 나머지 여행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멍하니 있다 주섬주섬 미얀마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래도 너무 맨숭맨숭한 것 같아서.. 치앙마이 트레킹 중 폭포에서.. 안숙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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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라이> 호의도 짐이 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한 치앙라이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는 방이 없다. 것도 한국인들로 다 찬 게 아니라 무슨 자격시험인가를 보러 온 태국 학생들도 만원이다, 주인아주머니의 배려로 안채의 손님방에 짐을 풀고 나니 벌써 저녁 무렵이다. 트레킹을 알아보니 뭐 일반 트레킹도 가능하긴 하지만 주인아저씨 차로 다니는 게 더 나은데 이 분이 방콕에 가셨다가 내일 저녁에나 오신단다. 어차피 트레킹은 모레나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내일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치앙라이 나이트 바자를 한 바퀴 돈다. 치앙마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아기자기하니 볼 만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븐데 하면서 화덕에다 구워 주는 피자와 스파게티까지 먹고 동네 교회에서 공짜 음식까지 먹고 들어오니 제법 북적일거라 생각했던 게스트하우스 앞마당엔 아무도 없다.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그간의 주독이나 풀자 하며 일찍 잠이 든다. 특별한 날에는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건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만은 아닌가 보다^^.


피자와 스파케티 먹기 전에 나온 크리스마스 프레젠트, 버섯위에 크림 소스같은 걸 올렸는데 너무 예뻐 먹기가 아까웠다.



피자와 스파게티, 우리의 크리스마스 만찬이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태국에서는 사진이 없다. 이미 밝혔듯이 카메라는 장렬히 전사했으니 미얀마편까지는 그냥 사진없이 보셔야 할 듯 하다.


다음날 돌아온다던 주인아저씨는 무슨 사정으로 하루가 늦어지고 나는 그저 책이나 읽으며, 안숙은 치앙라이 시내나 돌아보며 하루를 보낸다. 그날 저녁엔 술자리를 기다리다 지친 우리가 그냥 판을 벌인다.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겨울에만 시간이 나 여행을 다닌다는 아저씨와 혼자 여행 온 스케쥴 빡빡한 삼십대 아가씨가 함께 한다. 대체 겨울에만 시간이 나는 직업이 뭘까 궁금했는데 이 아저씨 알고 보니 귀농하신 분이란다^^. 그래 농부는 겨울에는 쉬지, 이른바 농.한.기. 생긴 건 꼭 일본 작가처럼 생긴 이 아저씨는 이후 사흘 동안 우리와 동고동락을 같이 하게 되는데 그나마 이 아저씨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님 그 많은 술자리들을 어찌 견뎠나 싶다^^ 여튼 그날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 온천을 다녀왔다는 아저씨말로는 매쌀롱이 온천에서 멀지 않다고 해서 오토바이만 탈 줄 안다면 오토바이로 가면 좋겠다.. 오토바이 탈 줄 알면 여행이 정말 편할 텐데.. 했더니 이 아저씨 오토바이 가르쳐 줄 테니 나는 배워서 타고 안숙은 아저씨 뒤에 타고 내일 매쌀롱에 가잖다. 뭐 술김에 그러자고 한다.


담날 나가보니 이 아저씨 자기가 어제 빌린 오토바이로 연습을 해 보자며 이것저것 가르쳐준다. 술김에 큰 소리는 쳤는데 막상 타려고 하니 무.섭.다. 그래도 안 탄다 소리는 못하고 한 번 올라타 본다. 의외로 중심잡는 건 어렵지 않은데 손잡이를 조금만 돌려도 가속이 붙으니 영 불안하다. 그나마 차 안다니는 골목길만 한 바퀴 돌고 내린다. 이 아저씨 그새 상황을 파악한 듯 오토바이 타고 가기는 어렵겠다 하는 표정이다. 그때 때맞춰 비도 내려주셔 그냥 버스를 타고 움직이기로 한다. 막 버스를 타러 나가려는데 소리도 요란하게 이 집 사장님이 돌아오신다. 이 집 사장님과 이 아저씨의 동생은 얼마 전에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 몇날 며칠을 술로 지새다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는데 이 아저씨를 무슨 친형님이나 되는 듯이 정선생님이라며 깍듯이 모신다. 덕분에 어영부영 우리도 정선생님 일행쯤으로 격상(?)한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매쌀롱을 다녀오려 한다니까 느닷없이 같이 가자고 나선다. 본인의 차는 무슨 일로 경찰서에 있다면서 차까지 렌트해 오는데 그 일처리가 워낙 시끄러우면서도 순식간에 이루어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매쌀롱으로 가는 차안에 있다. 으.. 이게 투언지. 투어면 얼마인지.. 뭐 그런 건 물어볼 틈도 없다.


가는 길에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소수 민족 마을 한 곳을 들렀다가 매쌀롱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무렵이다. 매쌀롱은 장개석의 국민군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태국 국경을 넘어 정착한 곳으로 마을에 국민군의 기념관까지 있는 전형적인 중국인 마을이다. 사장님 말로는 대만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곳으로 본토 중국인들은 관광도 오지 않는 곳이라 한다. 그곳에서 국수맛이 기가 막히다는 중국집을 찾아갔으나 이미 영업이 끝났고 아침에 내린 비 탓인지 안개가 심하게 끼어 경치도 구경하긴 어려웠지만 간만에 편안한 차를 타고 안개 속을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그만이다. 차안에서도 사장님은 계속 자신이 지원하는 소수민족 마을 이야기, 치앙라이를 통해 내려오는 탈북자들과 그 탈북자들을 자신들의 돈벌이와 명예욕에 이용하는 기독교 엔지오 단체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마침 안숙이 탈북자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으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니까 당장 치앙라이로 와서 작업을 하라며 성화다, 모든 소스는 다 본인에게 있으니 와서 찍기만 하면 대박이라고 그냥 오기만 하면 된다는데 안숙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교묘하게 이리저리 피하느라 난감해한다. 여튼 안숙은 미스리도 됐다가 이동생-성이 이씨라^^-도 됐다가 하면서 사장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덕분에 정선생님과 나는 편안하게 경치나 구경하면서 돌아온다.


미해병대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 외에도 말도 많고, 정도 많고, 술도 좋아하는 이 사장님에게-어느 정도로 술을 좋아하냐 하면 아주머니가 게스트하우스에서 파는 술까지 모조리 다 치워버렸을 정도로 많이 드신단다- 소수민족 마을지원과 탈북자 문제 이외에도 또 한가지 관심사가 있었으니 커피가 그것이다. 한때 마약 재배의 온상이었다는 이곳에 정부와 유엔의 규제로 대체 작물을 심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커피였다고 한다. 그 중 도이창-도이는 산이고 창은 코끼리이므로 대충 코끼리산이라는 곳이다-이라는 곳에서 몇몇 커피 농가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협동조합 같은 만들어 공동 생산과 판매를 하는 것은 물론 커피전문체인점까지 내 그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이 사장님이 아마 그 도이창 커피조합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 듯 하다. 사실 본인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리 추리해도 그 역할이 무엇인지 정리해 낼 수 없었다^^. 여튼 매쌀롱에서 돌아와 거한 저녁과 함께 시작된 술자리는 일이차에 걸쳐 양주를 마시고 삼차로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맥주를 마신 뒤에야 끝이 난다. 뭐 우린 별 말도 못하고 그저 네네 아니, 뭐..를 연발하고 뭐 정선생님이라고 별 수 있나.. 아.. 네네 하다가 내일은 커피 농장에 가자는 말에 얼떨결에 그러죠.. 한다.


다음날 잠도 술도 채 깨기 전에 미스 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채 샤워도 못하고 주섬주섬 나가보니 커피 농장을 올라가잖다. 그러더니 차에 타자 다시 일정이 바뀐다. 탈북자들을 한 번 만나보겠냐며 탈북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빵이라도 넣어주고 가자고 하신다. 뭐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마트에 들러 빵과 물을 사서 간다. 그냥 이 돈만은 우리가 내겠다고 우겨 빵값을 내고 따라가 보니 태국 이민국이다. 말이 이민국이지 그냥 경찰서 유치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래도 태국땅에서 잡혔으니 이곳에 얼마간 수용되어 있다가 한국으로 보내지는 모양인데 꽤 연세가 많은 할머니부터 귀를 다친 어린 아이까지 그 연령이며 상태도 다양하다. 그래도 한민족인데 목숨을 걸고 빠져나와 결국 이국땅에 수용되어 있는 걸 보니 맘이 편칠 않다. 한국으로 빨리 갈 수 있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데 여기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커넥션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결국 사장님은 이 사람들이 조사받는데 통역까지 해 주시게 되어 그날 커피농장에 올라가는 일정은 무산되고 그냥 미얀마 국경지대인 치앙센과 골든트라이앵글을 돌아보는 것으로 하루가 지난다.


저녁엔 또 술자리가 이어진다. 뭐 내가 아무리 과음을 외쳤기로서니 사흘 연속 음주 게다가 과음은 쉬운 일이 아닌데다 술자리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으니-사실 매번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과의 술자리는 한 번으로 족한 법이다- 오늘은 좀 피하고 싶은데 이미 이런저런 신세를 진 다음이니 어쩔 수 없는 분위기다. 이 날 저녁쯤 되니 슬슬 황당해지기 시작한다. 도무지 일정도, 몸상태도 말이 아닌데다가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건지, 이게 돈을 내는 건지 아닌지, 아니라면 이  호의의 정체는 무엇인지, 일정은 점점 늘어지는데 앞날을 알 수 없으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 된다. 게다가 사모님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나신 것도 같고 대략 난감한 상황이다. 결국 정선생님에게 총대를 메게 하고 우리는 술자리를 빠져나온다. 뭔가 개운치 않다. 같이 다니던 정선생님도 그리 개운치는 않은 표정이다. 나중에 슬쩍 이런 기분에 대해 비췄더니 했더니 정선생님도 그렇단다.


글쎄..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도 답을 모르겠다. 상대방의 격의 없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방법 아니 좀 일방적인 호의 표시에 대처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건데 사실 여행에는 절대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뭐 어디 여행뿐이겠는가 인생도 대체로 그렇긴 하다- 나로서는 그 분이 생면부지의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이 분명히 호의였음에도 내내 뭔가 확실한 것 없이 진행되는 상황이 불편함을 넘어 짜증스러움까지 이어지는데 참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더라는 거다. 그렇다고 확실한 의사 표시를 하기에는 얼마간의 미안함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버렸는데 사실 나의 그 어정쩡한 상태가 더 싫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것도 좀 맘에 걸린다. 여튼 그 정도의 호의를 아무에게나 보일 수 있는 사람도 흔한 종류의 사람은 아닐진대 만약 이글을 읽게 되면-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 면에서는 진보넷에 블로그를 개설한 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던 듯 싶다^^- 자신의 맘도 몰라주는 싸가지 없는 인간에 대해 아마 맘이 몹시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되겠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기중심적인 호의가 주는 불편함에 대해 그 분도 조금은 아셨으면 하는 맘도 한편으론 든다.


그래도 커피 농장까진 들렀다 가자고 안숙과 합의를 보고 담날 다시 차에 실려 도이창에 있다는 커피 농장에 간다. 커피 농장 가는 길은 우기에는 거의 길이 끊기다시피 한다는 굽이굽이 비포장 산길인데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올라간 곳은 커피나무가 산을 덮고 있다. 이곳에서 열매 따는 것에서부터 말리고 가공하는 공정까지 모두 이루어지는데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이곳에서 뽑아주는 커피 맛은 거의 예술에 가까운데 커피가 가지고 있다는 다섯가지 맛이 절묘하게 섞여 혀끝에서 감돈다. 이곳에서 점심까지 거하게 얻어먹고 내려온다. 내려와서 슬쩍 빠져 정선생민과 셋이서 술자리를 가진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비용 애기가 나온다. 괜히 투어비 운운하면 오히려 화를 낼 것 같아 그냥 적당한 비용을 두고 오기로 한다. 게스트하우스의 매니저 격인 조카를 불러서 적당히 돈을 주고 아침에 일찍 사장님 내외가 자는 사이에 그냥 나온다. 이게 잘하는 건지 어쩐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그러는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막상 나오고 나니 그래도 그 덕분에 그냥 투어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한 소중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든다. 중국으로 배타고 떠나신다는 정선생님과의 인사를 뒤로 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아무래도 치앙라이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 인지 그냥 냅다 남부로 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낮차는 힘들 것 같아 다시 치앙마이로 가서 밤차를 탄다. 방콕에 아침에 도착하면 다시 그날 밤차를 타고 끄라비로 내려가는 일정이다. 윽 음주에 몸을 피곤할 대로 피곤한데 이틀 연속 밤차를 타야 하다니.. 체력이 받쳐줄지 모르겠다. 며칠만 있으면 나도 마흔이란 말이닷!! -사실 마흔이 되면 떨어지는 체력대신 그만큼의 배려와 참을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지만 나도 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건 그저 생기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리 많이 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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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트레킹을 하다

 

사실 한달 만에 여행기를 쓰자니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게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혼자 다닌 여행기라면 살짝 지어서 쓴들 누가 눈치채랴마는 이건 증인이 엄연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게다가 그 증인이 어리버리한 인간도 아니니 대략 난감이다. 그냥 넘어가나, 사진으로 대충 때우나 별 생각을 다 해봤으나 그냥 넘어가면 더 이상 여행기를 안 올리고 싶어질 것 같고, 사진으로 때우자니 그나마 카메라가 치앙라이 어느 지점에선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장렬히 전사했으니 그도 불가능해 막연히 일산주민이 찍은 동영상이나 편집해 올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돈안받고 찍은 비디오는 남의 결혼식 비디오도 둘째아이 돌날에나 갖다 주는 우리네 상태를 생각해 보건데 부지하세월일 것이 분명한 고로 그냥 기억나는 대로 써 보기로 한다. 뭐 안 읽어도 그만이다^^


치앙마이로 가는 여행사의 밤버스는 가격이 싼 대신 여행자들로 초만원이다. 이제 시즌이 시작된 건지 한국인들도 제법 눈에 뛴다. 태국의 버스는 대략 이층버스를 가장한 일층버스인 경우가 많은데 -좌석 높이는 이층인데 일층에는 사람이 거의 타지 못한다- 이 이층버스는 일층에 제법 응접실 같은 공간이 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한국남녀 둘이 냉큼 올라타서는 여기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괜찮다고 했는지 일층에 널찍하니 자리를 잡고 앉는다. 뭐 그 자리도 좋아 보여 우리도 슬쩍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또다른 한국청년 하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서 열명은 족히 앉아갈 공간을 차지하고 떠날 때까지는 좋았는데.. 이 버스 한 시간 가량을 달리다가 아유타야에서 다시 열 명 가까운 사람을 태운다. 행복도 잠시 초만원이 된 일층에서 발도 못 뻗고 밤새워 가야하는 신세가 된다. 더구나 악명 높은 에어컨 버스는 아무리 추운 날에도 절대 에어컨을 끄지 않는 전통을 자랑하지 않는가 말이다. 더구나 창가에 앉은 안숙은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까지 온전히 맞으며 태국에서의 신고식을 치르게 되는데 지금도 가끔 그 버스에 치를 떠는 안숙의 모습이 떠오른다^^


치앙마이에서의 안숙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당일 트레킹에 오르는 최강 체력 이십대 초반 둘과 삼십대 초반 하나를 남겨두고 삼십대 중후반의 숙소잡기에 나선다. 아.. 이 얼마나 좋으냐 말이다. 둘이서 구하니 돈은 덜 들지, 방은 더 좋지 역시 여행에는 일행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방을 잡아두고 트레킹 예약을 위해 치앙마이에서 가장 친절하다는 한국인 업소인 미소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나선다. 뭐 길에 널려 있는 게 여행사긴 하지만 트레킹을 위해선 짐도 맡겨야 하고 뭐 트레킹 멤버 중 한국 사람이라도 하나 더 있으면 좋고 기타 등등한 이유로 그냥 한국인 숙소에서 트레킹을 신청하기로 한 터다. 조금 헤매긴 했지만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치고는 심하게 친절한 미소네에서 트레킹을 신청하고 내친 김에 트레킹을 다녀와서는 숙소를 아예 이곳으로 옮기기로 한다.


치앙마이 구시가를 둘러보고 나이트바자도 구경하고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슨 호텔에서 무려 세금포함 삼백밧이나 하는-뭐 대략 칠팔천원 돈이지만- 샤브샤브 부페까지 먹고 돌아오니 벌써 하루가 지나 있다. 담날 트레킹은 출발 시간이 그리 빠르지 않아 여유있게 짐을 싸 픽업 장소인 미소네로 이동한다. 작은 배낭도 하나 빌려 옷이며 물 등을 싸고 나니 출발 시간이다. 막상 픽업트럭에 올라보니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에서 신청한 보람도 없이 우리 둘을 제외하곤 전부 서양애들이다. 더구나 다국적군도 아닌 게 영국앤가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호주 애들이다. 게다가 나이 거의 이십대 초반이라 뭐 애초부터 어울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뭐 사실 크게 어울리고 싶은 생각도, 어울릴만한 영어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트레킹 코스는 시장을 보는 일부터 시작해 점심을 먹고 오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처음에 완만한 등산로를 오르다가 약간의 계곡을 건너는 등 뭐 이정도면 할 만하다 싶은 길이 두어 시간 이어지더니 마지막 30분가량을 밑도 끝도 없는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헉헉거리며 따라가다 결국 더는 못가겠다고 잠시 뒤로 빠진다. 가이드가 2분만 더 가면 된다는 게 그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줄 뒤에 낙오되어 헉헉거리고 있는데 그래도 일행이라고 안숙이 옆에서 기다려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일이분거리에 정상이 보이고 사람들이 거기 모여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휴 이분만 참았으면 스타일 안 구기는 건데^^ 여튼 어찌어찌해 라후족 마을에까지 도착한 시간이 다섯시 경인데 땀이 채 마르지 않은 탓인지 갑자기 추워가 느껴진다. 아무리 태국이라도 지금은 겨울철이고, 치앙마이는 북부인데다, 게다가 여기는 산 속인 것이다, 우리가 하루밤을 묵어야 하는 집 역시 대나무로 얼기설기 얽은 집이라 대체 바람이 막아질 것 같지 않다.


트레킹 숙소


라후족 마을 전경


마을 한 바퀴 돌고 가이드가 해 주는 저녁을 먹고 마을 아이들의 재롱 잔치까지 봐도 시간은 고작 여덟시다.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이어지는 가이드의 영어로 하는 말장난까지 들어줘도 시간은 아홉시나 됐을까 날은 더 추워지고 하늘은 흐려 그 예쁘다는 별도 보이지 않고, 호주애들은 술도 안마시고 노래도 안 부르더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분위기다. 우리도 안숙이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 한 병을 쵸콜렛을 안주삼아 나눠 마시곤 잠자리에 든다. 옷이란 옷은 다 껴입고 침낭에 담요까지 서너개를 덮어도 별다른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럭저럭 잠자리에 들긴 했는데 바깥에서 들리는 바람소리가 무슨 전설의 고향이라도 찍는 것 같다. 이럭저럭 아침이 오고 그래도 얼어 죽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에 아침에 주는 따뜻한 커피며 차를 좋아라 마시고 다시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수월해 올라가는 중간에 폭포에서 잠시 놀다 내려와도 올라가는 시간보다는 덜 걸린다.


 

코끼리를 탄 안숙과 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안숙 심히 무서워하더군^^

코끼리 코,, 저건 바나나를 달라는 신호다. 안 주면 콧물 같은 것을 쏜다^^


산을 다 내려와서 코끼리타기며 래프팅, 뗏목 타기 등의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지는데 죄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제법 흥미를 끈다. 특히 레프팅은 말 그대로 온 몸이 다 젖는다는 가이드의 말에 어릴 적 운동회에서나 입을 법한 조악한 색깔의 나일론 반바지를 하나씩 사입고 시작한다. 물살이 그리 세지 않아 크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제대로 된 래프팅을 해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스릴이 느껴진다. 래프팅을 마치고 돌아온 날 미소네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동네 천막집으로 새우 부페를 먹으러 간다. 민물 새우긴 하지만 새우를 비롯해 각종 고기와 야채 뷔페가 199밧, 우리돈으로 삼천원 남짓이다. 구워먹어도 되고 수끼로 먹어도 되는데 우린 물론 양쪽을 다해 먹었다^^ 이젠 수끼는 지겨워.. 뭐 새우는 바다 새우라야 되는데 맛이 좀 떨어지지.. 등의 배부른 소리를 해가며 돌아온다. 여튼 안숙 오고 나서부턴 진짜 잘 먹는다.


치앙마이에서의 마지막날은 혼자서는 다니기 쉽지 않은 치앙마이 근교를 숙소에서 소개해 준 한국인 몇명과 차를 대절해 다녀온다. 한쌍의 부부와 한쌍의 남매 그리고 우리가 그 일행이다. 부부는 나이차가 좀 나보여 불륜으로 오해받기 쉬워 보이는 그러나 결혼한 지 10년이나 됐다는 커플이고 남매는 대학교 일학년 누나가 중3짜리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데 그 누나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커플이다. 치앙마이 추위를 우습게 보고 반바지 차림으로 나온 우리는 결국 숙소에서 사원에서 입으라고 챙겨준 긴바지를 내내 입고 다니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그게 방콕편 사진에서 보신 차림새 되시겠다. 저녁에는 미소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달째 머물고 있는, 동남아만 8개월째 돌아다닌다는 해병대 출신의 박병장과 술자리를 같이 한다. 어제 우리가 맥주를 일인당 세캔씩이나 먹는 걸 보고 재들 정도라면 술먹을 하다고 생각했다나 어쨌다나 하는 인간이다. 그 친구 내숭 안 떠는 화끈한 언니들이라며 간만에 술친구 만난 분위기인데  뭐 상태가 썩 훌륭해보이지는 않지만 그런들 뭐 어떻겠는가, 뭐 같이 살 것도 아니고^^ 덕분에 두어시간 유쾌하게 보낸다. 이차 가자는 걸 뿌리치고 일어서는데 꽤나 서운해 하는 눈치다. 


대학생 누나와 중학생 동생 커플, 몽족의 전통 의상을 입었는데 좀 하얀 것만 제외하면 그냥 현지애들 같다.


일단 크리스마스 이브는 치앙라이에서 보내자는 생각으로 다음날 치앙라이로 이동하기로 한다. 치앙라이는 이전에 한나절 정도 있어 본 곳이긴 하지만 이번엔 그 주위에 있는 매쌀롱이나 치앙센, 골든트라이앵글까지 돌아볼 생각이니 새로운 곳에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일단 크리스마스에는 왕창 술을,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휴식 그리고 크리스마스 다음날은 치앙라이 주변투어 그리고 그 다음날 방콕을 거쳐 남부로 내려가자는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치앙라이 입성했으나 뭐 인생이 아니 여행이 언제 그리 만만하던가.. 그냥 치앙라이에서 발목이 잡혀 날마다 과음에 시달려가며 무려 5일이나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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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일산주민과 만나다

라오스 국경을 넘어 태국쪽 국경도시인 총멕에서 방콕행 버스를 타니 12시간을 꼬박 달려 다음날 새벽에야 북부터미널에 내려준다. 같이 국경을 넘은 일본인 커플과 택시를 같이 타고 카오산에 도착하니 6시가 조금 넘어 있다. 이 시간에도 체크인이 가능할까 하면서도 일단 위치도 좋고 좀 깨끗한 게스트하우스들부터 하나씩 들어가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좀 그럴듯한 게스트하우스들은 죄다 방이 풀이란다. 카오산 로드는 벌써 성수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예닐곱 군데를 돌아도 빈 방은 단 하나가 없다. 그나마 좀 친절한 곳은 체크아웃이 12시이니 11시쯤 다시 와 보라는 말이 고작이다. 먼저 아침을 먹고 숙소에 붙은 카페에서 방이 나기를 마냥 기다린다. 10시가 지나 11시가 되어도 원하는 방은 나오질 않는다. 결국 12시가 훌쩍 넘어서야 트윈룸이 하나 나온다. 방은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체크인을 하고 나니 방이 좀 작은 듯도 하다. 하지만 그나마 방을 잡은 것만 해도 어디냐 싶다.


한잠을 자고 일어나 가방을 찾고 빨래도 맡기고 인터넷에 여행기까지 올리고 나도 아직 일산주민이 오기까지는 서너 시간이나 남아있다. 술을 마시기도 뭣해 그저 방에서 음악이나 듣다가 조금 빨리 약속장소로 나가본다. 밤1시가 넘은 카오산 거리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낮에 의자가 놓여 있던 길거리에 어느새 비닐 장판 비스름한 것이 깔리고 그 위에 족히 백명은 넘어 보이는 서양애들이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구 인간들아 늬들 상태도 과히 좋지는 않아 보인다 하면서도 대체적으로 과거에 우리가 술마시던 모습이 겹쳐져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일산주민은 예상과는 달리 혼자 우아하게 택시를 타고 등장한다. 뭐 아무리 찾아도 신혼여행 온 부부만 백여 쌍 봤을 뿐 배낭여행자는 없어서 그냥 혼자 타고 왔다는데 막상 만나니 뭐 어제보고 다시 본 듯 그만그만하다.


첫날 좀 늦기는 했어도 그냥 넘길 수 없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와 마신다. 뭐 익숙한 이름들이 오가는 방에 같이 있으니 일산주민 왈, 여기가 방콕인지 가라뫼인지 구별이 안 간단다. 하긴 방분위기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딱 가라뫼다 해가며 낄낄거리다 잠이 든다. 담날은 뭐 당연하게도 늦게 일어난다. 오후가 시작될 무렵 왕궁 근처와 사원 두 개을 들렀다 보트를 타고 다시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이다. 담날은 버스를 타고 방콕 시내를 다녀온다. 여기도 시내에는 크리스마스트리도 있고 산타클로스도 보이긴 하는데 날씨 탓인지 영 연말분위기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방콕이라는 도시가 딱히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내키는 대로 다니다 뭐 먹을까 고민이나 하고, 심심하면 타이 맛사지도 받았다가, 얼굴마사지도 받았다가, 내친 김에 머리도 자르고 나니 어느새 이틀이 지나있다.


방콕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어 일단 북부 쪽으로 먼저 갔다가 남부 쪽 해변으로 가기로 루트를 정하고 치앙마이로 가는 밤차를 예약해 둔다. 대략 치앙마이-치앙라이-아유타야-끄라비-피피-방콕의 일정이 될 듯한데 크리스마스는 북부에서, 새해는 남부에서 보내게 되는 일정이다. 일산주민이 돌아가는 날은 1월 9일이지만 그전에 앙코르와트를 들렀다 돌아갈 예정이니 1월 5일 경에는 헤어져야 할 것 같아 1월 6일자로 미얀마 비행기표도 같이 조정해 둔다. 사실 일산주민이 오지 않았다면 치앙마이 정도는 몰라도 남부 쪽으론 얼씬도 안했을 텐데 태국을 두루두루 볼 수 있게 된 것도 고마운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뭐 가장 고마운 것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연말을 같이 보낼 술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기억나나.. 태국여행에서 같이 먹었던 푸퐛퐁 커리와 홍합탕. 그 집에 한글간판과 한글 메뉴도 생겼다는 사실을 함께 전한다.


방콕에서 찍은 사진이 없이 치앙마이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린다. 뭐 한 일주일만에 상태 나빠진 일산주민의 모습을 보라..


사실 방콕 여행기는 일산주민이 쓰기로 했는데 계속 게으름을 부리는 통에 먼저 써버렸으니 이어지는 치앙마이 여행기를 안숙이 쓰라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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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판돈> 시간이 멈추다

씨판은 4천, 돈은 섬이란 뜻으로 씨판돈은 라오스말로 4천개의 섬이란 뜻이다. 메콩강이 라오스 남부로 오면서 강 하류가 넓어지면서 여러 개의 섬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그 수가 사천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롱베이처럼 그 섬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건 아니고 그냥 섬의 개수가 4천개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냥 봐서는 그저 육지인지 섬인지도 구별이 되지는 않는다. 여튼 강이 만들어낸 지형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외부의 영향을 벗어나 살고 있는 이곳은 지금도 강을 따라 시간과는 상관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4천개의 섬 중에 여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섬은 단 3개인데 그중 큰 섬이 돈콩이라는 섬이다. 돈콩으로 가기 위해 짬빠삭에서 빡세로 나가는 길을 되짚어 오다가 갈림길에서 버스를 내린다. 빡세는 북쪽이고 돈콩은 남쪽이니 갈림길 어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트럭버스를 기다린다. 뭐 몇 시에 오는지도 모르니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 30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버스 한대가 서곤 돈콩 타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저 배낭만 들고 있으면 말 안해도 어디 가는지 다 써있는 모양이다^^. 잽싸게 버스에 올라타니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라오스 사람들은 눈만 마주치면 싸바이디하고 인사를 하는데 서양애들의 으례적인 핼로우와는 달리 제법 순박한 미소까지 전해진다. 사실 어느 나라를 가거나 그 나라 인사 정도는 외워가기 마련인데 거의 쓸 일이 없는 경우가 많은 데 라오스에서 만큼은 싸바이디란 인사가 입에 붙어 다닌다.


버스는 돈콩 건너 강변에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여행자를 내려주고 간다.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걸을 필요도 없이 선착장 근처에 게스트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 라오스 남부를 일컬어 시간이 멈춘 곳이라더니 여기도 여행자만 몇 명 눈에 뛸 뿐 심하게 조용한 동네다. 짐을 풀고 강변을 따라 조금 걷고 나니 벌써 할 일이 없다. 게다가 이곳엔 정말 인.터.넷.도 없다. 다행이라면 나머지 두개의 섬에는 안들어 온다는 전기가 있다는 정도일까.. 저녁을 먹고 앉아 있는데 으악.. 짬빠삭에서 만났던 스페인 처자 엘사가 아는 척을 한다. 투어를 신청했냐고는 묻더니 5명 이상이 되어야 투어가 가능하니 같이 보트 투어를 하잖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냐고 했더니 잉글리쉬 커플과 저먼 커플이란다. 죄다 다시 만나 버린 것이다. 그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고 다시 지난밤의 악몽이 재현된다. 이번에 영국아저씨에게 여행 다니려면 영어공부 열심히 해된다는 충고도 듣는다--:;


돈콩에 있는 두개의 마을 중 여행자들아 머무는 므앙콩


오토바이에 실려 다녀온 반대편 마을 므앙센의 일몰


돈댓과 돈콘이라는 나머지 두개의 섬은 서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폭포와 이제는 흔적도 없고 기차만 덩그러니 서 있는 철로-프랑스 식민지 시절 화물수송을 위해 만들었다는데 여튼 인도차이나 반도는 죄다 프랑스 식민 잔재가 관광자원화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메콩강에 서식한다는 희귀 동물인 이라와디 돌고래 구경 정도가 볼거리인데 엘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관광 후에 그냥 돈댓이라는 섬에 머물기로 해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그것도 배를 타고 더 나가야 볼 수 있다는 돌고래는 포기하고 그냥 보트로 두 섬을 돌아보기로 한다. 담날 선착장에 나가보니 어제의 6명이 투어 인원의 전부이다. 이제 거의 체념이 되는 게 차라리 맘이 편하게 느껴진다^^. 돈콘에서 폭포와 철로를 보고 돌고래를 보러 나갈 때 이용한다는 선착장에 들렀다 돈댓으로 보트를 타고 이동한다, 돈댓에서 내려 일부는 방을 정하고 엘사와 나는 잠시 돈댓을 둘러보고 다시 돈콩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돈콘에 있는 쏨파밋 폭포


선착장, 여기서 배를 타고 나가면 강에 사는 돌고래를 볼 수 있단다.


돈댓은 열대야자수가 가득한 섬으로 강변을 따라 방갈로가 들어서 있는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먹에 누워 강만 바라보는 인간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잠시 내일은 여기나 와 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전부 공동욕실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에 그냥 돈콩에 있기로 한다. 한가함.. 낭만.. 이런 것도 밖에서 볼 때나 좋은 거지 막상 겪어보면 보통 심심한 게 아니란 걸 이제 나도 안다. 게다가 사람들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죽어도 쉬어야 되는 상태가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겐 더욱 괴로운 법이다. 살짝 가볼까 하는 마음을 이성적^^으로 누르고 다시 돈콩으로 돌아온다.


방갈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을 바라보며 해먹에 누워 흔들거린다


돈댓, 십년이 가도 아무 일도 일어날 것 않다

그러고도 아직 비자 만료까지는 이틀이나 시간이 남아 있다. 비자야 만료 전에 나가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지만 얼마 전 확인한 일산주민의 메일엔 암웨이 인간들이 삼천명이나 태국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오기로 한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다고 되어 있었으니 비자 만료날에 나가야 방콕에서 일산주민과 바로 만날 수 있다. 물론 방콕에 가서 하루 이틀 기다려도 되지만 카오산 로드는 너무 번잡하고 혼자 있으면 좀 이상해지는 곳이라 차라리 여기서 날짜를 채우고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여기서 뭐하고 이틀을 보내나 그저 한숨만 나온다.


하루는 여행기나 정리하면서 보낸다. 자전거 타기도 지겨워져 오토바이에 실려 마을의 반대편까지 갔다 와도 시간은 지천으로 남아있다. 설상가상 e-book은 윈집이 기간이 만료되었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열리지도 않는다. 나머지 하루를 더 버티기가 싫어져 그냥 빡세로 떠날까 생각도 해본다. 그나마 빡세에서는 인터넷도 가능하고 라오 커피도 한 번 더 마실 수 있고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냥 빡세로 가야겠다 싶은데 오토바이를 태워준 라오아저씨와 빡세에 같이 가기로 한 약속이 떠올라 그냥 돈콩에 머무르고 만다. 자전거 타기 귀찮아 실려간 오토바이 아저씨가 이것저것 묻더니 모레 자기도 빡세 시장에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해 그러지고 한 것이다. 왜 같이 가자고 했는지야 알 수 없지만 것도 약속은 약속이니 일방적으로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떠나는 날이 온다. 국경을 넘어 밤버스로 하루만 더 가면 일산주 민과 만나는 날이 온다. 마침 그날은 내가 여행을 시작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일산주민과 함께 백일주나 마셔야겠다. 근데 백일주는 디데이 백일 전에 마시는 술인 것 같은데..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언제는 핑계가 없어서 못 마셨나 여튼 일산주민이 과음하게 해 주겠다고 장담했으니 믿어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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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빠삭> 영어가 웬수다

 

짬빠삭은 왓푸라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메콩강변의 조그만 마을이다. 사실 빡세에서 30km쯤 떨어져 있는 곳이라 빡세에서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다녀오면 되는 곳이지만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굳이 다시 돌아오기도 번거로운데다 있는 거라곤 시간뿐이니 그냥 짬빠삭에서 하루이틀 묵어 가기로 한다. 정보에 따르면 9시와 11시에 남부터미널에서 사람이 다 차는대로 트럭버스가 떠난다고 하니 대충 9시 경에 터미널로 나가본다. 뭐 터미널이래야 흙먼지 풀풀 날리는 벌판에 버스 몇 대와 좌판 몇 개 벌여놓은 게 다긴 하지만 그래도 남부로 가는 차들은 죄다 이곳에서 떠난다는 교통의 요지다.


물어물어 찾아간 짬빠삭행 버스는 제법 큰 트럭버스다. 언제 출발하냐고 물었더니 땅바닥에 11이라고 쓴다. 아직 9시도 채 안됐는데 9시 버스는 벌써 떠났는지 흔적도 없고 이 버스는 11시에 떠난다니 그 시간 동안 뭘하나 하며 터미널 주변을 기웃대고 있는데 30분도 채 안 지나나 갑자기 기사가 타라고 손짓을 한다. 나 하나 싣고 떠날 리는 없고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그냥 타고 보니 온 길을 되짚어 시내 근처의 시장 쪽으로 간다. 그러더니 트럭 지붕에서 끝도 없이 짐을 내리고 또 싣는다. 이 버스의 기능은 단지 사람만 수송하는데 있는 건 같지는 않다^^. 그러더니 사람이 하나둘 타기 시작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남부터미널이 출발지라고 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모르겠다. 바닥은 어느새 각종 보따리와 비닐봉지도 가득찬다. 그러더니 정말 11시가 조금 넘어서 출발한다.


빡세의 남부터미널, 물론 북부터미널도 따로 있다^^


대략 사람이 이 정도는 차줘야 차가 떠난다.


한시간이나 달렸을까.. 이번에는 강이 가로막는다. 차를 배에 싣고 내리는데 한시간.. 결국 30km 떨어진 마을까지 오는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마을 입구에서 하염없이 짐을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이번엔 또 언제 가나 하고 있는데 사람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말을 붙인다. 손님 픽업 나온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다. 이름을 들어보니 가이드북에 있는 이름인 건 같아 얼른 내린다. 아저씨의 뚝뚝을 타고 메콩강이 바라보이는 숙소에 짐을 푼다. 방값은 2달러, 비록 더운물은 안 나오지만 그래도 개인 욕실이 달려 있는 방이다. 짬빠삭은 워낙 작은 마을이라 픽업당해 온 1km 남짓한 길이 메인도로이자 마을의 전부이다. 동네 구경이나 나가야지 하고 갔다가 그저 골목의 집들만 실컷 보고 돌아온다.  


선착장, 이곳에서 차를 배에 싣고 강을 건넌다.


산책 나갔다 만난 동네 아이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작은 마을에 오니 사람들도 착해지는지 저녁을 먹으려고 혼자 앉아 있으니 일군의 다국적 인간들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권해 온다. 영국인 부부, 호주 아줌마, 스페인 처녀 그리고 독일 커플이다. 이름도 수에 파멜라에 그레이엄에 엘사까지 뭐 영화에나 나옴직함 이름들이다. 그나마 처음에 여행 영어를 할 때는 이래저래 묻기도 하고 대답도 되더니 점점 일상 대화로 흐르니 말도 무지무지 빨라지고 대략 내용의 30% 정도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것도 내가 이런 내용일거야 짐작한거지 사실인지 아닌지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저녁 먹는 두세 시간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다가 새삼 영어 공부 안하고 뭐 했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후회는 후회고 현실은 현실인터 내일 저녁 먹을 때는 저 사람들을 꼭 피해서 먹어야지 다짐해 본다^^.

 

다음날은 자전거를 타고 왓푸에 다녀온다. 앙코르와트를 만든 크메르인들이 만들었다는 이 사원은 앙코르와트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탑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산을 따라 지형을 높이하면서 만든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곳이다. 짬빠삭에서 왓푸까지는 8km 떨어져 있는데 자전거로 1시간쯤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사이로 벼베기가 끝난 논들이 펼쳐져 있고 중간 중간에 그림 같은 마을들을 지나친다. 다행히 구름이 약간 끼어 있어 햇살도 그리 뜨겁지 않다. 왓푸도 여느 유적들이 그렇듯 원래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무너져 있다. 그나마 앙코르와트는 세계 각국의 도움이라도 있어 계속적인 수리를 하고 있지만 여기는 그냥 더 이상 안 무너지게 대충 갈무리만 해 놓은 듯 여기저기 잔해들이 굴러다닌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중앙 성소에 이르니 힌두석실 안에 금박을 입은 부처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국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뀌면서 생긴 현상이라는데 그러보니 앙코르와트에도 여기저기 불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앙코르와트의 불상은 그렇지 않더니만 이건 금박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이물감이 느껴진다.


왓 푸, 얘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다


중앙 성소로 오르는 길


중앙 성소에서 바라본 왓 푸


왓푸는 왓푸 자체보다 중앙 성소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근사하다. 가깝게는 욋푸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멀리는 메콩강도 보이고 넓은 라오스의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몇백년 크메르인 누군가가 깍았을 돌 위에 한참을 앉아 있는다. 앙코르와트처럼 관광객이 떼로 몰려 다니는 곳이 아니라 조용하게 앉아 쉬기에는 그만이다. 내려오는 길에 그저 구색이나 맞추려고 지은 듯한 박물관에 잠시 들렀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다. 어둡기 전에 돌아오려고 조금 서두른다. 도로는 평평한데 군데군데 길이 패여 어두워지면 자전거를 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어제 본 일군의 인간들은 모두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ㅎㅎ 다행이다. 주인아저씨에게 다음 행선지인 돈콩 가는 길을 물어보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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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세> 다시 길을 떠나다

빡세로 가는 여행자 버스가 풀이라 로컬버스를 탄다. 예약을 미리 해두긴 했지만 픽업을 하러 오는 게 아니라 남부터미널까지 직접 나가야 한단다. 시내에서 거의 10킬로 떨어진 곳까지 닛이 오토바이를 태워준다. 기름값이나 하라고 얼마간 쥐어주긴 했지만 언니 언니하며 데려다준 그 마음이 고맙다. 다시 라오스에 올거라고 그때 다시 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닛은 영어가 안되고 나도 라오스말이 안되니 그저 꼭 껴안았다 놓는 걸로 말을 대신한다. 닛을 보내고 버스를 탄다. 빡세로 가는 밤버스는 로컬버스긴 해도 V.I.P버스라 그런지 시설도 좋고 도시락이랑 물도 준다. 이전 밤버스의 경험으로 긴팔을 입고 차에 있는 담요까지 뒤집어 썼는데도 추워서 잠이 오질 않는다. 아무리 에어컨 버스라도 그렇지 날씨가 이리 쌀쌀한데 에어콘을 끝까지 틀어대는 이유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자다깨다 바라본 창밖에는 쏟아질 듯 별들이 반짝인다. 내 생전 저렇게 많은 별들을 본 적이 있을까. 별들은 밤새도록 버스를 따라 온다.


라오스 남부의 중심도시인 빡세에 도착하니 중심 도시 같지 않은 한가함이 느껴진다. 그저 여느 도시에 도착해서 하는 것처럼 강가도 거닐어 보고 사원도 들러본다. 어디를 가도 조용하고 느긋한 시간들이다. 트래블 게릴라에서 봐둔 커피집을 찾아간다. 베트남 커피뿐 아니라 라오 카피도 질이 좋기도 유명하다는데 그 대부분이 이 남부 지방의 볼레본 고원에서 생산되는 것이라 한다, 어디나 맛있는 집이 그렇듯 이집 커피도 다른 커피에 비해 대략 두배 쯤 되는 가격을 받고 있는데 두배 아니라 세배를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맛이 탁월하다. 베트남  커피도 집마다 다 맛이 달라 정말 맛있는 곳은 두세 곳에 불과했는데 그 집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들르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온다. 나가기 전에 신청해둔 볼레본 고원투어가 인원이 안 되서 무산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내 뒤로 4명이 더 신청되어 있다.


세돈강 다리에서 바라본 빡세 시내


다음날 일찍 볼레본 고원 투어를 간다. 현대 1톤 트럭 뒤에 지붕을 씌우고 좌우에 의자를 만들어 앉을 수 있게 해놓은 이른바 트럭버스를 탄다. 뒤 칸에 투어신청자 여섯명과 가이드가 함께 타고 흔들리면 산길을 간다. 4개의 폭포와 차와 커피 플랜테이션 그리고 소수민족마을 한 곳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대략 고원이란게 다 비슷한 환경인건지 베트남의 고원지역인 달랏에서도 폭포며 커피, 소수민족 마을 등이 주 여행상품이었는데 여기도 비슷하다. 그래도 산이 국토의 대부분인 라오스는 동남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 폭포가 좀더 많은 것 같은데 종류도 다양해 흔히 볼 수 있는 폭포부터, 협곡으로 냅다 떨어지는 놈, 옆으로 퍼져 다양한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놈, 대여섯개가 아기자기 모여 있는 놈 등 꽤 볼만한 거리를 만들어낸다. 차 재배지나 차 만드는 과정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라 그리 신기할 건 없지만 커피의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 그런지 제법 눈길을 끈다.  


볼레본 고원


4개의 폭포 중 하나, 이름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점심을 먹고 다시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곳은 무슨 무슨족이 사는 소수 민족 마을이다. 투어 중에 들르는 소수 민족마을이란 게 무슨 동물원에 동물 구경 가듯 사람 구경 가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내린다. 사실 지들은 소수민족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옷 좀 다르게 입고 있는 것 말곤 다 똑같아 보이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라면 하나겠다. 파인애플 등을 팔고 있는 마을 입구를 지나니 마을 어귀에 학교가 보인다. 학교가 파한 시간인지 아니면 휴일인지 학교에는 몇 명의 아이들만 놀고 있다. 아이들에게 뭔가 주려거든 돈은 주지 말고 펜이나 교육에 필요한 것을 주라는 가이드의 말이라도 들었는지 아이들은 따라 다니면서 펜을 달라고 한다. 사진을 찍은 댓가로 펜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라오스에 가기 전에 펜이라도 몇 개 가져가라던 사람들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 후회가 된다.


마을 어귀의 학교


칠판에 낙서하는 아이들은 어디나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른바 스모킹 빌리지라는 이 마을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대나무 파이프로 된 담배들을 피우는데 열두어살 된 여자애들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준다. 스모킹 빌리지라는 관광 자원을 놓칠 수 없어서 그런건지 아님 정말 마을의 전통인건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여기저기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일 말고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앉아 있다. 일상이 멈춘 것 같은 이 마을에도 학교도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데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무렵 이 마을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마을을 돌아 나오는 맘이 그리 가볍지는 않다.


여자 아이가 들고 있는 것이 담배 파이프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마지막으로 폭포를 하나 군데 더 보고 돌아 나오는데 당연한 수순처럼 차가 퍼진다. 모든 라오스 여행기에는 차가 퍼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외는 없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쓴 글에 차가 퍼지고 한참을 기다려도 다른 차가 안 오길래 항의하려다가 니네 나라 차가 퍼져서 그런달까바 암말도 못했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차도 현대 트럭이다. 우리나라에서 폐차 직전까지 시달리다가 라오스까지 팔려와 성형 수술까지 당하고 수명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는 트럭이며 버스들에게 경의라도 표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차가 오기까지 꼬박 두 시간을 기다린다. ㅎㅎ 데리러 온 차는 일제 토요타다. 트럭 뒤에 앉아 추위에 떨면서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보며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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