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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3/24
    유령의 사랑을 읽고
    파란 하늘
  2. 2005/10/28
    감사로 발목잡힌 **노조
    파란 하늘
  3. 2005/10/25
    민주노총 고위관계자가 비리의혹 제기?(1)
    파란 하늘
  4. 2005/10/24
    태풍 지난 월요일아침
    파란 하늘
  5. 2005/09/03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파란 하늘
  6. 2005/08/09
    7월 17일 청계밀림을 가다
    파란 하늘
  7. 2005/07/12
    체의 마지막 일기
    파란 하늘
  8. 2005/07/12
    밀린 숙제
    파란 하늘
  9. 2005/05/15
    나 그리고 느림보 컴퓨터
    파란 하늘
  10. 2005/05/03
    산재로 숨진 여종엽동지 누님의 글
    파란 하늘

유령의 사랑을 읽고

지난 달 손석춘님의 <유령의 사랑>을 감명깊게 읽었다. 찔찔 짜면서 책을 읽었다는 뜻이다. 그 책의 주인동은 마르크스네 하녀였고, 그 책은 헬레네데무트라는 이름의 마르크스와 또다른 사랑을 나눈 여인의 일기를 형식으로 구성돼 있었다. 손석춘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거다.

우선 직업이 기자인 주인공 한민주는 마치 손석춘 님 자신인 듯한 착각을 일게 만들었고, 이리 저리 들어보니 빨치산의 아들이란 얘기도 있는 걸 봐서 절반이상 자신을 그려놓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름다운 집을 본 뒤 내가 가졌던 물음표를 약간 해소해주는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왜 북한사회, 북으로 올라간 사람과 그 사회를 뚫어지게 보려했던가? 아름다운 집도 일정정도 사실에 근거한 픽션이라고 할 때 집요하게 추적했던 이유는 무엇을까 늘 궁금했었다.

그 책에서 보면 아버지의 존재를 찾고자한 갈망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운동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분위기와 조건 들에서 어렴풋 궁금증이 해소된다. 또한 마르크스에 대한 갈증도 마찬가지같다. 어느 정파적인 입장 때문이라기보다는 변혁운동의 순수성을 간직하고픈 그런 것 아닐까. 주인공 헬레네데무트는 노동자였고, 그의 시각으로 본 마르크스는 부단히 시대와 자기와 투쟁하고 안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준다. 선물로 들어온 한 여인이 노동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노동자가 계급성을 갖기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또 쓰고 또쓰고 고쳐쓴 마르크스의 책을 나는 제대로 읽었봤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천재이기 때문에 당연시했던 작품들이 하나 하나에 얼마나 깊은 애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이 픽션이 일지라도 작가는 마르크스의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닮으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겨우 마감을 끝내고 기운이 쭉 빠져서 집에 가기 힘들 정도다. 조금 전 만두 2개와 밥을 한 숟가락 뜨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미뤘던 지인들에게 전화하고, 얘기 좀 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너무 흘러가 버렸다. 나는 얼마나 노력하며 사는지, 변혁을 꿈꾸는 자, 노동자로서 나는 무엇을 지금 실천하고 있는가? 비교하며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한 책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중년의 사랑과 마르크스의 사랑을 연관지어 좀 어색했다. 사랑이라는 제목때문에 그랬을까? 마르크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던 나에겐 억지로 꿰어놓은 듯한 느낌이 강해서 데무트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끝난 뒤부터는 책장이 잘 안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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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발목잡힌 **노조

노조 대의원대회가 감사미비로 휴회됐다. 산별노조 4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회계감사가 중앙위에서 통과된 규정에 반발해 일주일가량 감사를 하지 않았기에 4만 조직의 대의원대회를 휴회시켜 버리는 사태를 만들었다. 

규정에는 회계감사 변제 범위와 감사도 출장명령과 출퇴근 등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통과된 규정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된 사항이 문제라면 대의원대회에서 수정안건을 제출하거나 해야할 문제다.

대의원대회를 유회시킬 만큼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조직 내 숨어있는 또다른 것들과 영합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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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고위관계자가 비리의혹 제기?

80년대 말 이런 얘기가 떠돌았다. 

정파간 다툼이 첨예했던 어느 지역 한 현장에 활동가들이 대거 들어갔는데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 갈등이 심각했다고...그런 와중에 한쪽 입장의 활동가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쪽의 활동가를 회사에 슬쩍 흘려 제거했다는 슬픈 이야기다.

자본보다 더 미운 동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여태껏 한번도 주도권을 쥔 적도 없고, 권력을 두고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까 싶은데...오늘 한겨레신문에 난 기사는 그 때 그 시절보다 더 심각하다.

 

물론 내 의견은 냄새나는 비리들을 다 폭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마나 밉고 싫었으면 언론을 통해 경찰 개입까지 부르는 상황을 만들었을까.

25일자 한겨레신문 2면 머리기사로 '민주노총 또 금품비리 의혹'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 일은 쌍용자동차노조 정비지부의 한 조합원이 우연히 발견한 회사 쪽 문서로 한 때 논란이 된 적이 있던 일이다. 새삼 드러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묻힌 채 몇달을 지나왔고 민주노총도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우리 내부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던 이 문제를 밝히는 것은 좋지만 이 기사를 보면 '24일 민주노총과 금속산업연맹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과 '민주노총 고위 관계자'말에 따라 기사를 쓴 것으로 파악된다.    

즉 다시 말하면 내부에서 이 사건을 외부로 흘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민주노총 내부를 갈라치기 하는 기조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참으로 안타깝다.

이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밝힐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지 않고 외부의 힘을 빌려 다른 쪽 정파 죽이기로 쓰여지는 듯해서 참으로 안타깝다.

더군다나 알려지기로는 이 비리 문제는 단위 노조가 전 집행부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 개입되어 있더라'란 소문만 무성히 들린 채 회사가 노골적으로 개입되어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한다. 연맹이나 민주노총 간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드러나지 않지만 노조 내부 문제를 조직 내에서 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이런 일들 되풀이 되는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기사에서보면 '민주노총 고위관계자'란 표현이 나온다. 이미 민주노총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가. 권력을 향한 욕심 때문에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가. 보수언론과 다르지 않는 이런 언론을 통해 또 얼마나 많은 의혹을 제기하면서 똥물을 튀길 것인가.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이런 분탕질을 끝내고 진정 민주노조를 살려내는 길에 함께 나서야 하지 않을까.

 

점거농성 중인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 기륭전자, 하이닉스매그나칩, 기아차비정규직, 현대차비정규직노동자들...우리 조직내 비정규직동지들에게 뭐라 말을 할까.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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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지난 월요일아침

월요일 출근할 때는 "근로복지공단 앞 아침 선전전을 참가해야 하나?"며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오다가는 막상 자리에 앉아서는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갈 생각않는데 "나만 혼자 나가서 뭐하냐?"며 핑계거리 만들어서 그냥 눌러 앉는다.

 

지난 두 주동안 영등포 대영빌딩은 한마디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민주노총 수석이 직위를 이용해 사용자에게 돈을 받아 착복해놓고 구속 될 때까지 "사용자에 의한 탄압 운운"하면서 방어막을 쳐오다가 덜미를 잡혔으니....민주노총은 쑥대밭이 됐다. 사회적으로 어용노총, 비리 집행부란 멍에를 뒤집어섰다. 그런 상황에서 집행부는 현명치 못하게 '투쟁조직을 위해서'란 명분아닌 명분으로 남아있으려고 하다가 결국 꼴상 사납게 내려갔다. 민주노총이란 권력, 얼마나 내놓기 싫었으면....

 

이제 비상대책위가 꾸려지고 맞이하는 첫 월요일이다. 전재환 연맹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을 맡은 민주노총도 지난 주에 처리됐던 사무처사직 문제 등 남아있는 숙제가 산더미같을 것이다. 혼란스럽고...태산같은 숙제는 연맹도, 금속노조도 마찮가지.

지난 주 금요일 계약해지된지 1년이 되는 하이닉스매그나칩. 용케도 조합원들 결속해서 열심히 싸워오고 있는데 지회장이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출근해보니 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새벽에 현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비정규직 사업장들 중에 제대로 풀린 곳 하나없이 꼬이고 꼬인 채 어려운 투쟁을 하고 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전후로 금속이 중심이 되어서 풀어야 할 문제다. 비정규확산법 저지와 함께 그 전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 1년째 질질 끌어오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건가. 마음의 짐이 무겁기만 하다.

 

얼마전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의 한 조합원이 돈이 없어 세방에서 나와 천막에 짐을 놔두고 몸뚱이만 아는 형님네 집에서 붙이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가 출범한 다음 날 정부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현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이들의 투쟁과 고통 앞에 어떻게 함께 해야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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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저런 생각

어제 밤 사무실에서 나머지 숙제를 하고 있을 때 한 동지가 "(연락하고,통계내고) 이런 일하는 데 굳이 여기 있을 필요 있을까?" "빠릿 빠릿한 젊은 친구와서 하라고 그만 두는 게 낫겠어"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내 나이 마흔. 연맹에 온지 이제 만 5년을 넘었지만 느즈막히 왔기에 전노협에서 구금속을 거쳐 연맹 터주대감격인 동지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나이 들면 좀 그만 두지."하는 얘기들으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그래 너희는 나이 안드나 보자.' 씩씩 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갈수록 내 마음 속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한번 가야할 곳에 안가는 것 같고, 챙겨야 하는 데 그냥 두는 것 같고. 예전에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눈 뜨고 못봐서 이리 저리 챙기다 실 전체를 혼자서 챙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적도 있었는데...(물론 그 때가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결국 선택은 다른 사람 탓을 댄다. 쟤도 그러는 데 나도 이러면 뭐 어때? 사람의 심보가 고약하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것들이, 분하고 억울하지만 내가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형태와 그런 유형에 어쩔 수 없이 '부화뇌동'하지 않았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해를 더해 갈수록 조직의 상태가 건강성을 잃어가니 하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참 용하다. 그러나 또한편으로 비참하다. 요즘처럼 젊은 얘들이 치받아 오를때는 더 그렇다.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논리의 앞뒤가 맞고, 치밀하게 계산적이고...상근하는 30대들의 공통적인 모습 아닐까. 그네들 얘기는 걸 듣고 있으면 맞는 얘기인 것 같으면서 왠지 공허하다. 항상 색깔을 구분하며 더 선명한 것을 찾으려든다. 또는 자기가 만든 틀을 들이대며 주변을 재단한다. 이런 걸 두고 오만방자하다고 하는데...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문제를 던지려고 하면 통하지 않는다. 논리의 정합성을 따지면 왜 이런 생각과 문제제기를 하는 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그 만큼 고민하지 않는다는 거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일까. 경험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젊고 패기가 있기 때문일까. 내가 선배들에게 혹시 이렇게 하지는 않았던가. 나는 어느덧 전후사정과 조건과 분위기를 고민하는데...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태도와 충돌할 수 밖에.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고 한다. 오늘 이렇게 현재에서 흘려버리는 과거는 미래를 불안케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 내가 제대로 서야 하는데 어떻게 서는 게 올바른 것인지 항상 혼동스럽다. 여기서 버티고 있는 게 좋은 지 아니면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게 좋은 지. 우리 조직이 '할머니의 가설'을 증명하게 하는 그런 곳이었으면 한다. 할머니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아이들을 기르듯이 오랜 활동과 경험을 가진 동지들의 경험과 지혜가 조직을 발전케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한다. 어쩌면 나는 경계인지도 모르겠다. 신입과 경력의 중간에 끼어 관망자로 있지는 않았는지. 실천이 항상 생각을 못따르면서 그때 그때 느낌으로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영복선생의 '강의'책 앞줄부터 온갖 상념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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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청계밀림을 가다

인천지역일반노조 7월 산행계획 [청계산 4시간 코스]라는 공지를 보고 ‘설악산 대청봉도 올라갔는데 이 까짓 것 식은 죽 먹기’라 여겼다. 인천에서 가평까지 약 두 시간 채 못 걸려 도착한 청계산 밑은 계곡에 불어난 물이 깨끗하고, 저수지가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산행을 시작할 때 눈앞에는 울창하게 자란 활엽수 숲이 펼쳐졌다.

5분이나 갔을까 계곡이 나왔고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바위엔 푸른 이끼들이 착 달라붙어있고, 쑥쑥 자란 고사리들이 많았다.(나는 고비라고 주장했지만 집에와서 틀렸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먹는 것은 어린 고사리며, 그 과정을 지나면 잎에 커진다. 고비는 모양이 꼬부라진 게 별로 본 적이 없었던 듯싶다.)

울창한 밀림같이, 숲을 헤치고 나갔다. 계곡을 따라 오른 시간이 약 1시간 반 정도 지나자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땀은 비옷 듯 쏟아지고, 땀이 나자 기쁨도 함께 샘솟았다. 이런 걸 희열이라고 하나. 쉬고 싶지 않아 계속 올라갔다. 유찬이 약간 힘들어했으나 정상부근에선 나보다 앞서 갔다. 조광호 위원장님 다음으로 우리 가족이 1등을 했다.

(..재)정상에 올라 점심식사를 하는 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가늘지만 옷을 적실 만큼 됐다. 급하게 비옷(잠바)를 입고, 산악회 리더인 종수씨가 가져온 후라이(?)를 치고 둘러앉아 각자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준비해온 계란과 감자는 출발하기 전에 아침으로 먹었고, 수박은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동이 났다. 사온 김밥을 먹었는데 4줄은 좀 많았다. 다음부터는 3줄을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도 얻어 마시고, 기념 사진도 찍고, 정상 길목을 막고 약 1시간 가량 있었다.

배가 좀 차니, 돌탑 앞에 청계산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는 닭을 외양간에 넣는다는 뜻이라,...에서 보면 ...쪽이여서 청룡을 뜻한다. 청계는 푸른 계곡이 아니다. ..좀 이해가 안되지만 ‘계곡’이 들어간 의미는 아니다는 정도에서 이해했다.

하산 길은 역시 어렵다. 설악산에선 가파랐기에 발에 힘을 주다가 기운이 빠졌는데, 이번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끼낀 미끄러운 바위, 작은 바위가 이리저리 뒹굴고, 왼쪽 오른쪽 낭떠러지 옆으로 길이 나있어 바짝 긴장하며 내려갔다.

얼마 전 체가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밀림에서 생활했던 기간에 쓴 일기에 적혀있던 ‘밀림’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산에 이렇게 울창한 숲이 우거지고 마치 밀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며 걸었다. 나뭇잎에 하늘을 가리고, 줄기들이 이쪽 저쪽 길게 늘어져 있어 몇 번이나 머리에 부딪혔다. 약간 후텁지근 했지만 모험의 세계를 즐겼다. 낭떠러지 길 옆에 자란 풀들이 위험을 가리고 있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수다’가 없어지고 앞과 뒤 간격이 좁혀졌다. 조광호 위원장님을 제외하고 선두는 가면서 자주 쉬어줬다. 그러다가 나는 보지 못했지만 유찬이가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낙엽이 쌓여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과정에서 나는 모기(?)에게 물려 엄청 아팠다. 전체로 보자면 마지막에 길을 확인하다가 종수씨와 헤어져 내려온 것.

산은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다시 못박아준 산행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산이 이렇게 울창하다는 걸 알았다.

오늘 나의 몸 상태는 잠이 부족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처음 올라갈 때만 빼고.

마지막 맛난 것도 먹었다. 허브나라-뫼우리-꽤 알려진 곳인듯하다. 온실을 만들어 허브를 키우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든 온갖가지 것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내가 먹은 새싹비빔밥도, 유찬이가 먹은 돈까스도 맛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 쯤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인천으로 출발할 때부터는 비가 멈췄다. 계곡 물에 발담갔던 설악산과 다른, 사람들이 붐비었던 유명한 산들고 다른, 비오는 날 여름 산행의  모험을 즐긴 하루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청계산을 한바퀴 다 돌았다. 길잡이가 중간으로 내려오는 길을 잃어서라고 하는데 우리는 훈련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 산행은 추석 지나고 9월 25일경 우악산으로, 10월 넷째주경에는 금요일 밤차타고 일요일에 올라오는 2박 3일 코스의 지리산이다. 작년 9월 산행이었으니 함께 산에 다닌 지 1년 가까이 되면서 산악회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손꼽아 기다리는 산행으로 내마음에 즐거움으로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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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마지막 일기

2000년인가 사무실에 있는 캐비넷에 체게바라 사진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 약간 우수에 젖은 듯한 모습으로 잘생긴 얼굴. 가끔씩 시선을 보내며...체게바라평전도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체가 직접 쓴 일기를 보면서 어쩌면 화려한 추앙 뒤에 감춰진 현실을 본 듯한 느낌을 갖는다. 여기에는 체가 서른 여덟, 아홉 나이에 볼리비아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체포되고 총살 당하기까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상 때론 동지로, 때론 적으로 치열한 현실 속 대립을 피하고 혁명을 위한 게릴라로 삶을 선택했던, 어쩌면 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의 판단까지가 보인다. 동맹군이라 믿었던 소련의 믿을 수 없는 태도, 남미 혁명가들의 판단의 차이 등...

소수 게릴라부대가 볼리비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판단은 어디서 나왔을까. 마치 해방직전의 빨치산을 보는 듯하다. 고립되어 산화해간 혁명가들. 하나뿐인 목숨을 역사에 바친 이들. 체는 그렇게 서른 아홉에 죽었다. 죽은 체가 볼리비아 민중들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로 쿠바의 카스트로는 체를 영웅적으로 만들어냈다.

휼륭한 게릴라. 그러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마르크스 사상을 믿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던졌을 뿐이다.

가끔은 산길을 걸으며 치열하게 이보다 더욱 험한 산맥을 오르내리며 혁명투쟁을 한 체가 생각이 날 것이다.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산인데, 그 속에 여러 삶이 그려지는 것처럼.

내가 두살이 되던 해인 1967년 10월 9일 체는 갔다. 그 뒤 사십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볼리비아 혁명에 헌신한 맑은 영혼을 기리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그리고 쿠바의 카스트로... 남미는 아직도 혁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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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숙제

그동안 미뤘던 글을 써야 한다. 게으름을 부리며, 미루고 또 미뤘던 일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마음 속에 남은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낀다. 특히 비디오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내가 대본과정에서 말만 지껄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진척되지 않음을 느낀다. 그렇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되새기자. 이번 주에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지 못한다. 더는 다른 사람 탓을 하지 말자. 다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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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느림보 컴퓨터

아침에 왜관에서 부산으로 가려했던 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요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뒷풀이하면서 눈이 껌벅껌벅 감기니 가서 자라는 한 동지의 말에 얼른 가서 잤는데 알람소리도 못듣고 깨보니 7시30분이었다. 그런데 얼른 챙겨서 나가면 되었을 텐데 나의 느림보가 작동했다. 대충 1시간 반정도면 가겠지하면서 아침밥먹고, 오전 8시30분 지나 차 국장의 강의가 시작되서야 맘놓고 가방을 둘러매고 나왔다. 그런데 쫌 늦었다. 그래도 차얻어 타고 왜관역에 가서 부산에 내려 가신 아빠에게 전화했다. "11시40분이 되어야 부산에 도착하겠는데요" 그랬더니 아빠께서는 "그럼, 너무 늦으니 볼일 보고 그만 올라가라"하신다. 그래도 표 끊고 동대구역까지 가서 아빠에게 또 전화를 드렸다. "어디야, 너무 늦고, 다 끝났어. 집에 가라"하신다. 결국 부산에 가는 것을 그제서야 포기하고 동대구터미날에 가서 인천행 티켓을 끊었다. 그 자리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나구나'란 생각을 했다. 굳어질 대로 느림보가 되어 버린 나. 마음만 있는 거 가지고 되는 게 아닌데...느려터져서는 할일을 제대로 못하고, 늦게 불붙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부리나케 정신없이 달려가거나, 아니면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는 항상 뒤에서 고치고 또 고치거나 속상해 하는 내 버릇. 여유가 없는 이유를 다시 알거 같았다. 정확한 내 자신을 진단을 하지 못하는 거, 내 생각 욕심이 너무 많아 이것 저것 많은 것들을 담아 놓고는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거, 막연히 잘 되겠지하는 안일함. 이런 게 똘똘뭉친 느림보 아닌가. 오는 길에 한겨레21에서 읽은 글쓰기의 힘이란 특집에서 보았듯이 내 일기장에도 후회와 후회가 산처럼 쌓여 있다. 어쩌면 나는 글쓰기를 통해 잘못을 속풀이하면서 자기 위안을 삼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기 보다는 원래 그런거로 고착화되는 게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길 나선지 십오년이 남짓...나의 일기장에는 항상 "나는 무엇을 할까"를 써왔더랬다. 내가 뭘할지 노력하지 않고 말로만 떠든 격이다. 그래서 요모양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한참을 걸려 컴퓨터 커고, 메일검색하고 하는 데 1시간반 넘게 지났다. 오랜 구닥다리 컴퓨터를 끼우고 고치고 해서 기능은 다 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느려터진 내 모습같은 컴퓨터.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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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로 숨진 여종엽동지 누님의 글

[편지]내 가족! 내 형제! 우리의 동료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힘이되어 주십시요

- 2004년 11월 5일 산재치료의 고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산재노동자 고 여종엽 동지의 누이 여미선님이
우리 동지들께 보내온 편지입니다.


동지 여러분들 그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기억하실 런지 모르겠지만 
작년 11월 5일 날 사랑하는 동생을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낸
한 못난 누나를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간 동생의 아픈 몸과 마음
우리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과 안타까운 심정들을
수많은 전국의 산재노동자들과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멀리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근 몇 년을 아파 오면서
육체적 또한 정신적 고통으로 전전긍긍해
이렇게 크나 큰 악마가 불어닥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고고
지금도 온가족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아픈 마음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 가정의 단란한 행복은 그림자처럼 멀어지고
남은 것은
피멍이 든 병든 가슴과 눈만 뜨면 흘러내리는 눈물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겨우내 땅속깊이 숨어있던 새싹들도
이 밝은 세상을 보기 위해 모진 기를 쓰고 고개를 내미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세상에서 안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살기위해서
좀 더 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했던 결과가
인간대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디가서 마음 편히 발 붙이고 살겠습니까?

동생의 아픔으로 인해
산재의 요청, 불승인, 재심, 승인이 나기까지 과정들을 쭉 지켜보면서
아직까지도 노동자들 세계에서는
억울하게 그들의 아픔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난생 처음 근로복지공단이라는 곳도 가 보았습니다.
전 정말 기절할뻔 했습니다.

동생을 두 번 죽이기 싫어서 저도 수많은 동지들과 동참했었습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온몸을 불사르면서
목청을 높여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 다리 펴고있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내 혈육이고 피붙이였다면 그렇게 냉정한 판단을 내렸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정말 오기가 생기더군요
노동자들을 위해 있어야 할 근로복지공단이
노동자들 마음을 헤아려 주기는커녕 서로 목청 높여 싸워야함이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이 나라가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데 그들이 누구 때문에 그런 위치에
존재하는데
정말 우리 노동자들이 비참하고 불쌍했습니다.

전 그때 생각했습니다.
힘이라도 있고 목소리라도 커야 사람 대접을 받겠구나 라는 것을 요

동지 여러분들
그래도 전 살아나갈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크나 큰 힘과 끈끈한 우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1차 불승인은 났었지만
끊임없는 여러분들의 응원에 재심을 거쳐 이번에 산재승인을
받았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안 계신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 듭니다. 
저는 산재승인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도 마음이지만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울었습니다.
동생이 살아 생전 이 소식을 접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마음에 너무나 서글펐습니다.

한사람을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그 어떤 무엇도 바꿀 수도 채울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파하다 정신까지 잃어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린 생각들로 가슴이 아프기만 합니다.

동지들!
힘을 내시고 내 가족, 내 형제, 우리의 동료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힘이 되어 주십시오
떠나고 나면
일억 천금 만금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 건강 정신 건강인데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병마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물음표 인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여건이
노동자들 뜻을 다 다듬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계기로 인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고
좀 더 우리 노동자들의 틈새에 끼여
많은 아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눈높이를 같이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들 건강하시고
두 번 다시 동생처럼 이렇게
억울하고 고통 받아 가는 부당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게
저의 마지막 바램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노동 동지 여러분들
감사의 말씀을 끝으로
멀리서나마 파이팅을 빌겠습니다.

대구에서 고 여종엽의 누나 미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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