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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

예레미야10:23
“여호와여 내가 알기에는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수가 없고
삶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 할수 도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운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상관없이 태어나며,
그곳에 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안에서 정해진 인종이나
환경안에서 사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고로 사람은 자신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의 삶의 시작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처럼, 자신의 운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운이란 사람의 정해진 길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계나 테두리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의 바다와 육지를 갈라놓는 해변의 경계선처럼,
바다의 물결이 해변에 휘몰아쳐도 어떤 정해진 경계에 물이
더이상 그 경계를 넘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내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러시아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백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자신이 황인으로 태어났으면 그는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간다는 생각에는 그저 숙명을 좇아가는 경우처럼,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살아갈 때에,
부정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없이
그저 자신에게 정해진 삶을 살아가다면,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순응하듯이 살지만,
자신의 개선이나 발전을 위한 의지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도 알수 없는 운에 맡기고 사는 경우이다.

윤회설에서 말하는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업보로 생각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자신에게 더 나은 새로운 미래의 삶을 위해 현재에 당하는 힘든 일들을 극복하고,
선행을 힘쓰고 살아가면 언제가는 다시 태어날때에,
보다 좋은 인생이나, 영물로 살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돌고도는 윤회적인 인생철학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데는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기회가 유일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천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느 인생에게는 하늘의 정해진 뜻이 있다라는 말로 이해된다.
역사에 나타난 유명한 인물들은 그들의 삶이 하늘이 정해준 이치나,
삶의 길로, 그들이 당대에 필요한 일들을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하늘이 정해준 이치를 따라 살면서
자신안에 있는 적극적인 동기부여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하였는데,
그는 인간세상에 악을 행하고, 그 악을 행하는 댓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주실때에,
이집트의 왕인 바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도전하여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노예로 잡아두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고집과 오만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므로써,
하나님의 역사나, 섭리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이 되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돈에 팔아버리기로 선택한 유다는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애석하게 여긴다.
성경은 그의 태어남을 후회하듯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다가 없이는 예수님이 팔리지 않았으며,
십자가의 죽으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만인구원의 길을 열지 못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던 인생이지 아닌가?
그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선택한 일로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겪어야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예레미야는 태어날때부터 모태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유다민족의 예언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을 고난중에 감당하였다.
그의 인생은 이미 태어나기전에 하나님에 의해 선별되고,
자신이 해야할, 자신의 사명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진 인생은 그에게 정해진 인생의 운명의 한계안에서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알고
자신의 삶의 한계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

유다나라는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국민이
하나님앞에 그를 버리는 잘못과 우상숭배의 죄를 지으므로,
멸망으로 치닫는 결정된 미래를 따라 나라가 온통, 주님의 심판에 놓여 있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노력하여 정해진 멸망해가는 코스를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지만,
자신들과 조상들의 범죄한 우상숭배와 도덕윤리의 타락은
결국 유다나라를 침입하는 이웃 강대국들에 의해 멸망해 갔었다.

인간이 하나님이 결정된 미래를 살아가는 것과
인간이 운명처럼 변개할수 없는 것의 삶의 코스를 살아가는 것이란 다르다.
하나님이 정한 테두리안에서 자신의 최대한의 노력이나 발전적인 시도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숙명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에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의 운명을 다스릴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결정이나, 선택에 의한 미래의 결과를 알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결정하고 어느 일을 선택했을때에,
그 선택이나 결정이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자신이 결정하는 결혼도, 자신이 선택하는 직업도,
자신이 만나는 만남도 결과를 알수 없는 미래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때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자신이 생각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계획한대로 내일 그것이 다 이루지 못하며,
자신이 정한 삶이 방향이 아닌
삶의 변수(사건사고나 불행이나 불운을 통해 겪는 일들)가 주변에 많이 놓여있다.
선택과 결정은 자신이 하더라도 그 삶의 전체 흐름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선거때마다 유권자들이 어느 후보를 택하지만,
이외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의 미래에 대해, 알 수 없음을 한탄하지 말고,
자신이 정한 인생의 방향을 끝까지 지속하기위해서라도,
자신의 인생의 길을 정하고,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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