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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3/06
    심판과 구원사이에서
    목동
  2. 2007/03/05
    결혼 잔치에서 일어난 일
    목동
  3. 2007/03/04
    논리(2)
    목동
  4. 2007/03/02
    논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목동

심판과 구원사이에서

예레미야 4:1-4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나에게 돌아오너라.
네가 만일 내가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우상을 내 앞에서 제거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2. 살아있는 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또 네가 진실하며 정직하고 의로운 가운데에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속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4. 유다와 예루살렘사람들아, 너희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너희 자신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행한 악한 일에 대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너희를 태울것이니 그 불을 끌자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방황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백척간두의 나라의존폐의 위기에서 나라살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의나라는 계속해서 외침으로 인하여 약화되어 가고 있다.
내우외환으로 인하여 나라는 피폐하여져서 멸망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이다.
그들의 정치지도자들은 나라를 살릴려고 주변국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를 힘쓰고 있지만,
나라 온전체가 지도자나 백성이나 할 것없이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우상숭배의 죄와 모든 도덕적인 죄까지 범하고 있었다.

여기서 돌아가야 할 곳은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이며,
나라도 민족도 그 처해있는 상황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라가 힘들고 민족이 갈길을 못찾아 헤매이고 있을때에,
지도자의 역활은 중요하다 하겠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하에서,
지도자의 잘못된 인도와 정치철학으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을 세우고 번영케 하신 하나님에게
이제는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버림받는 처지가 되어가고 있을때에,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얻을 길을 찾아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에, 그것을 해결할 길을 모색하여,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사람이 타향에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기가 자라나고 자신의 근거지가 되었던 고향을 그리워 하며
원래 가졌던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갈때에 자신에게 뚜렷한 명분을 찾아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아무런 가치기준이나 삶의원칙없이 살아가는 것이란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뀌어지고,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줄만한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는 방황하지 않을수 없다.
우상은 신이 아닌 것을 신을 섬겨야 할 자리에
그것을 대신놓고 신처럼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영의 걸림돌이 되었으며,
국민 전체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민족의 미래가 참담해져가는 상황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자신들의 생활과 문화의 근거로 삼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대한 마음이 변질하여,
종종 주변국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우상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음과 죄를 범하였다.
지금은 우상숭배의 죄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던 그 백성을 해방시켜 나라를 세우게 인도하였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전능하심과 역사하심을 알아야 하며,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 지는 모든 그의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인생이 세상을 있게한 신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자신의 모든 삶이 제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서게 된다.
인생은 하나님앞에 있을때에, 자신에 대해 진실하며, 정직하며, 의로운 생을 살아간다.

진실, 진리, 참등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진리는 영구불변하며,
인생들이 기댈만한 가치와 원리를 가지고 있다.
진리안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있으며, 인생이 따라야 할 가르침이 있다.
그 진리는 사람들의 삶을 비쳐주는 빛이다.
빛이 비쳐주어질때에, 옳고 바른 것을 알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봄에 씨를 뿌리기 전에 그들은 땅을 고르고,
씨를 받아, 생명이 움터, 자랄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계절에는 만물이 자신의 옷들을 새로 갈아입듯, 봄갈이을 한다.
인생의 마음이나, 삶의 환경도 자신안에 생명의 숨결이 쉬어지고,
생명의 태동을 기대하려면, 자신안에 새로 정지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새로와 지기를 기대하신다.
인생의 마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부패하여,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내면이 드러난다.
마음의 부패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며,
자신안에 있는 어둠과 그로 인한 모든 악한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어,
자신속에 선을 찾아 보기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선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일도,
결국 자기중심의 자화자찬의 선행에 불과하며,
그런 행위는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에 오히여 오만한 위선으로 보일 뿐이다.
인간의 상대적인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의 선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고로, 자신의 밖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진단하고,
부패안에 있는 자신의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고,
그릇된 길에서 자신을 옳은 길로 인도하여줄 진리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전혀 다른 차원의 새마음을 받아야 자신을 새롭게 할수 있다.
사람들에게 새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은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부패한 마음을 깨닫고 그 잘못을 고치고 회개하는 심령에
새로운 마음을 가질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갱신하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생각이나 성향이 정결한 모습의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상에게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의 관심과 방향을 돌이켜
자신들을 살리는 길로 나아오도록 권면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자신이 관심하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마음에 무엇으로 채워있느냐는 것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음을 드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향할수 있다.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선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다면,
악을 멀리하는 일과 악을 짓는 행위로부터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기 위해,
선을 좇아가려는 마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소시적부터 인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류의 원조들의 원죄와 조상들의 죄의 흔적으로 인하여,
자신의 내면에 어둠과 악에 노출되어 있다.
순전하게 태어난 사람이 세상의 편만하게 있는 악에 물들고,
자신의 주변에서 겪는 일들로 인하여,
자신이 어릴때부터 받은 상처들로 인하여 악을 행하는 자의 피해자임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당한 것을
자신도 같은 상처들을 타인에게 범하며,
선한 자신의 동기가 점점 어둠에 물들어 가서,
악을 행하는 어둠의 세력의 동조자로 서있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하신다.
그 원래의 모습이란 사람이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으로 마땅히 하나님과의 교류안에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렇지를 못한 것이, 원래의 상태를 잃어버린 채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 자신안에 있는
좌절이나, 불행이나, 절망이며, 결국 죽음(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탄식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상태로 머물러 계속하여
악의 영향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그 죄있는 상태를,
악한 영향(어둠의 세력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을 받은 모습을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아래에 있는 인생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욕망이
그들을 그의 심판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며, 그의 심판을 면할수 없게 한다.
불을 품는 자가 자신을 태우기 마련인 것처럼,
죄와 악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사람들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자비와 함께 하는 구원의 역사와 동시적으로 임한다.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생들 자신의 선택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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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잔치에서 일어난 일

요한복음 2:1-12
1. 이틀후에 갈릴리 가나에 결혼식이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님이 거기 계시고
2.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아 갔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하자
5.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6.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각각 물 두세통 드는 크기였다
7.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워라” 하시자 그들은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웠다.
8. 그리고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이제 떠다가 잔치 책임자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자
하인들은 그대로 하였다.
9. 잔치 책임자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몰랐으나
그것을 떠 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잔치 책임자는 신랑을 불러
10. “흔히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군요” 하였다.
11. 예수님이 갈길리 가나에서 처음으로 이런 기적을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12. 그 후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서 며칠 동안 머무셨다.

예수님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거기에서 기적을 베풀어
자신의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메시야이며,
자신이 인간들을 고치는 분으로 오신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신랑신부이야기는 주님과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다.
성경에는 종종, 하늘나라의 진리를 결혼이야기로 여러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구주 예수님과 그 구세주를 믿는 이들이 신랑과 신부로 함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즉 장차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참석하셨다.
마리아도 하객으로 참석하고, 몇 제자들도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가나는 갈릴리지역에 있는 곳으로 예수님의 전도활동에 주무대가 되는 곳의 한 마을이다.
가정을 떠나 공생애를 사는 예수님이,
그의 모친과 함께 결혼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결혼식이나 특별한 예식에 초청받는 일은 정중하게 진행된다.
불청객이라는 말이 있는데, 초청받지 않는 손님이다.
잔치에 가서 별로 흥미가 없고 자신이 없어도 될 자리이면,
구지 그 곳에 있는 곳이 불안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자신을 불청객으로 여기는 것이다.
(혹여, 교회나 성당에 갔을때에, 이런 느낌을 받는 경험이 있는 지,
그런 경험이 지속되는 것은 자신을 신앙의 무관심에 방치하는 것이다.)

주님은 정중히 인생의 삶의 자리에 노크를 하시는 분이다.
주님은 이세상에 원리를 세우고 그 원리를 따라
세상을 창조하며 다스리며,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인생의 불청객이며, 불법을 행하는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귀신으로 인하여
인생이 힘들고 고달파진다.
그리고 인생들이 범죄하여, 자신들의 삶의 환경이 어두워 지니,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 그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영향하에 살게 된 것이다.

결혼식에 포도주가 하객들에게 흥을 돋우는 것은
중동지역에, 음료수처럼 이용하는 것으로 잔치에 포도주를 내어놓고,
포도주로써 잔치의 규모와 질을 평가할 정도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포도주는 물을 구하기 싶지않는 사막지역에 살고 있는
중동사람들의 일상의 필수품이며, 음식문화이다.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그 잔치집에 실물경제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인생의 삶의 많은 문제는 이렇듯 경제문제에서 오는 것이 많다.

경제의 문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생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하시고 관여하시고. 그리고 해결하신다.

때로는 어느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일방적인 메시지로 거부감을 일으킬수 있다.
자신과 무슨상관이 있나?
그 인생자신이 주님에 대해 이질감이나 생소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럴 경우, 인간의 근본문제(죄와 죽음의 문제)에 접근하여, 생각하며,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주님이 어느 인생의 삶의 현장에
손님으로 와 있는 주님자신이 그 잔치에 관여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때에,
비로소 주예수님은 그 인생들의 주인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의 인생안에 손님으로 예수이 주님으로 바꾸어지는 날,
자신은 메시야를 통해 구원받는 날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인생의 난제들이나
문제들에 휩싸인 삶의 문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잔치의 흥이 깨어질 낭패스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잔치의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모자란 것이다.
인생은 공급과 수요의 온전한 가운데에서 넉넉하게 주어진 만물이지만,
인간의 허물은 만물이나 자신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신앙은 무조건적인 순응이나 의존이 필요하다.
이해하고 믿으려는 이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하려는 것과 같은이치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에는 인간의 두뇌의 인식의 그릇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하나님에게 인간들이 할수 있는 일은 그분을 시인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되려다가, 결국 인생들은 모두가 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신뢰의 관계가 깨어졌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고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받아들일때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인간자신을 위한 인간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더 강한 영향이나 짙은 돌봄을 받는다.
그 말은 친밀함은 신뢰에서 비롯되며,
친밀함은 서로 가까운 의존적인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 진다.

신앙은 이해하지 못하나, 친밀하게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른이 이성을 사용하나, 그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다 알수 없는고로,
차라리 어린아이로 돌아가, 순수하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수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그 수용성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나님을 수용하고, 순종하고, 신앙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제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그분에게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려고 할때에 그분을 알게 된다.

물을 통해 자신을 씻는 예식,
물을 통해 손발을 씻게하는 것은
중동지역에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대하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손님접대이다.
그리고 당시에 그들의 종교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결례의식에 필요한 물이다.
(이런 의식은 구주 예수님의 사역이 있기전에는 필요했지만
그분이 인간구원을 위해 이루신 십자가사역은
모든 인간적인 종교적인 전통이나 가르침을 넘어가
구원에 이르는 계기를 만들어 내셨다)

종교생활에 늘 자신의 손이나 씻으며,
종교의 의식이나,겉핣기에 머물러 있는 수준에 있다면
그 단계에서 종교가 가져다 주는 유익을 친히 맛보는 수준으로 옮아가야 한다.

이 씻는 물이 맛보고 마실수 있는 포도주로 바꾸어진 것처럼,
종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겉치레로 종교적인 행위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분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알아가며,
교제하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경험하는 것은, 신앙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종교행사에서 서로 인사나 하고, 자신의 손발이나 씻는 겉치레에서
속으로 경험하는 친히 맛보는 단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인생들에게 주어진 영생은 경험하여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으로 표현되어진다.
주님이 명하시니 하인들이 따라 순종하여,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웠다.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기본도리는 다 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축복은
인간의 응답과 반응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거이다.
물을 아구까지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앙생활도 신앙심이 있고, 다른 종교에서 종교생활하던 사람들이 잘한다.
종교에의 귀이하여, 사람의 도리와 인생의 이치에 대해
가르쳐주는 종교적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종교의 약점이다.
그렇지만 그 종교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을 전해주고 있다.

손을 씻는 물이 사람들의 목을 채우는 음식용으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다.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사람들이 채울수 있으나, 그물을 포도주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창조하신 이인 창조주만이 사람들 고칠수 있으며,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만들어 쓸모있는 인생, 구원받은 사람들로 만들어 내신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삶을 떠다가
우리네 인생들을 별난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주소로 재파송하신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물을 떠다 잔치책임자에게 갖다주는 일을 통해,
주님안에서 변화받은 사람들은 세상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안에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구주를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일은
인생의 숭고한 일중에 하나이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지는 것이다.

사람은 필요하여 이세상에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모든 인생은 우연히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그것은 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인간의 영광과 축복을 받는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요구)
의해 생겼으며,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결례에 쓰는 물이 포도주로 바꾸어지는 것은
인생들이 도전받아야 할 메시지로, 인생들은 자신들이 변화받는 것을
주저해서도 안되며, 망설여서도 안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몸의 세포도 일주일마다,
그리고 7 년주기로 탈바꿈을 하여 우리의 몸이 지탱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경향은 먼저 좋은 것을 취하려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인간들은 세상에서 소비하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소비하고, 하나님은 생산하시는 분이다.

만물을 인간들을 위해 조성하셨다.
만물들을 통해 인간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인간들을 좋은 인생들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인간의 오만과 허물로 자신의 좋은 것들을 상실하고, 좋은 면들이 변질되어 버렸다.
다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이 바꾸어지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만나고 사귀어 갈수록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오래된 친구가 좋은 친구이며, 산전수전다 겪어
그의 여러가지면을 알고 있으니, 이제야 서로 통하는 사이가 아닌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도 그렇다.
평생동안을 섬기고 살아왔던
기독교 교회의 초기역사에 살았던 폴리갑은
자신의 말년에 한번도 자신에 대해
섭섭하게 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구주에 대한 신앙을 위해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하나님의 경향은 먼저보다낫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시다.
훈련을 시키고 사람을 만들어 그 사람에 맞는 직책과 사명을 주신다.
사람을 점점 좋게 만들어 가신다.

이기적이야기는 제자들에게 인상적이었으며,
자신들의 스승이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결혼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구세주역활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맛없는 인생들을 맛나는 인생으로 바꿀어 줄 메시야이다.
살맛이 없고, 맛이 없는 인생살이를
맛있는 인생의 삶으로 바꾸어주는 구주의 사역을 보여준다.

앞으로 전개되어지는 주 예수님과의 공적인 사역에 제자들은
메시야이신 구주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하실 일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함께 사역을 이루어 갔다.

이 기적이야기는 하나님에게 찾아오는 인생들에 대해
감격적인 변화와 자기갱신과
인생변화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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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2)

비공식적인 허위논증들(fallacies )
허위(fallacy)를 나타내는 진술들은
단순히 거짓전제들 (premises)을 의미하는 것보다 더 어떤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허위는 추리하는 과정에서의 오류(mistake)를 포함하며,
그 허위는 “그것에 따르지 않는다”
즉 전제에 의해 제기된 문제가 결론에 가서,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연역적인 것과 귀납적인 논증들은 허위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진술들이 거짓되거나 일관성이 없는 논증들에 위존하면 오류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허위에는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그룹들이 있다.
공식적인 허위는 단순히 논증의 형태나 구조를 조사하여 확인할수 있는 것이다.
그런 허위들중에 연역적인 논증들중에 카테고리적인 삼단논법(syllogism), 선언명제적인(disjunctive) 삼단논법, 그리고 가설적인 삼단논법이 있다.

비공식적인 허위들은 논증의 내용을 조사하여 확인할수 있는 허위이다.
비공식적인 허위에는 22가지의 비공식적인 허위들이 다섯종류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관련적(relevance)인 허위들, 약한 귀납적인 허위들,모호성(ambiguity)의 허위들, 문법적인 유추(analogy)의 허위들이 있다.

관련성의 허위들(fallacies of relevance)
관련성의 허위들은 공통적으로 심리적으로는 맞는 전제에 맞는 결론을 펴고 있어도,
논리적으로는 전제와 결론을 서로 맞지 않는 비적절한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런 종류의 논증들은 논리적으로 맞지않으나, 감정적인 표현에 있어,
전제와 결론이 서로 연결되어있다.
고로, 이 허위들을 판단하고 분석(identify)하기위해,
여러종류의 감정적인 제안(appeal)들을 가진 형태들로부터 참된 증명을 분별해야 한다.

1. 강압적인 제안 (appeal to force)
이런 어필은 논증자가 다른 사람에게 결론을 이야기할 때에,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그 사람에게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해를 가하는 허위이다.
이 허위는 육체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이 있고, 또한 심리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이 있다.

예 1. “만일 내가 당신을 위협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때에 내 월급을 올리는일이 수월 할 것이다.”
예2. “만일 내 동생이 당신에게 테레타비가 어린이 텔레비프로의 최고의 프로라고 우기다면,
사실 그 어린이 베스트 프로쇼안에 탈리타비가 보여질 것이다.”

2. 동정을 사는 제안 (appeal to pity)
이제안은 논증자가 독자나 청취자에게 동정을 일으키는 결론을 유도하려고 할때 일어난다.
이 논증은 아주 자주 쓰이는 것으로 학생이 교수에게 혹은 변호사가 재판관에게 쓰는 논법이다.
예: 납세자가 재판관에게/ 존경하는 판사님, 나에게는 비록 두아이가 있지만,
나는13명의 어린이들을 통해 세금을 돌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나에게 세금포탈의 혐의를 발견한다면,
내 명성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아마 나는 직업을 잃게 되겠지요.
나의 불쌍한 아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료품을 구입할수 없을 것이고,
우리아이들은 굶어죽게 되겠지요. 나는 분명히 죄가 없습니다.”

3. 사람들에게 호소 (appeal to the people)
이 제안은 독자나 청취자들이 자신이 제안한 결론을 받아들이오록
자신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있다.

직접적인 접근법은 논증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감정이나 열정에 호소하는 제안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즉 의혹이나 의심을 군중에게 일으키게도 하는 방법이다.
이제안은 과거 히틀러가 자주 썻던 방법이다.
간접적인 접근은 논증자가 자신의 호소를 군중이나
혹은 개인에게 차별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밴드웨건논증법,
허무(공허함)에 호소하는 논증, 속물근성(윗사람에게 아첨하는 법)논증이 있다.

벤드웨건 논증은 논증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부산물을 낳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뒤에 남기거나, 혹은 사람들을 내버려두도록(관심을 잃도록) 하는 것이다.
예: “ 물론 당신은 징 제품의 치약을 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의 90%가 징제품으로 이를 닦기 때문이다”

공허함에 호소하는 논증은 칭찬하든지, 설득하든지, 모방하든지,
자신이 사용하기를 원하는 아이디어로
논증자자신이 원하는 제품들을 연상하도록 하려는 논증이다.
최근에 미국의 TV에서 나오는 광고에서 나오는 문구에서 이방법을 쓴다.
예: “소수자, 자랑할 만한 것, 그것은 마린(제품이름)이다.”

속물근성논증법(appeal to snobbery)은 연상하는 작용을 이용하는
위의논증과 비슷하게 활용하는 논증이다.
예1: “롤스로이스(제품이름)는 누구에게나 위하지 않고,
선택된 소수자인 당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며,영국의 자동차회사들도 애용하는 것이다.”
예2. 엄마가 여자자아이에게/ “너는 슈퍼우먼같은 여성(wonder woman)으로 자라고 싶지 않니?
그러면 홍당무를 잘먹으려무나.”

Patrick J. Hurley 의 A concise introduction to logic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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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논리(logic)의 목표는 우리자신의 논증들을 건설하는 안내로서
다른 이의 논증들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사용되어지는 방법이나 원리들의 체계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논리의 연구에서 기대할수 있는 유익들중에 하나는
우리자신의 논증들을 발전시킬때나 다른 사람들의 논쟁들을 비판할때에,
우리가 만들어가는 필요한 감각들에 대한 신뢰를 높이게 한다.

 

논증(argument)은 논리가 일어날때에,
우리가 믿고 주장하는 이유나 다른 사람들이 믿고 지원하는 주장들을
나타내는 진술된 하나의 문장이나 혹은 문장들의 그룹이다.

 

모든 논증들은 두가지 기본적인 진술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전제(전술)에서 결론을 뒤받침하는 것이며,
또하나는 비록 주장하는 바가 있으나, 그 전술에서 밝힌 것이 결론을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전의 것은 좋은 논증이 되나,. 나중의 것은 나쁜 논증이 된다.

 

논리의 목적은 논증들을 평가하는 것이나,
나쁜 논증으로 부터 좋은 논증을 구별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나
테크닉을 익히는 학문으로서 목적을 달성한다.

 

진술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선언하는 것을 나타내며,

그 선언적인 것을 지원하는 문장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하는 것을 진리판단이라고 하며,
진실한 문장이 있을시에는 그문장은 진실하며, 거짓이 있을 때에는 가짜문장이다.
 
진술들은 하나혹은 그이상의 전제들과 하나 그이상의 결론으로

나뉘어진 논증등을 만들어낸다. 
전제는 이유나 증거들을 제시하는 문장들이며,
결론은 전제가 주장한 내용들을 지원하거나 암시하는 것을 증거해주는 문장들이다.

 

결론을 가리키는 키워드인 지시하는 접속사들은 이렇다:
"그러므로, 따라서, 결론으로 말하면, 그와같이, 결론적으로, 추측한다,  이런이유때문이다, 그래서, …을 포함한다.  암시한다." 등이다. 

 

전제를 가리키는 키워드인 접속사들은
"그런즉, 때문에, 그와같이, 왜냐하면, 그런이유때문에, ..으로부터 가정하는데, 주어진 것에 의하면," 등이다.

 

추리(추론)(inference)는 논증에 이해 표현되어지는 추리(reasoning)하는 과정이다.
추론은 논증들(arguments)을 통해 표현되어질 뿐 아니라,
조건적인 진술들에 의해서도 진술한다. 
조금 느슨한 의미로서, 추론들은 논증과 섞여서 사용되어진다. 
명제(proposition)는 진술(statement)의 의미하는 것이나 내용을 알리는 것이다. 

 

Patrick J. Hurley 의 A concise introduction to logic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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