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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2/28
    종말에 대한 신의 메시지
    목동
  2. 2007/02/27
    시간과 인생철학
    목동
  3. 2007/02/25
    신의 계획과 인생의 회복
    목동
  4. 2007/02/25
    상한영혼을 회복하는 사역
    목동
  5. 2007/02/23
    꺼져가는 심지
    목동
  6. 2007/02/22
    상한갈대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
    목동
  7. 2007/02/19
    인간의 나약함과 회복
    목동
  8. 2007/02/18
    시험을 이기는 사람
    목동
  9. 2007/02/17
    3 가지 단계의 구원의 삶
    목동
  10. 2007/02/14
    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상담
    목동

종말에 대한 신의 메시지

이사야51:4-6
4. 내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율법이 나에게서 나올것이며 나의 의로운 진리가 만민의 빛이 될 것이다.

신에게로 나오는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 자들이며, 그가 부르는 자들이다.
신에게서 나온 사람들은 신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인생들이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신이 가야할 마땅한 길이며,
그렿게 하므로 그들이 신에게 속한자들처럼, 신의 은총을 입을 것이다.

세상에 진리는 하나이며, 그진리는 신에게서만 나오는 영원한 원리이며,
인생이 들어야 할 이치이다.
그에게서 법이 나오며, 인생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법이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명제는 신에 대한 인간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하늘에 대한 태도이다.

신은 그의 속성이 의롭고 바르며,
그의 절대성에 기초하는 그가 정한 정도의 길을 걸어가는 원칙을
모든 인생들에게 내세우고 있다.
인간들은 조석으로 변하는 상대적인 이치에 머물러,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며 자신들의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며,
세상의 물결에 허우적 대며, 갈바를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인생들은 신에게로 나오는 자신에게 신은 바른 정도를 가르치며,
변치않는 원리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의 진리가 모든 인생들이 받아야 할 생명이며,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된다.
신은 태초에 세상을 지을때에, 빛이 있으라 하여,
그 빛가운데에 모든 만물이 생성되고, 형성되고, 조성되게 하였다.
모든 만물이 그빛안에서 지음을 받아 생존하며, 유지되며,
결국 그 빛가운데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 빛은 만민에게 비쳐줄 생명의 빛이다.
또한 모든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진리의 빛이다.

5. 구원의 때가 가까왔으므로 내가 속히 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다.
내가 만민을 심판할 것이니 모든 민족이 나를 바라보며
내가 구원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인생들은 시간속에 살아가는 시간살이같은 존재이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까지 자기가 정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지구상에 곳곳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시간들을 시작하고 있으며,
또한 반대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끝난 인생들은
자신이 받은 시간들을 반납하고 자신이 왔던 곳으로 가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을 무수한 인생들을 생각해본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남은시간을 보내는 인생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상실한채, 허탄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다.
시간에서 태어나서 시간속을 달리는 인생들은 그 정해진 자신의 시간속에서
신의 구원하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인생들은 자신의 신에게서 나오는 구원의 소식을 어느 시점에서 들을 것인가?
어느 인생들은 인생초반부터 먼저 세상에 온 선진들로 인하여,
신을 알아가는 지식을 얻게 되어, 어린시절부터 신을 찾고, 만나고 섬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혜택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삶들은 아직도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에게서 나온 진리의 도, 생명의 메시지가 인생들을 살리며,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인생들에게 구원의 제안을 했었던
신은 이제는 인생각자에게 자신들이 경주한 인생경기장에서,
결산의 때를 정해놓고, 한 사람, 한사람씩 그들을 판단하며
자신들이 살아온 이력들을 내어놓고, 신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신이 정한 인생들의 살아가는 노정이며,
인생들이 경험할수 밖에 없는 삶의 종착(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신의 평가)이다.

6. 너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아래 땅을 살펴보아라.
하늘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이 낡은 옷처럼 헤어질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하루살이처럼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나의 의는 쇠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마음이 시원하며,
구름한점없는 하늘을 보노라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얼마전에 어느 도시에 가서, 근처에 있는 해변에 갔는데,
경비행기가 몇번을 주변을 돌더니, 얼마안있다가,
하늘에 글씨를 하얀 연기로 써가고 있는 데, "아무개가 아무개를 사랑한다"라는 글귀였다.
그 하늘에 그 문장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난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고 청명하여,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들을 시원함으로 쓸어 내려주어,
마음을 한결가볍게 해주곤한다.

우리마음에 맑으며, 밝음으로 고마움을 선사하는
그 청명한 하늘도 언제가는 체질에 풀어져 하늘이 사라진다는 말은
청천벽력과 같이 인생들의 뇌리에 부딪치는 단어는 종말이라는 단어이다.

이지구가 새로운 체제로 들어서게 되는,
모든 인생들의 시간끝이라는 상황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사는 땅이 흉악하게 변해버려,
그곳에 사는 인생들이 하루살이처럼 하루 사이에 자신의 생명들이
촌각에 달리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기억에 혹성탈출이나 혹은 지구종말에 대한 주제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가 어느 시점에 가서
지구자신의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사람들이 우왕좌앙 살 궁리를 하지만,
생존세계전체가 흔들리고 변화를 겪는 현실앞에 인생들은 하루살이 목숨처럼,
그 현실에 매몰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신이 기획하고 있는 그런 지구혹은 세상 종말시나리오는 언제가는 현실로
인생모두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신이 신자신의 존재를 두고 인생들에게 알리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신은 모든 인생들을 만든이로서
그들을 할수 있는대로 자신의 구원으로 인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으므로 견디고
신이 베푸는 구원을 의지하여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인생 자신의 시계는
지금도 신이 자신에게 정해준 시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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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인생철학

인생의 삶은 그 사람의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지향하는 자세에 따라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 시간에 어떤 태도로 일관하는 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되어진다.
시간을 살아가는 네가지 삶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는 과거지향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그녀는 늘 과거를 추억하고 과거에 매이는 태도로 살아간다.
과거를 회귀하려는 미련에서 계속겪는 현실을 소극적으로 대하게 된다.

전통이나 관습에 매인 경우에는 과거에서 내려온 주어진 조건이나 규칙을 따르며,
자기개선이나 생활개선에 대해 소극적이어서,
자신에게 가져오거나 다가오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과거에 경험한 사건이나, 일들이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아,
그 영향이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처세술의 밑바닥에 깔려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데 매이게 된다.

또한 과거에 몰입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충실하고 그 조직에서 주장하는 원칙에 순응하려고 한다.
그 조직에서 갖고 있는 전통적인 법에 매여,
거기에 자신의 위치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의 자신의 발전에 대해 애를 쓰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발전적인 미래보다는 현실적인 안정에 더 관심을 갖기 쉽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개선하려는 시도를 두려워 하여,
과거가 자신에게 물려준 환경이나 습관이나 처세술로
자신의 처한 그 자리에 머물려는 습성이 있다.

현실주의적태도는 언제나 자신이 현재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려고 한다.
시간관리에 있어서는 현실주의자들은 지극히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한다.
자신이 세운 시간계획에 따라 현재에 주어진 자신의 시간이나 일에 충실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투자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주는 이익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그안에 머물러,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감각이나
인생을 선으로 보지 않고 점으로 만 보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쉽다.

예를 들어, 어려운 일을 만나는 일에 대해,
그 어려움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 어려움에 빠져 허우적되기도 한다.

미래지향적인 자세는 늘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앞으로 달려가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
자칫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시간적인 현실에 불충하여,
자신의 삶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 가져다 주는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언제나 미래만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상에 붙들려
현실적인 순간에서 얻어야 할 지금안에 있는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과
단계적인 성취을 잃어버리기 쉽다.

항상 무엇을 잡으려고 꿈을 꾸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또 다른 이상에 자신을 내맡겨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상념에 잡혀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시간과 다가오는 영원을 연결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살펴보면,
자신의 유한한 인생에서, 시간속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와 처세는
인생전체에 대한 자신의 위치설정(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나
치우치거나 빗나가지 않는 자신의 삶의 균형(이생과 저생과의 조화)을 잡아간다.

시간과 영원을 잇대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흐르는 시간속에서 지나가는 세월로 이해하여,
그 세월들이 주는 가치를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영원과 연결되는 시점을 향하여,
자신의 인생의 시간에 더하기 빼기식의 대차대조표의 상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또 그런 시간과 영원을 이으며 살아가려는 태도의 삶은
자신안에 물흐르듯 지나가는 시간을 아쉬어 하며,
그 안에서 시간이(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점점 자신에게서 줄어들고 있다)
주는 가치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인생의 사는 존재의 시도는 피안과 차안에서
맞주치는 삶의 태도의 이중적인 구조안에서 이상과 현실에 대해 조정하며,
자신의 전체의 삶의 지평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태도로 살아간다.

그/그녀자신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오늘의 교훈으로 받고 살며,
순간의 시간을 보내는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 사라질 시간안에 이루어야 할 일에 대해,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드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오늘이라는 자산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축적하는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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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획과 인생의 회복

이사야 46:8-10
8. 너희 죄인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라.
9. 너희는 오래전에 있었던 옛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나와같은 자도 없다.
10. 나는 처음부터 일의 결과를 말하였으며
오래전에 벌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고
내 계획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인생들이 아무리 선한척하고,
선한생각에 휩싸여 살아간다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안에서 태어나 죄를 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벗어날수 없다.

인생은 자신의 현주소가 어디에 속한지를 알아야 하며,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자신의 하는 일을 생각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나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살리는 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속성과 자신의 하는 일을 알린다.
인간이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걸어가야할 목적과 방향을 알고,
자신이 겪는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하는 의식속에 뿐 아니라,
느끼고 깨닫는 감정과 의지안에서 자신의 뜻을 알리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이미지를 새기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의 깊은 곳까지 살피는 분이다.

그가 인간을 자신의 파트너로 정하였지만,
인간들을 각기 하나님앞에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각각 제각기 제가 원하는 곳을 가다가, 방황하여, 길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하나님이 보낸 영을 받아들여,
그 영을 통해 알려지는 그의 음성을 접하고,
그음성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고 정한
이치와 법도를 마음에 새겨 살아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인간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소생으로 지었다는 것과
자신의 이메지(상)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 변질되어,
자신안에 자신도 모르는 빛인 하나님과 다른 어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끊임없이 빛과 어둠의 충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자신도 모르는 세력이 판을 치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 어둠이 유혹하고,
미혹하는 대로 끌려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다. 그만이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을 비쳐주는 생명의 빛이다.
이 생명의 빛이 이땅에 오므로 모든 것이(특히 어둠의 일들이) 드러났다.
그 빛을 보고 빛을 향해 가는 자는 진리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으며, 인생의 바른 길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상태와 처지와 운명에 대해 말씀하여 왔다.
사람이 범한 잘못으로 인한 결과는 인생이 겪는
모든 불행한(죄의 응보로 인한 역경, 저주,고난, 고통, 죽음) 문제들의 원인이 제공되었다.
세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해오고 있으며,
그 장래의 위기(다가오는 인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서
인간이 구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이 시작될때부터 계획을(잃어버린 하나님의 소생인
사람들을 다시 되찾아,
그들이 있어야 할 그 신분과 위치를 회복케하는 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모든 인생들을 향해 그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모든 인생들에게 영향을 줄것이다.
그 계획을 실행하였고 지금도 실행하며, 앞으로도 실행할 하나님은
그분자신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 깊숙이 와서,
인생이 겪는 일(문제들: 저주,고난, 고통,죽음)들을 맛보며,
인생의 당하는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였다.
그 계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도록 활동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한
그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인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마당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은 지금도 여러 인생들 주변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본래의 신분(자녀의 신분)과
위치(하나님이 머무는 자리)와 권한
(자녀의 권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죄의 모든 속박에서의 자유와
하나님이 허락하는 모든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파트너로 다가올 세상의 주역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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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영혼을 회복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는 꺼져가는 심지를 끊지 않으신다.
그것은 아무리 약한 자라도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고,
영혼이 회복이 되는 사역을 행하신다.

주님의 사역은 적게 시작할지라도 하늘에서 오며,
그의 영이 상한 심령속에서 그 연약한 영을
그의 사랑의 불꽃을 점화하므로
그의 자비의 사역이 시작이 되며,
또 그 완성을 이루어낸다.

그 사역은 그의 자녀들에게 능력의 은혜의 영광으로 다가와
어두움가운데에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심령들에게 빛을 발한다.
고로, 그의 사소한 은혜의 역사도
절절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심령속에서는 귀한 것이다.

이사역이 귀한 것은 새술은 새부대에 담는 은혜로,
절망스런 삶을 살아가는 심령속에
마치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과 같이 역사한다.
자신의 영혼이 깊은 속에서 매말라가는 가운데에
영적으로 기갈이며, 절망스런 상태에 있지만,
그런 심령에 다가오는 주님의 사역은
병들고 상한 영혼들을 회복케하는 귀한 사역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런 인생들의 약한 것을 지원하는 것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인간의 불순한 성품이 서로 상치된다.
그의 성품은 인간성의 온전함과 신의 성품안에서, 그의 비쳐주는 생명의 빛은
약한 인간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상태의 영혼에 불을 붙여,
병든 영혼들을 소생케 하는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비참함 가운데에서 시작하신다.

젊은 시작한 크리스챤들이 적은 일부터 시작되지만,
근본적인 가르침안에서 보다 점점 탁월한 방법으로 훈련을 받는다.
처음에 그들을 신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허물을 감추거나,
어떤 실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이 겪는 멍에를 잘 감당하여
그들이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봉사에 도달하기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 중에 약한자들은 무시당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이 만족할 만한 격려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약한자들에게 대해 그의 은혜로우신 능력으로 임하신다.
그는 겸손히 상한 심령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살피시고,
그들을 치료하고 회복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하여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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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심지

예수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않으시며,
그불꽃이 타오르도록 불을 붙이신다.

은혜는 처음에는 적은 것으로 다가온다.
믿음은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은혜도 처음에는 작으나,나중에는 아주 큰 영광을 인도한다.
위대한 완벽한 것들은 성장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간은 세계안에 가장 탁월하고 온전한 존재로 자라기 위해 조금씩 성장한다.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예수 그리스도도 가장 낮은자로 오셨으나, 천국보다 높은 자로 오르셨다.
거룩한 진리들의 결론은 감추어져 있는 원리들이 있다.
성도들의 거룩함과 열정도 처음에는 적은 불꽃에서 시작한다.

은혜의 적은 시작을 실망하지 말고,
거룩하고 흠없는 자로 선택된 것을 기뻐하며,
불완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함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은혜는 비록 작지만, 그 힘과 가치는 지대한 것이다.
눈의 동공이 작을 지라도 그눈으로 천국의 모든 것을 볼수 있다.
영광의 천사들이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은혜의 작은 알곡보다 세상에 가치있는 것은 없다.

은혜는 타락과 함께 역사한다. 은혜는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타락가운데에 있는 우리에게 역사한다.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타락된 부분들을 일시에 없애지 않고,
그들이 남은 타락된 부분들을 싸우기를 바란다.
가장 순수한 자가 순수한 행동을 할지라도
그에게도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에 어떻게 기도하지를 모를때에,
성령은 우리을 위해 탄식하듯 도우신다.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들은 상한 간구를 드릴수 밖에 없다.
심지가 꺼져가는 듯한 어려운 상태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모세가 홍해바다앞에서 그렇고, 다윗도 외국땅에서 그렇게 되었다.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절망스런 고백과 함께
자신의 영혼이 꺼져 가는 듯한 상태를 경험하였다.

자연과 은혜가 서로 어울려져 우리안에서 공존하며 있다.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은 안전과 자만에 기울이지만,
의롭다고 여기다가도 우리안에 허물이(stain)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안에 은혜를 통해 붙은 영적인 불이
우리안에서 남아있는 타락의 흔적인 육의 불에 의해,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Richard Sibbes's the Bruised Reed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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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갈대를 향한 예수님의 사역

의사는 통증이 심한 환자들을 다둘때에,
칼을 들이대고 아픈 부분을 자르지만,
환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치료한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싸매어주시고,
은혜로운 돌보심으로 하나님앞에서 중보자요 구주의 역활을 하신다.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가난한 심령이 복이 있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양을 돌보는 목자와같이 하신다.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 양무리들을 위해 제사장으로 죽으러 오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 우셨으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중보자로 기도하신다.
그는 온유한 왕으로서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왕이었다.
그는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시는 모든 질병을 가진이들의 의사였다.
우리의 죄를 위해 담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그는 그의 피로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자 죽으셨다.

우리자신들을 위하여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에 나가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처를 감추지 말고, 그에게 상처난 자신을 그에게 열어보여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니,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어 하지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왕국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으며,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의 상처난것을 그리스도에게 가져가 치료받게 된다.
그분은 나를 위해 유혹을 받으시고 시련을 겪으시므로
우리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니,
사단이 자신을 삼키려고 깨뜨려고 달려드는 모든 것에서
우리들 자신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단이 망가뜨린 모든 파멸들을 보상해줄 것이다.
특히 그는 약한자들을 돌보신다.
교회안에 가장 약한자라도 그의 돌보는 날개아래에 의존하여,강하게 될 수 있다.

누가 상한 갈대들인가?
어떻게 우리가 자비를 기대하기를 알수 있는가?
상함은 자신의 지는 십자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상처들을 말함이며,
우리의 양심이 죄의 영향력아래에서, 하나님의 분노에 신음하는 우리의 영혼이 신음하며,
모든 타락한 농담들이 병들고 상처난 몸을 만든다.
지난 날의 죄가 자신들을 가두고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주님은 자신의 죄에 대해 심판하셨지만,
이제는 주님은 우리 자신들을 치료하신다.
자신의 죄에 악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의 큰 은혜를 경험한
그는 이제 자신에 대해 겸손하며 타인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며,
성령안에서 가장 행복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을 대하며,
상한 마음의 내면의 살피는 일을 통해 성화를 이루어 가는 일에 유념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것인가?
우리의 상함에 하나님앞에 우리의 상함의 상태에 대해 인식하며,
우리가 범한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앞에 대적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가면 그는 우리를 배나 어루만져 주실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완고함을 풀고, 우리가 저질은 죄를 적대시하여,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감동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죄는 그저 있게 되고 더이상주님앞에 나가지 못한다.
죄를 시인하는 것은 회개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서게한다.
우리의영혼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빛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상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이지를 묘사할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고쳐질 것이며,
비록 우리의 오른손이나 눈을 뽑아야 할 처지일지라도,
우리의 잘못된 것들이 개선될 것이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거나,
우리 마음의 허물을 가리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공포나 짧은 슬픔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며,
우리의 머리를 조아려 겸손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회개를 거부하는 거룩한 횡포를 하게되면,
우리의 죄가 우리를 처벌받는 것보다도 더한 악취를 겪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영적진리의 근본이다.
자신의 영혼이 상처입은 상태에서 천국가는 것이
안일하게 있다가 지옥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우리가 처벌에 대한 것보다 죄자체 대해 슬퍼하면,
우리가 상함을 겪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외부의 불평으로부터 오는 슬픔은
하나님의 기뻐하시지 않게하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 우리의 영혼을 짓누른다.
왜냐하면 그런 슬픔은 우리의 안과 밖을 아울러 전인에 영향을 주며,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격한 불평때문에 믿음의 효력이 잠시 정지되어진다.

갑작스런 고통(스트레스에서 오는)은 우리의 영혼에 격류와 홍수와 같이 다가오면
영혼과 몸의 연결로 인한 원인때문에 우리의 몸에 병이 찾아온다.
우리의 영혼의 활동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현실에 압도된 믿음은 죄에 대한 슬픔을 통해,
비록 죄로 인한 불행스러움이 있지만,
다시 막혔던 둑에 물이 다시 흐르듯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준다.

상함의 철저한 사역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하게 하는 것같은 시련에서
우리가 인내하면,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된다.
우리안에 있는 거룩한 좌절은 참된 소망의 근거가 된다.
도울힘이 없는 자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도움이 되시며,
가장 약하고 낮은 영혼까지도 돌보시는 사랑을 가진 분이다.

Richard Sebbes's The Bruised Ree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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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나약함과 회복

청교도의 시대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준 사람중에 하나인 리챠드 시브스는
상한갈대와 같은 인간의 글에서 영적인 회복과 영적인 격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즉 그의 은혜의 사역안에서 연약한 자신들이 회복할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1.갈대와 상함에 대해
구약 이사야예언자은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은혜의 사역을 할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사역은 상한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이룰것을 알리고 있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오신 사역을 통해,
고난을 겪는 사역이었지만, 그사역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사역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벌어진 관계를 화해케하는 사역이다.
성도들의 신앙과 구속받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체결된 조약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구주로서의 사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수님사역의 방법에서, 예수님은 화려하게 사역을 하지 않고
겸허하게 그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의 사역이 마치 상한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도 끄지 않는 자비의 사역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약한 존재로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개종이후에 상한갈대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램은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상함의 의미에서, 인간의 상함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할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며,
인간의 죄로인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의 죄와 비참은 인간을 상함으로 이끌어 인간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
오직 가난한 심정으로 구주를 바라보고 자비와
약속된 은총을 갈급해 하고 사모하는 길밖에 없다.

상함의 선한효과에서, 인간이 겪는 상함은
인간자신이 개종하기전에 가지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앞에서 교만하고 높아진 생각들로부터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게하는 요인이 된다.
인간이 자신안에서 방황하며, 나그네로 살던 습성을 좋아하며,
탕자와 같은 상태에 빠진 채 살아간다.
이런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데 둔하고, 도피하고픈 심정을 나타낸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범죄자와 같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교묘히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이 인간의 상함은 예수님에게 인간을 향한 높은 댓가를 치르게 한다.
이것은 복음이 복음이 되며 왜 도덕성이 효력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인한 상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받지 못하게하지만, 그죄와 같은
인간의 벌거벗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보다 감사하게 하며, 오히려 인생을 열매맺게 한다.

인간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불행과 상함은
인간에게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타락이나 배교은 처음에 인간에 죄를 정하지 않으나,
개종이전에 인간의 오만한 생각에 대해 법의 채찍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령의 인간을 낮추게 하는 사역은 인간에게 어떤 고통과 함께 죄를 상기시키지만
그가 인간을 성화시킬때에 치유와 정화을 하게 한다.

개종이후에 인간은 자신의 상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자신이 강한 참나무가 아닌 나약한 갈대라는 것을 알게 하기때문이다.
비록 갈대같은 인간에게 상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자신의 성품안에 있는 교만함을 상기시키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비를 통해 살아가도록 한다.

그런 상함은 강한 자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때에,
나약한 크리스찬들을 좌절하지 않게 해준다.
베드로는 결코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강함보다,
더 큰 시련앞에 당한 비참함에 빠져 쓰디쓴 눈물을 흘렸다.
이런 예는 교회안에 일어나는 좌절이나 상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이 위로받지 못하는 영웅적인 행위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상함에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인간을 상하게 하는
그의 심판이 행사되면 아무도 그심판을 견디어 낼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그런 심판을 겪으므로,
얼마나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불경겅한 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모르는 불경건한 영들은 마음을 애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참한 존재라 비난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한 사역으로 일을 하신다.
인간이 본성으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불순종과 치유받기 싫어하는 속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Richard Sibbes's The Bruised Reed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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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기는 사람

누가복음 4:1-13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1.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2.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는 몹시 시장하셨다.
3.바로 그때 마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
4.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라고 쓰여있다.”
5.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 잠깐 사이에 셋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면서
6.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7.그러므로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것이다.”
8.그때 예수님이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쓰여있다.”
9.또 다시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아라.
10.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11.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쓰여있다”
12.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성경에는 ‘주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13.마귀는 이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적절한 시기가 올때까지 잠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인도를 따라,
선구자였던 요한에게 받으신 것이다.
인간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주님이셨지만,
그는 인간 요한에게 자신을 숙이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드러내심에 순응하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자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에게 충만하신 성령의 임재가 함께 하셨다.

그가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그가 자신에게 향하는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신에게로 집중하는 것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하나님에게로 촛점을 맞추게 된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자신안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하나님중심의 태도로 그의 인도를 따르는 상태이다.
성령충만은 자신에게 촛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촛점이 맞추어, 자신이 하나님의 채널에 맞추어 살아가는 상태이다.

사명을 감당하기전에 먼저 자신을 이길수 있는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공적인 일을 하기전에 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상태에서
자신을 공적인 일에 맡길수 있는 단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받은 시험은 사사로운 일이나 자기중심적인 사고태도에서
타인들을 위하는 태도로 나가는 전단계로서
주님은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사명자이심을 보이셨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시험이 있다.
시간을 통해 오는 기다림의 시간들, 혹은 일정기간의 훈련을 거치는 과정들이 있다.
전문적인 일이나 기능을 습득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요하며,
보다 나은 단계에나, 상급의 상태로 옮아가기 위해 여러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인생의 삶의 현장에 곳곳에 자신을 훈련케 하는 역경이나, 고난의 기간이 있다.
지도자를 세울 때에도, 사람을 검증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시험을(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 이길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때로는 은혜가 충만한 곳에 여러가지 시험이나 시련이 놓여 있기도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는 편에서 사람들을 돕고, 세우고, 그리고 인도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인도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다. 금식은 자신을 이기는 지름길이다.
금식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이다.
인간이 금식을 통해 자신(육성)을 이기고 자기한계에 부딪치며,
그안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에 의존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맞추어 자신안에 육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는 영성을 이루게 한다.

반면에 사단은 인간을 시험에 빠뜨리고, 시험에 지게 유도한다.
인간에게 다가와 여러 가지로 인간을 유혹하며 미혹한다.
때로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거나, 혹은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어리석은 가르침이나,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미혹한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그의 아들의 신분이나 권위를 걸고 유혹을 한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걸고자 하는 시험제안에는 상당한 전략과 모략을 갖고 접근한다.
고로 사람들은 그런 유혹이나 시험을 이기기가 쉽지않다.
그러므로 시험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는 시험의 의도를 잘파악하여,
그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시험에 드는 대부분은 자신속에 있는 걸림돌과 같은 편견이나
사로잡힌 생각때문에 그렇다.
예를들어 초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쉽게 세상으로 넘어지는 것은
그만큼 세상적인 유혹이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태도등이 강하게
그들자신에게 다가와 영형을 주므로,
쉽게 세상의 그릇된 습성에 빠져(자신이 알코올에 약한경우에
쉽게 알코올 중독에 돌이키게 되듯이말이다)세상에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금식하신 상태라, 가장 음식에 대한 굶주림이 있는 상태였기에,
빵은 그에게 절실한 육체적인 요구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예수님에게 그 자신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앞에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범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시험을 물리친다.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이나 시험의 도전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방어하시며,
시험을 물리치신다.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며, 하나님의 뜻의 선언이다.
그 말씀은 예언되고 약속된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의 사역이 나타난 하나님의 언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로고스로서의 말씀을
자신의 내면화를 통해(레마의 말씀:자신에게 주어진 말씀)
자신이 당하는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안에 있는 믿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내면화된 영이요 생명인 말씀)은
자신의 믿음을 받쳐주는 버팀목의 역활을 하며,
여러가지 시험(사단에게서 오는)을 물리치는 공격용무기로 활용이 된다.

마귀는 인간에게 자신의 허구한 것을 과장하여, 유혹하며,
세상의 여러가지 것으로 인간을 이끌어 허왕되게 살도록 유도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 하루 아침에 출세하려는 이들,
과정없이 목표에 도달하려는 이들이 있다.
마치 그들은 세상의 것을 쉽게 얻을수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중에는 항상 3가지 시험을 조심해야 하는데,
세상의 물질세계를 세속의 눈으로 보는 안목의 정욕과
자신속에 있는 나약한 육체의 욕구에 쉽게 자신을 충동하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자신을 허왕된 세상을 바람잡으려듯 자신의 세상영달에
뿌리를 둔 생각이나 태도에서 나오는 자신안에 있는 이생(이세상)의 자랑거리이다.
모두가 세상적인 유혹으로 허왕된 마음에 부딪쳐
자신을 옭아매는 시험의 수단으로 자신에게 다가온다.

헛된 꿈을 갖고 사는 이는 허왕을 좇아가다. 패가 망신한다.
사단은 자신이 교만하여, 저질른 죄의 대가로 그의 아름다운 지위가 박탈되어,
자신의 위치에서 탈선한 자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양 착각하며, 행세를 한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헛된 꿈에 부풀게 하여,
자기와 똑같이 망하게 하는대로 이끌어간다.

주님은 마귀가 거는 시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용하셔서 물리치셨다.
말씀은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통해 바르게 인용하며,
해석하며, 적용할때에 말씀의 본뜻이 살아나며,
그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이 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살아있는 주님의 메시지로 자신에게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허왕된 꿈을 부추기는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삶의 목적의식이 있다.
성도들 자신의 삶의 목표는 부귀영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성공에 도취되어 그것을(세상의 욕망들, 성공, 부귀영화)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은 자신의 생애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주님의 뜻하심을 이루며, 그안에서 자신의 도달할 자기완성과
자기가 해야할 자기사명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가장 쉬운 길(죄를 짓는 일이나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쉬운 일)로 빠지도록 이끌어 간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길은 모두에게 한번 주어진 인생이며,
결코 모두에게 쉬운 길은 아니다.

그리고 지름길보다는 길게 놓여진 마라톤의 경기코스와 같이
시간의 과정을 겪어야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며, 일의 성취도,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시간과 노력이 투자함이 없이 성공이나 소득을 얻으려는 것은
헛된 것을 좇아가게하는 것이다.

때로는 마귀는 쉬운 길로 인생들을 인도하여, 망해가는 쪽으로 유도한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는 것을 유혹한다.
사람들이 과대망상(지나친 자기능력과시)이나, 허왕된 꿈
(벼락부자, 헛된 명예와 뱌락출세만을 추구하는 태도)은 추구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며 사는 생활을 이다.
그렇지 않고 그런 헛된 것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의 손에서 자기가 추구하는 허왕된 것들은 쉽게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인생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있으며,
각자 인생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구체적인 리가 있지만,
동시에 인생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일들이 있으며,
옳은 것을 선택하며, 결단하여 이루어가는 책임이 있다.

인생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이 갖추어야 할 순종과
겸손의 근본적인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를 요구한다.
또한 인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책임지는 태도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실수는 자신이 편리하게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시도이다.
신앙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돕는 역활을 한다.
신앙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도움아래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것이다.
목적이 변하여 수단으로 전락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을 목적으로가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신앙인 에게 자신이 주님을 믿고 주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기가 주인노릇하는 것과 같다.

그런 태도는 자신의 신앙적인 활동이나 봉사를 조건부적인 신앙의 태도로 일관 하기 쉽다.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쉽게 낙담하고,
더나아가 신앙의 깊은 단계로 나가지 못하는 얕은 신앙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기복적인 신앙의 맹점은 자신의 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세우려는 것이며
그런 신앙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항상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이와 같은 유아기적인(자기에게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나 타인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태도) 자아중심의 신앙에 머물게 한다

그외 잘못된 신앙의 폐해중에는
종교적인 오용이나 남용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며,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릇된 영적인 가르침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하게 하기도 한다.
편협적인 신앙관은 자기안에 갇힌 소아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신앙형태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형식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시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나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많은 책망을 주셨다.
당시에 조상들로 부터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철두철미한 종교인들에게
오히려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지 않고
자기가 우상으로 놓여있어,
모든 종교적인 관습이나 실천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며,
자기우상의 테두리안에서 외형적인 종교인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저주하셨다.

여기에 주어진 시험의 일을 통해,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받은 사단의 유혹과 대비된다.
그들은 그 사단의 유혹과 시험에 걸려 자신들이 넘어지게 된 것을 생각케 하지만,
주 예수님의 시험은 그 시험을 통해 자신이 테스트를 넘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생애를 살기 시작하게 된다.

인간이 받는 시험은 인간의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
첫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선악의 열매를 따먹고 싶은 자신들속에 있는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욕심이 결국 자신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까지 올려놓는 결과가 되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그들의 욕망은
그들을 더 낮은 인간수준이하의 타락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이 세월에, 하나님을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힘들게 하였다.
결국 그들 출애굽을 한 해방세대는 광야에서 그들이 겪는 환경에서
오는 힘드는 삶의 조건과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는 조급함과
자기들의 우상들(이집트의 우상들,
그리고 자기안에 있는 불신이나 불순종의 우상들) 때문에
거의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자신이 받은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므로써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나 올바른신앙을 가지고저 하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셨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주님과 같이 시험을 이기고 나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힘이나 권한을 추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을 향한 뜻에 있어서나,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으로 시험을 이기셨다.

시험을 통관하는 자만이 합격이나 혹은 일정수준의 자격을 갖춘 일꾼으로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된다.
시험받음은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가늠케하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실제 시험에 임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시험을 받아야 하는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공직자가 공직에 나가기전에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도
그 사람을 판단하고, 살펴보고,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험을 받는 일중에 자신의 사람됨을 갖추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다.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진정한 시험의 합격자인것이다.
자신을 이긴 사람은 세상에 그어떤 것을 정복한 것이나,
무엇을 얻은 것보다도 더 강한 자긍심을 갖게 하며,
자신을 이긴 사람은 어느 일에도 적합하게 일을 추진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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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지 단계의 구원의 삶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의 은총에 대해 살펴보고저 한다.
주님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성도의 전인구원으로 인도하신다. 

성도들이 받은 구원은 3가지면에서  살펴볼수 있다. 


그것은 신앙고백과 더불어 시작되는 순간부터,
즉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생애적인 기간들을 통해,
구원의 시작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영적인 일생이 진행이 되어간다. 
그 과정을 통해 성도가 가진 믿음을 통해 영적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구원의 현재성과 진행형과 미래완성형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고 믿은 즉시 성도들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은
즉시 현재나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이 담긴 축복이 시작된다. 
그 축복에는 죄의 정죄당함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며
(자신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사함받아,
자신이 비록 죄를 짓는 육체안에서 살지만, 이미 의인으로 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음),
죄의 형벌(죄의 속박과 그 결과에 의한 저주받음, 그리고 절망과 고통에서 사는 상태)
에서 벗어나, 의(주님의 의) 은총안에사는
자녀의 권리안(거지같은 죄인의 모습에서 왕같은 자녀의 신분변화)으로 살게 되며,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나라(위치이동: 자신의 영역이 옮겨져
신앙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에게 인정을 받고
이후에 천국에서 영생과 상급으로 주어짐)로 옮겨지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변화에 이어 의식변화(저주받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서
축복을 통하는 긍정적인 인생관)를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자신의 옛 죄(원죄, 자범죄)를 범한 옛자아(자신이 주인노릇하는 자아)에서
새로운 영적인 자아에 눈을 뜨고,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이루며 커가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자아(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아)의 성장을 이루어 간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받은 구원은 자신의 영적인 일생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와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의 삶의 과정이며, 연속이다. 

이 구원에 관해서, 성도들의 생활을 통해 계속적으로 성장케하는 책임이 있으며,
사람들의 삶이 전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여 믿음으로, 영혼의 생명을 얻어,
그 생명을 풍성하게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앙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로부터 시작이 된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신자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안에서
모든 일이 형통(고난도 실패도, 좌절도, 고통도
자신의 영성의 성장을 형성하는 유익을 가져오므로
주님의 손끝에서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합하여,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 내는 창조주의 솜씨에 의존함)하게 되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모든 경험들이 열매를 이루어 간다. 

 

더나아가, 구원의 샬롬의 웰빙(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인)의 상태는
자신의 영혼의 만족과 성장과 그리고 더불어오는
육체의 온전한 (늙어가는 것도 건강한 상태에서)생활에 있으며,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만족한 태도로 살아가는 상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샬롬의 구원의 축복은 전인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축복이며,
인간의 상태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발전을 가져오며 그분의 손길안에서 자기완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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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씀과 성령의 상담

요15:1-8

 

참 포도나무비유에서의 주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교제의 갱신하는 문제가
신앙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려면, 자신의 믿음이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주님과의 산 교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은 신앙의 터전을 내리도록 힘써야 할것이다.

 

그 뿌리는 자신의 주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산 믿음에서 시작이 되며,
그 살아있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믿음으로 발전시키는 들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여 그 말씀을 생각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은대로 자신의 마음속에 되새겨서(반복해서 말씀을 상기하며,
그 구체적인 가르침의 교훈이 자신의 생각의 시스템에 새기도록)
그 말씀의 메시지와 교훈이 자신의 의식속에 의식화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실천 되어야 한다. 

 

그 산 믿음은 단지 성경을 문자만이 아니라,
그 기록된 말씀을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일때에,
자신안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법으로 주어진다. 

고로 자신이 성경을 읽고 듣는 선포되어지고 주어진 말씀안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을 단지 문자에 매이지 말고,
자신의 영에 부딪히는 살아있는 언어로 받아들인다.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큐티를 안하면 불안해하는 율법적인 태도에 대해
자신의 믿음시스템이 문제라면 아직도 자신의 믿음이
율법주의적 사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에 위해 자신에게 말씀의 내용을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경우는
자신의 영을 죽이는 종교나 관념적이며,형식화된 신앙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즉, 문자의 교리에 매이는 것과 종교적인 형식화에 매이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종교직인 괴로운 짐을 더 얹어주는 경우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적인 문제에 대해 성령께서 지적하는 권면을 듣고
자신의 영성의 흐름에 대해 근본적으로 갱신을 가져오는 .
영혼을 살리는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씀을 읽고 묵상하든, 혹은 선포된 말씀을 듣든지,
자기자신에게 믿음안에서 자신의 영을 살리는 말씀을 부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 생명력있는 믿음이 생기고,
자신과 남을 용서를 하는 넉넉한 신앙을 갖게 되어,
자신도 살리고 풍성하게 하게 하며,
남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살리는
사람의 눈높이의 영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어
자신도 남도 영적으로 죽게 만드는 문자에 매이는 율법적 신앙에서 벗어나,
영혼을 움직이는 신앙의 영향력아래에 머물러 있게 된다.

 

예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
그것은 "내 양은 내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대로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자신의 영혼안에 확신과 기쁨과 평안으로 다가온다. 

이때에 조심할 것은 주님의 음성외에 두가지의 음성에 주위를 해야 한다. 

마귀의 음성과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분별하여,

그것으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지키며,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구체화(순종하는 자신이나, 설득되는 자신)할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듣든지 상고하든지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믿음이 자신의 심성안에서 생겨 난다.
그리고 생겨난 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가져오는 축복이 된다. 
말씀을 통해 얻은 믿음은 자신에게 실상에 대해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자신이 예수님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성령충만한 모습을 바라는, 그리고 예를 들면,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중에 하나인,
가족구원을 바라보는  자신의 믿음안에서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중에 “나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믿음을 창출 한다. 

 

고로 성도는 믿음으로 일을 한다. 
참성도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힘쓰며,
더 나아가, 자신의 삶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한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첫번째 바라는 것은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채널이 강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어
자신을  상담을 하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갖든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사역에 대해서는 바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그 사역에 대해서도 성령으로 역사하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성령의 재충만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도록 자신이 열려있으며,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전달되도록, 성령으로 열려진 말씀에 대해,
항상 마음과 영혼이 아울러 함께 응답하는 열린 자세로 
자신의 영성의 발전을  이루도록 할 일이다.

 

특히 성령이 성도들 자신에게 권면하는 것으로,,
성도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메시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성령안에서 자기상담을 하여
자신안에서 지속적으로 개선과 치유가 일어나,
전인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하시는 사역에

자신을 열어 놓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성령을 자신의 상담자로 모시고,
자신을 상담하는 일은 항상 지속되어야 할 성도의 거룩한 의무이며,
자신에게 주는 무한한 축복이며,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고로 자신이 시간을 정해서,
성령안에서 무릎을 끓고 상담받는 일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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