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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02

크리스챤 묵상과 내면의 치유(1)

새하늘, 새땅, 새마음, 새로운 몸

성도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약속으로 주어져 있는 소망을 자신의 마음과 정신, 또한 동기들,그리고 매일의 분별로 실제화하는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임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변화를 일으킨다.
세상의 절망과 죽음을 극복하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초청을 받아,
단순히 영생을 주는 피안의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마음에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실로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전통이나 가르침들은 원래 인간들이
잃어버린 영생을 주는 영향력을 사람들이 힘입고 살도록 돕는 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어떤 확실한 내면의 자각이나 혹은 묵상의 조명을 개발하는 필요성을 통해
자신안에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을 치유하며, 약속되어진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기 위해 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죄책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여왔다.
우리가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것을 현대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보면, 실존적인 고통에 대한 물음을 갖게한다.
어떻게 역경과 고난의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살수 있을까?
인류의 인재적인 재난이나 혹은 환경적인 소멸이나 재앙에 직면해 있는 세계를
어떻게 희망으로 바꾸어진 미래를 열것인가?
그 인간실존에 대한 희망에 대한 질문은 실존의 다른 문제들
즉 인간들의 죄책, 진정성, 사역등에 대한 문제를 풀기전에 답변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사람들이 우주적이고 개인적인 위기가운데에 살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더라도,
인간생활의 출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
그 패러다임은 개인적이고 우주적인 고통에서 구해줄 만한
하나님의 희망과 더불어 함께 인간문제를 풀어가는
인간의 책임적인 참여를 통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패러다임의 근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새로운 생명은 낡은 것으로부터 소생한다.
죽음은 결코 인생에 마지막 답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세상의 존재들을 재창조하며, 갱신하는 것으로 활동한다.
그런 이슈들에 대한 해결책은 개개인적으로
어떻게 영원히 재창조하며 갱신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을 개발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이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그들의 신앙안에서 구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가를 배워 왔으며,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안에 있는 내면의 갈등을 다루는 가를 익혀왔다.
그리고 그들자신안에 하나님 센터의 중심적인 역활이나 활동들을 듣기를 터득해왔다.
우리는 그들이 배운 내면청취의 여러가지 방법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Dwight H. Judy, "Christian Meditation and Inner Healing"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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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영성유지를 위해


하나님중심의 삶을 살고저 하는 자신의 태도가, 저으기 자기중심적일때에,
그 숭고한 생각이나 묵상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비쳐질때가 있다. 
신앙인들이 쉽게 빠지는 자기연민이나, 자기도취에 대해
항상 말씀안에서 자신을 비쳐보는 영적인 거울로 자신의 동기와 목적이나,
자신이 하고저 하는 영적인 헌신의 깊은 생각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인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도의 목적에 대한 가르침처럼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영광이라는 문구를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거룩으로 포장할지라도 자신안에 있는 숨은 불순한 동기나,
그릇된 방향성은 사람의 깊은 속을 모두 다 헤아려 살피시는 하나님의 안목에 드러나게 된다. 

 

자신이 헌신하는 영적인 시간들, 드리는 몸의헌신들,
주님과 교제하는 순간들속에서 항상 면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다 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자신의 영성의 성장과 전진에 장애가 될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겪는 여러가지 일들이 오감을 통해
항상 자신에게 두뇌의 인식창고에 이성으로나,
감성으로서 각각 낱개의 정보를 입력하고 있다. 
그 정보들이 모여 자신안에 하나의 사고적 가치관이나
감성적 습성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신앙인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정보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 

오감중에서 가장 쉽게 들어오는 감각의 창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보의 창고에 쌓이게 되어, 자신의 영성의 집들을 이루는 재료들이 되어진다. 

그 재료들중에 어둠에서 온 불순한 것들과, 방종에서 온 악한 것들,
헛된 가르침이나 정보에서 들어온 부정한 것들,
잘못된 윤리나 도적에서 온 그릇된 것들,
영적인 무지로 인하여 들어온 어리석은 것들등을
판단하고 살피는 자신의 영성의 바로미터의 불빛이 켜있어야,
그런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서 걸러내어, 마음에 뿌려져
자신의 영혼에 더러운 것들로 남아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회개와 내면청소를 해야 건강한 영성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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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찾아가는 인생의 태도

인간이 신을 찾는 데 가져야 할 태도는
신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를 향하여 가난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가는 것일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에게 신의 은총을 입는 접촉점은
두가지의 사실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신을 이해하는 분명한 식견으로 신앞에 나가는 인생이
신의 영광스러움을 통한 신의 관대함과 용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인간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기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해는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간은 자신이 신의 소생으로 자신의 처지가 항상 신을 갈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배고픔이 있는 가난함에 대한 철저한 자기인식일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인생자신이 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가?
대개는 자신의 나약함에서 오는 인간한계에 부딪치게 될때에 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는 다든지,
혹은 사랑하는 자녀가 교통사고나, 죽을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은 인생의 한계를 생각하며, 신에게 두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어떤 반응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하고 신에게 반항하며,
무시하며, 신을 떠난 인생의 절규와 같이 애써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반면에 자신이 어떻게 할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나 사건에 대해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자신이 신의 손길을 찾아나서는 심정을 갖게 된다.

인생의 삶의 밑바닥과 같은 절망적인 경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하는 것은 자신안에 있는 내면의 절규와 영혼의 목마름을 통해,
인간속에 있는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케하는 신을 찾아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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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우울증들과 성경에 나타난 우울증이야기(우울증3)

며칠전에 또 우울증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유명한 연예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우울증으로 인한 반응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울증이 어떤 일이나 사건의 반응에서 일어나는 것과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요인,
일차적인 혹은 이차적인 원인, 단극적인 혹은 양극적인 현상으로 일어난다.

어떤 일이나 사건의 반응에서 일어나는 우울증은
(때로는 외인성이나 혹은 신경성 우울증이라한다)
주로 어떤 실제나 상상에서 일어난 상실내지는 상처에 대한 반응으로
혹은 걱정스런 감정의 높은 수치의 상태에서일어나는데,
그것은 그기간이 짧을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조절이 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에서일어나는 (내인성의)
(그것을 또한 자율적이며 정신적인우울증이라 불리운다)
마음의 내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며
때때로 그것은 자기파괴적인 성향이 있는 강한절망의식을 동반하며
그 증상이 오래가기도한다.
그우울증치료하기가 용이하지 않으며, 그 우울증의 재발가능성이 높다.

일차적인 우울증이 일어나는 것은
이차적인 요인인 다이어트의 부작용이나 암이나 당뇨
그리고 인퓰레자 감염으로 인한 병의 결과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단극적인 (unipolar)우울증은 일차적인(주요한)심리적인 장애로서
한 기간이나 그 이상의 우울증의 일어나는 조건하에서 일어난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 우울증은 양극적인(bipolar) 우울증으로
우울증적인 행동이 스며든 조적(정신적인 우울증의 반대인 조적인 현상)인
증상의 기간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이런 단 혹은 양극적인 우울증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실망이나,
실패나, 그리고 상실에서 오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증상인 우울증의 현상들과는 구별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우울증은 사람들에게 다 일어나기 쉬운 평범한 현상도 있지만,
때때로 그 우울증 증상이 복잡하고 힘든 상태의 현상으로
정확히 우울증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으며, 치료하기도 용이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에서는 우울증이라는 임상적인 용어는 다루지 않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런 증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69편과 88편, 그리고 102편은 시인이 겪는 우울증적인 현상을 절망의 노래로 언급하며,
그런 좌절속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편43편에서 다윗은 삶의 우울과 기쁨등 양쪽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영혼아 왜 너는 의기소침하여 있으며, 내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가?
그리고 불안해 하는 가? 하나님에게 너의 희망을 두어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곳에서 우울증의 증상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욥이나 모세,와 요나와 베드로,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전체가 우울증을 겪기도 하였다.
예레미야예언자는 이스라엘민족의 절망이나
우울한 현상을 애가(비탄, 통곡)라는 책 전체에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는 가멜산에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대결하여
승리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살인자이며 우상숭배자인 이세벨왕후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광야로 도망을 가, 거기에서 극단적인 절망감이나 자기낙담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며(자살충동)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천사에 의해
그 상태를 치료받을수 있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극단적인 슬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극단적인 우울증상태에 빠져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이 매우 슬프며,
그 슬픔속에서 깊은 고통을 통해 죽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Amplified Bible에서 표현된 ).

이런 예들은 성경이 사람들이 사는 인생의 현실이
수많은 슬픔의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생에게 꼭 필요한 희망과는 대비되는 인생의 절망적인 현실성을 알려준다.
믿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생의 우울한 현실들을
돌파하는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기쁨을 신앙안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요즘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성경에 이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생들에게 소중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며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포기하는 이중적으로 짓는 심각한 죄이다)
두 연예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데 충격적이며
새삼 그들의 삶에서 오는 우울한 현상들과 삶의 도전들을
이기지 못하는 신앙의 무력감을 금할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성경은 강조하기를 이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과 그로 인한 하나님나라에서 오는 풍성한 인생의 확신은
인생이 겪는 모든 인생좌절들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의한
희망이 넘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생의 모든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것을 기도하고 있다.
(게리 콜린즈의 Christian counseling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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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안에서의 인생의 자유

요한이 기록한 기쁜 소식 8:31-32
"너희가 내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멀기만 느껴질때가 있다.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스쳐지나며, 자신의 기억에서 곧 사라진다.
그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마음에 부딪치지 않아 메아리로 남았다가 이내 잊어버리게 된다.
말씀을 붙잡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안에 되새김질해도 그 말씀의 맛이 둔탁하기만 한다.

자신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머물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의식안에는 가득세상의 언어로 꽉차있다.
자신의 생각에는 주님의 말씀을 넣어둘 의식의 창고가 없다.
세상의 잡다한 사상이나, 규칙들이 자신을 얽어매어,
영적으로 맹인이 되게 하고,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육적인 소리에 한눈을 팔아,
말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셨다.
그는 말씀 그 자체이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근본 인생에게 생명을 주는 영생의 말씀이시며,
그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그는 하나님이 육신이 된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셔서,
인간세상에 계시되고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임하셨다.

오늘날,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말씀의 주제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맞추어 져 있다.
성경을 어디나 펴서 읽어도 쉽게 주님의 음성과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

시초부터 시말까지 전개된 계시된 말씀은
인간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주는 메시지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된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예언들이 때가 되어 이루어 진다.
예수님 그는 또한 선포되어진 말씀으로 세상 어느 곳에 든지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는 곳마다,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안에 주님은 그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말씀이 알려지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 말씀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경험하는 이에게 생명의 메세지로,
병들고 찌들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부요한 삶을 주는 능력의 언어로,
어둠에 처한 인생들에게 빛의 전파로,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공에 대한 강한 의욕의 언어로,
낙심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메시지로,
절망하는 이웃에게는 소망의 닻으로 다가온다.

주님이 계시는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주님의 영이 임하신다.
주님의 영은 선포되어진 말씀을 통해 따르는 표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자극과 격려와 치유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며,
그의 임재하심을 동반한 말씀의 선포을 통해,
더 명료하고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온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고 그를 인생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들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주님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며,
이 세상속에서 특별하게 주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실천하는 제자가 된다.

진리는 단지 언어이며, 이성이다라고 여기는 경우는
진리를 받은 자신의 신앙이 이성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의 판단을 좇아 신앙의 신비의 부분이 상실된다.
그리고 이성을 좇아 진리를 추구하다보면
자신속에 있는 진리는 자신의 이성의 규격된 틀안에서,
진리의 맛은 잃어지고, 그 진리의 보석의 가치는 화석이 되며,
자신을 율법화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원리이다라고만 여기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은 자신이 받은 원칙대로 영적인 원리나
혹은 교훈으로 받은 가르침을 따라 행동을 하지만,
진리에서 나오는 인격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교제는 성립이 되지 않고,
더이상 진리와 주고 받는 살아있는 인격인 하나님과의 신앙의 깊은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진리는 과연, 이성이나 원리일까? 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넘어서,
진리는 인격이며, 생명이며, 우주를 말씀(진리)으로 창조한 하나님이며,
우주의 원리를 세운 창조주이며,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교제를 나누며, 대화를 하기를 원하는 주님이다.
그 진리이신 주님을 아는 자가 진리안에 거한다.
진리는 단지 두뇌의 이성이나 지적인 활동으로 아는 것뿐 아니라,
일회적이든 다양하고 다차원적인 경험으로든 자신의 오감에서 오는 경험으로 알며,
인격이신 진리와 의 인격적인교제의
인생경험의 일정한 역사(길든지 짧든지 그러나 대개는 연결되어가는) 인생의 과정속에서 알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가려는 사람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은
늘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과거에 머물러 그분을 판단하지 말것이며,
과거의 습관이나 패턴으로 오늘의 진리경험을 왜곡하지 말며,
오늘의 경험의 한계에서 미래에 다가올 진리이신
그분의 거대한 역사(이루어지지 않은 많은 예언을 기록된 성경은 포함하고 있다)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를 머물 예언이나 약속에 붙잡힌 채로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는 오늘의 진리이신 주님의 숨결이나
손길이나 발자취를 자신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우연으로 여겨서도 안될 것이다.

신앙은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우연의 일들을 필연으로 해석하여,
진리를 알며 진리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가지가지의 삶의 얽매이는 현장속에서 살아간다.
먼저는 인간의 시조가 범한 원죄의 속박은 인류모두에게 죄의 구속으로 얽어매어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죄의 갇혀진 삶의 환경안에서 살아간다.
그 죄는 인생의 현장에 불합리와 불법과 저주와
형벌을 가져오는 인생의 굴곡안에 인생자신을 갇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죽음과 멸망으로 달음질하는 처절한 절망하는 삶으로 전락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주님은 인간을 갇히게 하는 모든 것을 해방하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인간을 대신하며 죄의 댓가인 죽음의 형벌을 받아,
모든 갇힘으로부터 인간해방과 자유를 주셨다.
그 진리안에 죄와 그영향력의 모든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을 맛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가져다 주는 인생의 능력과 삶의 만족이 있다.
진리를 알고 따르는 자들은 인생자체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다.
인생의 생사화복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 인생이 알수 있는
삶의 비밀의 지식을 알고, 자신이 겪는 모든 인생경험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판단의 지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모든 인생이 겪는 불안과
형벌받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을 받아,
스스로 알수 없는 미망이나 미혹에서 건짐을 받아,
세상의 그 누구로부터에서도 얻지 못하는 마음의 평안함과
자신을 삶의 목적을 두고 세상으로 내어놓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인생의 안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무능한 인생의 탄식을 바꾸어주는 유능함으로 그분안에서 발견한다.
진리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는 여러 종류의 유혹이나 좌절이나,
시련이나 절망에서 자신을 일으키는 진리의 능력을 경험할수 있다.
진리를 품고 있는 사람이 절망적인 인생의 환경을 자신안에 있는 희망으로 다가갈수 있으며,
여러가지 인생자신을 무능하게 하는 요소(자아감상실에서 오는 혼란과 방향상실,
자기무력감에서 오는 불안과 내면의 고통, 혹독한 환경의 역경과 시련,
인생의 쓰디쓴 실패와 좌절,
내면의 분노와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관계의 상처들)들을 극복하게 한다.

유한한 자원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그 세상의 유한성에서 겪는 모든(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차원들)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진리이신 주님은 부요한 창조주로 그에게 있어서
모든만물을 무에서 유로 이루어놓은 것을 통해
(오늘도 개인이나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다)
그는 진리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분안에 있는 모든 부요와 풍성함을 맛보며 살도록 한다.
진리를 믿고 따르는 신앙만이 세상의 모든 궁핍
(삶의 왜곡이나 인생고통의 질곡에서 오는 불만족한 인생의 상태)으로부터
진정한 승리를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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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성과 자신속에 있는 죄의 문제

2007/02/06 오후 11:26 | 영성과 묵상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어두워 져 있는 가를 잘 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목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바라볼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기고 싶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기가 쉬운 것으로 인해,
자신의 전반적인 성품이나 본성에서 자신의 허물이나 자신의 죄의 처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하여 자신의 영성관리를 소홀히 하기 쉽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게 되면,
자신의 영성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왜곡되어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주님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정말,자신에게 많은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문제나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처리하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지난 날 하나님을 섬기고, 영적으로 기도를 드리지만,
자신에게 변화가 없고 여전히 자신안에 있는 모순이나,
불합리한 내면의 불순물이 있음을 부인하는 자세는
결코 하나님앞에 있는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바른 상태나 혹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나 교제가 이루어지기전에는
자신의 영적생활이나 기도의 생활에 전진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못한다.
그리고 영적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받는 일에 대해서
효과가 없을시에는 진지하게 내면의 모습의 자신의 태도나
사고시스템이나 자신의 영성을 살펴볼 일이다.

자신의 영적 생활을 통해 자신의 영성훈련이나 습관들을 통해
자신의 영성이나 신앙진보에 도움에 효과가 많지않다고 느낄때에
그것은 자신을 대하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처리하지 못한 더러운 자신의 죄나
그릇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습성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그릇된 습관이나 왜곡되고 굳어진 사고 시스템이 문제라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마음아파하지 않았으며,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를 반문해 필요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주님과 나사이에 영향을 주며,
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해 왔는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무지하며,
자신의 자기열림에 대한 희미한 상태에서, 기도를 많이 해본들, 역사는 없는 것이다.
이문제를 반드시 처리하고 싶다고 다짐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영적상태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럴까? 그동안 자신이 드린 많은 영적인 시간이나 기도의 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효과적인응답은 적은 것이다.

혹 하나님에게 대한 불신과 어두움의 영향아래에서
자신의 영적인 방향성이 하나님의 방향에 빗나가 있기 때문이며,
자신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자신의 영의 희미함등은
해결되지 않은 죄로 인한 영적인 상태의 문제가 아닌가?

영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앞에 자신의 영을 밝히는 일은
먼저 하나님앞에서 처리해야 할 구체적인 것등 즉 회개치 않은 것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마음으로 지었던 죄: 불신,반역, 방종, 욕망, 정욕, 영적인 소홀등
입술로 지었던 죄: 적극적인 대응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소극적인 대응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말, 미워하는 말등,
생각으로 지은 죄: 부정적인 시스템, 불신, 교만이나 방종적인 태도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죄들외에,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는 육체(영과 반대되는)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릇되게 성적인 죄를 범하거나 상상으로 성적으로짓는 죄,
포르노를 보는 것, 생각으로 부정하고 원망하는 죄등
수많은 죄의 영향들이 자신의 영혼에 미치고 있다.

또한 영적으로 긍정적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죄,
해야 할일을 하지않은 것: 전도하지 않은 죄, 기도하지 않은 죄,
이런 죄들을 주님의 십자가앞에 나아가, 나의 시커먼 죄의 먼지를 털어내고,
주님의 피로 말끔히 씻어내는 기도를 드리자.
그리고 나서 자신의 영성생활을 재출발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보다 나은 영적생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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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진리와 자비

시편117편1-2
신의 진리와 자비는 인간들의 찬양의 주제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생활하면서 신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보호의 테두리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올바름을 알려주며,
정의와 진실과 성실로 신은 인간사회에 영향을 준다.
인생들이 바른 길을 걸아가는 것이 신의 바라는 의도이며,
세상에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예정해놓은 것도 신의 작정하신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자녀에게 바른 길을 살아가도록 원하는 것처럼
신이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들을 대하며
그들에게 진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신의 속성에 속해 있으며, 변하지 않는 그의 절대성에 근거한 원칙이다.
그 원칙으로 세상은 창조되었고, 움직여 지며 일정기간 신이 정한 시점까지 보존되어 간다.

신으로 부터 나온 진리의 언어는 세상을 이룬 근간이 되며,
세상을 창조한 그의 능력의 표시이다.
그의 언어에서 나오는 진리는 영원성과 절대성을 소유하고 있다.
신의 절대적인 진리앞에 상대적인 인간은 신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갈때에,
인간이 겪는 혼돈이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신은 인생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기를 원한다.
그의 진리는 그의 언어를 통해 나타난 그의 자기표현에 의해 인간들에게 알려진다.

신의 진리는 인간사회에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자연세계의 원리에 영향을 주며,
인간세상의 생노병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또한 신의 진리는 인간세상을 향한 그의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는 인간의 행위나 삶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며,
단 한번의 기회를 좇아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신의 진리를 따르면,
그 사람들과 그들이 사회는 정의와 배려가 있는 세상이 되어,
조화를 이루어 그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이루어 간다.

신의 자비는 그의 속성의 또 다른 면이다.
그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의 자비는 인간을 용납하며,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에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신은 언제나 한없는 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신의 사랑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
모든 인간의 사랑의 표현은 신의 사랑의 반영의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만남과 관계들을 통해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살도록 하였다.
인간세상에 언제나 사랑하는 만남이나 관계가 인간들의 관심사이며,
그 사랑이 언제나 인생의 삶의 큰 주제라고 할수 있다.

늘 인생문제를 안고사는 인간 삶의 현장에 신은 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그의 사랑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그가 자신의 외아들을 이세상의 살고 있는 인생들을 위해 세상에 보내어
그가 사람들의 모든 죄의 짐들을 지고 죄인으로 죽게 만들어
그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었다.

삶에 지쳐있는 인생들은 자신들이 지는 무거운 짐들을
이미 오래전에 신의 아들에 의해 처리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혜택을 받으며 살면,
모든 인생의 짐들이나 역경을 극복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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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의 역사를 통해 사람의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선험적지식,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선험적지식의 예를 든다면,
요셉의 노예팔림, 바라오의 악한행위, 베드로의 부인, 유다의 예수님을 배반,
십자가의 죽으심등은 하나님이 예견하심가운데에서 인간의지의 선택의 결과로 일어났다.

루터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아시고
그것을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선험적지식이나 예정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의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일어날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이성의 증거에 의하면,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의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험적인 지식은 신적인 결정주의를 반드시 암시하지 않으나,
인간의 의지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의 섭리는 때에 제한을 받지 않으셔서
그는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조금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데,
인간의 의지는 결정된 한도내에 있기에,
자발적이든 자유이든 우리의 결정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존해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적인 결정주의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속적인 변화를 가진 그의 마음과 의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의 결정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포용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파괴하는 예를 든다면,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참새도 떨어지지 않는다(참새가 팔리지 않는다)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100%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 확실한 것을 이루는 원인으로서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삶이나 선택을 통해 일하신다.

루터는 의지의 노예가 은혜신학의 기본적인 기초가 된다고 논의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와 질수 없고, 믿음을 얻거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공헌할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진리안에서 무이다.라고 루터는 주장하였다.
칼빈도 그점을 옹호하였다.
“자유의지를 지켜가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아닐수 없다라고 하며,
교회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커다란 이익이라고 하였다.

신적인 결정주의는 하나님의 선험지식이나, 전능하심의 교리에 근거를 두며,
그리고 은혜는 원인과 결과를 따르는 자연적인 결정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성서적믿음은 하나님은 창조적질서를 통해 일하신다고 암시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며 방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인간의 의지는
그 은혜의 손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자체안에 위험요소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의지의 선택의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그의 선험적인 지식에 따르는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또한 그의 전능하심의 다스림으로 인한 결정에 제한을 받으며,
그리고 더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제한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대안(은혜의 길)을 따르는 의지의 노예로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Myers, David G.의 "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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