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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 97-104)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실제의 삶에
어떤 축복을 주는지를 안다면,
또 그것을 경험한 자라면 그 말씀을 사랑치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우주를 창조하여,
지금도 “말씀으로 온 세상을 붙잡고 계신다(sustain) ”라고 하셨습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다시 돌아가거나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누구를 통하여 이루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그 말씀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요한 복음 1:1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오신자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형질, DNA, 생각과 행동이 모두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전도하실 때도 말씀이 전도 하였고,
배를 타실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배를 타신 것이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입을 열어 가르치신 것이며,
기도 하실 때에도 말씀이 기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니,
다윗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깊이 경험 하였던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 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 하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
라고 감탄을 하며 고백하였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감탄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었던 다윗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을 통해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기에
이렇게 까지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먼저
1. 주의 계명이 나와 항상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 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하였습니다.
다윗은 힘으로만 이기려는 골리앗을 물리 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윗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힘세니, 한번 붙어보자” 하거나,
단지 자기 형이 있는 자기나라 군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싸운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 상에 보면, 다윗은 즉,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싸웠던 것입니다.
그 때에도 다윗은 마음과 생각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늘 품고 다녔던 것 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방법의 원수보다
더 지혜로운 무기로 원수의 최고의 힘과 창을 이겼던 것입니다.
2.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고 지키어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학교라는 시스템에 다니지 않은 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라고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자기 인생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또 인생의 끝을 모르니 과정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지요.
하나님을 알고 믿는 어린 아이의 말과 생각이
그런 노인보다 명철한 것은 당연 하지요.
그가 원수를 이긴 것과 명철 하게 되 것은 바로 이 “주의 말씀”,
“주의 법도” 때문이었다고 담대히 증거 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 말씀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원수도 수없이 이겨 보았고, 또 노인 보다 더욱 뛰어난 지혜도 가져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 하고 나니, 그 말씀의 달기가 “꿀맛”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자원 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 하였사오며,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원수를 이긴 것과 명철하게 된 것은 바로, “주의 법도”로 인하였다고 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라고 불리웠던 죠지 뮬러는
평생 3,000명의 고아를 스스로가 가진 재산없이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여, 돌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100번 이상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적이 없었고, 읽을 때 마다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신앙 체험을 근거 한 것 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처음 3년 간은 성경은 읽지 않았는데,
그때는, 영적인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한 죽은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나는 그 기간을 잃어 버린 시간이라고 생각 합니다.
영적 생활의 활력은 날마다 성경을 읽느냐, 안 읽느냐에 정비례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 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규적으로 말씀을 늘 먹어야만 하는 것 입니다.” 라고
그의 인생을 회고하는 시점에서 말하였습니다.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사는 경우에,
영적 생활에서 묵상 시간 없이 그냥 잠들 때 그냥 자고
깨어나서 그냥 시작한다면 승리할 수 없어 사탄에게 끌려 다니는 꼴입니다.
경건의 시간의 실패에는 우리의 생활에서 크게 3가지로 생각해봅니다.
1. 육신의 영향 갈5:16-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슬립니다 / 롬8; 5 육신을 좇습니다.
2. 바쁜 현대인, 소음과 서두름, 혼잡이 특징입니다.
3. 사단의 방해로 인해, 메스콤이나 엔터테인트먼트의 영향 때문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습니다.
막1: 35 예수님의 경건시간 바쁜 일과 중에도 시행하셨습니다.
우리도 경건한 주님과의 만나는 시간에 있어, 우선순위의 자세로
우리의 필요한 훈련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준행하는 사람에게는
지혜의 선물이 주어져 원수보다 지혜롭고 스승보다도 지혜로우며,
오랜 인생살이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갖고 있는 노인보다도 더 지혜롭게 됩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가장 긴 시일 뿐 아니라 그 176절에 한절도
하나님께 대한 말을 빼지 않았습니다.
이시는 히브리 자모수대로 22시의 연으로
매 시연에 8행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찬송합니다.
중세기의 신부들이 매주일 외웠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가르침(teaching), 지도(guidance), 훈육(instruction)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라 믿었으며,
사람들도 그렇게 믿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공부함이 제일 큰 기쁨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선생보다 지혜롭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사모하니 그 말씀이 꿀보다도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최고의 선생이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모든 가르침보다 뛰어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과 믿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즉 말씀 앞에 그분의 뜻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끊임 없는 기도와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으로
이해의 은사로서 그 말씀들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쌓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란,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님의 법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의 교훈과 법이 내 마음에 자리잡습니다.
시편119편은 1편과 19편을 연결=주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계속적으로 연구하는 내용입니다.
히브리 알파벳으로 22연 8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97절/ 주님을 두려워하는 순종대신에 미신을 따르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온갖 그릇된 생각이나 혼란된 정보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고 그분의 교훈들을 따르는 것은
마치 바리새인의 순종처럼 의무감에서 나옵니다.
사실 자신의 영혼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영적인 짐을 가중시켜줍니다.
오직 깨닫는 은혜와 주시는 말씀의 생수의 은혜를 통해 사랑의 순종을 하게 합니다.
그 사랑의 순종은 주님과의 관계와 교제 안에서 누리는 사랑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의를 행하게 합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간직해야만 합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이유는
1. 그 말씀이 그를 지혜롭게 하므로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2.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법 너무나 사랑하여 하루 종일 온종일 생각합니다. (현대어성경)
당신의 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자나깨나 나는 그 말씀을 되새깁니다.(공동번역)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개역성경)
주의 법, 곧 주님의 말씀은주님의 성도들을 복이 있게 하며, 열매 맺게 하며, 거룩하게 하며, 성도들을 그분 앞에 세우는 지름길입니다.
고로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소성케 하며,
그의 구원의 말씀은 생명을 얻게 하고, 그의 창조의 말씀은
생명력과 창조의 힘을 부여하며,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빛입니다.
그 말씀은 공의의 법이며, 기이한 법입니다.
주의 판단의 말씀은 우리를 정직하게 하며,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시편 119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113절=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고,
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집중합니다.
163절=거짓을 미워하며 주의 법을 사랑하고,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합니다.
165절=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큰 평안이 있으리니, 장애물이 없나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며, 그 말씀으로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벧전1: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고 성도들은 그 말씀의 영향으로 영적으로 자라는 사람들입니다.
벧전 2:2 갖난 아이들 같이 순전 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1.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것을 묵상하기에 계속적으로 열중합니다.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그 사랑하는 대상에게 점령되는 법입니다.
2.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접촉하지 않고,
온 인격을 기울여 관계합니다.
항상 그 말씀과 함께하며(98), 묵상하며(99), 지킵니다.(101)
묵상에는 일반적인 방법에는 마음을 비우는 주문을 외듯이,
그것은 이방종교 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묵상은 주어진 성경말씀을 가지고 묵상합니다.
1. 한 구절로 여러 방면으로 생각합니다.
예)하나님== 이방종교 철학가 멀리 있는 두려운 무관한 분으로 생각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성도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창조주로 믿고 그분의 말씀으로 교제하며, 그분에게 우리의 사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로 그분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의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입니다.
내게 어떤 영향을 주는 가?
그분께서는 나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채워집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일 묵상이란?
119:15 종일 묵상 법도를 묵상합니다.
이삭의 묵상=창24: 63 들녁에 나가서 묵상하는,
아브라함의 종이 고향 메소보다미아에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보냅니다.
리브가를 데리고 옵니다. 이삭이 그것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하실 일들을 묵상합니다.
시편 77:12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 하니라, 과거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여호수아 1:8절에/ 군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말씀,
인생의 지침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지켜 행하라. 항상 온종일 그 말씀들을 생각합니다.
말씀의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이 됩니다.
시19: 14에 나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말씀의 묵상은 성도들의 거룩한 마음, 아름다운 소원, 기도하는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묵상의 유익은 이렇습니다.
1. 명철함을 얻습니다./ 시119:99절에 주의 법을 묵상하니 명철함이 스승보다 뛰어나다.
2. 영혼의 만족을 얻습니다.==시63:5,6 주를 묵상할 때에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3. 묵상의 결과로 인하여 영혼의 기쁨을 얻습니다.
시1:2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법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묵상하면 / 베뢰아 성도의 상고 행전17: 11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상고하므로 묵상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설교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구전으로 말씀을 전하고, 구전으로 말씀을 전해받고, 그리고 구전으로 그 말씀을 전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대인들보다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더 수월합니다.
더 나아가 그 말씀을 묵상을 통해 자기의 것으로 될 때 영생을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5: 39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니 내게 대하여 증거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묵상하는 자는
1.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승리합니다.
다윗의 승리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말씀을 묵상을 통한 여호와의 절대적인 신앙에
입각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을 때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전쟁할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서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며, 기도하여서)
그는 응답 받아 나가 승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원수 사탄의 시험을 이깁니다.
그 분은 금식기도 후에 돌로 떡 덩이를 만들라.
마태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 성도의 인내로 승리하는데, 그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을 지키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떠날 때 행전 20:32절에
내가 너희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 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하였습니다.
2. 나의 명철함이 스승보다 승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과 세상의 지혜보다 월등합니다.
고전 1:25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높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지혜보다 뛰어납니다.
사탄은 갖은 수단을 다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까지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승리케 하시고 ,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전1: 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3.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110절에/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히브리서4: 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은 영혼을 치유합니다. 내적인 마음을 치유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귀신들을 내쫓아.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4. 묵상하는 자는 말씀을 지킬 뿐 아니라, 그에게 악한 길로 가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묵상하는 자를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게 합니다.
결론
* 묵상하는 자는 말씀의 맛을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 자 입니다.
마태복음13장에 말씀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리웠다 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주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하다는 말은 그 말씀의 뜻이 심령을 기쁘게 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생활이; 행복 됨을 보여 줍니다..
꿀 송이보다 더 답니다. 그러므로 좋은 말은 마음에 양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치료제 마음의 양식입니다.
영혼에 꿀보다 달아 내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습니다.
꿀 송이 보다 달아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의 맛이 있을 때 입에 착착 달아 붙어
자꾸 씹으면 우리 입에서 소화액이 나와서 흡수가 빨라
그 말씀의 진리와 교훈이 마음판에 새겨집니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착착 달라붙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찌우고, 여러분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며,
여러분의 신앙을 세워서, 열매 맺는 생활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자매님이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 하기를
자기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 진다고 하였다.
그 말의 내용은 목청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아의 목소리를 잃어 버렸다는 말이다.
자기로서 말하는 것이 부모에 의해서나 학교에 의해서나
거부 당하든지 심한 상처를 받았을 때,
그의 자아가 안으로 움츠러 들면서 “목소리”를 잃어 버리는 것이다.
목소리는 곧 나의 정체감을 나타내는 통로이기도 하다.
나는 그 자매에게 연관 된 사건들을 되살려 보게 하였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술로 생활 했었던 분 이었는데
화가 나면 아무거나 가지고 매를 때리곤 하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늘 화나 있었고,
자녀들에게 말하거나 감정을 맘껏 드러내도록 받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선반 위에
놓아 둔 돈이 없어 졌다고 그녀 (어린 시절, 7살 즈음)에게
추궁하기 시작하여 아무리 안 가져 갔다고 해도,
거짓말 까지 한다고 더 무섭게 때리기 시작했다.
어린 그녀는 결국 살기 위해 거짓말로 가져 갔다고 고백 했는데,
엄마는 이제 “도둑”이라고 거의 실신 할 정도로 때리고 놓아 주었다.
그 때부터 자기의 목소리가 들어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녀의 내재아 (내적아이)는
그녀의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기도를 하는 데에도
어느 것이 자기 진정한 인격에서 나오는 기도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 자매에게 조심스러이, 그 때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매는 무섭다고 하며 용기를 내어
다시 그렇게 맞던 그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 하였다.
사람의 감정과 기억은 사라지고
없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 되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누구든지 아픈 기억을 떠 올리면
금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그 어린 7살의 자매에게 “네 목소리로
지금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을 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우리는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성공 하였는데,
그 자매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로 두려움 없이 말 할 수 있고,
기도 할 때도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와,
자신이 아닌 것을 분간 해 낼 수 있고
기도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그런 환경에서
그때의 아이가 안으로 들어 가 움츠려 있든지
혹은, 다른 억압의 영이 그 영혼을 억압 한 상태에서
계속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억압된 위에 다를 자아를 만들어 내고
자기가 아닌 자기로서,
자기도 어느 것이 진짜 자기인지
때로 분간이 가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거짓 자아”와 함께 산 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거짓 자아가 “자아”로 행세 하기도 하다가
정체를 가리고 숨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과감히 내 쫓아야 하는데
이유는 이것이 ‘다를 영’이기 때문 이기도 하거니와
계속 그 다른 영으로 살 경우에,
나의 삶을 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위선”을 행하기도 하여,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 하는 방법이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나 있겠지만
그 사건으로 돌아가 그 영을 대적하고
그 영혼의 상처는 치유하고
성령님을 초청하여 사역 하시도록 부탁 드릴 수도 있다.
뉴스 위크지에 나온 기사를 읽고서.....
(아시안들에 대한 상담에 대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안 이민자들은 자기들의 운둔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자신의 속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놓고 상담을 받기를 타 민족들보다는 자발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타민족보다도 더 언어습득이나 문화적인 동화작용이 더디며, 더 나아가 미국문화나 환경이 주는 헤택을 덜 받을 경향이 있다. 아시안 이민자들은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페쇄적인 문화적인 이해나 태도는 이민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중문화의 테두리에서,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정신적인 스크레스를 많이 받고 살고 있다. 특히 가정새활에서의 동서양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혼란이나, 혹은 가족간의 갈등에서 오는 문제들로 인하여 겪는 정신적인 문제들은 그대로 상처를 갖고 사는 경우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더 하다. 남미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은 자기들끼리 터놓고 자신의 문제를 내어놓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다. 동양의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침묵이나, 운둔적인 태도나, 비자발적인 사고나 행동양식에서 겪는 내면의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상담을 받으려는 경향이 적다. 전쟁을 겪은 캄보디아인이나 베트남인들은 전쟁후유증을 앓으면서 이곳 이민생활에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그대로 안고 살아간다. 한국인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은 문화적인 차이,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다. 특히 서로 문화가 다른 배우자들사이에는 서로간의 다른 문화적인 갈등과 언어의 소통의 차이로 인한 더 많은 갈등을 안은채 살아오고 있다. 그러기에 이곳에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일정한 상담사역은 많은 필요을 요구하게 한다. 정신적인 상담을 거치지 않고 살다가 육체적인 질환으로 발전되기도 하며, 혹은 혼돈된 인간관계의 모순과 곤란속에서 그저 묵묵히 참아 갈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은 더 외롭고, 그리고 삭막하며, 깊은 고뇌와 불안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고로 아시안들중, 많은 경우에 상담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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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믿음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말씀의 유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기적으로 이루어 진 책입니다.
즉 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할 때에도 믿음이 없으면
그 봉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물질세계가 그의 말씀으로 지어져서,
믿음의 원리가 적요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물질세계이며,
모든 물질의 구성이 원자에 의해 이루어져서, 보이는 현상세계를 이루지만,
실상은 나타난 현상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해 조정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선과 약의 원인으로 그 실체들에 의해 움직여 집니다.
아무리 악이 횡행하는 때라도 모든 것들이 창조자의 주관 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입니다.
더 나아가 믿는 자가 가야 할 약속의 땅인 천국도 실상은
시편 33:6에 하늘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신자가 가야 할 천국이 그분의 말씀으로 지어져서,
그 세계 안에서도 믿음의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여 언급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국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통용하는 세계이며, 하나님을 믿은, 그분의 신뢰를 따른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서 영원히 사는 감격이 넘치는 세계입니다.
이 물질세계는 영화 월리(과거 2,30년 전에는
영화 E.T의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오는 것에 반해
청소 로보트 월리는 먼 미지의 미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성으로 찾아가는)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서 살았던 미지의 세계가(거기에는 감격도 없고, 흥분도 없는
자동화된 세계에서 비만으로 생명의 활력을 잃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비쳐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인 천국은 신앙인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
특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경험과 이해를 갖고,
영원히 또 다른 흥분과 감격이 주어지는 도전이 있는 생명의 활력의 세계입니다.
고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그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합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분의 선물입니다.
다만 그분의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해당이 됩니다.
고로 사람들의 믿음으로 또한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인 영생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하는 믿음(faith)이란 말은 보다 큰 의미가 있는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그분의 속성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포괄적인 태도는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믿었던 것인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믿음을 배반하였습니다.
고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나갈 때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벗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에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신조에 대한 믿음(belief)이 있습니다.
그 믿음에 의해 종교행위나, 종교의식을 따릅니다.
문자에 매여있는 즉 (사도신경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고백)에
대한 믿음(belief)입니다.
또 다른 믿음이란 말 중에는 흔히들, 우리의 믿는 바, 확신하는 것
(신념, assurance, conviction),
말씀에 대한 약속들, 그리고 바라는 것들의 확신 등 입니다.
그러나 믿음(faith)은 그것도 포함하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서의 믿음은 의지하는 바나 혹은 신뢰로서의 믿음(trust)이 있습니다.
믿음(faith)의 세계인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는 그 분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연결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의 힘으로도, 종교나 수양의 힘으로도, 권력의 힘으로도,
물질의 힘으로도, 혹은 자력의 힘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과의 연결(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가는 세계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된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접촉 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의 여호와여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시편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 볼 때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남을 이루고 연결이 됩니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믿음의 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분의 창조된 세계인 이곳에서
그 믿음의 원리로서 생명력 있고 활력 있는 삶을 이루고,
특히 모든 일에 하나님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그분을 생각하며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묵상하여 그 말씀이 주는 축복 안에서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보통, 믿음의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정의로 바라는 소망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실현한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소망에 관해서, 앞으로 이루어 질것을 소망하는,
그리고 미래와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바라는 믿음대로 이루어 집니다.
마치 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낫게 하실 때마다
병자들에게 낫고자 하는 믿음을 말씀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라고 하셔서 믿음으로 기적을 기대하는 믿는 자가
그 기적을 맛보듯이 믿음으로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더 나아가 그 믿음의 특성은 바랄 수 없는 것들을 바라는 믿음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 불가능 한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힘으로는 되는 기적을 이룹니다.
그 기적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떠 하나의 믿음의 성격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는 보이는 물질세계입니다.
나타난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을 따르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는 현상세계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조정을 받습니다고 주장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깨닫고 직시하는 힘을 얻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현상의 세계는 원래의 세계(영적인 세계: 이상적인 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서 언급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은 영적인 세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들의 삶을 통해 경험으로,
응답으로, 그분의 임재를 느낌으로서 자신들만의 체득한 간증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기 확증들이 되어 변할 수 없는 믿음의 진리로
우리들에게 그들의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체험이나 간증을 통해 그들은 몸소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능력을 알고, 그 세계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믿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로 믿음의 원리는 인생의 삶의 원리 중에 그들이 깨닫고
경험한 가장 큰 축복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이 지구의 물질세계는
3가지 방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3가지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물질의 힘이면 무엇이든 살수 있다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은 보이는 물질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을
취하는 모양으로 그래서 보기에 좋은 선악과를 따먹고,
주님께서 그 금단의 열매를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욕심이 가는 대로
취하여 먹고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죄와 죽음의 법 아래로 내몰렸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을 신뢰하여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 하려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살려는 것,
즉 자기 권력의 힘을 의지하여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려는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은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부추켜서,
스스로의 통치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부패한 권력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삶의 쓰레기
(고통, 좌절, 불안, 걱정, 패배감등)를 거두어 들입니다.
세 번째는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은 고로, 인간이성의 힘이 주축이 된
지식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 지식의 힘 이면 정보의 힘이면 모든 것을 좌우 할 수 있다는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한 요즘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의 힘은 인간에게 더 많은 무지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알려 줄 뿐입니다. 인간생명의 병들을 치료하지만
또 다른 불치의 병이 생겨나며,
인간의 생명과 건강 세계를 위협하는 조류독감 같은 신종바이러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식의 총체인 과학은 인간세계를 편리하게 할 뿐 아니라,
불안하게 하며, 더 많은 민족이나 국가간에 갈등을 유발하며,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발력에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선악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선을 이룰만한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출애굽을 하고 나서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광야는 신앙인생들의 교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천국 등 모든 하나님의 창조된
그리고 통치하는 세계는 믿음의 원리가 통용하는 세계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식생활의 해결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에 들에 나가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께서 몰아주신 메추라기 고기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매일 공급하셨습니다.
6일을 들에 나가 만나를 거두어 들였으나 제 칠일 즉 안식일을 위해
6일 쨰 되는 날에 두 배로 거두어 들이게 해
안식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그들에게 하루에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아침이슬에 내리는 만나는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 햇빛에 의해 녹아내려 더 이상 만나가 아닙니다.
고로 그들은 매일 아침에 들녁에 나가 그것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이 경험하고 맛본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나 그의 사랑은
우리가 늘 먹어야 하는 마치 육신의 양식인 밥을 먹듯
매일 그분이 공급하시는 은총을 내 영혼이 맛을 보고 먹어야
영혼의 생명이 유지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영적 생활의 원리인 믿음(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터득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인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가다가 마실 물이 없어 불평을 하며 원망을 했습니다.
그때에 불 뱀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물었습니다.
불 뱀의 독에 의해 죽어가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높은 장대위에 다 놋 뱀을 만들어 놓고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뱀처럼 죽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장대에 달린 놋뱀처럼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치유를 받고 고침을 받으며 살아나고 소생하게 됩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입니다.
말씀에 순종한 예배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선민들은 하나님께서 앞서서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상징입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빛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말씀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발자취를 내딛기 위해서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역사로 살아가는 3사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아벨입니다. 최초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심은 그들의 믿음을 근거로 해서
그들을 옳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온전히 드림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성을 나타냈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중에 가장 귀한 양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양을 죽여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생각케 하는 제사였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 갈수 있는 방법은
죄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접촉점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그의 제사즉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 하셨습니다
오늘은 아벨즉 의인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벨의 후손으로 항상 피의 제사를 드립시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제사를
그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며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벨은 또한 그의 온전한 예배로 인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으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삽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탐심으로부터 나온 타락한 인간이 범하는
하나님께 불경 하는 죄입니다.
그레서 불신사람들은 보이는 우상도 섬기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도 섬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만 섬기기로 주님만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
물질이 우리의 삶의 목표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우리에게 넉넉한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당대에 무의미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은 땅만을 쳐다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사람들이 살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족보를 보면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몇 백년을 살다가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녀를 살다가
그것으로 자신의 씨만을 퍼뜨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저 인생을 소비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빛나는 의인으로
그의 인생이 참으로 특이하게 평가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의하고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세상에 놔두고 살기에는 너무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왜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살아가는 목적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모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으므로
그는 살아있는 산사람으로 죽음을 극복하며 천국에 이른 승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었던 에녹을 언급할 시에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에녹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자신의 생활의 모든 곳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기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코치를 받으며 그 분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말세에 사람이 쾌락을 좋아하고 자기만을 즐기려는 세태가 점점 심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더 추구하는 세태에서
우리자신들이 늘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에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점점 타락하여 악해져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사람들 중에 노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경외하심으로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120년 동안을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자기가족이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천국에 우리 집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 대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드릴 때에
천국에 우리의 집을 건설해 가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생활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들어갈 때에
그들이 한걸음씩 전진하듯 그렇게 우리 모두 믿음의 전진을 합시다.
요단강을 내디딜 때에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듯이
앞으로의 우리교회에 하나님의 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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