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예수의 발견
- 목동
- 2009
-
- 두 세계 사이에서
- 목동
- 2009
-
- 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
- 목동
- 2009
-
-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 목동
- 2009
-
- 홀로 설수 없는 인생
- 목동
- 2009
29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John 15:1-6 (10)
* Christ and His followers are connected in an inevitable
relationship as the vine and its branches.
1. The believers’ living is based on the assurance of their own
salvation.
2. They can survive, grow, and make fruit as the healthy
branches stuck to the vine.
3. Their vitality survives through their strong connection
* God is the Gardner of the branches. He has to trim them and
work with them to make them fruitful.
1. The methods that God use to care and train are using trials
of life,, spiritual training, spiritual awareness,, improvements
of character,, gifts development, etc,
2. What parts to be transformed are among personal aspects for
becoming mature Christian?
3. What parts of my image are blocking me from becoming a
mature Christian? Which outer factors of my life block me?
* How do Christians manage their life making fruit?
1. They can spiritual growth through personal fellowship,
scripture take, meditation, Bible study, etc.
2. They can make testimonial experience through experiencing
prayer-answering of God,
3. Christian life can express their virtues like love, hope,
patience, faithfulness, goodness etc.,
(벧전 1:22-2:3) |
II Tim. 3:14-17(1-17) |
포도 나무의 비유: 요한 복음 15:1-6(1-10)
본문 분해
포도 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의 필연성
1. 농부와 포도 나무
가. 예수님은 생명의 포도 나무이시다.
나. 하나님은 포도 나무를 가꾸시는 농부이시다.
2. 농부와 가지와의 관계
가. 농부의 손질
나. 말씀의 역사와 가지의 손질
3. 나무 가지의 생존 사상
가. 나무와 가지의 관계: 생존에 있어서 필연적인 관계
나. 가지의 목적: 열매 맺음
다. 가지의 열매 맺는 비결: 나무를 통해서 가지는 열매를 맺는다.
라. 가지의 운명: 열매를 통해 생존, 번영, 열매가 없으면 가지치기를 당해 버림
본문 배경 이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가지 관계에 대해 언급하신다.
첫 번째는 제자들이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것을 말씀하신다 (1-10).
두 번째는 제자들 서로의 바른 관계를(11-17),
마지막은 세상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등(18-: 16:4)에 대해 언급한다.
제자들은 주님 앞에서 세가지 책임 있는 의무 이행이 있는데,
그것들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과 그리고 세상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에 대한 7가지 진술을 말하는 것 중에 마지막 언급이다
(1. 생명의 떡 6: 35; 2. 세상의 빛 8: 12; 3. 양의 문 10: 7; 4. 선한 목자 10:14;
5. 부활이며 생명 11:25; 6. 길, 진리, 생명 14:6; 7. 포도 나무 15: 1).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포도 나무임을 언급하였다
(시편 80:9-16, 이사야 5:1-7, 27:2-6, 렘2: 21; 12:20, 겔15: 1-8; 17:1-21; 19:10-14; 호10: 1-2)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 나무이심을 언급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포도 나무의 정원사 혹은 관리인으로 언급한다.
포도 나무에는 두 가지 타입의 가지가 있다.
1. 열매를 맺는 가지(2,8). .2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2,6).
열매 맺는 가지들은 참된 신자들을 의미한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들은 형식적으로 믿는 것을 (믿는 체하는 것을 의미) 말한다.
열매가 적은 것은 구원받은 것을 결코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도 주님을 믿는자이며,주님을 영접한 자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앞에서 구원의 선물을받지못하고
그분앞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들은
정한시간에 종말적인 심판과 영원한 버림을 받는다(겔15: 6-8).
2 절
농부는 열매를 기대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에 기대하신 것은 순종하는 것과
의로운 것(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의(하나님과의정상적인 관계의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사야 5:1-7)
나무에 붙어 있는 모든 가지 중에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농부께서 자르신다.
매년 팔레스틴에서는 농부들은 나무에서 쓸모없는 가지들을 전지한다.
그 농부들은 또한 생명이 없는 죽은 나무들을 자르며,
시들른나무일지라도 그곳에 가지들이있다면
그나무에 있는 살아있는 가지들가 열매를 더 맺도록 다듬는다.
주님에게 있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예를 들면,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잘리움을 받았다.
3절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깨끗함을 입으며(주님의 보혈로만 사람들의더러움을 씻을수 있음),
그리고 그의 말씀(그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며
하나님앞에서 정결한 심령이 되도록 한다 벧전 1:22-24)을 통해 정결함을 입는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깨끗함을 받지 못했다(요한 13:10-11)
4절
열매 맺음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서 그 심령을 통해 새생명의 재생산하는
삶의 결과로 이루어진다(예를들어, 주님을 통해 목적이 달라지며,
세상에서 하늘의 생명의 길을 좇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의 심령속에서 사역을 이루어 가는것임).
4-6절
거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하는 자신의 해야 할 일중에 가장 중요한 일의 부분은
주님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즉 그 뜻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자신의 모든 삶에 대해 여쭈어,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상태가 되어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앞에서 그분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열린 귀와
사랑의 순종으로 무장된 마음과 그분을 향한 열정적인 헌신의 결심을 좇아
행해지는 선한 의지을 유지하는 상태)
즉 그런 상태가 바로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거한다는 것은 사도요한 신학의 중심사상의 언어이다.
헬라어 “메노”라는 거한다는 말이 15장에서 11번 나온다
(요한복음에서는 40번이 언급, 요한 서신서에서는 27번언급).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거한다는 것은
첫째,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둘째 믿음 안에서 지속하며, 보존되는 것을 의미하며(요일 2:19,24), 셋째 믿는 것과 사랑하는 순종을 의미한다(요한15:9-10).
이런 자신이 주님안에 거하게 하는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는 참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요일 2:19).
구원의 열매와 그 증거는 주님과 그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섬김에 있으며
(요한 8:31, 요일 2:24, 골 1:23).
옳고 바른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거하는 것과 믿는 것은
그가 현재 진실한 구원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히3: 6-19).
고로 주님 안에 거하는 크리스천이 인생 각자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앞에서 합법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즉 그것으로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 복음 15장에서 주님 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알 수 있다.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것(15:9)과 주님의 교훈에 거하는 것((15:10)을 통해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이루러 감을 알 수 있다.
상대방과 좋은 교제를 이루려면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향해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만 해도 좋고,
그분을 느껴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권면은
무엇이든지 그 내용을 듣기를 좋아하고, 따르고 실천하고 싶어한다.
6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지속적인 교제는 즉 믿는 자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거주를 의미한다.
그 결과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파멸을 맞는다.
생명이 없는 가지는 죽은 것이며 잘리움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쓸모 없는 것이며 불에 던져져 불에 태움을 받는다.
포도 나무의 가지가 불에 태움을 받는 것은 상징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3가지 면으로 해석을 한다.
1. 불에 태움을 입는 가지는 그들의 구원을 잃어버린 크리스천을 의미한다
(이 사상과 대치되는 성경 구절들은 요한 3:16, 36 10:28-29 롬 8:1등인데
구원의 확실성 내지는 영원성을 강조한다).
2. 불에 태움을 입은 가지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에서
상급을 잃지만 구원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전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기서 죽은 가지들 즉 던져져서 시들어버린다).
3. 불에 태운 가지들은 가롯 유다와 같은 가식적인 크리스천들을 말하며,
참으로 구원받지 못하여 결국 심판을 받는다.
죽은 가지와 같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며,
고로 영원한 지옥 불에서 처벌을 받는다(마태25: 46).
처음에 가롯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어,
그는 마치 생명의 참 포도 나무의 가치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다.
고로 그는 떨어져 나갔으며, 그의 운명은 죽은 가지와 같이 되었다.
파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마태3: 10-12, 5:22, 13:40-42,50, 25:41, 막 9:42-49 눅 3:17, 살후 1:7-9 계시록 20: 10-15)
7-8절
6절과 대조적으로 이 구절들은 포도나무의 교훈들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열매 맺는 방법 중에서, 효과적인 기도는 믿는 자 안에 있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 안에 있는 믿음에 기초에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의 믿음에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를 이루어가는
그분 자신에 대한 믿음과 그분이 하시는 구체적인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믿는 자의 생각을 조정하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한다.
고로 그들의 기도는 응답의 확실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한 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믿는 자의 응답 받은 기도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된다.
그렇게 주님의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당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소서, 마태6: 10).
9-10절
예수님의 사랑의 경이로움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은 신자는
그의 자질이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의 패턴을 따른다.
즉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를 맺고 계시는 것처럼
그의 제자들도 그 패턴을 따른다.
주 예수님께서 내사랑 안에 거하라 함은 신비로운 것 같으나,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드신다.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과 동일하다
(요한 14:15, 21, 23; 요일 2:3, 3:22, 24; 5:3).
고로 주님에게 능동적인 의존하는 것과 그분에게 사랑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것을 향해(천성을 향해) 가는 진정한 생명의 길이다.
신자들의 세상살이는 천국백성들을 만들어가는 예비의 기간의 삶이다.
신학적인 가르침
포도 나무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하며,
그 포도 나무는 때로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종류나 상태를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맺는 지도자, 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신다.
포도 나무의 유익과 가치는 그의 열매에 있다.
신약에서 포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복음서에서 6번 정도 있다.
주님의 성찬식에서 혹은 비유에서 그리고 가르침에서 이다.
구약에서 포도의 열매를 포도주로 사용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스라엘은 포도주를 두 종류로 사용한다.
하나는 물을 섞은 음료수로서의 포도주이며,
그리고 100% 포도로만 이루어진 알코올로서의 포도주이다.
예수님은 포도의 열매를 기도와 연관된 것으로 언급하시기도 한다.
그런 언어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축복의 사인으로 포도를 언급한다
(창27: 28, 요엘 2:24).
또한 구약에서 포도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그에 따르지 못하는 백성들의 한계를 나타내곤 한다.
극상품 포도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께서 가지셨으나,
그 기대를 저버린 이스라엘은 쓸모없는 부패한 포도의 열매를 맺어,
주님의 심판을 자초하였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포도 나무를 자신으로 표현하시며
그 포도 나무를 참 포도 나무로 언급하신 것은
그를 거부하는 유대인들 불신실함에 대비되는
그의 진정한 메시야이심과 하나님의 참 아들이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보다 앞서온 거짓 선지자나 거짓 스승 등과 대비한 표현이다.
주님은 자신을 줄기나 뿌리로 언급하지 않으시고
포도 나무 전체로 언급하신 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 나무의 부분으로서 그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말씀함이며,
즉 이말의 뜻을 풀어 설명하면,
주님을 믿는 일에 있어 그분안에 머물러야 하는 성도가
결코 주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의 목적이며, 그분의 영광을 향해 사는 것이
그분안에 거하는 자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은 요한의 핵심 사상인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알리기 위한 구체적인 비유이다(요한 17:20-23).
바울은 몸의 이미지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를 설명한다(행전 9:5, 엡 1:23).
요한복음 15장에서 표현된 포도나무의 상징들은
제자도의 중요한 면들을 즉 사랑, 믿음, 거함, 순종등의 의미를 알려준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런 의미들을 더 자세하게 언급한다.
주님과의 교제에서 출발한 영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 함을 알려준다.
가지에 대해
성경에서 가지는 나무나 혹은 포도 나무와 연관된 것으로 언급한다.
상징적으로 알려지지만, 가지는 나무의 가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가지의 특성을 따라 나무의 종류를 알려준다.
가지는 견고한 뿌리와 주된 줄기에서 영양을 공급받으며,
거기로부터 자기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붙어 있으며,
가지가 달고 있는 잎이 자라서 열매라는 풍성을 생산한다
(주님은 우리를 잎으로 보지 않으시고 가지로 비유하셨다).
꿈 해석가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서 3개의 가지를 기적적으로
생산과 풍요의 이미지로 포도가 맺힌 덩어리를 언급한다(창40:10).
자연의 혜택에 대해 시편 104:12에
시냇가의 근처에 자란 나무에서의 가지에서 새들이 생활하며 노래하는 그림을 보여준다.
건강한 나무의 가지에 대해 에스겔은 포도원이 풍부한 물에 의해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 맺을 것을 언급한다.
열매맺어야 하는 가지가 주는 의미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차이를 보여준다.
참 신자의 특징은 열매 맺음을 알 수 있다.
참 신앙인이 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은 그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진실한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의 구별도 그의 행실과 그에 따르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뜻은 모든 사람의 됨됨이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관계와 교제의 이해
크리스천의 생활에서 주님과의 관계 설정은 처음에 일회성이면서 영원성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과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면들을 다루게 한다.
주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는 성도에게 있어 자신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
관계와 교제는 불가 분리의 연관이 있다.
건강하고 견고한 관계는 지속적이고 풍부한 교제를 보장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정상적이며 건강한 관계는 오래 지속하며, 자주 교제를 갖게 한다.
관계가 잘못 설정이 되면 교제의 활성화는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면 그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통해
지속적이면서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주님과의 관계 설정은 마치 나무가 계속하여 뿌리를 내려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를 신선하게 할 필요가 있다.
결혼 생활에도 부부가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가운데에 풍부하게 되며,
다양하게 되고, 둘의 관계는 더 돈독해진다.
결혼 기념일 챙기기, 은혼식, 금혼식, 부부간의 기념적인 사건이나
역사적인 계기를 만드는 일들을 수시로 하는 것은 좋다.
간증할 수 있는 일이나 사건이 많이 생길수록
자신과의 주님과의 관계의 줄을 더 튼튼하게 묶는다.
그것처럼 주님과의 성도와의 관계도 구원의 관계를 신선하게 하기 위해 재 헌신이나,
혹은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로 하는 새로운 결단이나
헌신적인 자세의 매무새 고침 등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더 깊은 더 풍부하게 경험하는 것도
주님과의 관계를 강화시켜주는 데 도움이 된다.
주님과의 교제는 관계의 어떠함에 영향을 받는다.
관계가 신선하고 진지하고 생생하면 할수록
교제는 깊어지고, 폭이 넓어 지며, 교제는 활발해 질것이다.
기도의 응답이나 은혜나 은사의 체험은 교제를 더 활성화 하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 설정에 일조하는 일
즉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말씀 사역에 종사하는 일도
주님과의 교제를 풍성하게 한다.
주님의 포도 나무에 붙어있는 다른 가지들을(성도들)위해 봉사하는 일도
자신의 가지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된다.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도와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돕는 일이며,
자신에게 일시적인 유익과 영원한 영광을 동시에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 공부 안
* 요한 복음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의 관계는
참 포도 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의 필연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신자들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구원의 확신인가?
아니면 주님에 대한 충성심인가?
주님을 위한 헌신의 자세인가?
교회와 타 성도들을 위한 봉사인가?
2. 참 포도 나무의 관리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지의 처분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가지에 대해 전지하는 것(가지를 손질)과
접붙임 하는 것(새로운 특성으로 만듬), 아니면 잘리는 것(버림받음) 등이다.
이 전지하는 것이나 가지를 새롭게 하는 방법은?
삶의 시련이나 영적인 훈련이나, 영적인 깨달음, 아니면 성품 개조,
은사 개발 등 아니면 다른 요소들은?
자신이 가지로서 성장하고 열매 맺는 충실한 가지로
변화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해보세요.
* 신자로서 열매를 맺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는?
내부적으로 병든 가지는 충분하게 나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다.
외부적으로 상한 가지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가지로서의
생존이나 성장이나 열매 맺음에 영향을 받는다.
1. 건강한 가지가 되어가는 데에 있어, 방해 받는 자신 안에 있는 내면의 문제는?
2. 가지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외부의 요인?
*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열매 맺는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말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통해 나타나는 신앙적인 표현은?
2. 기도의 생활을 통해 보여주는 간증적인 체험은?
3. 크리스천의 삶을 통해 나타내는 생활의 현상들은?
올해 새해 정초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 주신 주님의 은총이다.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의 심령에 부딪치는 커다란 반향이 된다.
그 동안 나의 기도 생활은 나의 영성을 유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성은 영혼의 성품인가? 영혼이 향하는 영적인 경향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이며,
경험되어지는 영적인 세계의 창문인가?
나는 기도를 통해 어릴 때에 가졌던 인생의 꿈들, 먼 미래에 다가올 새날들에 대한 기대를
바라보는 내일의 창문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자신은 기도를 하다 언제는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싶은 간절할 때가 있다.
내 영혼이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에 흥분되는 그 무엇을 준다.
영음으로 들려오는 내면의 반응은 영혼의 감성을 자극하여
열린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나의 기도가 천상에 계시는 창조주에게 올려져 왔다.
나의 무수한 쏟아낸 간구들은 때로는 영혼의 절규가 되기도 하며,
고요하게 내면에 울려 퍼지는 묵상의 언어들,
혹은 하늘을 쳐다보면 나의 마음의 창문으로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들,
그리고 나의 꿈이나 비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내면의 마음의 소리들.....
그 동안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의 기도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께 대한 헌신과
구원받음에 대한 감격의 열정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평신도로 사역을 할 때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에 분반 아이들에 대한 어린 목자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어린 영혼들을 위해 순수한 목자의 열정을 담은 간구를 뜨겁게 올리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중 고등부 전담 담당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전체 중 고등부의 부흥과 젊은 영혼들의 세상의 쉽게 노출된 유혹을 차단하고
그들을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 열정적인 간구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의 영적인 생활은 보다 깊은 영적인 갈망이 솟구쳐 특별 기도나,
산 기도나, 금식 기도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런 기도들은 주님을 찾는 영적인 갈망과
더불어 나의 장래를 부탁 드리는 기도를 드렸으며,
그러다가 나의 인생의 전체에 대한 간구를 드리기도 하며,
나의 삶을 드리는 헌신적인 기도가 드려졌다.
그런 기도를 드렸던 나의 영적 생활에 전환점이 되는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나의 영성을 순수의 열정에서 고뇌의 무감각의 영성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느 주일날 젊은 교우의 군입대를 환송하는 곳에 갔는데,
당시 그 젊은 영혼은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서
세속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친구였다.
그 친구의 환송은 동네 막걸리 집에서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여
거룩한 나의 몸과 영에 영향을 받게 되어
주님앞에서 나의 영성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은 그 후 주님께 회개를 드리는
10일간의 물만 먹고 하는 금식 기도를 드리는
나의 내면에의 영성에 변화를 가져와
나의 영성은 무감각해 진 영혼의 상태로 나아가
결국 영성의 순도는 무디어져 이어진 군생활 3년 동안의 기도 생활은
더 깊은 영적인 은혜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영적인 성장이 멈춘 상태로 지나게 되었다.
나의 기도도 신선함을 잃은 상태로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에 군 제대 후에 신학교에 복귀하여,
그 후로부터 교육 전도사로 있을 때에는
중 고등부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당시 사역자로 나선 처음의 사역시기에
자신의 영혼은 그래도 열렬히 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심방 전도사로 성도들의 각 가정을 심방하면서
교우들의 가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그리고 직업이나 사업에 대한 간구를 그들을 위해 드리고 하였다.
이렇듯이 사역자로 혹은 책임 있는 목회를 하면서
나의 기도는 인간적이며 세속적이며,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사역의 도구로서의 기도를 드렸다.
평신도 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기도는 점점 식으면서,
제도적이고 습관적인 기도의 언어들이 나의 영혼에 메아리 쳤다.
부목사로 있을 때에는 심방을 하면서 늘 교우들의 개인적인 문제나
혹은 교회의 공동체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었다.
어느 때에는 하루에 심방을 하는데 거의 30가정을 다녔던 적도 있다.
심방 대원들과 함께, 잠시 가정에 머물며, 가정의 상황을 듣고는 바로 기도를 드린다.
같이 다니는 대원들에게 꼭 같이 들려지지 않는 기도를 드리려고 했으나,
그러나 나의 기도는 어느 새 공식처럼 가정의 가족들의 평안과
가족들의 축복된 삶과 그리고 그들의 대소사의 문제들을 간구 드렸다.
유학의 시기들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신학교의 신학적인 배움의 길에서는
영혼에의 메마른 상태에 있었고
기나긴 영혼의 고뇌의 시간들과 더불어
더 깊어진 영성의 변화와 함께 몇 번의 내면의 치유와
영적인 깨달음과 넓어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뿌리들을
이루게하는 영성과 경건신학의 배움은 자신의 영성의 형성과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영성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개인 경건의 시간들이 도움이 되나,
과거 처음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가졌던 순수함과 영적인 열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이렇듯이 자신의 기도의 생활의 변천사는
나의 영성의 변화와 맞물려 나의 신앙생활을 형성하여 왔던 것이다.
당시 주님께 드려지던 기도의 언어는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주며,
자신의 영성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는 가운데에 특히 나의 신앙의 삶의 역사에는
메마른 영혼의 시기였던 신앙의 암흑기와 영적인 굴곡의 나래에서도 기도는
언제나 주님께 드려졌다.
기도의 언어나 내용은 나의 영성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할 수 있겠다.
목양을 하는 요즘은 교회의 목회와
교우들의 목양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역자의 기도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영성을 깨우치는 기도에의 헌신에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벧전 2:9-10) |
출 15:1-18
이스라엘의 구원은 마지막까지 애굽의 군대의 추격을 받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200만명이나 애굽의 노예를 잃은 애굽의 왕 바로와
그의 부하들은 장자들의 죽음에 애통하며 장례를 치루고 난후,
그들은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잡아두려고
바로와 그의 군대는 전차 600대를 앞세우며,
며칠동안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홍해바다앞에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절대절명의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바다가 놓여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600대의 전차가 달려오고 있어,
모두가 죽을 상황, 독 안에 든 쥐(A rat in a trap),
진퇴양난(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라는 말처럼
앞, 뒤, 좌우 다 돌아보아도,
그들은 살아날 길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민족으로 취급받으며, 천대받고 살았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삶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고통의 소리에 신음하였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저주받은 삶, 희망이 없는 삶, 속박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의 상황은
현재의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그 동포들 중에 그곳에서 탈북 하시는 분들은 살 희망이 없으니 탈출합니다.
출애굽 하듯, 그들은 그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홍해바다 앞에 처한 위기의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펴서 그 바다를 열고
바다의 열린 길을 육지처럼 건너 구원받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저의 교회에 교역자 일일 수양회를 바닷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잦은 흐린 날이었는데,
수영을 하면서 육지에서 조금 바다가로 나갔습니다.
제가 수영을 하는 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
제가 수영을 하면서 나오려고 하는데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갑자기 물에 빠져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규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저의 등뒤를 누군가가 힘을 받치면서 저를 밀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은혜 받았을 때에,
당시에 젊은 나이에 저는 신경성위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아, 약을 먹어야 되고,
만성적으로 소화불량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저의 마음에 평안함이 왔을 때,
저는 그 신경성 위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체험은 예수님을 믿은 저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위장병이 고쳐졌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주일 낮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다녀와서는
혼자 뒷산에 올라가 오후 내내 주님을 찬송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은혜의 깊음에 잠기다 보니,
저의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을 높여 드리고저 하는 강렬한 마음이 일곤 하였습니다.
그런 찬송 부름의 습관은 바로 저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감격을 기쁨으로 노래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밤새껏 동풍이 불어서 바닷물을 두쪽으로 물벽을 세워
그 사이를 육지처럼 건넜던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 모세와 더불어,
그 새벽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나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주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구주 하나님께 찬송드림은 당연한 신앙인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로 표현함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지, 정, 의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중에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적시어
정서적인 믿음의 단계인 마음의 감격이 정서적으로 찬송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세상에 어느 음악이든지, 음악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찬송생활은 크리스천음악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음악은 우리의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세속적인 음악은 성도에게 세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유명한 신학교교수님의 여고생 딸이
영적으로 공격을 받아 고생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귀신의 영향이 점점세워져 결국에는 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딸에게 있는 귀신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딸의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은 그녀가 자주 들었던
아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록음악에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단적인 타락한 음악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음악을 조심스럽게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그런 나쁜 음악에 오염되어
정신과 마음을 아울러 더럽히게 하는
악한 영에 열려, 자신도 가눌수 없는 어둠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의 정서를 부드럽게, 음악이 없다면 인생의 삶이 삭막합니다.
슬플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고, 기쁠 때에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의 건강에 좋습니다.
특히 노래하는 마음이나 듣는 기쁨은 마음의 정서를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찬송하는 일은 더욱 영혼을 강화, 마음의 정서를 편하게 함과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더 우리의 마음을 이끌리게 합니다.
성경에는 단체나 개인이 찬양이나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기사들이 여러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역대하 20: 1이하에, 남 왕국 유대의 나라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유다는 막을 힘이 없어,
군대의 힘이 약하니, 긴급히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의 군대가 평소에 훈련되거나 적들을 대항할만한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여
왕으로 비롯하여 온 나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력이 연합군으로 편성된 적들을 대항하여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다의 군대 앞에
레위족속들의 성가대 앞세우며, 찬송을 부르며, 적진으로 나가니,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하나님께서 적들의 전력을 상실하게 하시므로,
적의 연합군은 서로 반목질시하여, 서로 죽이다가,
결국에는 다 전멸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을 승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전장에 널려있는 전리품을 수거하는데,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다 가져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잃었던 것을
불레셋의 나라의 족속들에서 되찾아올 때에,
춤을 추면서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찬송은 때로는 이렇게 기쁨이 충만한 자신을 가눌수 없는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흥겨워서 춤을 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신 후, 감람산으로 나가실때에
그들과 함께 찬미하시며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4:26절에는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첫순교자 스데반의 집사가 원수들로 부터 무수한 돌을 맞으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순교하는 순간에
스데반은 자기의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며,
그의 은혜를 유지하는 신앙에 활력이 됩니다.
늘 찬송을 가까이 함은 크리스천의 삶의 승리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 송구영신 예배 시에 말씀 드렸지만,
제가 새벽에 찬송을 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천국의 길을 향하는 나의 마음에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찬송의 유익은 성도의 신앙의 자세의 나약함을 강화시켜줍니다.
찬송할 때에, 성도들에게 들어있던 부정적인 마음,
나약한 마음에, 강한 의지와 용기의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찬송은 우리에게 또한 적극적인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늘 찬송하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명랑한 얼굴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입고 사는 성도의 삶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며,
그 구원과 은혜의 감격은 날마다 주님을 높이며,
찬미하며 사는 성도들로 살게 합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