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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5-22
이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이다.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이다.
룻기는 “우정”이라는 뜻이며,
룻기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려운 사사 시대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당시는 배교와 전쟁과 몰락과 강포와 도덕적 부패와 반란의 시대임을 보여준다.
나오미는 이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처지에서 며느리들에게
자기의 고국이나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면한다.
나오미의 며느리들은 모압 여인들이었다.
그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동족이나 신에게로 돌아가라는 시모의 권면에 따라야 할 것인데,
오르바는 시모의 권유를 받아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새로운 남편이나 새 삶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룻은 자신의 선택을 시모인 나오미를 택하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1 모험과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선택이다. 룻은 시모가 사는 곳에 자신도 살며,
시모가 죽는 곳에 자신도 그 곳에 죽겠다고 한다.
현실적이지 않고 희망이 없는 시모를 선책한다.
인생에 있어서, 투자를 하거나 선택하는 일에, 신중하게 지혜가 필요하다.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선택도 필요하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선택은
현실적이고 보이는 것에 대한 선택하는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룻은 자기 동족에게로 가면, 순탄할 것이다.
그러나 시모를 선택하는 일에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보장이 없다.
이스라엘에 수혼법이 있다. 그 법은 형제가 아내를 두고 죽었을 때에
그 밑에 형제가 대를 잇는 법으로 자녀를 생산하기도 한다.
여인에 대한 자비의 법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대를 이어가려는
이스라엘의 지혜에서 나온 법이다.
그러나 나오미의 며느리들에게는 이런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다만 시모를 모셔야 하는 수고만 있을 뿐이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곳을 선택하는 모험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봉사와 희생의 선택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효성으로 시모를 보호하려는 봉사하려는 생각이며,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선택이다.
며느리로서 시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순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며느리 전성시대라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도 우리네, 삶에는 인간의 윤리가 중요하다.
룻의 선택은 그녀의 신앙을 나타내는 선택이 었다.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또 다시 우상숭배의 죄로 가기 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신앙의 동기가 선택의 중심이 었다.
이방인이 개종하려면, 안식일이나, 절삭일들을 지켜야 하며,
113가지의 율레들을 지켜야 하는 수고가 따라야 한다.
이방인에게는 때로는 이스라엘의 법은 엄하며 지키기가 용이하지 않다.
더 나아가 간음한 여인에게는 돌로 쳐 죽인다든지
중한 죄에 대해 목을 매어 사형하는,
엄격한 윤리가 적용되며, 시행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세상 사람들의 도덕보다는 높으며,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룻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선택은 1. 남을 도우려는 선택이며,
2. 순리를 따르는 선택이며, 희생과 모험이 따르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이방인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좇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6번씩이나 어머니라고 부르는
룻은 시어머니에 대한 효정이나 애정이 지극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려는 의지는 믿음에서 나왔다.
시모와 오랫동안을 살은 며느리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믿음의 마음이 있었다.
오르바는 결국 우상숭배하는 자기의 동족으로 돌아갔다.
오르바의 선택은 때로는 인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모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남편을 구하고자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룻은 자기 가족 친척을 버리고,
민족성을 버리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다.
고로 그녀의 선택은 비장한 선택이 었다.
끝가지 시모를 좇아가려는 아름다운 효의 선택이 었다.
앞으로 남편이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도 있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삶을 한 단계를 높이는 귀한 선택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일취월장하게 하는 고결한 선택이었다.
그녀에게는 다만 희생과 봉사만이 요구되는 모험의 선택이었고,
희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녀는 결과를 졸 때에 그녀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신의 섭리는 시모를 모시려는 그녀에게는 덤으로 잘사고 유력한 남편과
또한 자녀를 낳는 복을 주었으며,
자기 동족과 우상을 버리는 그녀의 결단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으로서 택함을 입었다.
그 뿐아니라 다윗의 증조 할머니로서 왕족의 가문에 들어가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위대한 은총과 영광을 얻었다.
룻의 선택의 이면에는 이렇듯이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느끼는 섭리가 있었다.
반면에 이방 땅인 모압지방으로 이민 생활을 선택하고 고국을 떠난 나오미는
그의 이민생활에서 얻은 것은 오직 실패하는 인생뿐인 것이었다.
나오미의 실패는 고통과 우울을 주는 삶이 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쓰디쓴 인생의 맛을 맛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분명한 이스라엘인의 신앙도
그녀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을 가졌을 것이다.
신앙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다운되는 그런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괴로와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은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이나
다가오는 미래를 제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실패와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그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에 넘어있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의 의도와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섭리신앙에 대한 인간의 한계이며,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순종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오미는 마치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이민의 삶을 살려고 왔지만,
다 잃어버리고, 실망과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쓰디쓴 나날들을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나, 그분에 대한 신앙이나 존경보다는
주님에 대한 섭섭함이나 원망, 그리고 한탄스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울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실패와 자절에서 겪는 상실에서 오는 고통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넘어뜨릴수 있으나,
신의 섭리아래에 있는 인생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상실을 넘어서는 때에,
자신은 더욱 강한 자로 세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실패를 딛고 진행된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형제들에게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가,
주인 보디발집에서도 의롭게 충실하게 실력있게, 청지기직을 잘하였으나,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통해 억울하게 모합을 받아,
국가 범죄인들이 들어가는 지하감옥 같은 곳에 들어가서 수년을 보내었다.
그는 그곳에서 더 힘들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훈련의 때를 보내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의 기도는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고 체념하며,
그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이 있고,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로 그자리에 머물어 있어야 함 했다.
거기에서 생활은 실망과 한숨이 섞인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곡이 깊은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 처럼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의롭고 불쌍한 요셉을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가장 높은 자리인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신다.
우리는 늘 인간의 생각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며,
그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기에 이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그분에게 맡기는 믿음을 따라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이 움직이시는 때와 방법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고로 신앙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현재의 일시적인 현장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으로
인간의 역사를 두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장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룻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의미를 되새겨 주며,
신앙의 선택이 주는 이유와 인생의 삶의 실패와 성공을 보게 하는 교훈을 준다.
창세기 1:24-31
창조된 자연 속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신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식적인 관점에서, 일반적인 계시로 부분적으로 말씀하신다. 예를 들면 천둥과 번개는 사람들 속에 미지의 세계나, 혹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신의 세계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리고 신의 창조된 자연의 세계는 신의 솜씨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창조는 전능하신 창조 사역이다.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
1.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셨다. 그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심이며, 동시적이며, 일시적인 창조이다.
2.그의 창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전능하심, 전지하심, 무소부재 하심,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다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말씀의 창조 사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창조사역은 그의 영원성, 전능성, 인격성, 진리성등을 나타내신다.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창조의 목적이나 동역의 사역을 통해 중간 역할을 하신다.
4.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삼위일체의 사역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심, 성령은 창조하신 말씀을 직접 이루어 지게 하심, 수면에 운행하심, 말씀 창조 사역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모든 만물이 이루어 지심
5.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순서대로 하심이다. 질서데로 창조하셔서 잘 조직하셨다.
6.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심, 창조와 보존과 섭리의 사역이 있으심,
7.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육의 창조 사역이 있고, 영의 창조 사역이 있으심, 영물들을 창조하심, 재창조의 사역의 시발점은 창조 사역에 있다. 인간 구원의 사역은 재창조의 사역이다.
8. 창조와 타락은 연결되어 있음, 창조는 세상의 존재의 모든 원인의 해답, 타락은 인간 문제의 원인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 명령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 된다.
1.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직접 창조 즉, 직접 인간을 빗으심, 대화와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2.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의 창조,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의 역할, 지성의 역할, 영성의 역할 등으로 나뉘어 있다. 고로 인간은 신의 거룩성이나 신성을 닮았다. 에베소서4:24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의 속성을 따라 재창조의 사역으로서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3.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에 직접적으로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어 사람들은 창조 사역 중에 하나님의 창조의 복을 받았다. 고로, 인간들은 신의 축복 안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명예와 은총이 있다.
4.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장이며, 동시에 창조의 파트너이다. 고로 창조세계의 관리인으로 혹은 통치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고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창조의 명령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1.생육하고 번성하라/ 자기 생존이나, 자기 성장 이나 자기 발전하라, 건강하게 생존하고, 자기를 잘 가꾸어야 할 일이다. 고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육적인 사람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되라, 또한 항상 건강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가꾸라, 더 나아가 영적으로 복음으로 거듭나는 일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땅에 충만 하라/ 자기 표현이나 역할을, 자기에 대해 자기 인생에 대해 완성하라, 자기를 극대화하라, 자기 성장이나, 발전하라, 자기고유의 재능 개발을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인 탈랜트 개발을 하여, 자신안에서 기술적이나 기능적인 것을 잘 하도록 개발하라, 고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을 잘하라
3.땅을 정복하라/ 영향력을 주라, 자신의 리더쉽을 키우라, 좋은 사회인으로 살라, 크리스천(특별한 부름을 받은 군인)의 전투적인 입장을 따라, 이 땅의 어두움을 정복하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과 사랑으로 정복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28:19-20 18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자신에게 있음을 언급하시며, 믿는 이들에게 다시금 복음 선포를 통해서 재창조의 명령을 주셨다. 19절에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으로 어둠을 정복하라 1. 제자를 삼으라 2.세례를 베풀라20절에,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
4.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즉 창조세계의 관리인이 되라는 것이다. 주님의 통치의 모든 영역에서 청지기가 되라,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한을 통해 통치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벧전 2:11-17
크리스천에게는 사회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삶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죄에 대해 대적하며, 법적인 권위에 순응하며,
주인이나 상관들에게 인내로 참으라고 권면한다.
이렇게 하면 다른 불신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며,
어리석은 사람들의 비방을 막으며,
하나님께 칭찬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친애하는 사람들이라며,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형제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세상에서 외국인처럼 그리고 나그네처럼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신자들을 외국인이라 여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천국의 시민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외인처럼 살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말은 언제나 자기의 자의식이나 세계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함을 명하며,
세상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이 크리스천의 가치나 믿음을 부정하므로,
세상에 속한 것은 비도덕적이며,
죄 짓는 욕망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나그네처럼 죄악적인 세상의 추구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음을 명하고 있다.
마치 그것은 전쟁을 치르는 사람처럼
즉 영적인 전쟁을 매일 싸우며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세상에서 공중 권세 잡은 악한 마귀가
세상을 통해 크리스천들을 유혹하거나,
혹은 도전을 걸어 믿음의 가치나 삶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이런 죄의 욕망에서부터 절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 앞에서 효과적인 증인으로서 살기 위한 것이다.
적극적인 크리스천은 죄악 세상에 대해 능력 있게 빛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거짓말로 크리스천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즉 그 어둠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 어두움을 밝혀줄 빛을 발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 선한 행위나 삶의 스타일을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새롭게 받을 불신의 형제들에게 주님이 방문을 하실 때에,
그 좋은 선행이 효과적인 인도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기독교 역사에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에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를 통해
민족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대표적인 경우의 예를 보면,
민족의 기운이 불운할 때에,
매일 저가에서 술만 퍼 마시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강패였던 김익두같은 사람에게
어느 날 외국인 여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지를 코를 풀고는,
그 선교사를 위협하였던 것에 대해 선하게 반응한 일로 인하여,
그 깡패 김익두는 마음에 찔림과 진한 감동의 도전을 받아,
급기야는 당시의 유명한 폭력배인 그를 거꾸로 뜨려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은 천국의 시민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가 속한 조국이나 사회에 소속된 일원으로
자기 책임을 감당해야 할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모든 권위에 순응할 것을 명하는데,
그 순응의 동기는 위반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보다는 주님을 위하여,
즉 그것은 모든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에 대한 영향력이 그의 권한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 권위를 세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세운 법적인 권위의 목적은 악한 자에게 징벌을 가하고
선한 행위를 격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
고로 그 권위에 순응하는 일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을 비방하며 악의적으로 거짓 증거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므로,
그들의 비방이나 중상 모략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빛이 크리스천들을 통해
더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 권면의 역사적이나 지리적인 배경은
당시 로마 시대의 전 제국의 조직적인 핍박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주는 권면이다.
즉 우리 시대에 우리나라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같은 문제에 봉착하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다.
그 문제란 말로나 언론의 힘으로 크리스천이나
그 사회의 모습들에 대해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것일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하나의 흔한 현상으로 문제 있는 것이나
혹은 그렇지 않는 것일지라도,
많은 크리스천들의 행위에 대해
사회적인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같은 비방 스런 중상 모략같은 공격적인 일들에 대해
최선의 방패는 크리스천들의 선한 행위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일 것이다.
사회의 법적인 구속이나 제도에 대해 순응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그 사회의 법이나 제도에 기꺼이 순응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일 것이다.
크리스천들의 자유는 언제나 책임 의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그 자유는 악을 마음껏 행하도록 하는 만용적인 자유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즐기며,
그 사회에 속한 한 일원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갖고 사는
하나님의 종처럼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크리스천들의 시민 의식은
먼저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표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큰 가족 의식을 갖고 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단이나 교파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에도 더불어 함께 이해하며,
생각하는 동지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행위에 대해
먼저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제도적인 권위나 법적인 구속에 대해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할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권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허용이 있기에 그렇다.
룻기 1:15-22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러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신앙은 선택으로 표출된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순간 순간들이 넘실댄다. 금성 냉장고나 텔레비전에 대한 한번의 선택은 제품의 품질 보증의10년을 좌우 합니다 라는 광고를 접한 적이 있었다. 항상 인생 앞에는 여러가지 선택의 기로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인생의 길에는 천안 삼거리와 같은 길들이 많이 놓여 있다. 그 천안 삼거리에서 한 길을 선택하여 가면 그 길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다른 도로 가는 세 갈랫길로 나뉜다. 하나는 전라도로 가는 길이며, 하나는 경상도로 가는 것이며, 그리고 충청도로 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즉 7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났다. 민족의 앞날에 중요한 결정을 하며, 다가오는 미래를 함께 맞이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북한은 특히 개방이냐 아니면, 폐쇄냐 하는 기로에서 생존의 갈림길에 달려 있다. 남북은 이제 따로 설수 없는 민족 공영 공존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남은 북을 품지 않으면 번영으로 더 나갈 수 없으며, 북은 남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남북 민족의 공동의 운명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다.
롯의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삼촌 아브라함 앞에서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장차 망할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의 에덴동산 같은 곳을 선택하여 나중에는 그곳에서 의인으로서 심한 영적이며 도덕적인 우울에 걸려, 끌려 다니다 시피하는 타락된 사회에서 맛 잃은 소금처럼 이리 저리 치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그 땅의 사람들과 같은 운명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롯 유다는 몊 푼에 스승을 파는 후회막급의 선택을 하여, 결국 자살로 자신의 생애를 끝냈다. 지옥의 자리에 떨어졌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통일 왕국의 통일 치세의 길을 제시하는 노인들의 지혜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분단으로 이끄는 자기 동무들의 어리석음의 과욕의 분단의 길을 선택하여, 결국 통일 왕국인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는 안타까운 민족적인 손해의 행보를 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영생을 위한 선택을 통해 그는 주님의 제자들 중에 수제자로 그의 사역을 이어받아, 초대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하였으며, 쿠오바디스라는 영화에도 나오듯이 그는 십자가의 죽음의 선택의 기로에서 도망가듯 로마에서 빠져 나오다, 그는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가시는 주님의 환상을 보고 그는 결국 주님을 위해 죽기로 하는 십자가의 순교의 선택을 하였다.
사업에도 투자 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투자한다. 공부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선택한다. 연애도 결혼도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를 선택하는 가는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늦은 막이나 혹은 갖 결혼하자마자 이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쏘아져 나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의 실수로 인하여,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려는 경향들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삶의 이야기 가운데에 이 이야기는 지극히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전의 이야기이다. 어려운 일에 있을 달콤한 축복의 세월을 교훈하는 고진감래라는 말이나, 역전의 삶의 통용어인 기사회생의 말이라 든 지를 생각나게 하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진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에 매료되어, 그것이 한류가 되어 외국에 까지 타민족의 사회에 영향을 주는 감동의 이야기로 알려 주고 있다.
한류의 원조인 겨울 연가를 저는 감명 있게 본 적이 있다.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특히 주인공의 죽음과 그 죽음 후에 있는 꿈 같은 재회의 기회로서 죽은 이에 대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는 그 드라마에서 주님에 대한 저의 첫사랑의 애끓는 듯한 과거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기억나게 하여, 영적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주인공은 죽은 첫 애인에 대한 첫사랑의 향수를 그녀를 자주 괴롭혔지만, 그녀는 그 첫사랑의 분신으로 그녀 앞에 다가온 새로운 인연의 만남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연결로 끝나는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인생의 삶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유산을 남겨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민족의 이야기를 말로 전수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녀들 세대에 전달하며 자기들만의 민족적이며, 신앙적인 희망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원래 성경은 기록된 문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말로 전달되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의 당시에도 신약은 없었고 다만 그들에게는 주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만 전달되며, 그 이야기나 간증은 생명력이 되어 사람들의 삶에 파고 들어 죽어가는 인생들을 변화시키는 부활과 생명의 메시지로 널리 로마 세계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전파되었다. 나중에는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나오미는 고향 땅을 떠나 객지 생활 10년 만에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어버린 인생의 쓰라린 상실의 계절을 맞이했다. 모압이라는 땅에 들어가는 그녀에게는 이민의 삶이 기회의 땅이 아니고, 그녀에게는 상실과 방황의 쓰디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민 생활에서 맞이한 이방 여인이었던 두 며느리는 모압의 여인들로 이방 풍습에 젖어있던 그 며느리들은 남편이 죽자 그들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고, 자식도 없는 처지에서 당연히 그들을 보낸 친정 집이며, 같은 동족인 모압 족속에게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나오미는 그 자부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삶의 시련과 황량함으로 남은 자신의 삶의 부담을 안겨줄 뿐이다. 룻은 아무것도 없는 희망이라고 볼 수 없는 그녀의 시어머니의 황량한 고통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겉으로는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두 여인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의 삶을 보지 않고, 그녀의 배후에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자신이 돌보아 주리라는 일념으로 시어머니를 세상 끝까지 따르려는 아름다운 선택을 하였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것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할 때가 많다. 룻 그녀는 황량한 시어머니의 삶을 끌어안으며, 그 험악한 삶의 세월들을 헤쳐나가리라는 비장한 각오의 선택을 하고 있다.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공동 운명체로 이방 여인이었던 자신의 삶을 시어머니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그녀는 보이는 처량한 시어머니의 삶을 보지 않고 그녀의 배후에서 새롭게 역사하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룻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녀의 시어머니의 삶과 묶는 결단의 말을 하고 있다. 살아도 그녀와 함께 죽어도 그녀의 곁에서 죽을 것이라는 일사각오와 같은 희생적인 결단은 그녀의 선택을 나약하지만, 훌륭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비장한 선택의 말을 내뱉고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 시어머니의 인생의 삶의 삭막하고 실패한 자처럼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 거기에 계시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오히려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와 함께 하고자 하는 자신의 선택이 당연한 귀결임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룻의 부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활 신앙은 인생의 실패와 좌절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나오미는 감동적인 며느리의 결단과 그녀의 확고한 마음을 보고는 그녀에 대하여 시어머니로서 그녀의 기특함을 보고, 그녀의 선택을 받아 용납하였다. 이제는 한 여인의 황량한 삶이 아니라, 두 여인의 아름다운 삶의 미래가 전개되는 것이다. 인생은 좌절과 실의 속에서도 함께하는 두 마음의 결합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부부가 함께 마음으로 한다면, 그 일은 쉬이 물러가며, 그 어려운 때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어려움이 극할 때에 주변에 있는 우인이나 친우들의 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격려나 충고는 자신에게 엄청난 힘을 얻는 계기가 된다.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과 함께 고향 땅을 다시 밟았을 때에, 온 동리가 그들을 보러 나왔다. 그 두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고향 사람들은 옛날 같은 동네 이웃이었던 나오미를 보며,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처럼 기쁨의 여인 같은 모습이 아니고 쓸쓸한 노인의 황량함과 희망을 바라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한 그녀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고향을 떠 날 때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희망찬 이민의 삶을 살 것을 바라보면서 나갔지만, 이제는 타향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을 고백하는 쓰디쓴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며 기쁨의 여인이 아니라, 괴로운 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인생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가는 젊은 시절에 가고 있던 꿈을 향해 나가던 시절이 어느 덧, 지난 날들을 회고하며, 회한에 빠져 슬픔과 실의에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게 한다. 젊은 시절의 강인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생기 있고 발랄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몸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무능하고 연약한 자신을 깊이 느끼는 시간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생은 결코 우리의 삶을 그렇게 결산하도록 해서는 안되는 삶의 진지함이나, 인생의 숭고한 발자취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생명이야말로, 자신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후회하고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는 그때에야 말로 인생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들의 처하는 위치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었던 나오미의 삶의 처량하고 처참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황량한 그녀의 노후에 더 너머에 있는 그녀의 말년의 세월은 인생 행복 귀결이라는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다복한 여인의 말년을 보내며, 지난 쓰라린 세월들을 되갚아 그렇게 찾기를 힘썼던 그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왜 인생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일을 신의 조화라고 여기는 가 여기 나오미도 자신의 고되고 고통스런 삶을 겪으면서, 자신의 삶이 이렇게 황량 스럽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 화복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삶의 이야기 중심에서 도외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끌어 이 땅에 살게 하였으며, 그리고 나를 따라 내가 살아온 길에 서 계셨으며, 장차 나의 미래를 이끄실 분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이나 불행이나, 죽고 사는 일들은 그 분안에 있는 우리 인생들이 겪은 일들이며, 그리고 장차 맛보야 할 일들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룻의 하나님 선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녀는 과연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의 운명을 넘어가는 크나큰 인생 선택의 결단이었다.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 주제는 기독교 역사에 전통적인 가르침에 의해 옹호를 받고 있다.
지옥은 성경에서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지옥의 현실과 그곳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영원한 심판의 현장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관용(용서의 기간을 넘긴 경우)이 없는
그의 엄중한 심판을 받는 곳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존재의 엄연한 현실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지옥의 심판에 대해 그 엄연한 심판의 현장의 사실성을 왜곡하여,
그곳에 대한 상상적인 비유로 영혼의 영원 소멸이라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며,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의 강조로,
그의 복음을 거부한 인생들에 대해 유여 하는 정도의 심판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의 존재와 그의 알려주신 복음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인생들은 가야 할 엄연한 심판의 현장인 것이다.
이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심판이 문자 그대로 사실대로 이루어 지는 영원한 감옥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한 타락한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어둠의 영들이 가는 곳이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인생들이 가야 할 곳임을 증거하고 있다.
지옥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어지는 곳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죽음의 영원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곳은 영영히 불이 타는 곳으로,
악한 존재들에 대한 심판의 현장으로
그곳의 생생한 감옥의 역할을 하는 곳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는 앞으로 인간 사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대 파노라마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 중에 지옥이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곳으로,
동시에 그 심판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 계시록 20:10 에 사단은 불타는 연못과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며,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던져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시록 14:11에, 지옥에서 고통의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가며,
밤낮 쉬지 않고 고통을 당하는 현장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단과 그의 짐승들에게 경배하는 자들도 그 연못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
영원한 고통을 받는 다는 교리는 복음주의자들과
비 복음주의자들 사이를 구분하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옥의 교리를 수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신학의 근본적인 시스템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죽음 안에서 인간들은 죽음의 테두리 안에서 생명의 희망을 희구한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생명과 연결되는 영생으로 나가지만,
악인은 하나님과의 단절의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영벌로 나간다.
지옥의 고통은 다가오며,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이다.
고통 받는 곳과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곳으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신약의 한결 같은 주제이다.
지옥에 대한 세가지 그림은 천국에 대한 성경적인 묘사와 대조된다.
지옥은 천국을 상급이나 상속으로서 여기는 것과 같이 지옥은 처벌로 나타난다.
심판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지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전능하게 구원 얻을 자를 선택하시며,
그들의 죄 때문에 처벌받을 자들을 심판 받도록 허락하신다.
지옥에 대한 사실이나 지옥 형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는 만인구원론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으로 지옥형벌을 받을 사람이 없다라는 논리이다.
그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심판의 현실성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은 성경적인 가르침에 맞지 않다.
그것의 낙관적인 견해는 위로를 주지만, 인간의 죄의 비극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간의 불신적인 것들을 통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무시한다.
또 하나는 영원 소멸론(annihilationism)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데서 사람들이 떨어져나가,
그저 단지 영혼이 영원히 죽는 것을 믿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게하지만,
그 논리는 인간은 영혼불멸의 존재로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의인은 영생의 부활로, 혹은 악인은 영벌의 부활로 존재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대치되는 논리이다. .
마지막으로는 조건주의론(conditionalism)이 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영혼의 상태가 불멸하는 존재로 육체는 죽으나,
다시 영혼의 상태는 지속되는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함으로 신자들은 신의 성품과 불멸성을 받는다.
그러나 불신의 상태로 남아있을 시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고로,
그 자신이 지은 죄에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공존은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받은 자의 행복을 감하지 않는다.
비 기독교인들의 처벌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엄위성을 증거하며,
그의 능력을 과시하며, 그의 공의를 높이며,
그의 은혜를 간접적으로 극대화한다.
지옥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의 효과를 기대하는 인간들에게도
엄연히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 속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인생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한다.
Morgan, Christopher’s Hell Under Fire 중에서
베드로 전서 1: 22-2: 3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을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크리스천의 생활은 날마다 새로 와 지며, 거룩해가며, 정결함을 유지하는 삶이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는 삶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을 유지하는 삶이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삶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였던 주님의 말씀이 있다.
진리를 순종함은 인생의 참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마음의 부패를 가져왔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의 부패와 연결되어 있어, 밝아야 할 인간의 양심이나, 영혼의 상태는 어둠에 휩싸여 있다. 거기에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와서 밝혀야, 어둠이 걷히고, 마비되고 찌들인 양심의 기능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생령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교류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진리의 말씀은 어두운 인간의 영혼을 밝혀,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며, 말씀 속에 계신 주님의 정화시키는 능력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므로, 자신 안에 순결함으로 회복하게 한다. 어둠에 처해 있을 때에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하며, 왜곡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비쳐주면,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함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뉘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둠에 숨어 있는 죄의 그림자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가까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인 새 생명의 출생을 의미한다. 그 생명을 탄생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세상에 있는 썩어지는 모든 것(육체에 속한 것)과는 다른 본질의 것으로 그 말씀은 원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지만, 다시금, 그 말씀은 영혼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죽었던 인간의 영적 생명(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생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성과 현존성을 드러낸다.
그 인간에게 전달 되어진 기록된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인 영원한 말씀(영생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말씀으로 그분의 영원한 존재성과 더불어 그 말씀은 살아있다.
모든 인생이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 이지상에 한 일들은 인간의 기억에 남지만, 그러나 다 사라지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세운 업적이나 공로나, 일들은 결국 마지막에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들이 얻은 영광도 세상의 사라짐과 더불어 없어진다. 그러니 아침에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라도 저녁에 시들어지는 때에는 힘을 잃고, 생기를 잃어, 아름다움의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렇듯이 인생의 날들은 젊은 때에 활기찬 것들이 노년에 시들해지면서, 결국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듯, 인간이 세운 모든 일들이 다 사라진다. 거기에 안주하려다가는 실망을 하며, 또 거기에 자신(미래와 생명 등)을 거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오직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말씀은 세상의 존재의 유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세상을 있게 한 창조의 근원으로 그것의 존재의 근원은 영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 가운데에 존재했던 말씀은 생명 존재의 근원으로 그 말씀은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거의 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낡아지나, 인간이 기대하며, 바라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에 의해 세세토록 존재하며, 이 지상의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에 상존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남아있어, 인간의 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 머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 말씀 안에 지금 세상의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나, 미래에 숙제로 남아있는 일들이 풀어질 날이 다가오는 때에, 그 말씀의 미리 알려주신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 그 곳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때가 되어 나타나며 현실로 다가 올 것이다. 그 것에 대한 정보가 인간에게 전하여 진 아름다운 소식으로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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