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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자대회에 이어 '농민가'를 부르며 시작한 범국민대회는 민주노총 전재환 비대위원장과 전농 문경식 의장, 민주노동당 강병기 비상대책위원이 함께 무대에 올라 노동자, 농민 연대투쟁을 결의했다.
전국연합 오종렬 상임대표는 연대사에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비정규 노동자가 850만을 넘어서고 있다"며 "월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아무 때나 자를 수 있는 비정규직을 두고 어느 기업이 정규직을 쓰려고 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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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을 자초하는 정연주 사장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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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9일 새벽 창원 두산중 노동자광장에서 분신자살해 '손배가압류'를 사회 쟁점화시켰던 고 배달호씨의 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금속노조 두산중지회와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가 9일 낮 12시 두산중 정문 앞에서 연 추모제에는 300여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날 추모제는 고 배달호씨 분신장소인 노동자광장에서 열리지 못했다. 노조 지회는 사측과 교섭을 통해 공장 안에서 집회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지만 사측에서 불허했던 것. 두산중 사측은 이날 추모제 자체를 불허해 상당수 조합원들이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윤영규 민주노총 비대위원과 우병국 금속연맹 부위원장, 오상룡 금속연맹 경남본부장, 김창한 금속노조 위원장, 이종엽 창원시의원, 이흥석 민주노총 경남본부장, 허재우 금속노조 경남지부장, 고 배달호씨 부인인 황귀연씨 등이 참석했다. 전대동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은 추모사를 통해 "사측에서 추모제를 허용하지 않아 공장 바깥에서 열게 되었는데, 사측의 반대를 뚫고 들어갈 힘도 부족한 실정이 안타깝다"면서 "사측은 지난 해 노사합의에서 집회를 약속해놓고는 말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강대균 금속노조 두산중지회장은 "고인은 3년 전 노조탄압에 못이겨 분신자살했고, 63일만에 장례를 치루었다"면서 "달호형을 생각하면 노동자의 생명은 단결이라는 사실을 한번 더 실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큰들문화예술센터에서 만든 마당극 '배달호 열사의 노래'가 공연되었으며, 두산중 정문 앞에 있는 '추모비'에 헌화한 뒤 마쳤다. 고 배달호씨는 1981년 두산중의 전신인 한국중공업에 입사한 뒤, 노동조합 대의원 등을 거쳐 2003년 1월 9일 분신했다. 고인의 무덤은 양산 솥발산에 묻혀 있다.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고 배달호씨 분신 3주기를 맞아 강연회 등 다양한 추모행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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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KBS본부 성명서 |
성명서) 악덕 경영자의 말로는 반드시 처참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노조는 이번 임금협상 과정에서 골수까지 파고드는 처절한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정연주씨가 KBS 사장이라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 얼굴을 땅에 박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다. 대외적인 시선을 우려해 임금을 절대 올려 줄 수 없다는 정연주씨의 논리는 그 현란한 세 치 혀를 아무리 놀려도 상식을 가진 중앙노동위원들에게는 전혀 먹히지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마라톤 조정 끝에 중노위는 이례적으로 총액 4.5% 인상이라는 조정안을 내놓았다. 중노위원들은 적자예상이라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이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경영수지를 개선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가상승률과 사측의 지불능력을 고려해 봐도 최소한 4.5% 정도는 인상해야 한다는 게 중노위원들의 결정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연주씨는 중노위원들의 이 같은 최소한의 제안마저도 거부했다. 임금 인상폭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마치 경영자의 전리품인양 착각하는 정씨를 보며 공영방송 철학이 없는 자가 사장 자리에 앉는 것이 얼마나 해롭고 위험한 일인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각인하게 됐다. 정연주씨의 뻔뻔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씨는 지난달 28일 중노위에서 위원장에게 분명 연차수당과 시간외 수당, 비정규직 지원, 인사 현안 등 몇 가지 과제를 같이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정씨는 임금 인상이 국고보조금 예산안 통과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국회 본회의가 있는 30일자 이후에 합의하자고 제안해 노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고보조금이 확정되고 난 뒤 지난 3일 중노위에서 만난 정씨는 태도를 180도 바꿔 내가 언제 그랬냐며 안면을 완전 몰수했다. 노조는 중노위에서 당초 약속대로 사장과 위원장과의 협상을 통해 풀자고 제안했지만 정씨는 만남 자리마저 거부했다. 정연주씨의 그간 행태를 봤을 때 치졸한 뒤통수 치기가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설마 공영방송 사장이 노동자의 생존수단인 임금을 논하는 자리에서 사기를 치겠냐는 생각에 정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노조의 순진함과 안일함을 통감하면서도 이런 수준 이하의 사람이 어떻게 KBS 사장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역대 어느 사장도 임금 협상 자리에서 이런 사기를 친 적은 없었다. 임금 1%보다 더 중요한 것이 노사신뢰다. 노조와의 약속을 자신의 이해에 따라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이런 저질 경영 행태가 더 이상 KBS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노조는 노동자의 강철같은 투쟁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노조는 저질 경영을 하는 악덕사장이 얼마나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기필코 보여 줄 것이고 천 배 만 배 후회하게 만들 것임을 분명히 천명한다. 2006년 1월 5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비상대책위원회 |
비정규직의 삶을 시로 노래하는 노동자 주봉희 씨 | |||||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12-24 17:05] ![]() | |||||
소외계층에게 12월은 춥다. 계절상 추운 달이기도 하지만 끝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한 채 한해의 마지막을 맞는 이들에게 12월 찬바람은 유독 시리다. ‘파견 노동자의 상징’ 주봉희 씨도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 그는 방송사비정규지부 KBS 분회 위원장으로, 열악한 임금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준비 중이다. 칼바람이 부는 21일 저녁 비정규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삭발한 머리에 모자를 아무렇게나 쓰고 연신 담배를 태워댔다. 파업을 하루 앞두고 까칠해 보이는 얼굴에서 서정적인 시구를 적는 모습을 떠올리기란 솔직히 힘들었다. 주 위원장은 올해 7월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라는 시집을 낸 어엿한 시인이다. 그는 94년 KBS에 파견직 방송차량 운전기사로 입사했다. 그러나 4년 뒤인 98년 ‘사용사업주가 파견 노동자를 2년 이상 사용하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 한다’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제정됐고 사용주는 이를 악용해 2년 단위로 파견 노동자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98년 IMF가 터지면서 공기업이 구조조정에 나서기 시작해 KBS도 운전직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에 들어갔죠. 그 뒤 98년 파견법이 생겼고 2000년 6월 30일, 법이 시행된 지 딱 2년 되던 해 15년씩 일했던 운전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위원장 역시 그 때 해고됐다. 그는 “2000년 5월 26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는데 4일뒤 바로 해고됐다”며 “당시 KBS 앞에서 출근집회 등을 진행하며 3개월간 투쟁했지만 생계가 걸린 이들은 하나둘씩 조합을 떠나기 시작했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결국 그는 혼자 남았고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제법 모여 시집 한 권으로 탄생했다. “다른 단체 집회도 참석했다가 일정이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면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었죠. 그 땐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심정과 패배의식, 고독감이 한꺼번에 밀려와요. 처음엔 그냥 매일 술만 마시다 어느날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 순간의 기록들을 남겨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간 날 때마다 국회 앞에서 전경들과 싸웠던 기억, 비정규직 동지들이 하나둘씩 해고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죠.” 이후 2002년 5월 한 잡지사에 기고한 글이 독자의 호응을 얻게 됐고 시집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주 위원장은 “새로운 박노해 시인이 나타났다는 농담도 들었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투쟁의 깃발을 내리면서도 날 위해 돈을 모아준 그들의 정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부름에 우리는 순응하였습니다 하지만 죽음 뒤에 화려한 국화꽃으로 장식된 관도 길게 늘어선 조문객도, 선정적인 장면만 잡던 방송 카메라도, 광고만 가득한 신문의 한 줄도, 우리를 외면하였습니다. -‘아주 편한 곳에서 노동이 없는’(2003년 2.18 대구지하철 화재사고시 사망한 용역업체 청소노동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부분)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출간된 시집의 수익금 전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기금으로 쓰인다. 이에 대해
묻자 그의 표정엔 만감이 교차했고 눈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이 책 속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쓰러져갔고 결국은 깃발을 내려야했고 극한의 노숙투쟁을 하다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투쟁과정 속에서도 그들은 한두 푼 모아 홀로 투쟁하는 나를 위해 돈을 마련해줬죠. 그 때 이들에게 받았던 마음을 잊을 수 없어 언젠가 나도 꼭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주 위원장은 지금도 계속 시를 쓴다. “시집에 실린 시 대부분은 술 한 잔 먹은 상태에서 쓴 것”이라는 그는 최근엔 농민대회 당시 경찰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고 전용철 농민을 추모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농약을마시고 죽어도 목을매고 죽어도 불길속에 뛰어들어 죽어도 성냥갑 속 미국놈 햄버거 국회의원들은 농민들 죽으라고 손을 들어 버렸오. 방패로 곤봉으로 찍어 용철이를 죽여버렸다오. 아버지 어머니 이눔의..나라.종이처럼 접을수만 있다면 확.접어서 날여버리고 싶습니다. -‘이삭을 줍는 촌로’(고 전용철 농민 추모시, 부분) “한 달에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적다, 너무 적다” 그를 비롯해 다시 뭉친 조합원들이 5년간 싸운 결과 KBS 측은 작년 6월 취재와 제작 차량을 운행하는 방송차량서비스(주)를 자회사로 설립했다. 이에 268명이 파견 노동자 신분을 벗어났고 주 위원장도 회사에 복직됐다. 이젠 파견 노동자도 아닌데 왜 파업을 하냐고 물었다. “열악한 임금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재 조합원이 받는 임금이 월 93만 2500원입니다. 여기서 세금 떼면, 고작 85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해요. 사측은 기본급 5만 5000원 이상은 못 올려주겠다며 버티고 있고요. 결국 고용안정만 됐다 뿐이지 임금 면에선 파견 노동자 때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이 엄동설한에 파업까지 하겠습니까.” 주 위원장은 “파견법은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고 단호히 말하며 파견법 현행 제5조에서 ‘업무의 성질, 직종별 인력수급 상황 등을 고려하여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 규정이 추가돼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인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을 강하게 비판했다. 황우석 서울대 교수에 휩쓸려 비정규직 실태를 자세히 보도하지 않는 언론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주 위원장은 “황 교수 사태 때문에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모든 법안들, 심지어 농민 대투쟁까지 묻혔다”고 지적했다. “두 명의 농민이 국회, 언론사, 증권사가 다 모여 있는 여의도 한 복판에서 경찰 칼방패에 찍혀 죽은 기막힌 현실조차 황 교수 사태에 다 묻혔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도 이맘때쯤이면 계속 언론에 의해 부각돼야 하는데 조용해요. 가장 우려스러운 건 이 틈을 타서 열린우리당이 비정규직 법안을 단숨에 통과시키진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향후 황 교수와 관련해 더 큰 일이 터졌을 때 그 틈에 비정규직 법안을 슬그머니 통과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추운 겨울에 언론의 여론몰이에 또 한 번 목을 베이고 있습니다.” 김유정 (actionyj@dailyseop.com)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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