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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의 종류

    전화 좀 안 받고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어제는 아는 분의 부친이 울 병원에서 무슨 검사를 해야 하는데 예약이 42일 밀려 있다고 가족들이 너무나 걱정이 되는데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물어보는 전화 한 통. 그 문제와 관련된 전화 통화 2통. 설치한지 한 달 된 고장난 에어콘 때문에 수리 기사하고 짧은 전화 3통, 긴 전화 2통. 조카 문제로 전화 2통. 곧 결혼할 동생네랑 가족 모임 관련 전화 2통.  후배가 새로 도입한 검사장비 교육때문에 전공의와 직원들을 울 병원에 보내고 싶다고 전화 한 통, 관련문자 두 건. 또 다른 후배가 프로젝트하는데 조언을 구한다고 하여 긴 통화 한 건. 중간중간 아이들 일로 전화 몇 통.
 
  오늘은 아침에 검진 전에 부원장하고 상의할 것이 있어서 전화. 검진하는 와중에 에어콘 수리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판매업체 및 수리기사랑 전화 및 문자 여러 통. 판매업체는 자기네 설치기사가 잘못 했을 리 없다고 무조건 우기고 수리기사는 설치당시 문제라고 하고.
 
   오늘 전화의 압권은 어느 회사 노조 노안부장이 별일 아닌 것을 확인한다고 전화. - 여기는 노안부장이 조합원 민원 해결을 위해 전화를 자주 할 뿐 아니라 내가 직업병 아니라 하면 비닐우산한테 전화하는 등 좀 몰상식한 행태를 보인다. 이 회사 검진한 지가 5년째이고 첫 검진 때 그 동안 은폐되었던 소음성 난청 환자를 다 직업병 판정을 내서 회사 간호사가 나만 보면 또 뭔 일 생길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는데 노조는 뭐가 그리 못 미더운지 자꾸 전화를 한다. 노사 모두 떼만 쓰고 의사를 힘들게 하는, 참으로 정이 안가는 회사이다. 오늘은 나도 뭐라 뭐라 했다. 으...... 싫다 싫어.
 
   오전 검진 마치고 나니 검진팀장이 특검결과 문의한다고 전화달라는 요청있었다 해서 보니 아까 그 노조 노안부장이랑 실컷 이야기했던 문제의 당사자. 통화해보니 검진결과서의 문구에 대한 오독이 문제였고, 당사자가 알아들을 때까지 이야기하는데 족히 30분은 걸렸다. 용접공의 건강문제에 대해서 안전보건이 취약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에서 조차 이러저러한 보고가 있는데..... 하면서 나에게 설교를 하는데, 짜증이 나면서도 미국이 안전보건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다니, 대단한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회사에서 지난 번 검진 때 작업 중 손가락 부상 7개월째에도 지속되는 통증과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물어왔던 사람하고도 통화. 우리 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일단 진료를 보러 오라고 통증에 대해서는 일단 검사결과를 보고 이야기해야겠지만, 손가락 구부러진 것은 간단한 수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으니 오시고, 진료의뢰서는 우리 과에 와서 받으시라 하고 끊었다. 다친 손가락으로 계속 손가락 부담 작업을 하는 문제도 해결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눈치 보여서 작업을 쉬기는 어렵다고 검진 때와 같은 대답을 하길래 일단 진료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했다. 이런 전화는 그래도 할 만 하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과 직원 전체가 전화 받느라 몸살을 앓는다. 병원이라는 게 민원이 발생하면 일단 직원들에게 문책이 가는 풍토라 모든 게 조심스러운데다가 사업장 담당자들은 자신들이 갑이고 우리가 을이니 어떤 황당한 요구라도 무조건 들어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직원들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전화에 시달린다. 그래도 나는 의사에 교수라고 심한 언행에는 덜 노출되니 좀 낫다.
 
   출장검진팀장이 다른 부서로 보내달라고 찾아왔었다. 12년간 이 일을 하면서 지쳤고 임상병리사 본연의 업무만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다른 부서로 가면 교대근무에 더 심한 노동 강도에 처하게 되지만 ‘고객’관련 스트레스는 없으니  가고 싶은 것이다. 일단 9월 인사는 모두 끝났으니 겨울에 이야기하자고 돌려보내면서 잠깐 교과서적인 답을 생각했었다. 직무스트레스의 대처방안은 스트레스 유발요인을 줄이려는 조직적 노력과 개인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부서전환을 원하는 그 직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대안이 있어야 하기에, 그동안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별로 나아지지는 않았던 경험을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하다.
 
   오늘은 수검자들도 사설이 길었고,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아 중간에 말을 자르지 않고 다 들었다. 수검자들이 펼쳐놓는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스트레스 덜 받기를 위한 내공 쌓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1. 갑자기 혈압이 많이 높아진 60대 남자. 요새 손주들이 와서 속썩여서 그런가, 12살, 9살, 7살인데 맨날 컴퓨터 한다고 싸우고, 아이고 속상해요. - 진짜 많이 속상해 보였다. 애들 보내놓고 한숨 돌렸을 애 엄마아빠의 홀가분함이 보이는 듯.
 
2. 70세 여자. 여기저기 아프고 쑤신디, 손주를 보는 게 너무 힘든디... 그래도 이뻐서... 잠도 못 자고, 목에서 뭐가 톡톡 쏘고... 옆에서 남편이 원래 이 사람은 좀 예민해서... 하자 그럼 그정도 신경도 안 쓰면 멍충이지....하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신다. 한 참 듣던 뻐꾸기, 우울증 있단 말 들어보셨어요? 남편은 우울증 있어요. 약 먹으라 해도 안 먹어요. 한다. - 부인이 이야기하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며 한숨 쉬는 남자. - 그래도 두 분이 함께 지내니 덜 막막하시리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3. 기운 없어 보이는 40세 남자 초등학교 교사. 잠을 잘 못 자요. 애들이 어려서 같이 자는데 조금만 뒤척거려도 잠이 깨요. 직장일이나 집안일이나 특별히 신경 쓰이는 것은 없단다. - 세로토닌이 한참 부족해 보인다. 세로토닌 보충을 하면 좀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 설명하고 보냈다. 어떤 정신과 의사가 사회적 기능에 큰 지장은 없이 평생을 무기력하게 지낸 아버지에게 프로작을 드시라고 한 뒤 훨씬 나아졌다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났다. 아는 의사 중의 하나는 기분이 계속 가라앉은 상태에서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기 어려워 프로작을 먹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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