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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연구용역 제안서 발표 소감

    노동부에서 한 열흘전에 총액이 30억원쯤되는 연구과제를 공모했다. 제목이 '화학물질 건강장해 예방 연구용역'인데 화학물질 3개당 9천만원을 줄테니 유해물질 노출기준의 제정및 개정이 필요한 물질에 대하여 문헌을 고찰하고 우리나라 사업장 실태조사를 해서 개정안을 내고 편람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다.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총력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노동부가 엄청난 돈을 들여 기준을 제,개정하는 것도 그렇고 다가올 춘계 산업의학회 심포지움 주제는 '직업병으로부터 안전한가'이다. 그러니까 이 과제들은 위해도 평가, 관리, 소통(risk assessment, management, communication)에 관한 것이고 독성학, 역학, 산업의학적 지식과 연구 경험이 출중한 자들이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공모에 대한 소문과 분위기는 이랬다. '과제가 무려 30개나 되니 전국의 산업의학및 산업위생 교실에 하나씩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웬만하면 응모해보자'. 이런 분위기가  관련 연구 경험이 많지 않은 나까지 없는 시간 쪼개서 연구제안서를 쓰게 하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 보다는 그동안 우리 사업장의 화학물질 건강장해 예방에 소홀했음을 반성하고  우리  업무의 질 향상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고, 현실적으로는 냉동보관중인 관련 생체시료에 대한 분석비용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낸 주제는 경쟁률이 4:1이었는데 산업위생학계의 원로교수 OOO, 평소 존경해온 산업의학계의 중견학자, 최근에 외국에서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돌아온 신진 학자가 경쟁상대였다. 대기실에서 만난 신진학자가 옆에 있던 다른 원로교수가 발표하러 들어가자마자 궁시렁거린다.

 

그 :"자라나는 후학들한테도 기회를 주어야지, 어르신들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나 : " 그런데 왜 내셨을까요? 연구비도 많고 다른 할 일도 많으실 텐데"

그 : "OOO 교수님이랑 전화하시다가 그 분이 낸다는 소리듣고 내셨대요.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도 내는데 당신이 놀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ㅋㅋㅋ 원로교수들의 이유가 너무 재미있다. 우리가 선정될 확률이 거의 없는 건 아쉽지만 원로교수들이 일하려 하는 건 좋은 현상아닌가?  곧 초고령화 시대에 들어서고 우리 세대는 아마 80살까지 일해야 할 텐데 나이먹었다고 이리 빼고 저리 빼다보면 더 늙을 테니.

 

  그나저나 경쟁상대들의 화려한 이력에 기가 팍 죽은 뻐꾸기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 상태에서 발표하러 들어갔더니 발표시간이 15분에서 10분으로 줄었단다. 이때부터 당황모드. 

내 발표에 대한 반응은 시큰둥했다. 우리 연구진이 관련 연구 수행 경험도 별로 없는데 냈다는 타박성 질문 하나가 있었을 뿐. 6명의 심사위원들은 그 짧은 발표시간동안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들춰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거야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거니 할 수 없지만 제안서 내용에 대한 질문이 하나도 없는 건 좀 서운했다. 하긴 그 양반들도 며칠동안 비슷비슷한 발표를 수십개 들어야 하니 진이 빠지겠지.

 

  2시간 걸려서 도착해서 30분 기다리고 10분 발표하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그 근처에서 일하는 낙타형 생각이 나서 점심 얻어먹고 다시 2시간 걸려서 연구실에 도착하니 맥이 빠진다.

 

  이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제안서를 쓰느라 이런 저런 논문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가 화학물질 건강장해 예방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공부를 좀 했으니 앞으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제안서 쓰면서 계획한 것중 일부는 연구비를 못 따더라도 사업주 꼬셔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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