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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보건관리자가 필요한 작업장, 검진 첫날

뻐꾸기님의 [유해성에 대한 다른 이해] 에 관련된 글.

대기업 계열사인 특수필름제조 회사.

이 회사는 3년전에 입사 10년차가 되면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종합검진결과 상담을 위해 처음 왔었다. 의료인인 보건관리자가 없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일검이든 종검이든 검진을 받아도 그 결과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채로 몇 년을 지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왔다. 



  이 회사는 사실 규모로 볼 때 보건관리대행을 하지 말고 자체 보건관리자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영삼정권때 기업규제완화을 위한 특조법에서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보건관리를 위탁할 수 있게 하여 많은 기업에서 간호사인 보건관리자를 해고했던 아픈 역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방문할 때마다 자체 보건관리자를 선임할 예정이라고 하여 건강상담만 좀 하기로 했는데 결국은 보건관리대행쪽으로 결정이 났다.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하기로 했으니  내가 사업장 보건관리 일반에 대하여 관리감독자 교육을 한 번 했고, 간호사가 응급처치교육을 교대조별로 한 번씩 했다. 보건담당자는 앞으로 체계적인 보건관리를 해보겠다고 큰 소리를 꽝꽝 쳤는데 글쎄......그 뒤로 몇 달이 지났는데도 작년 검진 결과에 대한 상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 검진을 하게 되었다. 


 검진버스에서 내리니 안전관리자가 90도로 절을 한다. 여자만 보면 습관적으로 성희롱을 하는 사람인데 지난 번 방문에서 내 몸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길래 주의를 주었더니 정중한 척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만나면 안부도 묻고 하건만 오늘은 목례만 하고 외면하고 검진 시작. 


#1. 인쇄공정의 이소프로필 알콜이 전년도 미검출인데 올해 279ppm이 나왔다. 인쇄공정의 환기시설을 개선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확인해보아야겠다. 수년 간 일했다는 한 작업자가 집중력, 기억력 저하 등을 호소하여 이차 검진에서 신경행동검사를 하도록 했다.


#2. 전기실과 보일러실에 대한 작업환경측정결과가 없다. 산업위생파트에 확인을 요청해야겠다. 검진중에 한 작업자는 작업자들이 궁금해서 어디서 장비를 빌려와서 60Hz 전자파에 대한 측정을 해보았다더니 노출기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변전소 바로 옆에 사무실이 붙어있다는데 차폐시설을 설치하기에는 돈이 많이 들어서 안된다는 것이 작업자 의견이다. 사무실 위치만 변경해도 좋으련만. 아직까지 산업안전보건법상 전자파의 인체영향에 대한 규제는 없다. 전기실 작업자는 9명이다. 보일러실에 대해서는 단열재로 무엇이 쓰이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건축년도로 볼 때(90년도) 석면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유리섬유일 가능성이 있다.  


#3. 제막필름실에 6명이 근무하는데 작업과정중에 가스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가스가 유독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람도 있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서에는 관련 사항이 없다. 확인이 필요하다.


#4. 증착과정의 알루미늄 분진에 대한 작업자들의 불만이 많다. 장비를 열고 청소할 때 30분씩 4번 정도 먼지를 마시는데 집진시설이 위에 달려있어 작업자들의 코를 통과하기 때문에 호흡기 노출이 많은 것 같다. 알루미늄으로 인한 진폐증은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고 뇌에 침착되는 경우 치매 위험이 있다고 하는데 분진형태 노출시 그럴까 해서 찾아보았더니 흠....... 관련 논문이 꽤 많다. 알루미늄은 법정 유해인자가 아니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작업자들 중에 기침, 가래 등의 증상이 흔하니 분진 감소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작업자는 총 11명이다. 이 회사 말고 두 개 이상의 알루미늄 취급 작업장이 있는데 묶어서 한 번 살펴 보아야 겠다.


#5. 왼쪽 어깨 통증이 있어 동네 재활의학과에서 건강식품구입을 권유받은 뒤 믿을 수 없어서 그만 다니게 되었고 그 뒤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인다는 50대 남자에게 우리 병원 어깨 전공 정형외과 교수앞으로 진료의뢰서를 썼다. 5만원짜리, 10만원짜리 중 구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니 같은 의사로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6. 이 회사는 오존 농도가 8시간 평균 0.1ppm에 육박하고 있고 하청업체는 0.14ppm까지 초과되고 있다. 오존의 직업적 노출기준은 15분 노출에 대하여 0.2ppm이다. 작업자들은 단시간 노출 기준의 50%에 달하는 오존에 8시간 내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검진 중에 만난 작업자들은 가슴답답함 등의 증상을 호소했으나 심한 기침 등은 없었다. 오존은 감수성이 있는 성인이나 어린이에게서 폐기능을 감소시킨다고 알려져 있고 1ppm에 노출되는 경우에도 심한 기침과 무력감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오존의 직업적 노출이 장기적인 폐 질환이나 생식기관에 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존은 산업안전보건법상 특수건강진단 대상 물질이 아니다. 어쨌든 잊지 말고 2차 검사로 폐기능 검사를 내야겠다.


#7. 세정작업은 IPA와 함께 트리 에틸렌 글리콜이란 물질을 쓰는데 전자는 법이 정한 168종의 유해인자임에도 측정 누락이다. IPA는 월 15일정도 사용하기 때문에 파악이 안 된 것 같다. 후자에 대해서는 물질안전보건자료 확인이 필요하다.


#8. 6개월전 성공적으로 뇌수술을 받은 뒤 추울 때 메스꺼운 증상, 더울 때 으실 으실 한 증상(수술부위가 체온조철중추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을 가진 50대 남자, 주치의가 자기 증상에 무심하다고 호소한다. 자신만만했던 그는 요즘 원망과 슬픔에 젖어있다. 아주 어려운 수술인데 성공해서 다행이며 그런 불행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 그래도 너무 힘들면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주치의와 상의하라고 조언했다. 단 몇 분이라도 자신의 불행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했을 나이 든 남자의 얼굴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겹친다. 당뇨병 합병증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어느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내 인생과 같구나’하셨고 그 뒤로 일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9. 50대 여자가 절뚝거리며 다가와 앉는다. 물어보니 2주전 수레를 끌다가 발 뒷꿈치를 다쳐 퉁퉁 부은 채 일하고 있다.  휴식이 필요한데 월급의 70%로는 생활 못한다고 그냥 일하고 있다. 이러다가 아예 망가지면 일 못하니 최소 이주일은 집에서 쉬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계속 망설이는 아주머니. 반장과 안전관리자와 의논해보겠다고는 하신다. 다음 주에 와서 확인해보아야겠다.


#10. 하청업체는 개인보호구 착용도 잘하고 보건교육도 잘하는 데 원청업체는 형편없다. 하청업체는 민주노총, 원청은 한국노총.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한다는 원청 위원장의 하소연을 한참 들은 다음 아픈 사람 붙들고 소음 초과, 오존, 알루미늄 분진 등 현안에 대하여 설명했다.

 

   오늘은 150명, 다음 주엔 240명이다.

이외에도 검진 중에 많은 일이 있었다. 일일이 다 쓸 수가 없다.  이 회사는 보건관리를 위탁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다.  특조법 이후 완화된 보건관리자 제도를 강화하자는 소리가 잠깐 높았던 것 같은데  잠잠하다. 그러는 동안 작업장의 건강을 지킬 사람이 없다.  

 

 그럼 다음 주에 후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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