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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 힘들다.

   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고 질병을 예방하는 의사이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 가끔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길을 걷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비교적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 일을 하면서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길러주고 공부시켜주신 엄마한테 많지 않은 돈이라도 꾸준히 보내줄 수 있고 뜻있는 일을 하는 단체에 기부금도 낼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를 가졌다는 게 고맙다. 그래서 밥 값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처음 3개월은 검진을 했는데 수검자의 반 이상이 제대로 작성하지 않은 문진지를 들고 내 앞에 왔고 특수건강진단 대상 유해인자의 파악은 정말 아무렇게나 되어 있었다. 의사가 하는 일이란 별 필요도 없는 청진기 하나 달랑 들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동판매기처럼.

 

  그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처럼 작업환경측정결과를 첨부한 특수검진실시계획서 양식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업무를 해달라는 요구에  검진팀장은 코웃음을 쳤다. 보건관리대행 업무로 복귀해서는 간호사들이 허구 헌날 혈압만 재고 노동자들이 술먹고 담배피운다고 야단치는 것을 지켜보다가 상담기록양식을 만들어 작성하도록 했다. 반발이 심했다. 업무량도 많은데 그것까지 어떻게 하느냐, 수년간 그런 것 없이 잘 해왔는데 왜 해야 하냐 등등. 일년이 지나도록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을 바꾸고 교육하고 체계를 갖추고 나니 좀 나아졌다.  최소한 개인 수준에서 만성 질환의 관리에 있어서는 효과가 있는 일이며 건강과 삶의 질의 개선을 확인할 때는 기쁘다.  직업성 질환의 예방에 대해서는 조직적 중재가 어려울 때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도 많지만 개인 수준에서 '당해 근로자의 알 권리'라도 보장하여 심각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을 최소 목표로 생각하고 일했다.  

 

  과내 업무순환으로 보건관리대행을 그만두고 검진을 하게 되었을 때 시원섭섭했다. 시원한 첫번째 이유는 작업장을 다녀올 때마다 늘어나는 해결해야 할 문제목록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목록을 직장에 두고 퇴근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면 객관적인 조건이 어렵기 때문이든 나의 게으름과 무지때문이든 정신적으로 힘들어 진다. 검진은 대부분 개인 수준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고 그날 그날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정신적 부담은 훨씬 덜하다.  

 

  두번 째 이유는 생산성을 최고의 목표로 생각하는 회사 담당자들과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감정노동을 줄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업장의 변화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노사관계로 부터 나온다. 노조가 없기 마련인 중소기업에서는 '착하고 유능한 중간관리자'가 큰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신경이 많이 썼다. 담당자들은 보통 이삼년이면 바뀌기 마련인데 기껏 잘 가르쳐 놓으면 바뀌는 일이 반복되면서 좀 지치기도 했다. 검진업무는 그런 게 없으니 가뿐하다.

 

  검진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차를 타고 멀리 가서 4시간에 100명씩 만나서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자동판매기처럼 일하지 않으려면 시스템을 잘 갖추어야 한다.

 

  출장검진은 병원에서의 검진과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의사진찰에서 얼마나 비밀이 유지되고 시간이 보장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스크린을 치고 대기의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검진장소를 조용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수검자와 집중해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최소한 심각한 직업성 질환은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가 1인당 2.5분이라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제대로 기입된 문진지와 간단한 진찰도구뿐 아니라 과거 검진결과와 건강상담기록, 작업장 유해인자 노출에 관한 정보, 건강정보를 담은 교육자료도 필요하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요즘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검진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검진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우리 과 직원들이 고생을 좀 해야 한다. 검진팀과 나 사이의 긴장감은 갈 수록 높아지고 있어 고민이다. 힘들다.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비우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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