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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검진하는 곳, 아수라장

노조에서 원해서 검진기관을 옮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 가본 곳이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요중 마뇨산(톨루엔 대사물)값이 그리 높지 않아 의뢰로 작업환경이 괜찮은가 보다 했다.  그런데 문진하면서 들어보니 오전 10시경에 관리자가 소변용기를 나누어주었고 사람들은 그 직후에 소변을 제출했다고 한다.  올해부터 관리자를 통해서 소변을 채취하지 않고 우리 과 직원이 오후 3시이후에 직접 채취하기로 했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직도 이런 일이 있다니.  검진팀 다 모아놓고 상황설명하고 해당자 전원 다시 검사하도록 했다. 평소같았으면 화를 냈어야 하는 건데, 화낼 기운도 없었다.  좋게 말해도 화를 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어찌 하랴 하는 절망적인 기분까지 들었다.



교육장이나 큰 회의실도 없는 회사라고 하니 식당검진을 피할 수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심했다.  온갖 소음속에서 소음성 난청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문진을 하는 건 에너지가 몇 배가 드는 일이다.  사람들은 또 어찌나 떠드는지.  30분에 한 번씩 나가서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고 한 번은 우리과 직원한테 큰소리를 냈다. 사람들 조용히 시키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면서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담당간호사말로는 평소 그 회사의 분위기로 보아서 오늘은 매우 조용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게다가 보통은 유해인자에 심각하게 노출되는 사람부터 검진하도록 하는데 이 회사는 거꾸로 되었더라.  이것도 몇 번이나 당부를 하는 사항이건만.  검진팀에선 사업장에 그렇게 안내했다, 그게 끝이다.  말했다고 들은 게 아니고 들었다고 이해한 것이 아니고 이해했다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건만.  오늘같은 날은 검진팀한테 많이 서운하다.  꼭두새벽에 나와서 고생하는 거 잘 알지만 문진하는 데 필요한 환경조성을 위해 좀 더 노력해주면 좋겠다.

 

유기용제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 가운데 좀 어눌한 이들이 많기 마련이다. 유기용제가 원인일 수도 있고 그렇게 유해한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그런 작업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인과관계를 지금에 와서 입증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도대체 조리가 없는 내용들을 듣고 있노라면 많은 시간이 들고 그래도 호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것이다.   

 

백명은 넘긴 것 같고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나갈 때까지 검진을 했다. 곳곳에서 우리 과 직원들을 포함해서 떠드는 소리에 도저히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식당검진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최소한의 문진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으면 좋겠건만, 어찌 우리 과 직원들까지 떠드는 것인지, 기가 막힌다.

 

검진하는 중간에 총무과장이 와서 문진하는 내용을 들으려 하지 않나, 동료작업자가 의사를 만나는 데 와서 장난을 치지 않나, 몇 번이나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 검진을 어떻게 해왔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것일까? 한편으론 그들이 검진을 이렇게 우습게 생각하기까지 역사를 추측해보니 산업보건하는 사람들이 다 반성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12시가 넘어서는 현기증이 나서 간호사를 불러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초콜렛 한 조각 먹으니 좀 낫다. 

 

 #1. 이 회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작업관련 뇌심혈관 질환이었다.  40세 이상자가 80명이나 되는 곳인데, 뇌졸증을 진단받았던 사람이 대여섯 명에 이른다.  생산직 노동자 정년이 보통 55세인 것을 생각하면 이 연령대에 뇌졸증이 이렇게 많다는 비극적인 일이다.  치료하지 않는 고혈압, 부정맥, 협심증이 의심되는 증상호소자.... 정말 갈 길이 먼 사업장이었다.

 

#2. 심각한 근골격계 질환자가 몇 명있어서 작업평가의뢰서를 몇 장 썼고 동행한 산업위생사한테 이주일 내로 보고해달라고 했다.  그중의 한명은 6개월정도 자나깨나 손목이 아파서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MMPI를 해보기로 했다.

 

#3. 피부질환 심한 사람있어서 사용중인 접착제 들고 병원에 오라고 했다.  톨루엔에 의한 두드러기는 문헌에서 본 적이 없는데, 참 이상하다.  지난 번에 다른 사업장에서 톨루엔과 MEK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성 두드러기를 2년간 앓고 있는 여성 노동자한테 C1판정을 냈는데,,,,,,,이 분이 쓰는 물질은 필수유기용제 몇 종이 포함된 다른 성분도 있는 접착제이다.  음.... 사용중인 혼합물질 말고 각 유기용제 성분별로 유발시험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 썼으니 까먹지 않으리라)

 

오후엔 전공의를 동반해서 보대사업장을 가기로 했다. 전공의한테 물었다.  업무일지와 지난 번에 방문했던 곳의 작업장 평가보고서를 왜 아직 제출하지 않았냐고.  답이 없다.  가뜩이나 말을 많이 해서 지쳤는데 이런 문제까지 길게 이야기할 기운은 없다.  우리 과 특성상 산더미같은 일 속에서 우선순위를 파악해서 일하는 것은 수련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란 것을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전화가 왔다. 염산작업후에 기침을 하는 사람한테 염산작업할 때 PEFR 검사를 하라고 재검을 냈더니 간호사 하는 말이 담당자가 그 수검자는 염산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했다며 어찌할까요? 한다.  "그건 담당자 말이고, 작업자가 사용할 때는 고농도 노출이 되고 기침이 나온다고 하는 것을 확인한 겁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또 짜증이 난다.  담당자와 수검자의 말은 언제나 다르다. 산업보건 몇 년차인데 아직도 그걸 모르시나.

 

오후에 방문했던 사업장은 손님이 왔다고 작업장에 못 들어가게 해서 일검상담만 다섯건 하고 금방 나왔다.  이 방문은 전공의 수련 목적으로 일부러 잡은 것이다.  돌아오면서 전공의한테 숙제를 냈다.  노동자들에게 줄 두통에 대한 교육자료를 만들어 보라고.

 

하루가 참 길구나.

이 시간 이후 판정하고 피부과에서 리컨설트 낸 피부질환 환자 면담하고 지도학생들 밥사주고, 댄스스포츠교실갔다가 지도동아리 공연 뒷풀이가고.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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