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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빵이 없었다.

  아침에 출근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비몽사몽 누워 슬픈 꿈을 꾸면서 늦잠을 잤다.  세수하고 과일 한 쪽 먹고 치카푸카 하고 뛰었다.  다행히 지각을 면했다.  아침식사를 제대로 못했지만 어제 빵과 우유를 나누어주는 것을 보았기에 배고픔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빵이 없었다.  어제와 같은 장소에서 검진을 하긴 하는데 오늘은 수검자들이 용역회사 직원이다.  빵 한 쪽 나누어주는 것도 신분에 따라 다르다니, 서글프다.


나이가 많고 학력이 낮고 난청이 있고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과 같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세번째 수검자의 검진지를 보니 다른 사람 검진지가 섞여 있었다.  심전도를 찍으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 그걸 들고 심전도실에 가서 주의해달라, 지금까지 수검자에 대해 아이디를 다시 확인해달라 했더니 임상병리사 하는 말, " 괜찮아요, 이것만 그런 것 같아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참았다. 검진에서 아이디는 생명과 같은 것인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너무 하잖아.  다른 사람의 검사결과를 통보받을 가능성이라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어찌도 그리 모른단 말이냐.

 

   알콜중독으로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이 서너명 있었다. 매일 소주를 한 병이상 30년씩 마셔왔다는 그 노인들의 얼굴을 보니 절주를 권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술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는 알 권리가 있으므로 길게 물어보았고 길게 설명했다. 

 

   혈압약을 먹든 먹지 않든 대부분의 수검자들이 중등도 이상의 고혈압에 해당하는 소견이었다.  중간즈음엔 200/140인 사람이 있었는데 한번도 혈압약을 먹으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고 다만 혈압이 좀 높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먹으라면 먹을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무엇을 잘 못했는지 깨달았다. 이 회사는 일반검진만 하는 곳이고 일검출장까지 다닐 여력이 없어 인턴선생이나 전공의선생을 보냈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음성 난청자가 2명있었다. 20년이상 변압기를 다루는 업무를 했는데 소음측정을 해 본 적도 없고 특수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특검에 준하는 청력검사를 받게된 것일까? 나중에 청력검사를 하는 임상병리사한테 들어보니 일반검진수검자라도 모두 고음역 청력검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검사를 해준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수검자 모두에게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두 가지 주파수를 검사한다는 건 두 배의 노력이 드는 일인데. 어찌 그리 이쁜 생각을 했는지. 

 

  누리친구 아빠를 거기서 만났다. 사람이 셋이나 죽었던 그 장기투쟁 사업장의 노조부지회장이었던 그가 해고당한뒤 주차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인줄은 몰랐다. 술도 안먹고 날씬한 그가 작년에 간기능이 약간 나빴다고 그의 부인이 검사결과확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들어주지 못했던 게 생각났다. 

 

  당뇨병이 시작된 지 생활습관을 철절히 관리하고 투약을 잘 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혈당관리는 잘 되지 않는 편이라고 하여 최소한 일주일에 두 번은 체크해보시는 게 좋고 그 수첩을 주치의한테 들고 가야 더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더니, 스트립값도 만만치 않아서 이주일에 한번 정도 검사해본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아마 한 검사에 1000원정도 할텐데 그게 부담이 된다니

도대체 임금이 얼마인거야.  누리친구네 사정으로 짐작컨데 70만원정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럼 본사 의무실에 가서 검사를 자주 해보시면 어떻겠냐 했더니 웃기만 하신다.  맞아, 용역직원이 본사 의무실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심전도결과가 이상해서 한 번 더 검사하시라고 했던 남자가 다시 와서 화를 낸다. 우리 과 직원이 너무 괘씸해서 검사안하신다고.  이어서 도저히 분을 못 참겠다고 담당 직원에게 가서 소리를 지르는데 거기에 대고 잘못한 거 없다고 또박또박 말하는 우리 과 직원의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다.  이런 경우 차분하게 잘 설명하고 오해를 풀어주면 되는 것인데,  그 수검자가 용역회사 직원이 아니라도 그녀가 그렇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다. 

 

 끝나고 검진팀 소집을 했다.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냐 물어보니 오래된 정규직 임상병리사가 볼멘 소리를 한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예요? 오늘은 심전도 찍을 사람이 많았고 모두들 도와가면서 일했는데도 수검자들이 많이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성질나쁜 교수한테 재수없게 야단맞는다는 느끼는 것일까?    사실 그동안 우리 과 직원들이 불친절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그게 과로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회의가 든다.  일을 하다보면 별별 희안한 수검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같이 흥분하고 다투어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앞으로 이런 상황에선 감정관리를 잘 하고 꾸준히 노력했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병원의 얼굴인 것을 기억해달라 이 정도로 말하고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회사 보건담당자를 불러서 비록 수는 얼마안되지만 변압기, 냉동기 작업자에 대해서 소음측정과 특수검진을 하시라, 만성질환자 문제가 심각하니 꾸준한 건강상담과 교육이 필요하다 했더니 안 그래도 작년에 검토했었지만 못한 부분이라고 한다.  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노력중이다 한다.  우리 과 팀장과 자세한 것은 상의하시라고 하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 과 입장에선 그리 수지가 맞은 일이 아니라 푸대접받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

 

  다음 주에 있을 검진하나가 취소되었는데 인원이 많지 않는 보건관리대행 사업장이었다. 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보건관리대행 사업장이니 만큼 신경써서 수익은 적더라고 출장검진을 해야한다고 누누히 말했건만, 쇠귀에 경읽기이다.  우리가 건강관리하는 회사를 수익이 별로 없다고 검진을 안 하다니, 참으로 비윤리적이다.

 

  오늘은 2007년에 내가 마지막으로 출장검진을 하는 날이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지만 변화없이 지속될 때 힘이 빠진다.

 

  검진버스타러 가는데 본사 간호사가 나를 찾는단다. 어제 말했던 그가 진단서를 받아왔는데 한달간 입원치료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진단명이 주요 우울증은 아니라 하니 잘 치료하면 좋아질 수도 있겠다고 하면서 그 환자가 출근하면 일년정도는 꾸준히 만나서 상담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고 경과를 보시기 바란다고 했다.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그 과정에서 환자가 최소한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서로 후회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하나는 냉정한 이야기지만 만약 사고가 나서 유족들이 민사소송을 걸 경우 회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근거를 남기는 것이다. 

 

 어쨌든 출장검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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