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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업무관련성 평가를 위해 내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이 산재인지 아닌지를 입증해야 하는 이상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산재신청을 하려는 노동자들이 노무사를 선임하거나 혹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내가 있는 진찰실까지 오기도 한다.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들이다. 오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이 직업병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오늘 외래로 방문하신 분은 건설현장 배관설치 철거업무를 30년 이상 하신 분으로 악성 중피종을 진단받았다. 이 무서운 병을 진단받으면 수개월내에 사망하는 경우가 흔하고 오래 살아야 오년이라고 한다. 이 분은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보존적인 치료를 하고 경과관찰을 하고 있다. 죽기 전에 남은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쓰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비용을 돈으로 환산하면 지불하는 사람에게는 큰 돈이고 실제 노동력을 투여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원가도 안나오는 돈이다. 그래서 우리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본인부담으로 하는 업무관련성 평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업무에 시간을 쓰다보면 해야 할 일상업무가 밀리기 때문에 여기 아니고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에 한해서 진행한다. 다행히 작년말부터 근로복지공단 시범사업이 진행되어 전국 6개 근로복지공단 병원에서 본인 부담없이 진행하는 길이 열렸다고 들었다.
작년 말 노무사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을 때, 왜 굳이 업무관련성이 명확해보이는 사안을 들고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지 물었다. 그냥 노무사가 진행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담만 해서 방향만 제시하고 돌려보내려 했는데, 준비한 자료를 읽어보니 2프로 부족했고 노무사가 보완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음 예약을 잡았고, 그래서 오늘은 환자가 직접 온 것이다.
이 사례는 석면노출에 대해서 본인 주장외에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을 붙들고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석면노출의 근거가 될 만한 내용을 모두 끄집어 내었고 추가 자료확보를 요청했다. 요즘도 석면포를 깔고 용접작업을 한다고 하는 데 구매내역 등 객관적 자료를 요청했다. 혹시나 석면노출의 흔적이 몸에 남아있을 지 모르니 컴퓨터단층활영 재판독도 넣었다.
" 처음 일할 때는 8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어요. 그 뒤로는 한 달에 두번 정도 쉬었죠.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일했어요. 배관설치를 할 때는 원통형의 보온재를 잘라서 관을 감고 테이프로 감아요. 해체할 때는 층간의 1미터 높이의 공간에서 석면 보온재를 톱날로 썰어서 까고 새 보온재를 다시 감아요. 해체된 석면솜을 들고 내려와 마대에 담아서 차량까지 운반해요. 용접을 할 때는 불꽃이 튀면 안되니까 석면포를 깔아요. 석면포는 일미터 넓이의 롤에 감겨 있는데 그걸 깔고 밟고 다니면 다리에 석면먼지가 묻어서 가렵곤 해요."
그 분의 말로는 지금도 이렇게 일한다고 한다. 90년대 말이후로 배관을 감싸는 석면은 사라져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겠지만 석면포 사용실태는 어떤 지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병원에 배치전 검진을 받으러 오는 많은 배관작업자들에게 "용접불꽃을 막는 천은 어떤 건가요?" 라고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노무사 상담으로 마쳤거나 서류만 검토하고 평가서를 썼다면 영영 몰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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