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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야간작업을 하는 청년 비정규직 방사선사의 혈압

작년 12월12일에  채용검진및 배치전 건강진단을 받았을 때 혈압이 높았던 우리 병원 신규 방사선사, 29세 남자, 가 오늘 재검을 하러 왔다.  일차 검진 기록을 보니 혈압을 세 번 측정했다. 순서대로 152/102, 172/103, 149/90. 맥박은 78~79회로 아주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주 긴장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즉 첫번째 두번째 혈압은 적절한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5분이상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측정전 30분이내 커피, 카페인 등을 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측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보통 검진당일 긴장해서 혈압이 높은 사람들은 세번째 측정시는 더 높아지는 데, 이 사람은 세번째 혈압이 가장 낮은 것으로 보아 본인이 긴장해서 일시적으로 높은 혈압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금일 혈압은 우측 145/75, 좌측 130/77, 우측에서 두번째 측정값이 140/81.

 

일차검진이후 혈압을 측정해보았냐고 하자 핸드폰속의 메모를 보여준다. 134/86, 124/74, 133/87, 132/86, 146/84, 127/87.... 그런데 왼쪽에서 잰 혈압이라고 한다. (혈압은 양측을 측정해서 높은 쪽에서 잰 값중 가장 낮은 값이나 평균값으로 판단한다.)

 

젊은 사람 치고는 그래도 조금 높은 편이라 혹시 야간근무 끝나고 퇴근하는 아침시간대에 측정한 것은 아닌지 물어보았다. 종종 그런 일이 있고 그 경우 혈압이 과대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고정 야간 작업자이다. 저녁에 들어와  야간근무를 하고아침에 퇴근하고 그 다음날은 쉬는 근무일정이다. 일명 야비휴야비휴. 야간 근무하고 퇴근한 비번일 밤에 자고 휴무일 아침에 측정한 혈압이라고 하였다. 

 

일차검진부터 본인이 자가측정한 혈압을 모두 놓고 볼 때 고혈압의 진단기준에 부합한다. 

 

"언제 혈압이 높다는 것을 처음 아셨나요?"라고 묻자 전 직장에서 정기적으로 건강진단을 받았을 때 혈압은 약간 높다고 들었다고 한다. 일차검진때 작성한 문진지를 보니 고혈압 가족력이 있고, 키 몸무게 정상, 주 1-2회 소주 한병정도의 음주, 흡연.... 그래도 나이를 고려하면 혈압이 높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냐 물어보니 이어지는 이야기.....  전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정도 실업상태에서 스트레스가 많았고 1주일 평균 3~4회, 어떤 때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6년동안 2년에 한 번 계약하는 비정규직 방사선사로 자취하면서 몇 개의 병원을 떠돌아야 했던, 결국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고정야간작업을 선택해야 했던 청년의 힘든 마음이 느껴졌다.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혈압이 높아진 거구나. 

 

일차검진 이후에 건강관리에 변화가 있었는지 물어보자 투약과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동네의원에서 약을 받아 먹은 지 2주 되었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몇 번 다녔다고 한다.  생활습관 개선 의지가 있는 지 확인해보았다. 언젠가는 술 담배를 끊어야 겠다는 막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6년째 야간작업에 종사하고 있고, 업무특성상 앞으로 야간작업을 지속해야 하는 데, 야간작업은 고혈압의 직업적 위험요인이다. 현재의 건강상태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에 건강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금연, 금주, 규칙적인 운동, 스트레스 관리이다. 서울시 보건소의 금연사업참여시 6개월 금연율이 거의 50%가 넘으니 금연상담을 받도록 권고하였다.  혼자서는 술을 안 마신다 하고 지금은 고정야간근무를 하니 사실 술 마실 기회도 적다.  하지만 혼자서 자취하면서 집 직장만 왔다 갔다 하다보면 기분관리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휴무일에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취미생활, 자기개발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을 하였다. 그리고 진로문제로 고민이 되겠지만 아프기까지 하면 더 힘들어지니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살아보자 했다.  당신탓이 아니잖아 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들 세대 방사선사가 종합병원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확률은 아마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정도가 아닐까 싶다.  

 

혈압관리가 잘 되는 지 모니터링하기로 했다.  1, 3개월째에 24시간 활동혈압에 대해서 추적관찰하기로 했다. 고정 야간작업자는 뇌심혈관질환의 고위험군이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검사하기로 했다. 야간근무하는 날, 그리고 휴무일 이렇게 2회에 걸쳐서 검사를 하기로 했다. 3개월째 면담은 생활습관개선에 대한 상담을 고려해서 잡았다. 우리 병원 근무자라 경제적 물리적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가능한 계획이다. 

 

사실 이 사람이 생활습관개선이 아니라 투약을 먼저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좀 있다. 보통 상담이 끝난 뒤에 3차 혈압을 재고, 1,2차 혈압만으로 보았을 때는 즉시 투약권고기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투약이 먼저 고려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검진 흐름을 바꾸는 걸 의논해봐야겠다.  1, 2차 혈압에서 높은 사람은 3차 혈압을 측정하고 진료실에 들어오는 것으로.  원래 3차 혈압은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어서 본인이 강력하게 원하는 경우가 아니면 측정하지 않고 재검때 측정하고 면담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18년 부터는 일반건강진단은 재검도 없어지니까 우리 검진 프로세스 개선도 필요한 것 같다.  

 

의사로서 노동자 검진을 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는 사례라고 자세하게 기록해둔다.  시민된 도리로 이 청년들이 버젓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빚이 또 쌓였다. 이럴 때 조그마한 진료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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