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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 화요일

   스페큘럼(자궁경부암 진찰 기구)를 사용하고 나서 내려놓는 통의 위치가 더 낮아졌다. 삼월부터 허리가 아팠다 안 아팠다 하는데 자궁경부암 검사를 할 때 허리를 숙이고 나서 사용한 기구를 통에 넣을 때 한 번 더 숙이는 작업이 악화요인의 하나이다. 허리를 숙이는 각도나 빈도로 보면 고위험 작업은 아니나 아픈데 기여를 하고 있어 통의 높이를 올려달라고 했더니, 담당 간호사왈, 안된단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으나 병원의 안전규정에 걸린단다. 결국 내가 작업방법을 바꾸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검체를 채취하고 나서 일어나지 말고 앉은 상태에서 몸을 돌려 기구를 통에 넣으면 허리숙이는 일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ㅎㅎㅎ 일을 하다보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히는데, 문제해결방식의 효율성을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다.

 

   오늘은 원내 검진팀이 하는 일이 기본적인 접수 에러를 포함한 에러가 속출해서 골치가 좀 아프다. 이따 점검회의 때 얘기를 하려고 적어놓았는데, 이런 것까지 내가 점검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런 꾸준한 대화의 결과로 우리 병원 원내검진 시스템이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다는 마음 반, 시지프스의 노동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하는 생각 반이다.

 

    유해할것으로 예상되나 베일에 싸여있는 업종의 청소작업자가 일반검진을 받으러 왔다.  교육계통에서 일하다 정년 퇴직한 뒤 약 7년간 클린룸 안에서 청소작업을 했다고 한다. 천정과 바닥을 청소할 때 먼지가 많이 발생하며, 보호구는 있기는 한데 미흡하다고 한다. 비슷한 공장에서 일하다가 흑색종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사례가 스쳐지나갔다. 유족들은 아빠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인력파견업체 소속의 동료들중에 작업환경에 대해서 얘기해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 업종에서 노출된다고 알려진 비소와 UV에 노출이 되었는지 아닌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작업환경이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의견을 묻자 몇 달 후 퇴직예정이라 하신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건강하시기를 비는 수 밖에.

 

    배치전 건강진단을 받으러 들어온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의 사업장에서도 서너명 왔고, 새로 계약했다는 한 시간 거리의 사업장에서도 몇 명이 왔다. 광물성 분진에 노출되는 작업에 배치예정인 청년과 먼지와 호흡기 질환예방 및 금연의 중요성에 대해서 짧은 대화를 마치고 금연 자료를 나누어주었다. 진지하게 듣고 질문도 한다. 도장보조작업에 배치예정인 사람도 있었는데 근무환경에 대한 설문에서 아무것에도 노출되지 않는다고 표시했길래 물어보니 자기가 표시하지 않았단다(진상규명해서 재발 방지해야 할 사안임). 도장보조작업의 위험성과 예방에 관한 간단한 정보를 제공하고 보냈다.

 

   배치 전 건강진단이란 법정 물리화학적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사람에게 실시하는 건강진단이고, 이 건강진단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흔히 매우 건강한 상태고, 앞으로 어떤 점에 주의해서 작업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런 활동이 직업병을 예방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궁금하지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산재신청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 즉 “내가 알았더라면 그렇게 작업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말을 기억하기에 아주 간단하게라도 기본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이 대목에 배치 전 건진 수검자 대상 한쪽 보건교육자료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일단 벌여놓은 일들부터 수습하고.

 

    잘 아는 사업장에서 청력재검을 하러 6명이 관리자랑 들어왔다. 오랜만에 본다고 반가워라 하는 관리자와 수검자들의 얼굴을 보니 잠깐 작업현장을 돌아다니던 노가다시절이 그리워지면서 정이라는 게 무섭구나 싶다. 그 중 한 명이 12년간 주야간 교대근무를 했는데 2년 전부터 시작된 수면장애가 있다고 했다. 어제 야간작업과 수면장애의 예방에 대한 답을 구하러 멀리 인천까지 다녀왔으나 마음이 더 무거워졌는데, 이 대화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 기억에 남은 사람.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들어온 60대 초반의 아저씨는 지금까지 수술을 무려 14번인가 했다고 하는데, 웃는 얼굴이다. 농담도 잘 하시고. 그렇게 아팠었으니까 잘 웃을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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