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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 역시 한 사람의 아비였고, 남편이었고, 누군가의 동생이었고, 그리하여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도 갈등하고 돌아보며 자신을 다듬어 갔다. 그는 바로'흔들리며 핀 꽃'이었다.
이 책은 수오재기로 시작한다. 고딩들도 아는 글이며, 수능 시험에도 나오는 글이니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 글이겠는가. 이 책은 다산 선생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결코 깊이는 아니다. 짧은 글이고 편집된 글이기에, 더구나 그의 방대한 저서를 두고 발췌된 책을 보고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면 이는 교만이다-친철한 편집이 돋보인다. 생애의 18년을 귀양지에서 보내야 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이루는 바탕으로 삼는 그의 돋보이는 낙관적 자기 성찰과 의지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면서도, 귀양지에서 가족과 자신의 형제와 자식을 생각하는 그 절절함은 또 한 편의 휴먼드라마이다.
그간 다산의 글들과 생애에 관한 책을 읽었고, 읽다가 힘들어 그만 둔 책도 있는데, 읽다 그만 둔 책에는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라는 책이 있다. 힘들어 유난히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힘들어 중간에 놓아버렸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의 내용이 새록새록해졌다. 독서는 읽다가 그만 둔다고 하더라도 읽은 만큼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소설가 김연수는 이 글을 '논쟁적이다'라고 평을 했다.
분명히 '발칙한 아내'가 불륜과 양다리와 두 집 살림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현재의 도덕관념에서 보면 분명히 천박한(?) 이 이야기가 왜 재밌지? 우선 이 소설은 비현실적인 만큼 판타지 소설마냥 재밌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재미에만 머무르지 않는 문학의 미덕을 보여준다. 김연수의 말처럼 누구나 할 말이 생기는 '논쟁적' 미덕이 있다.
이 소설을 읽은 남성은 모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이런 '년'에 대해 성토를 한다고 들었다. 그럴 수 있다 싶다. 대한민국의 남성들 중 지금도 이 시간에도 두 집 살림을 하거나, 바람을 피거나, 어쩌면 벌건 대낮부터 낯선 곳에서 오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남성들은 걸려도 용서 받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여성은? 물론 용서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왜? 대한민국이니까. 그런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두 남자를 당당하게 거느리는 얘기가 어찌 대한민국 남성의 가슴에 열불을 지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여성취향적이거나 여권주의자의 소설은 결단코 아니다.
이 소설의 중심를 '발칙한 인아'가 지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여전히 남성적이다. 축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이 소설의 남성적 장치이다. 여성이 남성의 지위와 논리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면에서만 보면 여성주의적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내가 결혼했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사랑'이라 생각한다. 사랑 없는 결혼이 무의미하다면, 사랑이 유지되는(있는) 모든 결혼 양식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사랑 없이 자식 때문에, 살아온 정 때문에라는 비겁한 말보다는 이혼이 훨씬 아름답다. 동의한다. 사랑이 결혼의 전제조건이라면 당연히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사랑이 결혼의 조건인가? 오로지 사랑만이 결혼의 조건인가는 나는 여전히 의심한다(오해가 없길... 내가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거나 사랑 없는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적으로 오해다). 속물적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자본주의는, 아니 그 어떤 시대도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명분으로만이라도 결혼의 전제로 사랑 운운한 것은 최소한 개인을 발견하는 근대에 이르러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결혼'을 말하는 순정 소설이다. 오로지 결혼의 조건을 '사랑'이라 말하는 이 소설이 어찌 순정소설이 아니겠는가? 다소 과격하고 비현실적이라는 둥, 비상식적이라는 둥의 얘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가 난 결코 '발칙한 인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을 전제하는 낭만적인 결혼을 말한 것이리라 여긴다.
또 하나 결혼이라는 제도가 갖는 폐쇄성에 대한 얘기도 이 소설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여긴다. 이 폐쇄적 결혼양식이 남성 중심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나 역시 그런 편리 속에 있기에 더욱 잘 안다. 결혼이라는 현재의 문화양식이 지배적 흐름이고 여타의 시도는 모두 '불륜'이므로 이를 어쩌지는 못하겠으나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어떤 방향이어야 할지는 모호하지만, 그냥 문제가 있으니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니네 마누라가 말이야 어쩌구 하면서 말꼬리 잡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꼬리잡기는 어릴 때나 하는 것이니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성석제는 심사평을 이렇게 썼다. '빠르다, 신선하다, 흥미진진하다' 맞는 말이다. 나는 덧붙이고 싶다. '뒤집힌다.' 속도 뒤집히고 웃다가 뒤집히고 생각도 뒤집힌다. 그러면서도 책을 덮으며 나는 이렇게 박수를 친다. "소설은 소설일 뿐 따라하지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 따라하지 말자." ^^
대학 1학년 때던가 2학년 때던가 고집스레 이 책을 읽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도 모른채, 글자만 읽었다. 그리고 대학 5학년을 다니면서도 읽었던 듯 싶다. 그리고 졸업하고 사회단체 일하면서도 읽었던 듯하고, 교직에 나와서도 또 읽었던 듯한데, 별스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다만 "유령이 떠돈다"는 말과 국가를 "부르조아를 위한 위원회"라 칭하는 그 명쾌한 '선언'만이 남았던 듯하다.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이 팸플릿을 읽고 나면 항상 비판적 의식이 용솟음쳐올라 무엇에 대해서든 써야 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던 듯하다. 이번에도 ...
"하나의 유령이 한국교육에 떠돈다."로 적고 "전교조 몰이 사냥에 MB와 뉴리아트, 조중동이 신성동맹을 맺었다."는 식의 패러디가 대학시절 대자보 초안을 쓰듯 떠올라 곤혹스럽다. 그런데 쓰고 싶다.
이 책은 내가 읽은 <공산당 선언> 중 가장 쉬웠다. 쉽다고 느낀 이유가 진짜로 쉽게 이해되도록 쓰였을 수도 있고, 프랑스 혁명과 서양사를 모른 채 읽었던 시절이 아닌, 제법 머리가 굵어진 지금이라서 좀더 쉽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유쾌하게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공산당 어쩌고하면 빨갱이라는 부정적 어감에 덧씌워 몰매를 맞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는 역사의 변혁과 기어코 反자본주의적이어야 하는 간명한 얘기-사람을 돈으로 보지마!-는 여전히 감동적이고 유효하다. 예전 지회 홈페이지에 '나는 사회주의자' 어쩌구했더니 '과격'이라는 딱지를 붙여주던 우리 전교조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고 권하면 또 뭐라 할런지.... 그래서 잠시 물러서서 나는 '反자본주의자'라고 '선언'해볼까 싶어진다. ^^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 유대인’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이산’을 뜻한다. 역사적인 서술에서 이 단어는 헬레니즘 문화 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통해, 그리스 근역(近域)과 로마 세계에서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키고 있다. -두산대백과사전-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은 모어(母語)를 일본어로 사용하고, 모국어(母國語)는 한국어이며, 국적(國籍)은 한국이나 스스로는 ‘조선 반도’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 ‘재일조선인’이다. 일본어가 모어(母語)인 탓에 그는 ‘옮긴이’가 필요하다.
예술에 관한 에세이스트라고 소개하고 있긴 하나, 정확히 그가 일본의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고,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어떤 공간에서도 처음엔 타의에 의해서, 다시 자의에 의해서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읅으면서 “플라이 대디 플라이(카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북폴리오)”를 떠올렸다. 재일 조선인(또는 한국인) 작가 자신이 일본 소수민족(조선인을 포함한)이 되어 주류 일본 사회와 동화되지 못한(않은) 채 비상을 꿈꾸는 그 낙천성이 떠올랐다. 디아스포라가 언제나 절망 속에서 머물지는 않는다. “디아스포라 기행”에 언급하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은 절망을 내면화하고, 그 절망의 힘으로, 김훈 식으로 표현하면 ‘온 몸으로 밀고가’면서 이뤄낸 예술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서경식은 역시 ‘온 몸으로 밀’면서 쓴 언어로써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나의 천박한 예술 경험이 저자의 경험치에 너무도 미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함량미달인 나에게조차 ‘디아스포라’는 많은 영감을 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끝끝내 의문문 하나를 만들고 말았다.
<국가적, 역사적 맥락에서만 디아스포라가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이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실재하는 디아스포라가 아닌가 말이다. 한국어를 모국어와 모어로 사용하나, 상류층과 그 고급한 이들이 쓰는 언어적 양상과는 사뭇 다르며, 사회보장제도 안에 놓여져 있기는 하나 시혜적 태도 앞에서 언제나 몸을 낮추어 ‘받아먹도록’ 또는 ‘기생한다’는 식의 상황이 그들을 디아스포라가 되도록 할 것이며, 다시 디아스포라를 선택하게 되지 않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상황을 떠나도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디아스포라는 양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역사의 진보’를 적극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디아스포라이다. 여성의 절대적 권리와 평등을 말해도 우리 사회는 디아스포라이다. 학교에서 ‘평가’의 비서열화, 절대성, 교수자의 피드백만을 얘기해도 디아스포라이다......
그럼에도 디아스포라는 절망을 내면화한 힘으로, 온 몸으로 밀면서 나아간다. 나아가야 하는 거이다.
“(일본어)의 50음도를 점차로 쳐달라고 해 혀로 핥아보았지만 어쨌든 처음엔 아무거도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계속 하고 있으면 어깨는 결리지, 눈은 빨갛게 충혈되지, 눈물을 뚝뚝 떨어지지, 침은 나오지, 종이는 금세 끈적끈적해져요. 그래서 젖어도 점자의 점이 지워지지 않는 종이를 쓰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그림염서라든가, 달력의 표지라든가 말이에요. 그런 종이에 점자를 쳐주면 처음엔 매끌매끌하던 게 조금 있으면 딱딱해져서 구멍이 난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혀를 내밀고 고개를 흔들며) 젖어서 미끈미끈해져요. 언제나 처럼 침이겠지 하고 핥고 있으면 눈이 보이는 사람이 보고, ‘어어 이봐, 피가 나와’ 하는 거예요. 혀끝에서 피가 나오는 거지요” - 디아스포라 기행, 230쪽, 재인용
양산국어교사모임에서 발표를 하려고 정약용의 시와 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다. 실학파의 글들에 꽂힌 지 몇 해 되었으니 쉽게 읽힐 줄 알았는데, 어쩜 책이란 것은 읽어도 읽어도 이렇게 모르는 것들이 속속 쏟아지는지....
학교가 갑자기 바빠지고, 마음도 급해지고... 쉽지만은 않은 책이라선지 진도가 안 나간다. 책을 꼭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오랜만에 중간에 포기하는 독서다.
혹 오해가 있을까 싶어 그러는데, 결코 이 책이 어렵게 쓰이거나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재미도 있고, 어렵지도 않다. 그럼에도 읽기를 중도포기하는 것은 단지 바쁘다는 이유 단 하나다. 학교 일과 수업준비와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이었다. 현대문학을 가르쳐주시던 교수님이 한 날은 영화를 이야기하셨다. '붉은 수수밭', 이 영화에 숨겨진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코드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3시간 동안 하셨는데, 그때 우리 과 여학생들 교수님에게 뿅~하고 가버렸다. 교수님은 단숨에 꽤 많은 펜을 확보하게 되었다. 영화를 안 만들어도 영화평만 잘해도 누군가를 '뿅'가게 할 수 있다. ^^
1200만 관객을 동원한 대박작 '괴물'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한다. 위생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에도 재현되는, 그래서 더욱 실감나는 분석이었다.
'황산벌'은 무거운 대서사를 표준어를 폭력적 언어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된 효과에 대한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국어생활을 가르치면서 표준어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고미숙의 '황산벌' 평을 곁들여 얘기하게 된다.
'음란서생'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서술에서 보여주는 고미숙의 예리함과 '음란서생'의 줄거리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를 설명해내는데서 다시 한번 고미숙의 예리함을 보게 된다.
'서편제'는 수업을 하면서 제법 많이 써먹고 있다. 우리 선생님들과 하는 독서모임 오선지(오래도록 선생하려면 책을 읽자)의 취지가 직접적으로 와닿는 영화 분석이었다. 안타깝게도 서편제가 오래된(?) 영화이다보니 비디오를 구하지 못해 학생들에게는 '천년학'을 대신 보여주고 있다.
'밀양', 이 책에서 언급한 영화 중에 유일하게 보지 않은 영화다. 우선 영화부터 봐야겠다.
'라디오스타',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영화다. '혼자 빛나는 별이 없다'는 압축적 아포리즘적인 언사가 마음을 더욱 끌었던 영화이다. 명절 때마다 반복해서 몇 번을 봤었던 그 영화. 영화 분석도 잔잔하지 좋았다.
고미숙의 날카롭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 아줌마의 글을 읽다 보면 '뿅'간다.
'남쪽으로 튀어라'를 읽고 "아, 이 작가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추석 동안 심심할 것을 예상하고 재미난 책을 고르려다 보니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예상대로 재밌다. 코믹 액션 영화를 한 편 본 듯한 가벼움이 몸도 마음도 가뿐하게 해 준다.
'남쪽으로 튀어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도 이상향으로서의 '섬'이 등장한다. 나는 오쿠다 히데오가 내세우는 이 '섬'과 홍길동의 율도국이 닮았다 생각한다. 무릉도원과 같은 고립무원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알베르 카뮈의 '티파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어느 세대나 그런 '섬' 하나는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삶의 힘이 되리라는 것...
김훈의 '자전거 여행'과 '밥벌이의 지겨움'을 그의 표현력에 혀를 내둘렀었다. 어쩜 같은 장면을 보고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의 표현은 결코 화려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응시와 관찰의 힘이라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야 읽은 그의 소설은 대서사의 굵직한 선의 느낌이 아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기력한 만큼 격력하게 비분강개했다."
=>정말 그렇다. '비분강개'는 무력한 자의 정서일 뿐이다. 방책이 있는데, 굳이 비분강개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겠는가 말이다.
"칼을 빼자 햇빛이 튕겨져 나갔다."
=>김훈은 이 표현이 갑작스레 떠올랐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몇 번이고 칼을 빼들거나, 그 장면을 깊이 응시하고 관찰했을 것이다. 글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응시하고, 오래도록 다듬어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가...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다."
=>교직 10년에 여차한 이유들로 힘겨웠고, 지금도 여전히 힘들지만, 전환, 새로운 다른 것을 해보려는 버둥거림은 어쨌든 나의 삶이고 의지이다.
"먼 수평선 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저녁의 빛은 느슨했다.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넓게 퍼지면서 물 속으로 스몄고, 수면은 스치는 잔바람에 빛들은 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였다. 석양에 빛다는 먼 섬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 거두어 들였고, 빛들은 해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
=>해지는 바다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김훈의 힘인 것 같다.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응시'에 의해 획득한 생경한 표현,하지만 이 표현은 단지 '표현'이라는 의미에만 멈추지 않는다. '칼의 노래'에서 충무공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영웅'은 아니었다. 스스로 '죽을 만한 자리'를 찾아야했을 정도로 상황에 끌려다녀야 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인식에서인지 작가는 배경 표현은 주로 '피동적 표현'으로 이뤄지고 있다. '빛'은 '해'에 의해 거둬지는 것이다. 충무공은 '빛'이었고, 임금은 '해'였다. 빛은 해에 의해 거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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