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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88만원 세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각 장별로 정리도 하고 모아서 좀더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도 시켜보려 했지만, 나의 지적 수준이 함량미달이었다.

  지금껏 세상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본을 계급이나 계층 정도로만 사고해왔는데, 이 책은 주로 '세대'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궤적과 배경을 통해 그들 세대를 분석하고 있다.

  제목은 꽤 만만하게 보였는데, 그처럼 쉽지만은 않다. 제목만큼 내용이 만만하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해 본다면, 지식적인 것이기보다 실천적 문제들이 짙게 드러나기에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분명한 변화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논리정연하게, 경제학적으로 분명히 일러줌에도 불구하고 무엇부터 그 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여전히 막막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저 기억나는대로 떠올려본다면, '승자독식사회'라는 것과 우리 사회가 20대에게, 10대에게 좀더 많은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를 이해했다. 아니 이해와 배려는 너무 사치스런 말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착취'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요즘 애들이 말야'라며 비난을 시작하기 전, 그들이 처한 상황이 30,40대들이 어렸던 그 시절과 상황이 사뭇 다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내가 이해한 점 중의 하나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며, 이 변화의 주체는 누가 될 것이며 등을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통해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길을 모색한다. 이 길의 모색에 30대 후반의 나이에 들어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텐데....

 

  또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역에서 청소년 아르바이트 권리 찾기 사업을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연소자근로에 대한 무지와 그들에 대한 어른들의 착취를 직면하고 소위 '어른들'에 대해 환멸을 느꼈는데, 직접 당사자인 아이들을 어떠했을까?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전교조의 주된 사업 중의 하나가 청소년에 대한 근로권 보장 투쟁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들이 잘 정리되지 않는 것은 나의 무지다. 예전 우석훈 씨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역에서 우석훈 씨 초청강연회를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나의 부족한 이해를 풀어줄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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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신사실주의 대표작가 소설선

서울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으로 말이 많다. 티베트에서의 학살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과 쇼비니즘적인 애국심에 넘치는 중국인들과의 충돌로 '법대로'라는 말이 오간다. 중국인들이 보여준 국가주의적 발상을 우리에게 대입시킨다면 우리는 과연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대처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낮은 사회의식이나 우리의 사회의식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있었던 광주의 학살에도 등을 돌렸고,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 한 것을 생각하면 중국들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 책은 네 개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다.

 

<풍경>, 팡팡

<애정의 소용돌이>, 류헝

<직장>, 류전윈

<번뇌 인생>,. 츠리

 

중국에서의 문화혁명이 중국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본격적인 변화가 있었고, 그러한 변화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의 모습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회주의 안에도 불평등은 존재했고, 권력은 존재했으며, 그로 인해 비롯되는 갈등은 사회문제였던 듯 싶다.

 

하기야 현재의 중국을 봐도 그렇다. 사회주의의 제1 강령이 나는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중국은 또하나의 제국의 길로 가고 있고, 이 곧 타 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로 이어진 것이 나는 티베트 문제의 핵심이라 본다.

 

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 나 하나의 별 의미없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가 나아갈 방향은 결국 쇼비니즘적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방향은 결코 역사가 가야할 방향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다.

 

사회구조, 사회구성체와 무관하게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고뇌는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정래가 '인간연습'이라는 소설에서 결국 인간의 문제로 결론을 마무리 짓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는데, '중국 신사실주의 소설선'을 읽으면서 또 결국 인간의 문제인가 싶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체제나 구조의 문제가 아닌 인간문제를 짚는 이유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싶다. 나의 아쉬움을 되돌아봐야겠다.

 

 

<덧붙임> 서울을 떠난 성화는 북으로 갔다. 평양에서 수많은 인파들의 중국과의 동맹을 과시하듯 오성홍기와 인공기를 흔들며 환영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 속에 왜 이견이 없는 것인지,  저 나라가 과연 사회주의적인지 회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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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 <나는 나를 안다>

<서사의 겹침, 삶의 겹침>

마당 깊은 집의 저자, 김원일. 분단 문학의 깊이를 보여준 작가를 정평이 높다. 분단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적 갈등의 뿌리가 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이 글을 읽었다. 수구보수와 진보 간에도 분단은 존재했고, 내가 철 들고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한 진보세력인 민주노동당 내의 사분오열에도 분단이 있다.

자칫 분단 극복의 주제가 감상적인 민족애로 귀결되는 것도 막으면서, 현실의 부조리로 환치된 고발을 넘어서면서, 인간 개체에 미치는 삶으로의 지평을 살뜰하게 보여준다.

 

 

환멸을 찾아서
손풍금

나는 나를 안다
임을 위한 진혼곡
 

 

네 개의 작품은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읽으면서 자꾸만 하나의 이야기인 듯 싶어, 앞서 읽었던 작품을 돌려보게 된다. 우연히 얻게 된 월북 지식인의 수기를 통해 이를 접하는 남한 사회의 경직성에 대한 '환멸'과 '이상 국가'인 북한에서 좌익 지식인의 '환멸'을 보게 된다<환멸을 찾아서>. 좌익 활동으로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한 작은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는 왠지 <환멸을 찾아서>의 이야기와 자꾸만 겹쳐진다.

수다스러운 할머니의 방백과 같은 <임을 위한 진혼곡>까지 읽고서 생각해보았다. 분명 다른 이야기들인데, 분명 독립된 이야기 구성들이 자꾸만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제가 "분단"으로 하나였고, 분단으로 인해 극단적이고 폐쇄적 이데올로기로 강점된 남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삶을 비슷비슷하게 얽었다는 것이 '겹침'의 이유이지 않았나 싶다.

 

진보 세력의 분열의 근저에 '분단' 문제가 있고, 이것이 발현되는 형태가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시점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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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순정=도망자 이치도

몇 해 전 성석제의 '순정'이란 소설을 읽었다. 나의 아주 부정확한 기억으로는 내가 성석제의 문체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마도 '순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도망자 이치도'를 읽었다. 다 읽고 난 후 난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성석제는 풍자적이면서 비꼬는 듯한 이런 문투가 딱이란 말야."

'도망자 이치도'를 다 읽고 난 후 판쇄를 보는데, 초판 발행 '순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순정'과 '도망자 이치도'는 같은 소설이고 다시 찍어 내면서 제목이 바뀐 것이다.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헛헛... 웃음만 나오더군.

 

그래도 재밌었다. 성석제는 역시 재밌다. 다시 봐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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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주머니 속의 고래

이금이 저 | 푸른책들 | 2006년 12월
 



성장 소설.

나는 작가가 교사 출신인가 싶었다. 학교에 대한 이야기 부분에서 너무도 적확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뜻 밖에도 아니었다. 다만 아들이 중3이었단다. 학교에 관심이 많은 부모였겠구나 싶기도 하고, 학교를 객관적으로 자기 아이만의 학교로 보지는 않은 사람이구나 싶어 마음이 놓인다. 하기야 제 아이밖에 모르는 사람이 '성장 소설'을 쓸 수 있지는 않겠지.

 

가볍게 읽을 수 있어 좋다. 꿈이 어디 아이들에게만 있으랴. '민기'의 아빠가 항상 읍조리는 '고래사냥'이란 노래는 아빠의 못다한 꿈의 원형인 것이다. 연예인이 되고픈 아이들과 남들이 가는 평탄한 길을 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봐야겠지.

이 글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훈성'이다. 이야기 안에도 나오는 얘기이지만 '도덕 교과서'마냥 깔끔한 마무리가 더이상 상상의 길을 가려버린다. '길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는 서사는 아니다. 동화작가여서 그런 것이려니 싶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생각이 난다. 내가 야단치고 야간자습 강제로 시키고 하는 그 동안에 아이들의 꿈은 짓밟힌 것이었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우리 학교 애들은 어떤 아픔을 각자가 품고 살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누군가가 그랬다던데,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열심히 하는지 모르고 열심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지난 한 해 '열심히' 고3 담임이란 것을 해오면서 나는 혹 무지한 체로 열심히 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 지곤 한다. 내가 열심히 한 고3 담임의 역할이 아이들의 꿈을 억누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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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하리하라의 생물학카페-투쟁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예전에 논술 연수를 갔다가 토론수업을 임상하게 되었다. 그때 토론 주제가 '낙태'였다. 일단 나의 경우 종교적 입장에서는 낙태 반대론자였고, 현실적 입장에서 낙태 찬성이었다. 상반된 두 결과에 대해 공통의 바탕은 생명 존중이었다. 단지 독립해 존재하는 실존하는 생명이냐 아니냐로 갈라 더 중요한 생명에 대한 얘기 정도가 나의 주장의 다였다.

이 책에 수정과 착상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수정된 난자가 자궁 내에 반드시 자궁 내 착상 되는 것은 아니란다. 70% 이상은 자연 유산, 즉 착상이 이뤄지지 않는단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명의 시작은 난자와 정자의 만남인 수정에서 보기보다는 착상을 그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레보'라는 피임약의 얘기가 그 뒤에 이어진다. 노레보는 수정된 난자가 자궁 내 착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70% 이상 이뤄지는 자연 유산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란다. '노레보' 국내 시판과 관련하여 유림이나 보수층에서 우려하는 문란한 성생활을 조장하지 않겠냐는 우려는 '콘돔'이 처음 시판될 때도 있었단다. '우려'는 '기우'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생물학 카페'를 교과서로 만들지 않는다. 단지 자연과학인 생물학 지식이 많이 서술되어 있어, 고딩시절 공부하던 시절의 습관이 살아나서 연습장을 꺼내들고 깜지를 써가며 외우고 싶어진다는 것은 책의 문제이기보다는 나의 문제이려니 싶다.

또 이 책의 재미는 신화와의 연계다. 뚜렷한 연계가 보이는 대목도 있고 그렇지 않은 대목도 보이지만, 또 신화와 생물한 부분을 병렬만 해놓고 있어 오히려 산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신화를 생물학적과 가볍게 접목해보는 대목도 상당한 눈요기가 됨은 부인할 수 없다. 재밌게 즐겁게 뿌듯하게 읽을 수 있어 좋은 책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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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노년에 돌아서 돌아보니 삶의 아이러니가 보이네

박완서 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친절한'으로 시작하는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 영화가 있었다. 친절하기는 친절했는데, 그 친절함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친절'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박완서의 '친절한'은 박찬욱의 '친절한'과는 사뭇 다르다. 박완서의 친절함에는 어수룩함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어수룩함으로 인해 이용당하고, 이용당한 만큼 멸시당한다. 그래도 복희 씨는 알고 있다.

'이건 아닌데'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있으되, 왜인지에 대한 논리적 인식은 안 보인다. 박완서는 여기서 멈춘다. 하기야 그래야 되지 않겠나 싶다. 어디 인생이란게 분명한 이유가 있겠나. 나같은 젊은이야 그 이유에 목말라 헤매이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고 뭄부림 친다지만, 삶을 회고할 시점에 선 작가의 시각에서 이유라는 게 뭐 그닥 중요하겠나. 그리고 너무 많이 일러주는 것이 반드시 '약'이 되는 것만도 아니지 않나.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이 국문과 면접을 가게 되었다. '친절한 당탱씨'는 그 대학의 기출 구술 면접 문제를 뽑아서 교육하고, 예상 문제를 몇 문제로 압축해서 공부를 시켰다. 말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예상 문제의 그럴싸한 답안 문장까지 작성해서 교육을 시켜 보냈다. 친절한 담탱이답게.

면접을 마치고 나온 그 학생이 전화를 해왔다. 운다.

"서..언..새..님"

꺼이꺼이거리는 분명치 않는 말을 대충 요약해보면 이렇다. 내가 예상한 구술 면접 문항이 그대로 나와서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정리해준 그 말이 생각이 안 나서 버벅버벅하다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친절하게 구술면접을 준비시켜 주셨는데, 제대로 못해 죄송하고, 이미 준비한 것조차 대답 못한 자신이 한스럽다는 정도의 얘기를 휴대폰이 뜨거워지도록 했다.

그 후로 나는 학생들 전공 면접 시 예상 문항은 얘기하되 정답을 작성해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과도한 친절은 '독'이다.

 

소설집이다.

단편 소설들의 삶의 전반을 속도감있게 훑어간다. 단 하루만에 읽혀 내려가는 힘은 '수다'에 있다. 박완서는 화자를 통해 수다를 싫어하느냥 작품에서 언급하지만 실제로 수다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나는 이런 삶의 수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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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강산무진-허무에 대한 덤담한 고백이라 느낀다.

김훈 저 | 문학동네 |
   

 

김훈을 읽으면 제일 먼저 그 표현에 깜짝 놀란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는가 싶다. 그의 수사는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그 디테일은 화려함이 주는 불명료함을 단숨에 넘어서 명징한 이미지로 떠오르게 한다.

 

자본주의를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저 '사실'로만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그의 책 <자전거여행>에 실린 이순신의 태도와 닮았다. 사실만이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이데올로기와 주장은 사실의 왜곡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허무하다. 객관과 거리감이 주는 허무가 절망은 아니니 그를 비관적이라 말할 수는 없고, 그저 사실로만의 인정은 '젊은 시인'의 기침을 너무도 무의미하게 해버리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을 강추한다. 세태소설보다도 더 세태를 적확하게 묘사해내는 그의 탁월한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가 보여주는 표현의 수사만으로도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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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최척전, 우연으로 엮은 해피엔딩의 소망

황혜진 글/박명숙 그림 | 나라말 (전국국어교사모임) |
   



고전은 재밌다.

우연의 연속이 거슬리는 것을 현대소설의 시각에서 재단하지 않기만 하면 우연이 가져다 주는 해피엔딩의 인간적 소망을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다.

정유재란으로 인한 최척 가족의 헤어짐과 이국에서의 만남, 그리고 귀향...

누구나가 그러한, 보편적인 행복 추구에 공명할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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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인간연습-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연습
조정래 저 | 실천문학사 | 2006년 06월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한 얘기를 한 인물은 이름 없이 나오는 출판사 사장이다.

 

"냉전시대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한테 안 먹히려고 사회복지제도를 얼마나 강화시켜왔어. 만약 그런 노력 하지 않고 돈 놓고 돈 먹기로 자본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더라면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더 먼저 무너져버렸을 거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연금을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제도는 반공이 국시로 떠받들어지던 비이성의 시대인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졌다. 수정자본주의란게 결국 사회주의적 이념의 자본주의적 수용이 아닌가 말이다.

 

조정래는 인간의 삶을 연습이라 적고 있는데,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연습이라... 그럼 결국 우리에게는 여전한 실전이 남겨진 것이란 건가? 언제 그 실전을 치르는 것인지.

 

난 이 글을 읽으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이 생각이 났다. 더이상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찾아나선 파피용호의 1세대들은 그들의 신념대로 절제하며 이상적 사회를 유지해갔다. 그러나 그 떠남을 통한 새운 세상을 해 향해한 혁명의 1세대들이 다 잊혀지기 전에 떠나온 지구와 다르지 않는, 아니 그보다 더 험난한 세상이 이어졌다.

공산당 1세대의 희생과 순수함이 무너진 얘기를 조정래를 호치민 평전을 번역하는 윤혁을 통해 말하고 있다.

 

"호치민은 죽기 전에 유서를 네댓 번 고쳐 썼다. 그런데 처음부터 불변이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시체를 꼭 화장시켜서 재를 전국의 중요한 장소 며 군데에 뿌리되, 그 뿌린 장소를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치민의 지극한 조국 사랑을 나타낸 것인 동시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자신에 대한 정치적 영웅화를 경계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해방을 맞게 되면 그동안 수많은 고난을 치러낸 인민들을 위하여 인민 생활을 향상시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호치민 주석을 충실히 뒤따른다고 공언한 당 간부들은 첫번째 유언을 거역했듯이 두번째 유언도 거역하고 말았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어쩌면 인간 본성에 대한 잘못된 성찰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가 본능적이고 악마적이어서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타락한 인간을 타락한 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중국의 문화혁명의 시도는 나름의 의의가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결과로 과정을 재단하고 승과 패로 나누기에, 결국 사회주의는 제도적 현재적 실패뿐만 아니라 이념적 실패도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거름이라도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는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이기에, 게다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그 야만성과 비인간성, 비이성적임을 통렬하게 드러내기에 어쩔 수없이라도 사회주의에서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아지똥'이 되는 사회주의의 양분을 이 책은 '인간'이라 말한다. 인간됨의 철학이라... 인간에 대한 탐구가 지금까지 어디 정답이 있었던가.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 5년 동안 좌파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져왔고, 지금 교단에서도 사회주의적 교육에 대해 가끔 생각하는 나는 어쩌면 '인간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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