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2007/02/12 13:40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to have to love someone.


The second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is to have someone love you.


The third most important thing is to have the first two happan at the same time.


 

 

[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1872~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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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생활

2007/02/07 10:22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씻다가

 '나는 매일 같은 일을 하는 구나. 세수하고 담배피고, 지하철로 달려가는 나는 어제와 똑같구나.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퇴근하면 정말 끔찍하다. 이렇게 똑같은 일상이 평생 반복되면 어떻하지?' ......

 

 

차이 그 자체(즉자적 차이)...

대자적 반복...

반복 :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시간의 방향......

 

- Gilles Deleuze. [차이와 반복]. 2005. 김상환 옮김. 민음사.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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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2007/02/02 12:08

보고싶은 조선배에게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선배 생각을 하다 울었습니다.

당신을 떠난 보낸 후, 참 오랜만에 인사를 합니다. '잘 계시지요?'

저는 당신과 헤어진 후 서울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서울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쳤는지 이번에 많이 아팠습니다.

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참 많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선배,

당신이 학교를 떠난 뒤에 저에게는 온통 슬픔만 남았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도 힘들고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당신이 그리워 많이 울었습니다. 서울은 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참견하는 사람이 없었고, 지하철에서 갑자기 질질질 울어도 창피하지 않았습니다.


조선배,

가끔 당신이 꿈에 나옵니다. 꿈에 당신이 나타나면 저는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고, 사람이 어디를 가면 간다고 말을 하던지 해야지, 혼자 말도 없이 갔다가 이렇게 오면 어떻게 하냐고...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그렇게 무심하게 하냐고" 성질을 내면서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꿈에서 화를 잔득 내다가 잠을 깨면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선배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떠났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눈을 보면 첫사랑 같은 달콤한 로망을 생각하지만 저는 선배 생각이 먼저 납니다. 그래서 저는 눈이 많이 내리면 슬픕니다.

조선배, 이제보니 당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어때요? 거기도 살 만 한가요? ... ...
그저 선배가 보고 싶고...선배는 참 무심하게 떠났습니다. 진짜 무심한 사람입니다.

조선배, 저도 이제 잘 살겠습니다.


p.s.

당신은 생전에 외롭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곳은 외롭지 않나요?



2007. 2. 1. 서울 충무로에서 만복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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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이렇게 심하게 아프다 보니 나의 일상과 일들이 정지된다.

 

그래서 돌이켜 보니, 내가 참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미워한 사람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러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내가 아픈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사람은 진짜로 아픔을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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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2005.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인물과 사상사.] 발제문  2006. 5.

 

 * 오늘날의 되고 싶은 ‘나’ : 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박이-건강한자-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이성에 입각하여 설정된 표준적인 근대적 인간상

-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다움’: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

- 정기적 훈련으로 단련된, 잘 복종하는 몸을 늘 ‘국가와 민족’에 바칠 각오로 사는 ‘애국적 신심’의 군사주의적 남성이 우리시대의 모델임. 이것은 일제말기의 총동원체제와 식민지 이후의 남북한 군사문화로 인해 명령과 복종의 파시스트적․남성적 미학이 본격적으로 파급된 것임

- 오늘날의 남성다움: 양복복장, 수염이 없는 ‘깨끗한’ 얼굴 모양=(획일적 복장과 면도 습관을 강요하는 군대문화)+(단정한 모습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단발, 양복등을 물신화시켰던 개화기나 일제시대 개화파 풍조의 계승)+(학교에서 키워지는 습성)


- 오늘날의 대장부=(조직에 충성하고 돈을 잘 벌고 그 경제적 능력으로 가족들의 존경을 받아 가족들을 잘 ‘관리’하고 ‘조직생활’과 돈벌이에 필요한 인간관계(인맥)들을 ‘둥글게 둥글게’ 잘 유지․발전시키는 사람)+(독서인으로서 남성다움)+(힘의 숭배자(서울대 동창회 수첩, 삼성의 명함, 공무원증을 내심 받드는 자)로서 남성다움)


- 우리사회의 궁극적 목적 ‘이윤추구’≠인간심신의 태생적인 특징과 항상 충돌,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인 동료와의 경쟁, ‘보스’나 상급자에게의 종속과 고용의 불안 등은 각종의 스트레스를 강력하게 안겨주어 상당시간을 술이나 포르노, 돈 주고 사는 ‘윤락’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듬→반인간적 체제를 강요한 결과, 사실 국가나 재벌 같은 집단들은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립, 운영됨(국가의 핵심)


⇒ 연대와 평등한 대인관계를 위주로 하는 체제가 필요함: 현 체제가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함


* 힘의 숭배: 미군은 한국에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미군 주둔의 역사는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분군 사령부가 들어섰던 용산기지를 모태로 한 미군의 한국 주둔 역사가 일본군 주둔 역사보다 훨씬 더 길다.

‘남한 전역에 주둔하는 대규모 미군 병력은 1953년 정전이후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병사들은 낮에는 탱크에서 꾸벅꾸벅 졸고, 밤에는 매춘부 품에 안겨서 보낸다. 61년부터 93년까지 미국은 한국에서 역대 군부 독재자들을 지원하거나 권좌에 앉혔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군사대표단 및 제8군 사령관과 참모 장교들이 남아 있어서,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시도하는 평화적인 대화자체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한국은 냉전의 절정기에 미국이 중앙정보국 고위관리 출신을 두 번이나 대사로 보낸 유일한 국가다’

찰머스 존슨은 한국이나 일본은 군사제국주의 나라 미국의 전형적인 식민지다. 미국은 과거 로마나 중국제국과는 달리 식민지가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국외 군사기지들만으로 작동되는 신형제국이다. 미국은 국외주둔 미군기지들을 통해 세계를 통제하고 석유 등 전략자원과 경제 잉여를 무제한 빨아올린다. 평택미군기지가 그렇다.


* 폭력의 변형

- 강압적 지시와 통제→보편주의 이데올로기 작동

- 달라진 지배 이념 : 덕치(德治)를 들먹이는 사대부들의 권력기반은 궁극적으로 물리력

폭력수단과 행정구조가 근대에 비해 훨씬 취약했던 전통 시대로서 적어도 지배이데올로기만큼은 포섭적이며 다원적이며 관용적이었음


* 힘의 숭배-상무(尙武) 정신의 일상화

어떤 지배담론도 단순한 이야기만으로 존재하지 않음

담론: 시각화, 의례화→이미지 소비, 참여의무화, 보편화 시켜야 함

⇒‘힘의 숭배’라는 근대 거시담론의 미시적 침투과정(ex. 군대(징병제), 스포츠)

but, 경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군대에 대한 양면적 인식-폭력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완전하지 않음을 증명


* 개신교는 왜 막강한가?

- 토착적인 것들에 대한 배척의 바탕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한국의 대리 세력이라는, 한국 교회의 세속적인 위치에 대한 강력한 자긍의식이 깔려 있음


- 19세기 개신교의 종교 제국주의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 중세 기독교적 배타주의가, 제국주의적 담론을 내면화한 상당수의 한국 개신교 신도들에게 전염된 것임


- 한국에서의 종교적 다원주의


* 교육: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지식’이라는 상품이 거래된다(지식기반정보산업), 그러나 사실은 지식 그 자체가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거래되는 것이다.


- 선생님과 선배가 때릴 수 있는 ‘권리’, 온갖 규칙과 제한으로 가득 찬 학창생활,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풍토


- 의무교육 : 교육 권력이 의료․경찰 권력과 함께 일체 국민들을 훈육하면서 국가, 자본의 질서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자강과 국민 만들기를 위한 문명 교육론


- 지배층들은 그들을 특권층으로 대접해줄 어떤 국가에라도 충성하는 자세를 취해, 인민들에게 ‘국가에의 복종과 충성의 덕목’을 계속 가르칠 준비가 돼 있었던 것.


- 교육을 국가와 자본에 적합한 인간을 만드는 기제로 인식하고 교육 체제의 상부(핵심적 고등교육 기관)를 있는 자들에게 훨씬 들어가기 쉬운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만든 것


* 영웅: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 미국의 영웅 링컨은 ‘미국의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도발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흑인들을 위한 실질적인 위치 개선의 노력도 없이 정략적으로 노예해방의 쇼를 벌인 무자비하고 타산적인 냉혈아’이다. ‘형식뿐인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나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모든 남부 주들의 대다수의 흑인들은 계속 무서운 차별을 당했으며 투표권도 박탈‘당해 왔다.


- ‘영웅’을 이용하는 국가: 영웅이란 ‘초인적인 이미지를 갖고 피지배민을 쉽게 압도하여 동원할 수 있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강력한 지도자’를 말하는 것으로, 국가는 ‘영웅’을 이용하여 피지배민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국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목적⇒국민만들기, 국민통합이 목적이었던 근대국가의 계몽주의자들


- 세계 위인전을 아이들에게 읽히는 풍속은 식민지 시기 내내 조선의 식자층 세계를 풍미하다, 1945년 이후에는 교육의 기회가 넓어지며 거의 전사회적으로 남한에 확산되었음, 결국 아이들에게 냉혈한 정객 링컨과 대량학살자 나폴레옹과 노예주 워싱턴은 지금도 따라야 할 영웅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 경찰: 경찰은 국민을 보호해주고 지켜준다?

- 경찰국가: ‘경찰의 억압 장치화’와 ‘경찰들에 의한 개인들의 신체 존엄권 박탈’


- 하위직 경찰 공무원: 대다수 중산층의 하위계층이나 서민층 출신인 일발경찰을, 지배층이 언제나 대체 가능한 기계쯤으로 보고 있다.


- 경찰에 대한 불신: 국가기구에 대한 서민들의 전반적인 불신과 불만이 존재, 부패한 조직이라는 불명예, 한국에서 근대적 경찰조직은 공포감을 안겨줬을망정 결코 ‘사회안전’의 이미지화는 존재하지 않음⇒멸시적이고 적대적인 ‘전통적 포졸관’이 존재함


- 한국에서의 전통적 포졸관: 법치(法治)가 아닌 예치(禮治)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왕조. 따라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불법이나 비도덕적 비행은 그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음→마을의 질서가 주민들에 의해 유지되고, 반면 부패가 국가 권력의 간섭은 주로 뇌물 갈취를 의미했던 19세기 조선사회에서 포절은 대개 귀찮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됨.⇒서구사회의 ‘공익의 권신으로서의 경찰’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상(像을) 당시 조선인들이 지니고 있었음


- 양심에 따른 처벌: “어리석은 백성이 굶어서 도적질로 그 생존을 구하는데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이익의 ‘도적론)→도적떼를 진압해야 할 주체인 정부가 도적떼의 출현과 민란의 이유가 국가 기강 해이와 관료 부패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함(1862년 진주민란에 따른 철종의 대응-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를 처벌)


- 경찰의 필요성: 자본주의 지향적 관료와 지주들의 이해타산에 의한 것임, 다시 말해 재산가들은 국가로부터 자신의 재산에 대한 확실한 보호를 원했음, 따라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재산을 무조건 지켜줄 경찰국가 체제가 필요했으며, 이에 따라 경찰에 의한 국내적 폭력의 독점화를 ‘문명사회’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음


- 현대의 처벌은 법에 의한 처벌: 다른 사람의 ‘신성한 사유재산’에 손을 뻗친 가난뱅이는, 국가가 무자비하게 처벌하고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수시로 감시→처벌과 감시를 통해 ‘정상적인 국민’으로 만들어야 할 대상물로 전락. 이에 따라 ‘범법자’를 적군의 병사보다 훨씬 더 적대적인 ‘타자’, 위험한 ‘비국민’으로 여기는 것이 현재의 담론임.→‘우리 모두의 공적’인 ‘범죄’와 ‘범인’은 근대적 제도와 논리에 의해서 수배, 징벌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근대적 이성의 권신인 경찰은 ‘우리의 현대적 영웅’이 됨


- 한국의 경찰: 글을 모르고(1945년 조선 문맹률 75%) 살인적인 가난에 시달린 일제 말기 조선인에게, 뇌물 갈취와 폭력을 일삼는 6만명의 일제 경찰은 조선시대 포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로 등장→미군정하에서도 일제시대 조선인 경찰 고용→극우반공 체제는 경찰을 엄청나게 두려운 존재로 만듬(경찰에 대한 외경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음)→후발 자본주의 남한 사회는 지배자들의 사적인 폭력이 언제나 가능하고 국가기구의 사유화 정도가 높았음, 이에 따라 남한은 물리적 폭력위주의 ‘외삽된’ 경찰국가임. 이는 극소수 재산가들을 위한 폭력적인 우리로부터의 ‘근대화’와 이승만, 박정희에 의한 식민지 시대 국가 모델의 재현이 가져다 온 당연한 결과.


* 징병제: 군대는 가야한다?

- 우리들의 군대: 학교와 직장에서 장기간의 격리 생활, ‘윗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습득하여 자신의 존엄성(신체와 정신을 포함하여)을 지킬 방법이 거의 전무함, 무조건 반말을 하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고참 앞에서 헌법이나 군법, 유엔인권선언문 따위는 무의미함.→따라서 한국에서 군대를 간다는 것은-20대 다수는 소극적인 불안과 공포감, 부담감부터 적극적인 원망까지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부정적 감정을 두루 갖추게 됨


- 한국 수구언론의 횡포에 의한 군대 이미지 조작: 내무반에서 ‘칼잠’자는 모습보다 해병대와 특전사의 ‘진짜 사나이 만들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임. TV의 군대 관련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와 여자친구는 ‘남성이 여성을 지켜주고 여성이 남성을 챙겨준다’는 가부장적 전통논리에 직접 호소하여 군대에서 열심히 훈련받는 ‘자랑스러운 남성’들의 상을 만듬.


- 직장생활의 군사문화적 요소: 취업에서 예비역을 선호하고 기업들이 연수 프로그램에 ‘극기훈련’을 포함시킴→‘위로부터’ 세뇌와 같은 각종의 채찍과 당근으로 강요되는 군사주의적 세계관이 징병제에 대한 심적 의존을 유도하고 있다.


- 한국에서 초기 군사력의 열등감: 서구 근대국가들은 무소불위의 폭력에 의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 형성, 이들과의 접촉을 시도한 조선은 ‘그들’의 우월한 군사력에 대한 압도감과 ‘우리들’의 비극적인 열세에 대한 열등감을 가져다 줌(1876년 불평등강화조약, 1885년 한성조약, 1904년 한일의정서 등)→조선의 ‘개화’는 위로부터의 보수적 개혁 프로그램 속에서 외국 군사력에 대한 정보수집과 병력 증강이 핵심적인 과제로 떠오르게 됨


- 고종의 징병제 프로젝트는 실패: 러-일간의 대립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위협을 느낀 고종은 1903년 징병제 실시 조칙을 실시. 그러나 무산됨, 그 원인은 만성적인 정부 재정부족, 병역자원을 파악할 만한 행정력을 갖지 못한 정부의 통치력의 한계, ‘백성’들에게 무기를 맡기기 꺼려했던 지배층으 ‘근대’의식의 한계→지배자의 수탈에 찌든 백성들은 ‘애국 국민’으로 교육, 훈련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 고총 측근 세력들도 ‘백성’을 ‘국민’으로 인식할 만한 근대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 절망이 국가 형성의 열망으로: 징병제 실시계획의 무산에 따른 국가 지배자들의 좌절감이 강한 만큼 ‘부강의 비결은 바로 징병제’라는 생각이 굳어짐→근대적인 국민만들기 프로젝트로 ‘군인’을 새로운 ‘국민’을 위한 하나의 준거틀로 만듬


- 계보상으로 100여 년 전 개화파의 징병제 실시의 좌절된 꿈, 일제 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징병제 구국론’으로 거술러 올라가는 이 의식은, 박정희․전두환의 병영국가 시대에 더욱 강화돼 오늘날의 징병제에 대한 보편적인 ‘집념’으로 이어졌다.


- 남한의 징병제 군대는 ①반공규율 사회의 이념적 세뇌기구 ②군사주의적 훈육기구 ③ 초기 문맹퇴치와 기술지식 보급자 역할 ④ 각 지역의 한계를 초월한 ‘전국’ 의식 보급에 기여한(?) 강요된 합숙 생활과 공식․비공식의 수직적인 훈육체제이다.


- 민족/국가적 생존과 국난 극복 그리고 그 수단으로 ‘전사(戰士)로서의 남성키우기’가 중심이 된 개화기 이후 한반도의 내셔리즘 담론임(국가주의 담론)→전쟁장면의 ‘낭만’을 즐겁게 소비(국가주의적 주체)


- 지도자에 대한 복종의 미풍→권력에 대한 복종의 미풍→‘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국가에 의한 상명하달적인 생활양식으 훈련을 받을 권위주의 사회 남성 구성원의 ‘사회화 의무’를 의미함.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대

- 우리는 아직도 나폴레옹의 침략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근대’라는 살육의 대량화․낭만화․물신화시대를 그대로 살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국가형성시기의 전투성․폭력성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성찰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가장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것들이, 보이지 않게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현 체제는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 개인차원의 적극적인 저항은 가능하다

-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는 생활방식을 생각과 몸으로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 필요

- 서울대 갈 수 있어도 학벌타파의 의미에서 안가고,

- 병역을 거부하고,

- 재벌기업 대신에 시민사회단체에 취직하는 것

위에 것들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 재벌이 만드는 물건을 쓰더라도 노동탄압과 극우 보수 정당 기부로 악명을 얻은 악질 재벌들의 물품을 보이콧하기

- 학벌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을 지원하고 후원하기

- 합법적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위한 친화적 여론을 인터넷등을 통해 조성하기등 개인이 온 몸을 내던지지 않아도 할 수 있다.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오늘날의 한국 ‘시민사회’

- 한국 중심주의 강한 나라(중국이나 북한, 3세계는 멸시의 대상으로 인식-아시아의 자랑, 축구, 과학, 한류 따위의 것들이 작동함)

- 제도적 민주화와 시민사회가 성장해도 노동계급의 정치가 아직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현실

- ‘시민사회’의 학연중시, 정치적 커넥션들에 의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

- ‘명망가’ 또는 ‘전문가 집단’과 일반 활동가들의 차별대우등의 구조적 문제점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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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모두에게 모든 것을

2007/01/19 15:58

 

1.
이런 자리들마다 사파티스타 민중해방군은 자신들은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일 뿐이라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 Marcos. 2001.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들려주는 하늘과 땅, 사람의 이야기』. 박정훈 옮김. 다빈치. p.203.



2.
마키아벨리는 아래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은 "무기"와 "돈"을 필요로 한다고 제안하며 우리는 외부에서 그것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이미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필요한 무기들은 바로 대중의 창조적이고 예언적인 힘 안에 놓고서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무기"와 "돈"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종류의 화폐는 사실상 생체정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직접적 행위자인 대중의 생산성에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되는 종류의 무기는 대중이 사보타주할 잠재력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대중 자신의 생산력으로 탈근대적 명령의 기생적 질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선언, 즉 정치적 담론은 스피노자적 예언적 기능을, 대중을 조직하는 내재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열망해야 한다. 결국 여기에는 어떤 결정론이나 유토피아도 없다. 즉, 이것은 오히려 어떤 "미래를 위한 공백"이 아니라 대중의 현실적 활동에, 대중의 창조, 생산, 권력에 존재론적으로 근거한 철저한 대항 권력이다.

- Negri, Antonio and Hardt, Michael. 2000. Empire. Harvard University Press.: 윤수종 옮김. 2001. 『제국』. 이학사. p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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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에 관한 메모

2007/01/19 15:34
* 여성 운동은 자본(제국)의 발전-산업노동자의 증가와 자본의 요구로 여성노동력이 필요해짐-과 더불어 시작됨. 즉 여성운동은 자본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면서 자신의 신체와 권리를 성장시킴; 자본의 의도와 맞물리면서 발생하고 성장하는 운동들...

*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는데, 왜 여성운동이나 여성의 권리가 어느 시공간에서 시작하는가? (비정규직이나 불안정노동도 마찬가지?...)

* 대중(민중)의 사고와 이해는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 지배이데올로기는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 남한에서 노동운동의 폭발과 발전은 (포스트 포디즘시대의) 자본이 더 많은 노동력을 싼 값에 제공받기 위한 전략이었다?-자본의 전략!
즉, 자본에 의해 기존의 억압적이고 처참한 공장에서 '인간다운 삶'이 보장 될 수 있는-그것도 노력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지만-노동의 표상으로 전환시킴.

* 자본과 운동의 문제는 자본의 확대발전과 더불어서 나타남.

*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성을 형성하는 것.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즉, 어떻게 생성이 포섭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해서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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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테러, 전쟁...

2007/01/19 15:30

* 공포에 대하여

제16항
... 공포는 정신의 무능력에서 생긴다...

     -스피노자 [에티카] 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적 힘에 대하여'에서-


'테러는 권력이 경찰장치나 대중매체적인 무기를 남김없이 수중에 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다수의 피착취자를 지배의 망 속에서 더욱이 깊게 빠뜨리는데 사용하는 것이 명백하다...
...
서독의 적군이나 붉은 여단의 자본주의 진지에 흔들림을 가한다고 하는 의미이지만... 개인을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모든 것, 개인의 무력감을 강화하는 모든 것, 개인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는 국가나 집단적 시설 및 그 부속물에 의존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모든 것-이러한 대중조작의 현상들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지 않고 혁명적 행동을 한다고 칭하는 것은 바보같은 이야기이다.
...
당치도 않은 거대한 국가권력과 장악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정치=군사기계 사이의 대치에서 생겨난, 모든 점에서 부조리 이외에 없는 병적인 드라마라는 핵심을 응시하고 있다.'


     - 가타리. 『자유의 공간을 향하여』. 아우토노미아 총서3; '집단적 멜랑꼬리의 메아리처럼'(pp.70∼71)에서...

2001/09/12...



* 전쟁에 대하여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적의 타도(打倒)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과
다른 하나는 '단순히 국경지대에서 몇몇 지역의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으로 구분한다.

전자의 전쟁은 적을 정치적으로 격멸하거나 단순히 방어불능의 상태로 만들어서 아측에 유리한 평화를 강요하는 것이며,
반면 후자의 전쟁은 적 지역을 점유하거나 점령한 지역을 유용한 교환수단으로 하여 평화협상시 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전쟁에 대해 정의하면서 전쟁에 대한 난해한 정론적 정의보다는 전쟁의 요소, 즉 양자결투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확대된 양자의 결투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면서
이들 '양자의 당면 목적(전쟁의 목적)은 적을 타도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추가적인 저항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전쟁은 我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행동이다.'라고 정의한다.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성격과 관련해서
1. 적대감정 및 의식에서 연원된 맹목적 본능의 폭력성
2. 확률과 우연의 게임의 성격
3.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 속한 정치적 도구의 성격

이 세가지가 삼위일체를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 대한 명확하고 필수적인 관점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전쟁의 핵심적인 본질은
'전쟁이란 다른 수단들을 가지고 행하는 정치와 다를바 없다'라고 말한다.
즉, 전쟁은 도구적 성격을 띤 정치의 한 도구라는 명확한 해석과 관점을 제시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은 다른 수단들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며,
'전쟁은 정치적 행위일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도구이며,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추구이다'라고 말하면서,
'전쟁의 가치는 정치에 의해 결정되며 정치는 전쟁을 합리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사유 끝, 즉 전쟁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자신의 [전쟁론] 마지막 구절에
'불가능한 것을 구하기 위해 가능한 것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바보이다.'라고 쓴다.



* 푸코(Foucault)에 의해 정리된 전쟁에 대한 생각들을 보면,
먼저 블랭빌리에의 사유를 푸코는 가져온다.

-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불랭빌리에(1658∼1722)는 역사-정치적 분석에서 전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분석들에서 전쟁에 부여된 우위성은 사실은 전쟁관계에 부여된 우위성이다. 즉 전쟁을 사회의 일반적 분석지표로 사용하기 위해 불랭빌리에는 전쟁에 대한 세가지 연속적 혹은 중첩된 일반화를 시도한다.

1. 전쟁은 법을 중단시키고 그것을 뒤흔드는 단절의 에피소드이다. 즉 전쟁은 역사를 단순히 뒤흔들거나 중단시킨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다.

2. 전쟁이 한 사회체에 자국(흔적)을 남기는 것은 더 이상 '침략'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군사제도의 교대(변화)를 통해 모든 민간 질서에 전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즉 전쟁은 전쟁을 하는 방식으로서 전쟁이고, 전쟁을 준비하고 조직하는 방식으로서의 전쟁이다. 무기의 분배와 무기의 성격, 전투기술, 군인의 모집과 봉급, 그리고 군대로 귀속되는 세금등으로 이해되는 전쟁. 더 나아가 전쟁은 무기의 일반 경제학이고, 한 특정한 국가 안에서 무장된 사람들과 무장해제된 사람들의 경제학이다.

3. 전쟁은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강해졌으며 누가 약해졌느냐의 문제이다. 즉 강자는 약자가 되고 약자는 강자가 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대립과 분열, 새로운 배분이 있게 된다. 여기서 블랑빌리에는 전쟁관계를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 집어넣었다.

따라서 블랑블리에에게 있어서 전쟁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개념이고 특히 역사적 담론으로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 된다고 푸코는 말한다. 더 나아가 (푸코는) '전쟁이 결국 역사적 담론의 진실의 모태였다'라고까지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를 전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때 전쟁은 담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역사적 담론과 참조대상이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고 이 담론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담론은 전쟁에서부터 시작되고 전쟁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푸코는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지속되는 정치'에서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으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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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위기와 전쟁

2007/01/19 15:24
[2002.09.13.]
* 97년부터 2001년까지 블레어 총리 내각에서 각료를 지낸 모 몰램 전 장관은 5일일간 가디언 기고문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의 진짜 목적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며, 또한, 이라크는 위협이 되지 않으나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중동지역 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신문 2002/09/07 국제면에서 발췌)

* 윤소영은 금융세계화에서 3가지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금리와 환율과 유가라고 말한다. 금리는 추측가능한 계산이 존재하나 신뢰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환율과 유가는 그 변수의 다양함으로 인해 추측이나 계산이 불가능하다.(윤소영,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공감) 중요한 사실은 위 3가지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현실 자본주의는 그 생명력을 다한다는 사실이다.

* 석유위기는 석유의 공급제약과 가격불안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석유공급의 제약이라는 측면은 농경문명시대와 구별되는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고유한 문제제기이다. 기계제 대공업은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원료를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석유위기는 미국 헤게모니를 특징짓는 현대적 생활양식(마이홈, 마아카; 미국의 냉난방은 세계적으로화려한 수준이다)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겨레 신문, 가라사니 2000, 9, 22에서 윤소영이 쓴 칼럼에서 발췌)

* 따라서 네그리가 '제국'에서 말하는 '비물질적 노동의 전개 속에서 표현되는 생태적 투쟁(ecological struggle), 즉 생활양식에 대한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의 새로운 생산'은 유의미한 대안적 투쟁이다.(제국 pp. 357-361 참고) 이 사유는 가타리의 '세개의 에꼴로지'와 '새로운 에꼴로지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세개의 에꼴로지는 생태/정신/사회 에꼴로지를 말한다. 가타리는 새로운 에꼴로지민주주의를 지성, 연대, 협의, 책임윤리와 같다고 생각한다.(가타리, 아우토노미아 총서3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향하여 pp. 166-197 참고)

* 현재 자본주의 문명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은 화석원료이다. '문명론'적 입장에서 보면 자연자원의 문제는 '근대시작'의 문제이다. 근대정치는 '인간중심의 정치'라는 사실에 핵심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문제는 멜서스의 '자연자원의 절대적 한계'라는 문제의식과 맞닺아 있으며, 생태계의 문제와 그 생명를 같이 한다. 부르조아 정치는 '지구라는 구명보트'를 구하기 위해 리후회의를 작동한다.


* 미국자본주의가 붕괴하면 남한과 같이 자연자원이 거의 전무한 나라는 야만의 시대가 온다. 상상해보라! 식량과 석유가 공급되지 않는 세상을...

*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자국 자본주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추접한 발악이다. 911테러에 관한 음모설(미국과 이슬람 지배계급간의 자작극)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유이다.(티에리 메이상, 류상욱 옮김, '무시무시한 사기극', 시와사회; 장 샤를르 브리자르, 박언주 옮김, '빈 라덴, 금지된 진실', 문학세계사 참고)

* 석유가격이 제가격이어야 미국이 유리하다. 따라서 미국은 온건파 이슬람을 키워서 강경파 이슬람 죽이기를 작동해 왔다.

* 역사적 자본주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국자본주의와 현재의 미국자본주의는 다르다. 영국헤게모니 시대에는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개인적/민족적/국가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제국주의 전쟁이 필연적(1,2차 세계대전)이다. 그러나 미국헤게모니 시대의 현실 자본주의는 법인 자본주의이다. 이것은 국가자본주의와는 다르게 국가를 넘나들 수 있는 초국적(초민족적)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초국적 자본으로 인해 제국주의 전쟁은 사라진다. 왜냐면 주식등으로 인한 상호투자 관계로 서로 간 대결이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자본이 붕괴하면 일본자본이 붕괴하고 영국자본이 붕괴한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이것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워싱턴 콘센서스(플라자 합의)이며, 이것은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파운드와 엔화율을 조절하는 정책이다. 쉬운 말로 미국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유럽자본의 조절과 양보를 말하는 것이다.

* 현재의 위기는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의 이윤율 하락의 위기이며 상쇄기회를 찾지 못하는 위기이다. 새로운 재생산 메커니즘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새로운 헤게모니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초국적 자본의 투자는 없는 상태이다. 자본 재생산의 위기인 셈이다.

* 따라서 미국의 위기는 초국적 자본의 위기이다. 초국적 자본은 전세계 자본의 80%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미투쟁'은 초국적 투쟁과 국제연대라는 차원에서 유의미하다.

* 현재의 투쟁은 '위기'를 안고 '조직'해야하는 문제이다. 인류는 위기에서 항상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다. 평화로움과 안정에는 새로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고난속에서 피는 꽃이야 말로 진짜라고 사유한 힐더린의 사유와 맞닿는 지점이다.(문학적 상상력의 사회화!) '위기'시대에 등장하는 '자생적 질서'는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꼬뮨'이나 '(동학)집강소'등을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생적 조직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뛰어 넘어야만이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 우리는 그 힘과 조직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윤수종의 '다면적 주체성의 실현이 가능해 지는 사회=공산주의'의 한계지점이다.(윤수종, '소수자운동', 민주주의와 인권, 518연구소) 코뮨들의 일상적 다양성을 만들어 가면서 권력을 해체하는 투쟁과 이로 인해 사회의 지형도를 넓히고 확보하는 투쟁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나 새로운 폭발력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
따라서 새로운 구성의 정치와 더불어서 끊임없는 봉기의 정치(해체의 정치)를 사고해야 한다! 비약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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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관한 몇 가지

2007/01/19 15:22

1.

도덕적이고 군사적인 지속적인 개입(intervention)은 실제로 영원한 예외국가와 치안활동에 기초한 정당성 패러다임으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힘의 행사의 논리적 형태이다. 또한 이런 개입들은 비록 지속적으로 일어날지라도 항상 예외적이다. 즉 개입들은 내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치안활동의 형태를 띤다. 이처럼 개입은 경찰 전개를 통해서 도덕적이고 규범적이고 제도적인 제국 질서의 구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효율적인 메카니즘이다. (네그리의 [제국])

 

2.
'경찰'은 재판소, 군대, 국고와 더불어 국가를 이끄는 행정부처럼 나타난다. 정말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경찰은 다른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다. 튀르케Turquet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찰은 인민의 조건들에, 인민이 행하거나 시작하는 모든 것에 손을 뻗치고 있다. 경찰의 영역은 재판소, 재정, 그리고 군대를 포함한다.' 경찰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미셸 푸코)

 


3.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사법적 질서에 의해서 유지된다. 모든 국가는 법치국가다. 그 사법적 질서는 자국의 국내법과 전세계적인 초국적 법이 작동됨으로써 기능한다. 이것은 절차적인 전개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절차적 법 적용과정(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에는 항상 위기를 내포한다. 대중과 인민의 모든 행위가 전부 법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사법적 질서는 그 자체가 위기이다. 따라서 지배자들은 법률의 생산(입법)과 적용할 때(사법권)에는 항상 '예외'가 작동한다. 국내법과 초국적 법은 둘 다 자신들의 예외성을 담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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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인간연습

2007/01/19 09:05

- 2006. 8. 12.

1. 조정래는 지독한 민족주의자이다. 그의 사상의 끝은 '민족'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깊이가 대단하다.
깊은 성찰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하여 일상적 민중의 삶과 마음을 후벼 파는 미세한 서술은
단연 현대소설가중에 으뜸이다. [태백산맥]이 그렇다.

2. [인간연습]은 4년의 공백기간이 지난 후 쓴 소설이다. 아~ 나도 소설 쓰고 싶다.

3. [인간연습]은 '이념형 인간'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나와 느낌이 비슷하다.
그라믄 이념이 아니면 무엇이가? 내가 또 말하믄 '우주인'되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 볼 일이다.

4. [인간연습]은 전향한 장기수(간첩)의 엄청난 삶과 삶의 고민이 담겨있는 이야기이다.
나도 '인간연습'하여 인간이 되고 싶다.

5-0. (소설에 대한 이해를 위해)
박동건과 윤혁은 강제 전향 장기수임. 박동건은 먼저 죽고 윤혁은 계속 살아감. 따라서 윤혁이 소설의 주인공임.

5. 말이나 언어보다는 시선이 훨씬 효과적이며, 때로는 눈빛이나 감정이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 '혀보다 눈의 반응이 더 정확했다'(p.19)

6. 아~ 늙는다는 것.
- 시아버지로서 힘을 발휘할려면 며느리가 군침을 흘릴 만큼 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없으면 명예라도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난 박동건은 무일푼에다가 명예는 커녕 불명예의 덩이리일 뿐이다.(p.26)

7. 죽는 것.
- 남자의 눈에서도 저렇게 많은 눈물이 흐르는 구나...... 윤혁은 또 박동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박동건의 모습은 죽음의 문 앞에 선 불쌍하고 가련한 한 늙은이의 모습일 뿐이었다. 이렇게 죽어가려고...... 윤혁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그 실감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p.27)

8. 죽음은 최고의 술안주이다. (보통보다 훨씬 많이 먹어도 쉽게 취하지 않는다) 지독한 삶으로 빚은 술이기 때문이다. (박동건이 죽고 장례식장에서 술을 먹는 윤혁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 든 생각임)

9. 종교와 이념의 유사점과 갈등.
- 종교든 이념이든 관념이었다. 그런데 그 관념이 현실성을 획득하면 충돌을 면치 못했다. 그 현실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간 행동의 극한 상태가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힘을 빌리면 두 관념의 충돌은 광적인 활화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란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체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내세우는 예수교인들로서는 신을 부정해버리는 공산주의 무리들은 사탄일 수 밖에 없었다.(p.32)

10. 죽음!!!
- (화장터에서 나오는 박동건의 뼈를 보고) 사람이 결국 저렇게 되고 마는가! 흩어진 뼈에는 아무런 무게감도 색채감도 없었다.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는 뼈들은 덧없는 허망감만 자아내고 있었다. 그 깊고 사무치는 허망감이 일으키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갑작스럽고도 격했다.(p.40)

11. 인간의 한계: 이기심, 이타심, 종교, 본능, 이성
- 역사, 그것은 인간의 삶이었다. 이데올로기, 그것도 인간의 생산물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들이었다. 특히 이데올로기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그런데 그 발명품은 당초의 목적대로 쓰이지를 못했다.

흡사 칼이라는 발명품처럼. 똑같은 칼을 주부가 들었을 때와 도둑이 들었을 때...... 결국 각국의 공산당원이란 칼이라는 유익한 도구를 잘못 든 도둑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인간의 문제였다.

인간.......인간......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원들의 부패와 타락의 뿌리는 이기주의다. 이기성이라는 본능의 힘은 무섭다.

모든 종교의 공통된 미덕은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버리고 남도 위할 줄 아는 이타행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지고한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신의 이름을 팔아가며 타락하고, 사회권력을 형성해 횡포를 자행하고, 심지어 신을 내세워 살인을 합리화하는 전쟁까지 불사해온 것이 인류사였다. 그 막대한 해독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찍이 종교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이기심이라는 본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당원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인간이란 본능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럼 인간의 이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이성의 힘은 능히 본능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가.

그 이성의 힘에 의해 마르크시즘이 탄생했고, 그 이상세계를 반드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내가 3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지 않고 그냥 당원으로 살았다면 나도 인민들에게 원한을 살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인가.

인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이성이란 본능을 이길 수 없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그 ‘인간의 한계’가 사회주의 몰락의 절대 원인은 아닐까......(pp.119~120)

12. 시민단체에 대한 엉뚱한 발상
- 선진국에는 그 많은 시민단체들이 있다면, 사회주의 국가들에는 시민단체들이 있었을까, 없었을까......정치권을 감시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을 감시한다는 것인데, 인민들이 자율적 조직체를 만들어 당을 감시한다?......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사회주의는 시민단체들을 용인하지 않아 몰락했을 수도 있다......(p.143)

13. 새로운 규율-이미 익숙해진 위계질서: 장교와 사병, 선배와 후배
- 인민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장교가 허벅지에 부상을 당해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는데, 자기는 나중에 할 테니 사병들부터 먼저 치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의시와 간호원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건 국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국군 사병을 치료하다가도 장교가 나타나면 당연히 장교부터 치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요. 사병부터 먼저 치료하게 한 것은 그 장교가 특별히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인민군 전체의 규율이 그렇고, 그건 당원들이 인민들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희생하는 기본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모두 감탄을 했습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저는 한순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p.180)

14. 아이들!~
- 아이들은 인간의 꽃입니다. 그러니 저희 보육원은 인간의 꽃밭입니다....(중략)...제가 무작정 인민군을 따라나서며 그렸던 세상을 아이들을 길러내면서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니까요.(p.186)

15. 화장실 청소-이기심과 이타심
- “이런 일이 어때서 그래. 이게 좀 좋아. 내가 청소를 말끔히 해서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 깨끗한 변소를 쓰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나. 자네 모르지? 예쁜 아이들 똥에서는 쿠린내가 아니라 단내가 나는 거.”(p.197)

16. 인간의 생존조건 : 즐거움과 삶의 의욕

17. 이타행도 이성?
-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단련 즉 ‘연습’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이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족이나 더 큰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일 대 ‘연습’을 통해 습득한 이타행 또는 더 큰 자아를 위한 자기헌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하는 것도 이성이다.(p.218 황광수의 해설글)

18. 큰연습
-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그 무언인가를 모색하고 시도해서, 더러 성공도 하고, 많이은 실패하면서 또 새롭게 모색하고 시도하고......그 끝없는 되풀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연습’이 아닐까 싶다. 그 고단한 반복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 그것이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들다.(작가의 말)

p.s. 예술가는 꼬뮨주의자
- “진정한 작가란 어느 시대,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되어 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진보성을 띤 정치 세력이 배태하는 오류까지도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끝없는 불화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작가의 말).

 

 * 인용은 조정래. 2006. [인간연습].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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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권력

2007/01/18 20:45
 

1. 깊히 생각하고 스스로 생각하기


2. 먼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를 인간으로 파악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쪼금 경직되게 설명하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노예나 몸종들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고상한 척하는 귀족들이 인간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핵심은 주체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존재’를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카르트의 생각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등장하고, 그의 사유를 밀고 나간 라캉에 의해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로 뒤집어집니다. ‘생각’과 존재’가 하나로 일치하지 않다는 발상입니다. 프로이트가 반역의 깃발을 든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나’라는 존재가 거시기(이드)/자아/초자아로, ‘생각’은 의식/무의식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쪼금 더 비틀어서 라캉은 프로이트와 같으면서도 다르게 밀고 나가는데, R/S/I라는 라캉의 개념인데, R은 실재, S는 상징계, I는 상상계라고 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우선 언어(상징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말해지는 대상, 즉  무언가가 존재(실재)해야 하며, 셋째로 말해지는 내용 혹은 대상에 어떤 고정된 의미가 부여될 수 있어야 한다(상상계)고 설명합니다. 좀 더 쉽게 갑시다. 실재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상상계는 이미지 또는 기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상징계는 말이나 언어(기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란께 그것이 더 쉽게 거시기 해불믄, 어떤 대상(실재 R)을 보고 말을 할려면 머리로 생각하고(상상 I), 말로 소리(상징 S)쳐지면 되는 것입니다.


3. 이 문제는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이고 인간 인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언어나 말, 또는 호명되어서 사회적 정체성이 나타난다고 사고한 것입니다.


라캉은 언어학자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밀고 가면, 가타리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앙티오이디푸스라는 반정신의학적 개념이 등장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정신의학과 다르게 우울증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믄 항우울증제 같은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상담을 통하여 정신의 구조를 분석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 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며, 그래서 정신분석이 정신의학보다 훨씬 비싸게 먹힙니다. 참고로 정신의학은 미국에서 DSM이라는 기준표에 따라 사람을 갖다 맞추는 문제이고, 정신분석은 환자의 무의식을 파악하여 드러내게 하고 치료하는 것을 말합니다.


4.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런 복잡한 ‘주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합니다. 뭔말이냐 하믄, 예를 들어 ‘은행나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은행나무 이외의 나무들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말장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은행나무’와 ‘다른 나무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은행나무의 타자는 ‘다른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은행나무 이외의 나무들이 아닌 것’이라는 답은 내용이 없는 대답입니다. (여기서 답답한 사람들은 그냥 은행나무는 ‘부채꼴 모양의 노랑 잎을 가진 나무다’라고 악쓰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용없는 답은 결핍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만, 자신의 존재결핍을 채워줄 상대방 역시 존재결핍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순환’이라는 개념입니다. 주체와 타자가 끊임없이 상호 순환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실재(현실 또는 말하는 대상)는 원래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존재조차도 알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실재나 현실)이 체현되거나 드러나는데 항상 뭔가가 부족(결핍)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욕망의 원인이 발생합니다. 그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 욕망의 만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욕망(desir)과 요구(demande)와 욕구(besoin)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은 상징으로, 요구는 상상, 욕구는 실재로 이해하면 됩니다.


5. 이런 사유들과 관련하여 ‘착취라는 현실(R)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상징(S)을 가상(I)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착취하는 자본주의 현실은 존재(실재)하나 항상 그것은 왜곡되고 결여되어서 나타나고, 이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계급투쟁을 임의로 설정(기의/가상)하여 말(언어/상징)하는 것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인데 자본권력과 노동권력이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맑스가 이제까지와의 계급투쟁과는 다르게 스스로 소멸하는 계급으로 노동계급을 설정한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해체되는 것으로 설정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프로레타리아 권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권력으로 똑같이 작동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이나 끌라스트르와 같은 고고학에서 권력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모스의 ‘증여론’이나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선물’개념으로 뭔가 해답을 찾을려고 합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닐려면 자기 것을 다 내주어야 한다는 발상인데, 은밀하게 자기 몫을 챙기지 않고 확실하게 쏘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밀고 가면 권력=선물=죽음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권력을 획득한 순간 자신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장난말로 하는 말이 대통령을 하믄 임기가 끝난 뒤에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리더 또는 대표, 또는 선배라는 사람들이 조직이나 모임내에서 구성원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성질내면 분명한 권력자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사기 안치고 진짜로 다 내놓고 말하거나, 자신의 일부(생명, 재산, 사상 등)을 선물하면서-스스로 죽어가면서 말하는 것은 국가나 권력이 생성되지 않는 비국가적 조직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서 스스로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죽어가는 유기체인데 뭔가를 도모하는 사람은 죽을 때를 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발상은 공자나 불가의 윤리적 문제의식과 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재산, 자기의 생명, 자기생각(사상)에 대해서 깊히 사유해야 하고, 재산/생명/생각을 다 내놓고 공유하는 것이 뭔가 새로운 조직(꼬뮨)이 아닌가 고민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실재는 알 수 없습니다. 건투!!!

2006.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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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2007/01/18 20:38
 

나의 학문, 나의 사상은 자유를 구가한다. 때로는 만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자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때로는 광인처럼 깔깔대고, 때로는 실연한 연인처럼 눈물을 흘려도 나의 학생들은 나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비상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획일적 잣대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  2005. 11. 14. 도올 김용옥



1. 김용옥은 자유주의자이다. 사상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우익 자유주의자 정도 될 것이다. 전교조를 반대하거나 노동자나 계급,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고, 현실 자본주의에서 권력자나 독점자본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렇다.


2. 그러나 그가 남한 먹물사회에서 독특함이 강렬한 것은 워낙 우리사회가 보수적이고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전체흐름에 반역하는 생각이나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월드컵이 그렇고, 반백년의 역사를 훌쩍 넘는 반공이 그렇고, 가부장시스템이 그렇고, 군대가 그렇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을 실제로 한다는 것은 생명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는가. 김용옥이 죽지 않은 것이 기회주의적 성향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열정과 잔머리가 발달된 인간이다.


3. 우리도 혹시 억압적인 담론에 휩쓸려 함부로 영혼을 팔지는 않는가. 자신의 생명의 보존과 편안함을 위해 잔머리만 성숙되어서 내면이 길들어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는 않는가.


4.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장들을 읽고 느껴보자. 다시 깨워봄이 어떨지... 멀리 보자

미라나 냉동고기처럼 굳어져서 오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은근히 변형되는 맛이 기똥찬 꼬뮨주의자로 변태(metamorphosis)하자. 아~ 그러고 싶다.

나는 썩고 있지 않나...!


5. 健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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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층결정

2007/01/18 20:37
 

1. 정신분석학. 주체형성을 위한 중요한 거시기


2. '중층결정(Uberdeterminierung)'-심리적 원인은 중층결정 되어 있음


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고 생각한 프로이트는,


"유아기적 장면이라는 (증상을 발생시키는) 결정적 힘은 너무나도 감추어져 있어서 그것을 피상적으로 분석하면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떤 증상에 대한 설명을 나중의 장면들 중의 하나의 내용에서 발견했으며, 따라서 (분석)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가운데 유아기적 장면들 중의 하나에서 같은 내용에 부딪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중의 장면들이 증상을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나중의 장면들이 초기의 장면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중의 장면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히스테리 환자는)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동시에 일깨워지는 여러 계기들이 함께 작용하는 그러한 표상(관념)을 증상(형성)을 위해 선택한다는 것을 나는 하나의 (히스테리 증상 형성) 규칙으로 인정할 것이다. 나는 이를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히스테리 증상들은 중층결정되어 있다."

-프로이트, 1896년 논문 [히스테리의 병인론]


3. 우리가 받아들인 '중층결정'이라는 문제의식은 단순한 혁명적 표식에서 엄청난 삶의 해석과 혁명의 재구성을 사유하게끔 한다.


4. 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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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평가는 권력과 일정한 형태로 관계되어 있다.
2) 평가의 외부성은 자기신뢰에서 출발하는 드러냄이어야 한다.


0. 엄청난 책더미들을 배경으로 TV에 등장하는 전문가 집단들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국회의원 나리들이 유권자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과 같이 볼품없고 형편없는 일이다. 국가나 제도적 권력이 지니는 장치들과 더불어 신체, 사회, 성, 영혼, 경제 등 우리가 기정의 사실이라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의 ‘객관성’을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평가로 인해 부여된 ‘객관성’은 당연한 것인가? 우리들의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당연한(?) 시험이나 평가에 대해 스스로 깊이 음미하고 사유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가는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평가를 받게 되는 것과 관련해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규모의 왕족이나 권력자들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주거 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생활의 변화조차도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이야기 했다. 더 나아가 미시적인 개개인 삶의 과정이나 변화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사유한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효과적인 훈육방법으로서의)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와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며, 또한 시험이나 평가는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라고 말했다.

3. 감옥, 학교, 병원과 같은 기구들은 평가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 기구들은 평가 말고는 할 일이 없는 평가가 전부인 조직이다. 죄인, 학생, 환자와 더불어 간수, 교사, 의사도 평가기계로 작동한다. 죄인, 학생, 환자는 평가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간수, 교사, 의사는 평가자의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된다.

4. 평가는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5. 평가는 비교이다. 평가결과를 측정하고 동시에 상벌을 부여할 수 있는 한 자신과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따라서 평가는 궁극적으로 서열화를 요구한다.

6. 평가는 대상이 존재하며, 그 대상을 계량화, 숫자화 시킨다. 대상을 숫자화 시킨다는 발상은 구조주의적 생각이다. 구조주의 사유는 우리가 이세계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게 보인다 해도 그것들을 내포하는 어떤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한다. 그런데 그 밥 먹는 양태들이 무한히 복잡하다 해도 우리는 그 심층에서 어떤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식사법의 구조이다. 이 구조와 법칙을 가지고 ‘식사’라는 현상을 이해한다. 구조주의는 구체적인 것들을 추상적인 것들 속에 용해시킨다. 다양하게 들끓고 하나로 상징하기 힘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체적인 구도를 그린다는 생각이 구조주의이다. 이런 시스템의 핵심적 기술은 숫자화이다. 공무원들이 공문서를 통해 숫자로 다양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원래 공무원들이 숫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사회의 거대한 담론이 구조주의이며, 그 담론의 핵심인 국가조직의 공무원들이 숫자로 세상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구조주의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7. 평가는 기준이나 표준이 존재한다. 그 기준점은 100점이 아니라 0점이다. 0점을 어디에 위치 지을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따라서 평가는 통제를 위한 장치이며, 거기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0점의 위치선정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권력이다. 더 정확히는 그런 욕망이 현실화된 구체적인 장치들이 권력이다. 평가는 권력이다.

8. 이런 평가 권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드러나지 않고 중독되게 만든다. 모든 행동이나 능력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평가결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개인은 자유롭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신(神)이 인간을 심판을 하기 위해서 부여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책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자유로운 능력은 높은 평가를 유도한다. 그런 평가결과는 당신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의 평가결과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의 심판이라는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가 없다. 외부에서 심판하는 한 개인의 능력측정으로서의 평가는 복종하게 만드는 규율장치인 것이다. 평가는 심판이며, 우리는 거기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9. 평가는 형사재판보다 훨씬 가혹하다. 시간(지각, 결석, 일의 중단), 활동(부주의, 태만, 열의부족), 품행(버릇없음, 반항), 말투(잡담, 무례함), 신체(단정치 못한 자세, 부적절한 몸짓, 불결) 및 성의 표현(저속함, 추잡함)등이 처벌 된다. 생각보다 권력이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평가를 “지극히 사소한 일을 처벌하는 데에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처벌되고 처벌하는 보편적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규칙 위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행위이며, 예를 들어 병사는 요구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마다 ‘죄’를 범하는 것이며, 아동의 ‘죄’란 경미한 규칙위반과 과제 달성의 무능력 등인 것”이다. 이런 평가는 “일탈 행위을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명료하게 정해진 ‘인위적’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이는 것만 평가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역까지 통제하려는 것이 평가의 의도이다.

10. 자기배려에 기반한 드러냄이 최고의 평가이다.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이 개입하지 않고 자기신뢰에 따른 자발적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네이버(www.naver.com) [지식in]글 따위에서 별점이나 내공을 부탁하는 행위, 자기 자신의 사진을 올려 요염함을 뽐내는 것은 새로운 자발적 평가행위이다. 거기에는 0점도, 기준점도, 숫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서가 부여되지 않는 그 무엇에서 자신이 직접 기준점이 되며, 그 기준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계획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하고 외부평가를 통해 서열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평가는 이처럼 ‘주어진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평가는 스스로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지 외부에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통제와 조작에 대한 저항의 문제가 발생한다.

11. 길들어진 사회적 기계에서 자율적 주체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유를 벗어나 새로운 무의식 분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율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방식. 새로운 주체성을 생성하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20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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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 몽골인에게 유일한 신은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사방을 가득 채운 ‘영원한 푸른 하늘’뿐이었다. 이 신은 땅 전체를 관장했다. 또 이 신은 죄인이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돌로 지은 집에 가두어 놓을 수도 없었으며......신의 말을 붙잡아 책 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0. 칭기스 칸의 목소리는 소박하고, 분명하고, 상식적이다. 그는 자신의 적들이 쓰러진 것을 자신의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소” 그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오만과 지나친 사치” 때문에 주변의 문명을 벌했다고 말한다.

1. 몽골군은 평생 유목민 생활을 해온 사람들로 일찍부터 이동하며 싸우는 법을 배웠다. 농민 출신의 병사들에게 달아나는 것은 패배였고 추적하는 것은 승리였다. 정주하는 병사들은 공격하는 군대를 어떤 장소로부터 몰아내고자 했다. 반면 유목민은 적을 죽이려고 했다. 공격하다 죽이건 달아나다 죽이건 상관없었다. 달아나면서 이기는 것 역시 제자리에 머물러 이기는 것과 다름없는 어엿한 승리였다. 몽골군은 적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끌어내면, 동물의 대규모 이동을 관리할 때 사용하던 기술을 이용했다. 몽골군은 추적자들이 그들을 따라오면서 긴 줄로 늘어서게 했다. 그렇게 되면 적의 방어력이 약해졌으며, 몽골군은 그들을 함정으로 끌여들여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아니면 작은 분대로 나뉘어 달아나면서 추적하는 적 역시 작은 무리로 나누어 놓았다. 그렇게 하면 적을 좀더 쉽게 요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칭기스 칸은 전쟁을 위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여 사흘 낮밤을 기도하면서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말했다. 그런 뒤에 산에서 내려와 작전을 숙고하고 전쟁 준비를 했다”

3. 전쟁에 임하는 칭기스 칸은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인내와 자비의 눈에 흙이 들어갔고, 진노의 불이 사납게 타오르면서 그 눈에서 물이 말랐으니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피 밖에 없을”것이라는 말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적을 정복하여 눈앞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중한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이다”

4. 칭기스 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의 사자를 제압하는 것보다도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절대 자신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그 산에 사는 짐승들이 있다. 그 짐승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보다 더 높아진다.

5. 칭기스 칸은 “지도자의 전망이 절대 원로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낡은 델이 더 잘 맞으며 늘 더 편안하다. 이 옷은 거친 덤불속에서 힘겹게 살아도 잘 버텨주지만, 새 델이나 입어보지 않은 델은 금방 찢어져 버린다.” 칭기스 칸은 자신의 수수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천박함이나 허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좋은 옷을 입고, 빠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리면 자신의 전망이나 목표를 잊기 쉽다.“ 그런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으며, 반드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나는 소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소”라고 고백한다.

* 델(deel); 몽골의 전통 겉옷
* -Jack Weatherford. 정영목 옮김.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사계절-에서 발췌.





1227년(*주)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공리1-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
명제1- 이러한 외부성은 먼저, 신화, 서사시, 연극 그리고 게임들에 의해 확인된다.

1. 국가장치의 두 극
*인도-유럽 신화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권: ‘마법사-왕’, ‘판관-사제’라는 두 극; 밝음과 어두음, 격렬함과 평온함, 신속함과 장중함, 공포와 규율, 구속과 계약→이런 대립은 상대적 일뿐이며 분할이나 통일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쌍(서로 교대하면서 기능한다.)이다.
⇒ 두 극은 국가장치의 주요 요소로서 이항적 구분을 분배하고 내부성의 환경을 형성, 이중분절이 국가 장치를 하나의 지층으로 만든다.

2. 국가장치에는 전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가가 전쟁을 통하지 않고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경우: 군인대신 경찰관과 교도관을 동원, 전투를 방지하면서 장악하고 속박하는 기능.
*국가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 전쟁의 법률적 통합과 군사 기능의 조직화가 전제.

3. 전쟁기계는 다른 곳(외부!)에서 온다.
*전쟁 기계는 국가 장치와는 다른 종류, 다른 본성,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4.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의 비교
*장기와 바둑: 장기는 구조적으로 기능, 제도화되고 규칙화되어 있는 전쟁, 전선과 후방 다양한 전투들이 코드화되어 있다. 닫힌 공간을 분배→홈패인 공간. nomos
바둑은 투입 또는 배치 기능을 수행(바둑알은 경계짓기, 포위하기, 산개하기), 전선없는 전쟁, 충돌도 후방도 없으며 심지어는 전투마저 없는 전쟁. 열린 공간의 분배→매끈한 공간. polis.

5. 전사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전사의 독창성과 기인한 성격은 부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따라서 전사란 언제라도 군사적 기능을 포함해 모든 것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이거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칭기스칸)이다.

6.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국가는 군사제도 형태로서만 전쟁기계를 전유할 수 있지만 이 전쟁기계는 끊임없이 국가에 문제를 제기한다.(유목민의 전쟁사)

7. 클라이스트의 작품
*전쟁기계를 국가장치에 대립, 산적떼/비밀, 속도, 정동/외부성에 의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정동(affect)는 전쟁무기이다. 정동의 탈영토화 속도/수없이 부서진 원환들/몸짓이나 감동의 탈주체화/죽을 힘을 다하는 광기와 응고된 긴장의 연속적인 질주

*스모선수, 바둑기사

8. 국가에 환원불가능한 전쟁기계가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혁명력을 갖춘 사유기계, 사랑기계, 죽음기계, 창조 기계로 생성가능한가?

문제1- 국가장치의 형성을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는가?
명제2- 전쟁기계의 외부성은 민속학에 의해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1.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원시공동체.
*원시사회의 메카니즘은 국가장치의 형성을 저지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추장(chef)은 위신과 설득과 집단의 욕망을 미리 간파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제도적,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추장은 권력자이기보다는 리더나 스타와 같은 존재, 항상 인민들에게 부인당하고 버림받을지 모를 위험에 처해 있는 존재이다.

2. 전쟁은 국가를 반대한다. 그리고 국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쟁은 국가를 저지하고 물리치는 사회 상태의 한 양태이다.

3. 국가형성을 억제하는 여러 가지 집단적 메카니즘
*패거리나 무리: 보고타 거리의 청소년 갱 집단은 공동 도둑질(절도)과 공동분배 후 해산, 문제가 발생시 집단적 탈퇴, 15세가 되면 갱을 탈퇴해 독립한다
*동물의 무리에서도 리더제는 복잡한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다: 최강자가 리더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들의 짜임에 의한 것으로 안정적인 권력의 설치를 억제한다.
*‘사교성’의 형식: 사교집단은 사회집단처럼 권력의 중심과의 관계가 아니라 위신을 전파(분산)함으로써 움직인다.
⇒무리나 패거리는 리좀유형의 집단으로 권력형 기관 주위에 집중되는 나무형 집단과 대립된다. 따라서 패거리, 도적떼, 사교계는 전쟁기계가 변신한 모습이다.

4. 전사와 전쟁기계의 규칙들-국가형성을 저지하는 것들(전사의 특징); 근본적인 무규율성, 위계제도에 대한 문제제기, 버림이나 배반을 통한 끊임없는 협박, 민감한 명예의식.

5. 국가의 출현: 국가는 전쟁의 결과이기보다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힘들의 진전으로서 설명된다. 따라서 국가는 진화가 아니라 갑작스런 돌연변이(‘씨족에서 제국으로, 패거리에서 왕국으로’라는 낡은 시나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절단이다)

6. 국가는 완성된 모습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원국가’의 가설): 국가는 항상 외부와 관계를 맺어 왔다. 국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법칙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7. 국가나 전쟁기계를 독립성의 관점이 아니라 영구적인 상호작용의 장 속에서 공존과 경쟁의 관점에서 외부성과 내부성, 변형의 전쟁기계와 동일성의 국가장치, 패거리와 왕국, 거대기계와 제국에 대해 사고해야 한다. 동일한 장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내부성을 한정할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나 국가에 대항하는 것 안에서 자신의 외부성을 서술한다.


(*주) 1227년(1227년 8월 18일)은 징기스 칸[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대장장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의 사망을 말한다. 천개의 고원은 ‘목차를 보면,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1914년 전쟁 그리고 ’늑대인간‘의 정신분석, 1947년 아르또가 기관없는 신체를 알게 된 해, 1874년 바르베 도르빌리(Barbey d'Aurevilly)가 중편소설을 이론화한 해, 1227년 징기스 칸의 죽음, 1837년 슈만의 죽음......여기 날짜들은 곧 사건들이자 연대기적 진행성을 잃어버린 흔적들이다. 천개의 고원은 사고들로 가득 차있는 셈이다.’(Deleuz. Gilles[1980]. 김종호 옮김. 2000. 『대담 1972~1990』. 솔. p.55.)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은 개념들로 가득 찬 책이며, 그 개념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천개의 고원은 비개성적이고 비사물적인 개별화를 가르키는 것이다.(같은 책 p.56. 참고)


-Deleuze, Gilles and Guattari, Félix[1980]. 김재인 옮김. 2001. 『천개의 고원』. 서울: 새물결. [12. 1227년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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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위하여

2005/03/18 17:57

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위하여
-남원시장의 ‘한복 입는 날’ 지정과 관련하여

 

 

의복이란 개인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첫 만남에서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옷을 입는 패션의 변화에 따라 그 사회변화를 통찰할 수 있다. 옷은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인해 그 옷을 입게 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왕족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의복, 주거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의상은 욕망과 탐닉의 대상임과 동시에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받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철학자 푸코(Foucalt, Michel Paul)는 이렇게 개인의 욕망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사회변화를 ‘통제사회’라고 했으며, 모든 영역에서 그물망 같은 규율과 통제가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일제시대나 군사독재시절의 교복이나 두발단속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옷은 성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현대 여성들의 평상복인 바지를 입기 위해서 여성들은 100여년간 투쟁했다(Diana Crane. Fashion and its social agenda. 2004). 이처럼 의복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정치적 의도에 의해 항상 긴장관계에 있다.

 

남원시장은 ‘한복 입는 날’ 지정 운영 계획(자치행정과 공문-2233)에서 춘향제 성공적 개최와 우리고장 홍보를 이유로 3월까지 개별적으로 한복을 구입하여 4월부터 남원시 산하 전직원들은 한복을 입고 근무하라는 ‘협조’공문을 시달하였다.

 

한복을 입고 근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 옷을 입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남원시청은 시장실, 부시장실, 국장실을 제외한 실과소 사무실은 근무자와 근무자간의 여유공간이 부족해 직원들이 지나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사무실이 비좁다. 여유로운 생활공간이나 일터가 보장되어야 그 품이 넉넉해 보이는 한복은 자칫 거추장스러운 애물단지로 전락할 수가 있다. 또한 현장에 달려 나가 일을 하는 기술 분야 공무원이나 수로원, 검침원, 주차요원, 공익근무요원들에 대한 배려나 언급이 없다.

 

더구나, 선배공무원을 포함하여 임금이 열악한 하위직 공무원이나 신규직원, 일용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직원들에게는 20만원을 호가하는 한복을 구입하는 것이 뻔한 봉급쟁이로써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정식 공무원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종 사소한 혜택에서는 일상적으로 제외되고 차별받는 비정규직에게 지침이나 협조공문으로 그 ‘명령’을 지킬 것을 강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한 여성들의 한복은 남자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입고 생활하는 것이 까다로우며, 자칫 잘못하면 그 옷차림으로 인해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힘을 얻어 직장내 성평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우리 문화를 지키고, 남원을 홍보하는데 한복을 입는 것은 좋은 생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대안적 생활문화운동으로 차분히 고민되고 실천되는 ‘우리옷 입기’가 아니라, 행사준비를 위한 전시성 행정이라면 그 방향이 옳지 않다고 본다. 옷을 억지로 입혀서 남원이 홍보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하고 진지하게 기획되어야 하는 일이다. 설령 급하게 기획되었다 하더라도 한솥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는 동료공무원들에게 그 의미와 의견을 들어 차분히 준비되어야 한다. 최소한 720명이 넘는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와의 협의나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수렴이 없이 일방적으로 ‘시달’하는 협조공문은 요즘 진행하고 있는 지자체의 혁신사업이나 공직사회개혁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행정절차이다. 아직도 공직사회에서 시장지시에 의한 협조공문은 법보다도 무섭게 하위직 공무원을 위협한다. 공직사회 내부의 상명하복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옷이나 축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다이아나 크레인이 말하는 ‘의상민주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구태의연한 행정관습을 과감히 버리고 내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봄이 성큼 다가오면서 남원의 춘향제도 가까워지고 있다. 공무원노조 남원시지부는 남원시민과 더불어 2005년 춘향제가 온 국민과 함께 하는 기쁨의 축제, 어울림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며 명실공히 전 지역주민이 준비하고 참여하는 축제를 희망한다. 그 축제를 위하여 일방적 지시나 업무하달이 아니라 사소한 부분까지 공무원과 시민이 함께 하고, 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남원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 2005. 3. 17. 이유없이(?) 한복을 구입해야 하는 공무원들을 보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북본부 남원시지부]명의로 발표하기 위해 쓴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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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주체형성과 재조직화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
- '인간은 그/그녀가 행(行)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1. 차가운 사회에서, 개인으로 찢어진 인간들이 오직 욕망과 타인과의 투쟁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지식인은 사회의 난로인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아는 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내면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의 양태일 뿐이다.
'자신이 처한 계(세계)에서 끊임없이 저항선을 만들며 참여하는, 그리고 그러한 다른 계와 횡단적 연대를 서슴치 않는.....(특정한 행위의 양태)'
자신과의 끈질긴 투쟁에서 대중적 일상을 벗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가 지식인이다. 이것은 역동적인 사유와 행위이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는 생(生)은 지식인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룩해 놓음이 다른 누군가나 무엇에 의해 무너질 때 아름다운 것이다.
가을 저녁의 노을처럼...곧 이즈러질 누부신 하얀 만월(꽉찬 달)처럼...
고통과 쓰라림이 끝나는 편안한 휴식(죽는 것)을 누리지 못한자는 추한 것이다.

-[인간의 얼굴]이정우 저 (민음사) 읽고 나서 생각을 나누기 위해 씀.


2.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의식개혁운동이다. 게으른 봉건적 삶을 탈피하고 근면, 자조, 협동으로 의식을 개혁하면 '우리도 한 번 잘 살 수 있다'라는 물질적 풍요의 결과물을 제시한다. 하늘에서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의식을 개혁하면 인간의 삶은 달라진다'는 철학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의식개혁운동은 근대적 사유의 전형적 산물이다. 의식을 바꾸면 새로운 역사가 창출되는가? 생각을 바꾸면 신세계가 열리는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실패했다. 물질적 풍요는 일부 재벌과 권력집단에 지나지게 집중되었으며 의식은 개혁되질 못했다. 주어진 삶을 거부하는 저항의식은 탄생하지 못하고 달라진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신봉건적 노예주체’만 반복될 뿐이다.

3. 동양사상에서 인간에 대한 고민은 성(性)의 문제이다. 주희와 다산의 문제의식은 인간의 본성이 후천적 요인이 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원래부터‘그런놈’으로 탄생하는 주체는 없고 역사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4. 맑스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주체를 ‘생존하는 인간들’로, 그리고 그 인간들은 ‘유적인간’으로 설정한다. 개별인간 보다는 '생존하는 인간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이 ‘인간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임을 주장한다. 계급투쟁 역사를 지고 나갈 주체의 본질은 과거-현재-미래를 인식하는 ‘(인)류적 인간’이며 개인(개별자)의 발전과 모두의 발전을 인정하는 주체들이다. 바로 이 ‘유적 인간’은 현재의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혁명적 실천가’들인 것이다. 혁명적 실천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것이 맑스의 공백이다.

5. 레닌는 맑스의 공백을 철학적 사유로 채우질 않고 실천(practice)으로 완성한다. ‘해석의 문제를 실천의 문제’로 역사 속에서 실현시킨 레닌은 구체적 결과물로 소비에트를 호명한다. 소비에트는 스탈린과 사회주의국가장치에 의해 왜곡되고 소멸된다. 새로운 주체인 혁명적 실천가는 권력과 국가기계에 재코드화된다. 다시 부활할 수 없는가?

6. 부활하지 못하는 썩은 소련체제를 바라보고 알튀세르는 국가장치(당과 국가)와 새로운 주체에 대한 고민을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 이데올로기로 호명되는 주체는 동일시되거나 비동일시되는 문제만 남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끔찍한 이데올로기’뛰어넘어 새로운 주체성 형성을 시도한다. 동일시되거나 비동일시 되는 주체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제3의 주체형성을 설명한다. 계급투쟁과 더불어 욕망투쟁에 대한 문제설정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을 시도하는 들뢰즈/가타리는 레닌처럼 실천(현실)으로 공백을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체를 억압하는 권력의 미시적 작동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전복과 자율적 주체성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를 정치(맑스주의)와 정신분석(프로이트)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횡단'을 꿈꾸며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영역을 모색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기존의 구조주의적 분석을 벗어난 새로운 무의식 분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성을 생산하는 방식.
"무의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무의식은 건설되고 창안되어야 한다."

7.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단순히 계급으로 호명하거나 의식을 바꿈으로써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국가장치와 문화장치, 매체장치와 같은 국가/자본기계의 작동에 복종하거나 탈주(저항)하는 주체만 있을 뿐이다. 또한 실현됐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레닌의 경험). 끊임없이 실현되고 다시 복종되고(재코드화) 갈등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주체형성의 완성은 영원한 과제일지도 모른다(가타리의‘영원한 개량주의’). 단지 실현되는 것은 순간에 드러나는 혁명적 주체성과 갈등하면서 소멸하는 주체성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한번 혁명적으로 무장된 인간이 영원히 민주화 투사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적 주체가 영원히 비국가꼬뮨주의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과 우리들을 되물어보고 비국가꼬뮨사회를 실현(=실천)하는 경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존엄한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별적 노력보다는 집단적 실천과 마주침이 필요하며 끊임없는 투쟁과 모순된 현실에 대한 저항, 그리고 학습회와 연수가 필요하다. 자율성의 정치의 한계(개별화되는 경향과‘폭발적 힘’을 증폭하기 위한 어려움)를 넘어 집단적 실천를 통한 연대와 차이를 실현하는 주체(성)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 인간은 그/그녀가 행하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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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말하기
-새(bird)는 어떻게 사랑을 할까?-


사랑은 가장 은밀함과 동시에 가장 열린 신체와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한다. 여기서 사랑을 향한 은밀함은 그 어떤 사회적 장치나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은밀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체는 훨씬 자유롭게 열리고 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보통 우리들은 사랑을 하거나 애인과 섹스를 하고 싶을 때에는 말이나 합리적인 언어보다는 얼굴표정이나 상대방의 눈빛, 그리고 신체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들을 서로 살피고 교감한다. 소통되지 않는 섹스는 거짓이고 일방적인 권력의 작동이다. 사실 사랑이나 섹스는 서로 끌리거나 꼴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한쪽만 뜨거워져서 '우리 한번 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쑥쓰러운 일은 없다. 왜? 상대방과 충분히 교감하거나 접속이 되질 않으므로...!


1. 말을 한다는 것-권력

말을 한다는 것은 권력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언어권력'이라고 표현한다. 말이나 언어를 통해서 표시되는 '기표'는 그 순간 의미가 고정되고 확정된다. 우리가 책상 위에 과일을 보고 "사과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과일은 '사과'라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다. '사과'라고 외친 발언자의 언어가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으로 작동되어서 '사과'라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렇게 기표의 의미작용은 권력의 문제로 드러난다.
학생들을 줄맞춰서 세워놓고 혼자서 연단 위에 올라가 일장연설을 토하는 초등학교 교장은 파시즘의 중요한 결과물이다.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하고, 9시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사건들을 앵무새처럼 나열하는 것도 '언어권력'의 하나이다. 그 지겨운 소리들, 듣기 싫어도 들리는 말들.


2. 말을 한다는 것-관계

끊임없이 논리정연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는 인간은 가장 권위적이고 권력적인 인간이다. 그 권위의 확산을 위해 끊임없이 떠드는 자의 의도는 그 말이나 언어로 인해 자기 주위의 배치와 관계가 변화하기를 바랄 뿐이며, 이미 그것을 기대하거나 예상하고 지껄인다. 말이 바뀌면 사람이 변한다. 그 주위도 변한다. 그렇지 않은 말은 말이 아니다. 즉 말은 하나의 중요한 '관계'이자 새로운 '관계형성'이다.


3. 푸코의 말과 사물, 그리고 '무의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 관계와 권력의 문제를 담론(discourse)을 통해 설명한다. 푸코는 담론 분석을 통해 '일정한 담론이 가능할 수 있는 역사적 층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는 주체(말)와 말하는 대상(사물) 사이에 맺고 있던 지식(인식)의 태도와 그 곳에서 재주를 피우게 된 언어의 새로운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과 사물의 관계를 보면,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동해서 어떻게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지식과 권력을 자신의 내부에 흡수함으로써 '말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합리적인 언어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권력)와 '언어의 감옥'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로운 인간은 '무의미한 독특한 의미(가타리)'를 긍정하는 인간이다. 의미작용은 항상 권력의 문제이다. 반대로 '무의미'는 일방적인 권력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긍정하게 만든다.
'언어가 사물을 포착하려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 즉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의 모습을 변질시키려 하는 언어적 횡포(푸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언어의 횡포를 넘어서 권력에 대한 저항을

언어에서 작동되는 권력을 보고 '말하지 않기'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하기'를 생각해 보자.
물론 '암묵적 동의'를 악용하는 남성이나 권력집단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권력자들은 분명히 '침묵'을 점령하고 있으며 자기들 잣대로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침묵만 인정한다. 침묵이라는 일탈의 거리 측정은 자본과 권력자들의 무서운 무기이다. 그러나 통제 가능한 억눌린 침묵보다는 열린 교감이 훨씬 자유롭고 풍만하다. 그 열린 교감과 새로운 소통은 혁명과 사랑에 의해서 극대화된다.
혁명은 끝없는 사랑이다. 혁명은 무한한 타인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기애(自己愛)이자 자기에 대한 배려(푸코)이다. 혁명은 변증법이 아니다.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의 변증법의 아니라 끊임없는 끓고 있는 새로운 구성이다.

문제는 언어가 권력에 의해 장악 당했으니, 우리는 평생 올바르게 말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 탈주' 즉, 새로운 다양한 생성을 사고하는 것이다.
언어를 점령한 권력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끊임없이 스스로 변형된다. '터미네이터2'에서 나타나는 액체사이보그는 항상 우리 곁에 달라붙어서 어느 시공간에서나 존재하고 출현한다. '터미네이터2'는 새로운 권력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출현가능하고 이미 존재한 권력(거시권력과 더불어 더 끔찍한 미시파시즘)때문에 저항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있기 때문에 권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태초에 권력이 존재하고 저항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탈주가 존재하므로 그것을 재영토화 하는 권력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저항과 탈주는 인간 생성의 원인이면서 발전의 원동력이다. 새로운 말하기는 새로운 저항이다.


5. 새는 어떻게 사랑할까-'새로운 말하기'

생물학적 특성상 얼굴근육이 고정되어 있고 다양한 눈빛을 표현하지 못하는 새(새의 눈동자는 고정되어있다!)들도 사랑을 표현한다. 새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향해 몸체를 돌려서 '옆으로 비스듬히 쳐다보기'로 사랑을 표현한다. 깃털의 변화을 통해서 표현하기도 한다...합리적이고 권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위대한(?)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

논리적 표현과 합리적 언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말하기는 가능하다.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어린이의 언어로 말하기. 사랑의 뜨거운 언어로 말하기. 이것은 권력의 획일화와 지층을 해체하는 말하기이다.

최고의 말하기-사랑의 교감은 다양하고 항상 열려있는 것이다. 섹스, 부대낌, 눈빛, 느낌, 교감, 영혼, 자세, 떨림, 피부색깔, 소리(파롤parole), 닭살...엄청난 보여주기, 고음과 저음, 흔들림......다양한 침묵들(날카로운 침묵, 냉소적인 침묵, 즐거운 침묵, 오르가즘을 위한 침묵, 파쇼를 향한 얼음장같은 침묵-파시즘은 침묵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투표거부, 협상거부, 대표거부, 더 나아가 집단으로 말하기, 아우성, 들끓음, 웅성웅성, 부글부글...)....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무한하게 열린 감성적 텔레파시(telepathy)들을 사용하자. 그리고 느껴보자!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개인의 에너지와 그로 인해 끊임없이 풍만하게 퍼지는 집단적 에너지들을!!!

 

 

200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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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아 꼬뮌주의

2004/12/20 02:59

1. 사랑하는 동료에게 코코아를 선물받았다. 생각치도 않은 것을 받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맨 이런 일만 있었으면 너무너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와 미래도 마치 코코아 같다.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럽게 나를 적시면 나는 코코아 코뮌주의자가 된다. 혁명에서 소금과 야만과 폭력적인 거칠함은 제거되고 달고 기쁜 코코아만 존재하면 좋겠다. 나는 코코아 공산주의를 갈망한다!


2. 맑시즘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꼬뮌을 사유하고 구성하는 데는 무능하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분화된 사회 또는 외적으로 경제가 중심을 이루는 체제(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은 분화되지 않은 사회, 경제에 대한 거부에 토대한 사회에 적용될 때는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몽매주의 적인 것이다.'
[삐에르 끌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 p. 203.]

끌라스트리에 의하면 '분화되지 않는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배운자와 배우지못한자로 구분되지 않는 사회이며, '경제에 대한 거부에 토대한 사회'는 생산능력에 대해 부단히 엄격하게 통제하는 반생산의 기계들이 작동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들은 원시사회이며, 원시사회는 국가에 반대하는 비국가, 비권력, 비착취, 비상품 사회이다.

나는 야만적 별종보다는 야만적 원시인이 되고 싶다. 이런 나는 정통적이고 순수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야만적 꼬뮌주의자로 비칠 것이다. 나는 코코아 코뮌주의자인 동시에 야만적 원시사회인이고 싶으며, 따라서 다시 야만적 별종이 되고 싶다. 아~ 나는 때로는 야한 밤의 섹스천국 꼬뮌주의자가 되고 싶고, 밥꼬뮌주의자가 되고 싶고, 담배코뮌주의자가 되고 싶고, 가끔 술코뮌주의자가 되고 싶다. 이런 코뮌주의자들이 만나서 연대하면 야만적 코뮌주의가 될 것이다. 누구나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해도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 자유의 공간이 밤하늘 별처럼 무한하게 펼쳐지는 우주적 욕망천국 꼬뮌주의가 될 것이다.


3. 맑스의 '사랑'=공산주의

맑스의 경철수고에서 미친놈/녀같은 만능적 화폐에 대한 분석을 끝으로 구매와 교환을 이루는 착취경제를 거부하는 본심을 드러낸다. 화폐대신에 '사랑'으로 그 엄청난 공백을 메꾼다는 사유이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하고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는 인간이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칼 맑스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 p.361.]


4. 아무나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인용하고 노래한다. 이런 전지전능하고 마술적인 자본주의에 비해 꼬뮌주의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내 몸뚱아리가 되어 버렸고 공산주의는 너무나 멀리 있다. 이제 내 신체에 딱 달라붙는 꼬뮌주의를 생각하고 실천하자! 유연하면서도 부드럽고 기쁨에 충만한 제멋대로 미친 꼬뮌주의를 염원한다. 제맘대로 변신하는 카멜레온 꼬뮌주의 만세! 코코아 꼬뮌주의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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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명으로 쓰고 싶은 자는 자신의 실명으로 쓰면 된다.

2. 가상공간에서는 사실 실명보다는 아이디나 자신의 고유하고 특이한 필명으로 많이 쓰여진다. 그 이름(아이디)또한 항상 변하고 변용된다.

3. 가상공간에서는 현실 권력의 작동이 그대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장(場)이면서, 그 권력질서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도 한다.

4. 현실에서 권력을 쥔자는 새로운 공간마다 자신의 권력의 세(勢)가 유지되길 바라며, 가상공간에서도 그런 바램과 노력을 하고 있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항상 눌린 자들은 새로운 말하기 공간을 찾고 있으며, 가상공간에서 그런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5. 새로운 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는 질서를 부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스스로 질서를 만드면 되는 것이다.

6. 현실에서 표현의 자유는 많이 배운 자들(교수, 박사, 전문가들)이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의 표현의 자유는 하나의 상징으로만 작동하지 실제로 누릴 수는 없다.

7. 가상공간까지 군대처럼 군번대고 말할 필요는 없다.

8. (가상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는 실명을 사용할 수도 있고, 익명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9. 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노동조합의 자유게시판은 더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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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타산과 손익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잘 굴러가는 자는 노동조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노동조합은 머리가 잘 굴러가지 못하는 부족한 자들이 모여서
집단의 지혜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머리가 잘 굴러가는 자는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에서 생존하기가 참새가 바닷속에서 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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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004/12/20 02:50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지울려고 하는 자들에게...

 

 

과거의 잘못은 지우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마치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진공청소기로 흡입해도 소용없고 마른 걸레질을 해서 짜내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방법은 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성의 방법을 행하고
자기로 인해 직접 피해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친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면 된다.

그런데 대개 한번 잘못을 행한 인간들은
자기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수없이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이 옳다는 자기도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추하게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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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것이 추하다

2004/09/04 02:29

 " 오직 쓰라린 내면의 고통 속에서만

내가 사랑할 가장 아름다운 것 태어나네 !!! "
 
 
 죽지 않는 것은 추하다.
 
 차가운 사회에서, 개인으로 찢어진 인간들이 오직 욕망과 타인과의 투쟁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지식인은 사회의 난로인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아는 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내면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행위의 양태일 뿐이다.
-- 자신이 처한 계(세계)에서 끊임없이 저항선을 만들며 참여하는, 그리고 그러한 다른 계와 횡단적 연대를 서슴치 않는 ... (특정한 행위의 양태)
자신과의 끈질긴 투쟁에서 대중적 일상을 벗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가 지식인이다.
이것은 역동적인 사유와 행위이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는 생은 지식인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룩해 놓음이 다른 누군가나 무엇에 의해 무너질때 아름다운 것이다.
가을 저녁의 노을처럼...
곧 이즈러질 눈부신 하얀 만월처럼...
고통과 쓰라림이 끝나는 편안한 휴식을 누리지 못한자는 추한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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