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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최장집/ 폴리테이아)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63261.html
노동자들의 상실된 희망과 감춰진 분노 (한겨레, 이권우 도서평론가·한양대 특임교수, 2012.11.30 20:23)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폴리테이아·1만원
나는 책 읽으며 성장했고 성숙해졌는데, 세상은 어찌 되었을까. 최장집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읽으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책 읽으며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동안 세상은 숱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노정치학자가 현장에서 만나본 노동자들은 “상실된 희망과 감춰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내가 책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물 동안 해고된 노동자는 자살하거나 크레인에 올라갔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무감한 세상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하소연이었다.
지은이가 책 앞부분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떤 실체적 혜택을 주었고, 이들을 위한 정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무엇을 기여했는가”라고 묻는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책 읽어 진리를 알고 진실을 확인했고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해하고 분석하는 세계에 머물고 변혁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이념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 있었다. 거기는 지은이가 우리 민주주의를 수렁에 빠뜨린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의 자리였다.
지은이의 지적대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희구한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을 확대하고 실현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책에 나온 한 외국 학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살인자적 자본주의”가 되고 말았다. 지은이는 노동의 정치세력화가 실패한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결국 우리 사회의 위기는 대의되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 듯싶다. “더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마땅히 이슈화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책에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대안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한겨레>의 배려로 긴 세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두루 감사한 일이다. 한낱 책벌레인지라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지 못했고, 오늘 우리 공동체의 상처를 낫게 하는 데 이바지한 바는 없으나, 책 함께 읽으며 어찌해야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 권유해왔다. 아마도 책벌레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인 듯싶다. 그럼에도 질문하고 성찰하는 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아직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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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102124957
최장집이 갔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러! (프레시안,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학교 교수, 2012-11-02 오후 7:09:14)
[프레시안 books]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이 몸을 움직여 구체적인 노동의 '풍경'과 조우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그가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후마니타스 펴냄)에서 발견하고 감지한 소외와 상처의 풍경들이야말로, 그것이 비록 우리 시대의 벽화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라도, 현실의 깊은 모순을 환유적 형태로나마 강력하게 환기시킬 수 있는 모자이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풍경 속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고유한 표정과 목소리가 있다.
일본의 소설가 구니키다 돗포가 말한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부모, 스승, 친우와 같이 우리 인생을 결정했거나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저 한번 스쳤던 것 뿐인데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들은 나와 같은 평범한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이라서 잊을 수 없다는 게 그가 소설에서 힘주어 환기하고자 한 말이었다.
최장집이 이 책에서 만나본 사람들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이름 없는 대중들이다. 그들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이기도 하고, 청년유니온의 조합원이기도 하며, 영세 봉제 공장의 노동자이면서 사장이기도 하다. 지역 자활 센터의 수급자이기도 하며 재래시장의 상인이기도 하고, 농민 운동에 참여했으나 가망 없다는 심정을 갖게 된 농민이기도 하며, 그 자식들인 지방대 학생들이기도 하다. 수렁에 빠진 신용 불량자와 이주노동자들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저 낮은 곳의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와 상처, 고통에 조응하면서 최장집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의 착잡한 풍경에 대해 '사유'한다. 그가 이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되었거나, 아니면 다시금 확신하게 된 것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처해 있는 위기일 것이다. 그는 이것을 책의 제목에서 암시된 대로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 말하고 있다.
최장집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의 표정 앞에서 거듭 정당에 기반을 둔 대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음미하는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그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이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열망이 제대로 대의되는 정당 체제, 또 그렇게 대의된 정치 세력들이 경합과 타협을 통해 실질적인 정책을 실현하는 정치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사람들의 절망과 열망은 왜 정치 세력에 의해 대표되거나 대의되지 않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그가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노동을 대변할 진보 정당의 부재,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지속적 폐해, 지난 민주 정부의 무능력, 대안 없는 정치권의 추상화되고 구호화된 반대 담론, 대안적인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의 부재 등이다. 대체로 이것이 정당으로 요약되는 정치 엘리트에 대한 비판이라면, 반대로 스스로의 요구를 결집해 정치 과정과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회의도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보다도 이 책에서 최장집이 반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은 영국의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이 제안한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은 성장과 효율성, 시장 경쟁의 경제적 가치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충돌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시장 경쟁이 극단화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패배한 자에 대한 소외와 배제를 낳고 그것이 심화될 때, 공동체로의 통합이나 공존은 불가능해진다. 소외되고 배제된 시민들은 정치 참여로부터도 소외되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위기 모두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약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기여도와 무관하게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기본 생활과 복지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이를 통해 삶의 기회가 확대되도록 하는 것을 공동체의 의무라고 인식하는 사회 윤리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최장집의 주장이다.
최장집이 '사회적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민주주의의 윤리적 이상인 동시에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사회 정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단순한 복지 국가 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내 판단에 이러한 '사회적 기본권'의 강화는 '기회의 평등'을 역설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결과의 공정'이라는 공화주의적 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의 보완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러한 최장집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노동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한계는 공동체의 공존과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적 가치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파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가치의 출발점인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 가운데 유독 자유, 그것도 '소유권'으로 제한된 자유만이 팽창되는 폐해를 구조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국가와 기업의 동맹이 이러한 현실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 판단에 동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기업화' 경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기업 국가'라는 김동춘의 진단도 일찍이 제기된 바 있거니와, '국가의 기업화'에 의한 한국 민주주의의 이 끝없는 오작동은 일본의 정치적 후진성인 '국가의 관료화' 경향만큼이나 오늘날 '제2의 자연'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국가는 마치 기업이 노동자를 임의로 해고하듯, 국민 또는 시민을 실질적으로 비시민 또는 '난민'적 상황으로 배제해 버리는 일을 점점 당연시하고 있다.
최장집이 만나본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대중들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 그리고 환멸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연권에 해당되는 '시민권'을 오늘의 기업화된 국가가 체계적,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에 들어와서 우리들이 확인했던 저 끝없는 노동자와 철거민 등을 포함한 저소득 시민에 대한 공권력과 사권력(용역)이 결합된 압도적인 폭력과 모욕을 상기해 보면, 실질적으로 난민적 상황에 빠져버린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애초에 정치라는 공적 세계로부터의 배제를 이 기묘한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실질적으로 구조화하고 정당화하는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이란 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권리와 욕망을 대의하고 대표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최장집은 말하지만, 현실의 폭력 속에서 이들이 나날이 체감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대의 불가능성'의 명백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의 대의 불가능성은 한국 제도 정당의 역사적 경로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차라리 '정상 상황'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궁극적 도달점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관성 아래서는, 노동을 대변할 정당의 출현이란 차라리 예외적일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을 확장하기 어렵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상대화하고 넘어서는 가치와 실천이 오늘의 정치 시스템에서 체계적으로 제한되고 있다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의를 거부하는 불복종과 직접 행동을 통해, 대의 불가능한 노동 현실을 대의하라고 압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살아있는 민주주의다.
이것을 최장집은 다시금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낡은 관성이라고 말하겠지만, 오히려 낡은 관성에 빠져버린 것은 오늘의 정당 체제이기 때문에, 정당을 경유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는 반(反)정치적 상황에서는 스스로의 시민권을 대의(re-presentation)가 아닌 집단적 제시(presentation)의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행동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운동'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당 외부에서 전개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개입을 '운동'으로 규정해 비정상 또는 예외적인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면, 자본의 폭력과 대의 불가능한 정치 현실 앞에서 시민들은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은폐된 폭력과 무기력에 그저 순응하라는 말밖에 안 된다.
가령 오늘날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각 지역에서 전개되는 각종의 직접 행동들은 정당 정치로 상징되는 오랜 정치적 이데아가 현실의 압도적인 붕괴 상황 앞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새로운 정치적 표현과 반발력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대의제-정당 정치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 비정당적 정치의 세력화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미지의 민주주의가 대의 체제로 일원화돼 수렴되기보다는 하향적인 정당 정치와 상향적인 비정당 정치 간의 경합을 통해서라야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각성과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최장집은 지난 민주화 정권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정권은 바뀌어도 결국 경제 정책은 오히려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악화를 보조하고 용인한 것은 누구였을까. 그가 만났던 여러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구조화하는데 연루되었던 자들은 누구인가. '노동'을 의식하지 않아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정치 계급' 자신이었다.
왜 이들은 정치 계급이 되었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오늘의 제도 정치로의 수혈 통로란 학력 엘리트, 운동 엘리트, 상층 자산가, 이른바 '사회 지도층'들의 진입만을 용이하게 만드는 제도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적 상황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민주주의를 채용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의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명백하게 명시했듯 소유가 있는 자에게만 권리가 있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또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전제는 갈수록 현실이 되고 있다. 동시에 투표 행위를 포함하여 정치라는 공적인 세계에 참여하는 시민의 비율 역시 학력과 재산에 비례하고 있음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간명하게 말하면 포기할 수 없는 배타적 이해관계를 고수하려는 편에서는 다양한 자원과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힘을 축적하지만, 헐벗은 몸을 빼고는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사람들 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체념과 환멸이 지배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정치적 환멸과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장집이 말한 대로 '사회적 시민권'의 범주에서 구체적인 정책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실현해 나가야겠지만, 그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근원적으로는 지난 60여 년 내내, 민주화 이후 25년 내내 망각되었던 국가와 시민의 존재 근거에 대한 가치의 성찰과 전환이 필요하다. 한 국가 안에서 우리가 시민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스로의 자유를 실현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바닥으로의 경쟁'으로 전락한 소유욕의 배타적 추구의 끝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가. 유기체도 그렇지 않거늘 무한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과연 가능한가. 인간다운 삶이란 대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절망스러운 고통에 대한 유효한 처방전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는 국가는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은 정책이나 시스템의 보완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면서 던지게 되는 이런 '인문 정치'의 물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인간적 상처들"과 대면해, 사회과학자들이 그들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최장집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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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2/10/15/0914010000AKR20121015186800005.HTML
최장집 "안철수현상 한국 정치발전에 기여"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2012/10/16 07:11)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펴내
정치학자인 최장집(69) 고려대 명예교수는 "안철수 현상은 앞으로 그의 행적이 어떠하든 또 그것의 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 젊은 세대들의 자기 발전과 정치적 각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최 명예교수는 저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이른바 '안철수 현상'을 이같이 평했다.
그는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왜 '안철수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실감했다"면서 "좌절감에 빠진 젊은이들을 행해 이 사회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로 바꾸자고 말하는 그의 메시지는 강력했고 커다란 공감을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반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공허한 구호를 내세우는 것으로 일관한 진보 정당을 비롯해 기성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안철수의 메시지가 젊은 세대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었다는 게 최 명예교수의 진단이다.
대선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오늘날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가 갑자기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면서 "이를 좋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정당들 간에 존재했던 어떤 신념이나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처받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회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이들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 상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가 다뤄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로 "절대다수 노동인구의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꼽았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 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지난 4월 19대 총선에 대해서는 "야당 세력이 집권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수 시민들이 강한 의구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야당과 진보 세력은 '지난 실패를 딛고 노동 문제를 포함해 사회경제적 사안들을 좀 더 잘 다루고 유능하게 집행할 대안적 정부가 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610664
경제민주화 공약, 서민의 고통 알고 하는 얘기인가 (중앙일보, 배영대 기자, 2012.10.17 01:08)
『노동 없는 민주주의 … 』 펴낸 진보정치학계 원로 최장집 교수
정당 후보든, 무소속 후보든 노동 문제 해결 능력이 더 중요

그는 정당정치의 구체적 내용을 노동문제로 채우고 싶어한다. 중하층 서민들이 일터에서 겪는 애환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실제 문제(real issue)’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안철수에 대한 비판과 긍정=대선 정국을 바라보는 그의 복합적 시각은 우선 ‘안철수 현상’에서 확인된다. 안 후보의 대선 출마 여부조차 오리무중이던 지난 6월 최 교수는 “무책임하고 비정상적 태도”라며 안 후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 ‘안철수 현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안철수 현상은 그 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 젊은 세대들의 자기 발전과 정치적 각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 교수는 “내가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정당 있는 후보를 선호하고 정당 없는 후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당이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한 역사가 누적되며 오늘의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당 후보가 됐든, 무소속 후보가 됐든 노동 문제를 포함해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능력을 갖추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진보 세력에 대한 기대와 우려=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지지했던 최 교수지만 그들의 집권 후 결과에 대해선 비판적이다. “다른 정부도 아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가 정규직에 맞먹을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얼마나 취약해졌는가는 잘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이번 대선에서 주요 후보 세 명 모두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 이유는 “정당들 간의 어떤 신념이나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처받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회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이들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수동 혁명의 악순환’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의 저항감에 위기감을 느낀 통치 세력들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나서는 개혁을 그렇게 불렀다.
최 교수는 “민주화 이후 4반세기를 지나고 있는데도 우리 정치가 아직도 수동 혁명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며 “진보를 말하는 정당들이 뭔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과거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 정부의 접근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깊이 반성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 유권자들은 야당이 정치 슬로건으로 내세운 개혁 사안들을 실천할 능력과 진지함이 있는지를 중시하기 시작했다”며 “야당과 진보 세력은 사회경제적 사안들을 유능하게 집행할 대안적 정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찾아볼 것”을 제안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191943475&code=900308
[책과 삶]칠순의 최장집 교수가 발로 쓴 ‘노동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위기다’ (경향, 문학수 선임기자, 2012-10-19 19:43:47)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176쪽 | 1만원
이 책의 저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동은 모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어느 사회에서든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배제하고 ‘노동자’라는 이름을 들여다본다면 그 사실은 한층 명백하다. 이른바 선진국 경제활동 인구의 90% 안팎이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자영업 비율이 매우 높은 한국에서는 약 70%가 임금노동자로 분류되지만, 가족노동에 의존하는 영세 자영업자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수치’는 달라져야 한다.
다시 한번 최 교수의 서문에서 한 대목을 옮겨오자. “우리가 권위주의와 싸우면서 민주화에 걸었던 가장 큰 기대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는 사회”였다. 그렇지만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인 노동자의 삶은 과연 나아졌는가. 그 ‘나아진 삶’의 핵심은 일(노동)과 휴식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시간과 돈일 것이다. 하지만 최 교수는 나아진 것이 없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가졌던) 기대와 달리, 민주화 이후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이 시장상황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종속적 지위로 빠져들게 됐다.” 게다가 도처에서 혼란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한층 악화된 측면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를테면 공동체의 붕괴 같은 것이다. 작금의 한국 사회가 노동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최 교수의 진단이다. 그것은 “위기의 한국 경제,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다. 결국 최 교수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노동 없는 경제, 노동 없는 시장으로 달려가면서 바닥으로 질주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결국 “민주주의도 경제도 유지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이라는 얘기다.
최 교수는 그 위기를 현장에서 체험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삶을 연구실에서 보냈던 그가, 주말이면 아내의 손을 잡고 클래식 연주회장을 찾는 그가 운동화 끈을 묶고 ‘낮은 곳’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겠다며 길을 나섰다. 2011년 8월부터 올해 5월까지였다. 그가 10개월간 “만났거나 들여다본 사람들의 삶”은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일용직 노동자, 봉제공장 노동자들과 대기업 노동자, 기초생활수급자들과 이주노동자, 재래시장 상인들, 농민과 청년 비정규직, 신용불량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하층의 삶이었다.
그 만남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1부를 구성한다. 어느덧 한국 나이로 칠순에 이른 최 교수는 그 과정이 “물리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아울러 “아무리 남의 삶일지라도,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신적으로 괴로웠다”고 털어놓는다. 당연한 일이다. 최 교수가 강조하는 “노동의 위기”란 인간성의 몰락, 영혼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물론 최 교수는 그것을 보다 사회적인 앵글로 들여다보면서 “공동체적 결속의 해체”라고 표현하지만 말이다.
최 교수는 ‘삶의 현장에서 보는 한국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1부에서 자신이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감춰진 상처와 대면하고, 현대차에서 10년간 일하면서 자신을 고용한 인력회사가 일곱 번이나 바뀌는 상황을 겪어야 했던 노동자에게서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장위동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국가권력에 대한 강한 피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 책의 2부에서 최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결론은 노동 시민권의 확립이다. 그것을 위해 중요한 것은 물론 민주주의다. 그는 “노동의 시민권이 노사관계와 정당 체제에서 취약해질 때,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만약 진보세력이 다시 집권한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잘못을 되돌아보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있다.
 
http://www.redian.org/archive/43909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돼" (레디앙 / 2012년 10월 20일, 12:09 PM)
[책소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최장집/ 폴리테이아)
“한 노동자는 10년 가까이 현대차에서 일했는데, 그 사이 자신을 고용한 인력 회사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가.’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에서 나는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헤매는, 카프카의 소설 속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의 상처투성이 삶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노동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결과임을 말한다. 자신의 노동으로 소득을 얻고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생산자 집단들이 생활 세계와 시민사회, 나아가 정당 체제의 영역에서 사실상 무권리 상태에 있다는 증언인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질문한다. 민주화 25년이 지난 지금, 도대체 우리가 꿈꾸고 바랐던 민주화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우리가 권위주의와 싸우면서 민주화에 걸었던 가장 큰 기대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민주화 이후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이 시장 상황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종속적인 지위로 빠져들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책의 1부인 “ 삶의 현장에서 보는 한국 민주주의”는 최장집 교수가 전주의 지역 자활 센터, 성남의 새벽시장, 경기도 광주의 비닐하우스 농장, 가리봉동의 이주 노동자 지원 기관,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 등을 방문하고 탐사한 기록들이다. “필자가 만난 사람들 혹은 필자가 들여다본 사람들의 삶은,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일용직 노동자로 시작해 봉제 공장 노동자들과 대기업 노동자를 거쳐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들과 이주 노동자, 그리고 재래시장 상인들, 농민과 청년 비정규직, 신용 불량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하층의 삶이었다.”
그는 낯선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인터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보다 (아무리 남의 삶이라도)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괴로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현장에서 그는 노동의 존엄성과 정당의 역할이 부재한 것,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준 수많은 인간적 상처들과 공동체의 해체를 목격한다.
이 책은 이런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그 가치대로 발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회의와 강한 항의를 드러낸다.
노동의 시민권이 노사 관계와 정당 체제에서 취약해질 때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는 것,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1980년대 초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한국의 노동문제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장집 교수가 평생 일관되게 연구해 온 주제는, 정치체제가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정치의 제도나 구조로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처럼 사회경제적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하는 정치학자는 많지 않다. 일에 대한 헌신 없이 제대로 설 수 있는 사회나 경제가 있을 수 없다면, 당연히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가 튼튼해지고 노동의 존엄성이 공동체의 규범으로 자리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도 자신의 가치를 발양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은 모든 사회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이다. 경제성장도 시장도 재벌 대기업도, 그리고 민주 정부도 모두 노동에 기반을 두고 서있다. 따라서 노동의 위기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위기의 한국 경제,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한국 사회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 없는 경제, 노동 없는 시장으로 달려 나가는 한국 사회의 ‘바닥으로의 질주’가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도 경제도 유지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자체를 잘 제도화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서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에도 최대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선거철을 맞아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화두가 되고 있지만 최장집 교수는 이에 비판적이다. “오늘날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가 갑자기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필자가 이를 좋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정당들 간에 존재했던 어떤 신념이나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처받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회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이들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 상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장집 교수는 2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지난 정부 시기 복지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회적 시민권에 기초를 둔 접근은 복지를 위해서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복지란 사회나 국가가 의당 시민에게 부여해야 할 수혜이므로 시민은 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하는 한편, 수혜자 개인으로 하여금 자아 존중과 긍지, 삶의 목적과 효능을 견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1943년생으로 올해 칠순을 맞았다. 이 책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칠순을 기념해 묶어 낸 작은 책이다. 그는 서문에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에서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울 때마다 스스로 ‘뒤늦게 인생 공부 많이 하는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에도 무너지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를 생각했다고도 했다. 엄밀한 글쓰기로 정평이 나있는 최장집 교수가 일흔의 나이에 현실의 삶을 기록하면서 보여 주는 이런 감수성은 기존 글과는 다른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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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칼럼]정당 정부의 길 (경향,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2012-09-24 21:12:04)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적인 불확실성에 있다는 점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후보가 결정되는 과정은 무정형적이고 불가예측적이다. 선거를 100일도 안 남겨 놓은 지금, 여전히 후보가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적 측면을 반영한다. 앞으로 무슨 사태가 전개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한국정치이기 때문이다. 모든 후보들이 복지국가, 양극화 해소, 반값등록금,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후보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후보나 할 것 없이 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선거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당 해체의 현상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을 지배하는 것은 캠프다. 당이 후보를 지명하고 당의 후보가 정당 간 경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캠프라는 이름으로 특정 후보자와 인적 집단이 당을 지배한다. 그러다보니 정당이 정부가 되고 책임 정치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캠프가 청와대가 되고 정부가 되어 집권당조차 소외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임기 후반에 대통령의 인기가 없어지면 반대로 집권당이 나서서 정부와 거리를 둔다. 과거 노무현 정부 시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패턴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집권당 후보가 아니라 야당 후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마치 박근혜 캠프의 제1원칙은 ‘이명박 정부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해 시민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당선만 될 수 있다면 무슨 행동, 무슨 공약이든 다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선거는 책임으로부터 방면된 권력자를 뽑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때 선출된 권력자는 막스 베버의 말대로, 특정 후보자 개인이 정당이라는 매개 없이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마고그(demagogue) 이상일 수가 없고, 사실상 군주를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데마고그가 정부가 된다면, 사적으로 가까운 측근과 전문가집단, 나아가 관료에게 의존하는 통치는 필연적이다.
한국 정치의 이런 악순환 구조를 생각할 때,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문재인 후보가 “책임총리”, “정당책임정치”를 제시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록 그것이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위한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정부 운영 방향을 옳게 정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중심제의 특성이자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승자독식 원리는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권력 독점을 허용하는 문제가 있다. 강한 열정을 가진 추종자 집단을 가진 후보의 경우, 비록 그가 협소한 사회적 기반을 대표한다 하더라도 권력 장악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또 증오를 정치 동원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집권당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되고 결국 내부로부터 해체와 무기력증을 앓게 될 수도 있다. 정당정치의 붕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안철수 현상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공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정치가 악순환을 끊고 새롭게 도약해야 한다면, 극단적인 불확실성을 줄이고 정치적 인과성과 예측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집권당과 정부 사이의 협력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것을 통해, 책임 정치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행히 현행 헌법은 청와대 중심의 정부 운영이 아닌, 책임총리와 집권당이 의회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대통령 1인 중심의 통치가 갖는 과부하를 줄이고, 집권당을 정부 운영의 책임 있는 주체로 불러들이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부합하고 또 정부 정책의 책임성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정당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집권당은 활력을 갖게 될 것이고, 야당 역시 예비 내각을 구성해 그에 상응하는 정책 능력을 발전시켜야만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기회를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정당의 정부가 되는 길을 개척하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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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72053585&code=990100
[최장집칼럼]책임정치를 위하여 (경향,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2012-08-27 20:53:58)
대통령의 책임성 부재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정치는 대표의 선출과 함께 선출된 대표가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들에게 책임지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 즉 평상시에도 선출된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 때만 민주주의가 있고 평상시에 없다면, 그것은 왕을 선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상시에도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좋은 정부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4년 중임제로 개헌하자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정부형태를 아예 의회가 중심이 되는 내각제로 바꾸자고 한다. 제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뒷날 우리가 어떤 제도를 선택하든 현재 시점에서 먼저 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하겠는데, 그것은 권력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일이며, 이를 주도할 민주적 리더십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개헌은 그 자체로서도 넓은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제도를 바꾸어 정치를 좋게 만들려는 접근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의 규범과 원리를 실천하면서 “통치의 기예(art of government)”를 훈련하고 축적하는 것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간 숱하게 이루어진 제도개혁과 함께 정치발전을 위한 수많은 모델들이 난무하고 수많은 정치공학적 아이디어들이 짧은 사이클로 명멸한 뒤 만나게 된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현실이다. 현재의 제도적 틀 안에서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서 정치발전을 도모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는 것 없이, 뭔가 우리의 정치현실 밖에서 새로운 대안을 들여오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한국정치는 “정당정치의 해체”로 특징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를 주도하는 것은 정당이라기보다는 정당 내 여러 캠프들이고, 결국 정부가 되는 것도 승자가 된 특정 캠프의 인적 집단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열린우리당 정부나 한나라당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로 호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권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캠프정부가 선거과정에서 공약했던 정책대안을 실현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동시에 임기를 마친 정부의 권력 행사와 정부 운영 결과를 누가 책임지는가의 문제도 모호해진다.
이번 대선에서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까?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바뀌었고, 당 지도부와 후보는 현 대통령에 대해 자신의 당 출신 대통령이 아닌 듯이 말한다. 그것은 새누리당만의 현상이 아니라 5년 전 민주당의 경우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임 정부에 대한 “회고적 평가”를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당의 연속성이 감춰진 속에서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는 계속해서 애매한 문제가 되고 있다.
당정관계의 문제도 크다. 캠프정부에서는 자신의 인적 집단을 공직에 충원해야할 필요와 압력 때문에 당정분리를 지향한다.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은 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와대를 만들고 당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기 때문에, 기존의 당 리더십을 해체하고 당의 역학관계를 과격하게 재편성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러한 변화가 당을 허약하고 왜소하게 만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후의 정당은 그 이전의 야당 때보다 오히려 허약해지고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 당정 간의 정책조율과 원활한 소통의 필요성은 청와대가 아니라 주로 집권당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대통령의 소극성 때문에 실제로는 잘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당정관계는 대통령이 압도적 우위에 있는 현실적 권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또는 최고 권력을 향유하는 대통령의 자만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한때는 견제되지 않는 강력한 대통령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전혀 구속됨이 없이 당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으로 인해 제왕적 이미지는 더 강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당의 기반이 약한 대통령이 갖는 패러독스는, 제왕적이라 할 만큼 강력한 대통령에서 터무니없이 허약한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정당과 거리를 둔다는 말은, 넓은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그만두고라도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괴리되고,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통령들은 임기 중반도 안 돼서 갑자기 사회로부터 고립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임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정당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거리를 두었다. 임기 전반에 대통령은 “집권당 없는 대통령”이고자 여러 형태로 당의 영향력을 제어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이르러 그의 권력이 현저하게 약화될 때의 당정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당이 오히려 멀어지고자 한다. 대통령은 대선에 가까워오면서 오히려 당에 부담이 되고, 이제 당이 나서서 “대통령 없는 집권당”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이러한 청와대-집권당 관계는 대통령을 유능하고 좋게 만드는 데 있어서나, 정당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나 실패하게 된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당이 중심이 되는 책임 정부를 실천하기 위해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이 정부를 구성할 때부터 정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용하는 책임 내각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무총리와 내각 인사를 당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거나 집권당의 주도권 속에서 선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당정협의는 단순히 당정 간에 의사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의 구성과 운영을 담보하는 기본 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을 대표하는 내각은, 특정 정책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면서 선거 공약을 이행할 정책 수행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대통령과 더불어 당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정당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정당은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춘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장(場)으로 기능할 수 있다
. 이 과정에서 정당은 일반 당원의 참여를 확장하고 신규 당원을 늘리면서 지역적·계층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고, 수많은 정당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익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함과 동시에 그들이 정치경력을 일궈갈 수 있는 직업 훈련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의 정당 발전은 ‘대표’ 개념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동안 정당들은 여성, 노동, 청년, 시민운동 대표를 개별적으로 배려하는, 일종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대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대표를 뽑았다는 것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당의 기반 강화는 특정의 사회계층이나 집단, 직업, 기능적 분야에 있어 이들 사회집단을 실제로 연계할 때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당이 바로 설 때 당 밖의 관료나 정치지망생들 역시 이쪽저쪽 눈치 보며 신념을 저버린 줄서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정당 안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과업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연쇄적으로 전개된다면, 대통령은 쇼윈도식의 메가 프로젝트를 졸속적으로 추진할 필요도 없고, 임기 말에 이르러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당 간의 경쟁 역시 상대를 상처주고 모욕주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대안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대통령 개인의 사인화된 정부가 아니라 정당의 정부를 만드는 일은, 오늘의 한국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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