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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헤지스,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 서평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092012205&code=900308
[책과 삶]대중의 계급 배반, 그 뿌리엔 ‘자칭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절망이 있다 (경향, 문학수 선임기자, 2012-11-09 20:12:20)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크리스 헤지스 지음·노정태 옮김 | 프런티어 | 376쪽 | 1만6000원
이 책은 뉴욕주 랜싱에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막을 연다. 그는 12번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초록색 배낭에는 커다란 성조기가 묶여 있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가 그의 곁에 차를 세우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지금 “자유의 행진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스물다섯 살의 해병대 예비역으로 현재 실직 상태인 그는 엿새 동안에 150㎞를 주파하는 ‘캠페인성 걷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행진의 목적은 “24번 선거구에서 민주당의 마이클 아쿠리 하원의원의 자리를 공화당 후보로 갈아치우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내친 김에 그의 주장을 조금 더 경청한다. 한데 어찌 보면 그 주장이라는 것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실직 상태가 되기 전에 비정규 건설 노동자로 일했던 그 청년은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에서 최근 통과된 건강보험 법안에 반대”한다. 반면에 “연방정부가 월스트리트에 구제금융을 투입하기로 한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며 정부의 경기부양책과 실업구제 정책의 실패에 항의하는 보수주의 정치운동인 ‘티 파티 운동’에 지지를 보낸다. 또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공화당의 존 매케인을 지지했지만 현재 호감을 느끼는 정치인은 좌파로 알려진 하원의원 데니스 쿠치니치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저항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한창 나이의 그는 군대 문화에 길들여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사회가 그를 절망에 빠트렸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울화가 치민 그는 연방정부에 깊은 불신을 품게 됐고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을 불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좌우의 대중주의(populism)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매우 일반적 양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그 젊은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너무도 두렵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저자는 “현재 미국의 수천만 노동자들이 표출하는 분노”가 “지난 30여년간 노동자와 중산층의 최소한의 이익도 지켜내지 못한 진보주의자들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다르지 않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적 단체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해 점점 완고”해지는 동안, “기업들은 숱한 악행을 저지르고 민주주의적 국가는 와해됐으며, 일반 시민의 이익을 지켜주던 기본적 법률의 내장까지 뽑아 팽개치는 상황”이 지속돼 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곗바늘을 1917년으로 되돌려 진보의 죽음을 되짚는다. 비 오고 음울했던 4월2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백악관을 벗어나 의회로 발걸음을 향한다. 혹여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가 있을까봐 기병대의 호위를 받은 채였다. 그는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입추의 여지가 없는 하원에 당도해 36분짜리 연설을 행한다. 마지막 결론은 “독일제국의 항복을 얻어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힘과 자원을 즉각 총동원한다”는 것. 윌슨의 제안은 하원에서 373표 대 50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됐고, 연설이 있은 지 4일 후에 마침내 전쟁이 선포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바라보는 ‘진보 몰락’의 시작 지점이다. 일단 저자는 “전쟁은 지난날 미국적인 삶을 나타냈던 가치와 자아상을 파괴하고 공포, 불신, 소비사회의 쾌락주의를 낳은” 신호탄이었다고 바라본다. 아울러 “사실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대중선동의 기술”이 미국 땅에 휘몰아친 계기였다고 강조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실제적 진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급진주의자들(radicals)에 대한 탄압은 이때부터 고개를 쳐들었으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황금기를 구가했던 미국의 진보운동에는 마침내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의 ‘진보 대학살’이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서 절정에 달했다는 얘기다.
물론 새로운 분석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과정에서 침묵했던 자유주의자들(liberals)에게 주목한다. 그들은 한때 급진주의자들과 협력했지만 공포의 시대가 닥쳐오자 태도를 180도 바꿨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때로는 고발정신을 발휘해 자신의 살길을 찾기도 했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와 관련해 허다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자는 그 지점에서 때때로 통분(痛憤)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부와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고 타협한” 그 자유주의자들이 오늘날 미국에서 ‘진보주의자’로 불리는 일군의 무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속도감 넘치는 문체는 때때로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을 드러낸다.
이제 저자가 책의 서두에 갈팡질팡하는 젊은이를 등장시켰던 이유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대중이 보여주는 ‘계급 배반’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그것은 ‘자칭 진보주의자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온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이 책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매우 유의미해 보인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1990년부터 2005년까지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미국의 비영리 미디어센터인 네이션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책의 원제는 ‘Death of The Liberal Class’다.
 
http://www.redian.org/archive/45611
미국 진보운동 잔혹사? (레디앙 / 2012년 11월 10일, 11:29 AM)
정의를 잃어버린 기득권자들을 향한 통렬한 비판
수출 5,0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라는 지표가 무색하게도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8년째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 인류사 이래 가장 눈부신 기술력과 생산력을 보유했다고 이야기되는 지금 시대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생활고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1,000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다. OECD는 2012년 한국의 가계부채 비율이 154%로 유럽 재정위기의 진앙지인 스페인(140%), 그리스(97%), 이탈리아(80%)보다 높다고 경고했다. 대출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기에도 허덕이는 가계가 늘어나고, 여기에서 탈출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이 사람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까. 맞서 싸워야 할 적은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할까. 이 책이 그 출발점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동 문제를 취재해온 전문가다. <뉴욕타임스>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중동의 전쟁터를 직접 발로 누비며 미국이 만들어낸 부조리와 폭력의 참상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이른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테러와의 전쟁’ ‘지구적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구호 이면에는 영원한 전쟁 상태를 유지하며 자본주의적 확장을 꾀하고자 하는 파워 엘리트들의 의도가 있음을 확인했다.
거기에 진보 진영이 교묘하게 협력함으로써 노동자와 하층민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진보 진영 자체의 설 자리도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저자는 언론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고자 거대권력과 싸움을 시작했으며 이 책 역시 그 연장선에서 쓰였다.
이 책은 정치의 잔혹사로서 진보 진영이 국가와 기업 권력에 어떻게 짓밟혀왔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의 자화상으로서 진보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을 배반하고 권력과 손을 잡았는지를 되짚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롭게 싹 틔울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어떻게 진보는 부와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고 타협했는가
진보 계층은 점진적인 개혁을 변화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한 희망의 상징으로 중산층과 노동자를 대변해야 할 진보세력은 기업과 기득권세력의 공격으로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중산층의 삶은 망가졌고, 생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기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진보진영이었던 언론, 교회, 대학, 정치, 예술계 그리고 노조가 기업의 돈으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언론은 정부의 홍보 역할을 자원하고 나서고, 대학은 스스로를 취업학교로 전락시켰으며, 노조는 자본가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협상가가 되고 말았다. 무기력해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진보세력은 심지어 한때 자신들과 함께 ‘개인의 자유’를 지켜나가기 위해 자본주의와 싸웠던 동료 진보주의자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그들을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억압하는 자들 편에 서서 그것을 부추겼다.
그러면서 그렇게 ‘온건한’ 태도로 전향할 때 장기적으로 더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바른 말을 하는 학자는 강단에서 쫓겨나고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인은 지면과 방송에서 사라지며, 권력에 맞서는 성직자는 배교도로 낙인찍히고 인권을 이야기하는 운동가는 철창에 갇혔다.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고자 고공농성을 벌이고, ‘내놓을 게 그것밖에 없기에’ 목숨을 담보로 투쟁해도 기업 국가 시스템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빨갱이’라는 덫을 씌워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권력은 그러한 시스템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촘스키, “1930년대보다 더 절망적인 지금”
촘스키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이런 일은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1930년대를 겪었을 만큼 오래 산 사람입니다. 온 가족이 실업자였습니다. 조건만 놓고 보면 오늘날보다 훨씬 절망적이었죠. 하지만 희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모두에게 말입니다. 당시에는 산업별 노동조합회의가 조직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재봉사로 일했던 내 고모도 해고를 당할 때 일주일의 유예 기한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같은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나라의 분위기는 소름 끼칩니다. 분노, 좌절, 제도권에 대한 증오가 발전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본문 p.72)
촘스키는 학계의 냉대를 감수하면서도 평생에 걸쳐 엘리트들의 거짓말과 그들이 퍼뜨리는 신화에 저항했고, 진보 진영이 그들과 어떻게 결탁했는지를 폭로해왔다. 그 외에도 저자는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 작가 존 스타인벡, 역사학자 하워드 진 등 그 외에도 저자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결탁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례를 들려준다.
진보라 자칭했던 수많은 정치가와 지식인이 슬그머니 권력의 편에 서고 급기야는 진보 진영을 초토화시키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나섰지만 그 칼날을 피하지 않은 이들의 외침,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깨부술 용기가 희망이다
최근 몇 년 새 대기업 감세폭이 가장 컸다는 보도가 있었다. 같은 기간 중소기업의 감세폭은 오히려 줄었다. 더욱이 법인세 감세혜택의 65%를 대기업이 차지했다고 분석됐다. 이런 일들이 바로 우리의 생계를 위협한다.
학자나 예술가들이 그들 울타리 밖에서는 해독하기 힘든 전문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일반인을 소외시키는 것과 일면 유사하게, 정치가들은 정치를 자신들이 독점하고자 기를 쓴다. 국회에서의 난투극, 정당 간 소모적인 논쟁, 말 바꾸기나 공약 백지화 등은 그들의 본래적인 습성이기도 하면서, 국민들에게 정치에 혐오와 환멸을 느끼게 만드는 효과까지 덤으로 얻는다.
저자는 이때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는 이들은 ‘공포’라는 강력한 도구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정부 기구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며, 언론에 강력한 보도지침을 내려 정부 선동 기관으로 복무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학생들의 교과서마저 왜곡된 내용으로 갈아 끼운다.
이러한 공안통치는 서로를 믿지 않는 불신사회를 조장하며 결국엔 국민이 입을 다물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내려진 결정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규정짓는 하나의 틀이 된다. 곧 삶의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분명히 인식해야만 우리는 우리의 생계를 위협하는 자들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에 분노하고 그것을 바꿀 용기를 내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임을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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